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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날 사랑해 줘: Chapter 1 - Chapter 10

25 Chapters

1화

아르바이트가 끝나기 무섭게 이어진 억지 회식. 속에서 올라오는 역한 술기운보다 서아를 더 괴롭히는 건, 내일이라고 딱히 다를 것 없는 비루한 일상이었다. 서아는 전봇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전등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깜빡. 깜빡. 금방이라도 수명이 다해 꺼질 듯한 전등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빛 아래 놓인 서아의 걸음걸이 또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서아는 삶에 지쳐 있었다. 지독한 가난에 지쳤고,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신이 저주스럽다.” 생각만 하려던 혼잣말이 결국 댐이 터지듯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앗.” 서아는 흠칫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골목엔 차가운 밤공기만 감돌 뿐이었다. ‘아무도 못 들었겠지?’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서아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알코올의 기운은 자연스레 눅눅한 신세 한탄으로 이어졌다. 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고달픈 삶이 주어진 걸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나? 아니면 사람이라도 죽였나? 실없는 망상을 안주 삼아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와, 방금 그거 마음에 드는데? 신한테 대놓고 저주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낮고 선명한, 그러면서도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서아의 뒷덜미를 잡아 세웠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당황한 서아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밤의 어둠을 그대로 베어 물어 만든 것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 올곧게 내려오는 칠흑 같은 머릿결. 그리고 그 어둠과 대조되어 비현실적으로 창백한 하얀 피부. 남자는 낡은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신이 널 버린 것 같아서 억울해 죽겠지? 대신 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 서아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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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무슨 소원을 말해야 저 당당한 얼굴이 일그러질까.’ 서아는 어느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평범하고 뻔한 소원으로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말할게요, 소원.” 기다림이 지루해지려던 찰나, 서아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오, 이제야 대화가 좀 통하네?”라며 씩 웃더니 순식간에 거리감을 좁혔다. 어느새 서아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에게서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향취가 풍겼다. “좋아. 말해봐. 뭐든.” 서아는 자신을 압도하는 커다란 체구의 남자를 당차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장 무색무취한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를 내뱉었다. “나를 사랑해 줘.” “……뭐?” 남자의 미소가 박제된 듯 굳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그게 내 소원이야.” 서아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못을 박았다. “사랑? 아니, 부와 명예! 그런 거 아니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입으로 부와 명예라고 했잖아!”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보기 좋게 뒤틀렸다. 여유만만하던 태도는 간데없고, 그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난 수학자처럼 허둥댔다. “사랑?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해? 사랑 타령이라니!”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올곧은 검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그의 평정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뭐든 들어준다며? 거짓말이었어?” “무, 물론 그랬지! 틀린 말은 아니야.” 남자가 여전히 평정심을 찾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돈도 필요해. 하지만 지금 나한테 가장 절실한 건 날 사랑해 줄 사람이야. 마음을 다해, 오직 나만을 사랑해 주는 그런 사람.” “도대체 왜?”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돈이 있으면 넌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어. 사고 싶은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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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 “팰 이라고 불러.” “…….” “펠, 그게 내 이름이니까.” 어색한지 큼큼거리며 헛기침하는 남자의 모습에 서아의 입술에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악마 같던 남자가 갑자기 제 나이대의 청년처럼 보였다. “내 이름은 윤서아야. 서아라고 불러, 편하게.” 서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펠은 잠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망설임 끝에 서아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크고 서늘한 손이 서아의 작은 손을 감쌌다. “서아. 흠, 그…….” 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을 이었다. “좋아. 사랑해 달라는 그 소원, 들어줄게.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사실 난 사랑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그래서 정확히 그게 뭔지 잘 몰라.” “……아, 그래? 사실 나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데. 어쩌지?” 서아 역시 뺨을 붉히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백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사랑을 모른다니. “뭐? 이거 참, 꽤 난감하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회식 자리에서 억지로 들이켰던 술기운이 이 어색한 공기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펠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집에 안전하게 귀가하실 수 있게 에스코트하는 것부터 시작할까?” 그가 씩 웃었다. 서아는 멍하니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저 웃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겠다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도망쳤을 서아였지만, 오늘만큼은 이 황당한 에피소드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삶이 너무 지루했으니까. “너 말이야. 소원은 핑계고, 사실 이런 식으로 여자들 꼬시는 선수 아니야?” “뭐라고? 미친놈, 정신병자, 돌아이 소리는 골고루 들어봤어도 선수 소리는 또 처음이네.” 펠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소리 듣는 건 자각하고 있구나?” “당연하지. 처음 만난 인간들은 다 그렇게 말해.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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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표정, 이해해. 내 이름만 듣고 외국인이나 교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오해할 만하다고 생각해.” 펠은 서아가 어안이 벙벙하든 말든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진짜야. 네 소원은 좀 어렵고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런 까다로운 소원을 말할 줄 알았으면 아마 들어준다는 말은 안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나한테 독심술은 없어서. 아무 인간에게나 소원 빌라고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달까?” 너무나 당당한 그 태도에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골목이 깊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멀어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 진짜 위험한 놈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있는 거 아냐?’ 술기운에 마비되었던 생존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미친놈 장난에 어울려주다가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다. 서아는 급히 걸음을 멈췄다. “그, 저기. 이만 여기서 헤어지자. 집도 거의 다 왔고, 이제부터는 밝아서 안 위험해.” ‘사실 네가 제일 위험해!’ 속마음을 꾹 누른 채 서아가 펠을 밀어냈다. 그러자 펠이 멈춰 서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래, 그럼 들어가. 그리고 번호는 저장해 둬야지. 걸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내일 데이트하자.” “으, 응? 데이트?” “응. 연애하는 사람들은 데이트라는 걸 하잖아.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려면 우리도 그런 걸 해야 하지 않겠어?” 펠의 눈은 진지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그 눈빛이 오히려 서아를 더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내가 아까는 너무 취해서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 내 소원, 안 들어줘도 돼. 사랑 같은 거 없어도 나 잘 살 수 있어.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응? 괜찮으니까 그냥 가.” 서아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펠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안 돼. 이미 계약한 인간과는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함께한다. 지금까지 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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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목소리, 확신에 찬 그 눈빛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믿고 싶어지는, 말도 안 되는 기분이 자꾸만 서아를 괴롭혔다. ‘내일이면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나가볼까? 그러다 이상한 섬으로 팔려 가면 어떡하지?’ 머릿속에선 수만 가지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써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터 올 무렵에야 서아는 결정을 내렸다. 만나보기로. 진짜 미친놈인지, 아니면 정말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위험하다는 경각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앞서는 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저렇게 멀쩡하고 잘생긴 남자가 왜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이면을 보고 싶었다. “후, 죽기야 하겠어.” 서아는 거울 앞에 섰다. 퀭한 눈가를 화장으로 가리고, 어젯밤과는 다른 단정한 옷을 골라 입었다. 어젯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정체불명의 남자와의 첫 데이트. 서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챙겼다. 약속 시간인 10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 옷장을 몇 번이나 뒤엎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가장 괜찮은 것을 골라 입었음에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냥 출근할걸. 괜히 아프다고 거짓말했나. 하루 일당이 얼마인데.’ 후회가 밀려오면서도 서아는 세수를 세 번이나 다시 하며 서툰 화장에 공을 들였다. 평소 거치적거려 질끈 묶었던 머리도 오늘은 어깨 위로 길게 풀러 내렸다. 조금 푸석하긴 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가슴 뛰는 것이었던가. 자신도 모르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발견하고 서아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미쳤어, 윤서아. 누군지도 모르는 놈 만나러 가면서 뭐가 좋다고 헤실거려? 위험한 외출일지도 모른다고!’ 이성과 감정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치고받는 와중에도 외출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현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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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팝콘 먹다가 손이라도 맞닿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기대(?)와 달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팔꿈치 한 번 부딪히지 않았다. 펠은 조각상처럼 굳은 채 화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미친놈이니 위험한 놈이니 하더니 손 맞닿을 걱정이나 하고. 네가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이냐?’ 자괴감이 밀려왔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서는 인파 속에서, 펠은 서아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서아의 따뜻한 손바닥이 살짝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펠은 정면을 응시한 채, 아주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훅 끼어든 온기. 또다시 제 손을 덥석 잡아끄는 펠의 행동에 서아의 고개가 자동으로 바닥을 향했다. 터질 듯한 심장 소리가 발끝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왜 자꾸 바닥만 보고 걸어? 그러다 어디 부딪히겠어.” “아닌데? 나 앞만 보면서 아주 잘 걷고 있는데?” 서아는 뜨끔한 마음에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목에 깁스라도 한 사람처럼 뻣뻣하게 정면을 응시하며 대답했지만, 이미 펠의 입가엔 짓궂은 미소가 번진 뒤였다. 펠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아는 귓가까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지지 않겠다는 듯 턱을 한껏 당긴 채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물론 펠의 시선에 비친 서아는 관절이 굳어버린 나무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뚝딱’거리며 걷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펠은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그를 느끼며 서아는 속으로 절규했다. ‘망했어. 사랑이고 계약이고 뭐고, 첫 데이트부터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망가진 제 모습에 자괴감이 밀려오던 그때, 펠이 웃음을 갈무리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점심은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먹고 싶은 거?” “응. 난 뭐든 상관없어. 사실 인간 음식 중에는 내 입에 맞는 것도 있고, 도통 안 맞는 것도 있어서 말이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펠을 보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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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미친놈인 줄만 알았던 이 남자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정상적이고, 심지어 세심하기까지 했다.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툭툭 내뱉는 다정함이 서아의 마음을 자꾸 건드렸다. 안내받은 가게는 사방이 화사한 꽃장식으로 가득한 예쁜 레스토랑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어, 저는 까, 까르보나라요.” 입에 붙지 않는 생소한 이름에 말을 더듬은 서아가 민망함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스테이크를 주문한 펠이 주문서를 넘기고 직원이 사라지자, 펠이 턱을 괴며 물었다. “까르보나라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응. 그 이름을 제일 많이 들었거든. 다른 파스타보다 훨씬 궁금했어.”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아는 순간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던 서늘한 미소와는 달랐다. 인간이 아닌,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서아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네 정체는? 오늘 알려준다며.” “너도 성격 참 급하구나? 천천히 알아가자고. 먹기도 전에 정체를 알아버리면, 그 까르보나라가 무슨 맛인지 느낄 새도 없을걸.” “뭐,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서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때, 펠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얼굴을 향해 쑥 뻗어 왔다. “뭐, 뭐 하는 거야?” 놀란 서아가 의자 뒤로 몸을 젖혔지만, 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아의 입술 옆을 쓱 문질렀다. 그의 손끝엔 작은 가루 하나가 묻어 있었다. “팝콘 부스러기.” 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것을 보여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먹긴 먹었나 보네.” ‘아, 진짜… 나 오늘 왜 이러니. 모양 빠지게!’ 서아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보기에 오늘의 난 어때?” “멀쩡했어. 아주.” 서아가 새침하게 대답하자 펠이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거봐. 날 알면 미친놈 소리 안 나온다니까?”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노란빛이 도는 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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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뭐, 그래. 알았어. 카페는 알아본 거야?” “응. 근데 차 타고 몇 분 가야 해. 괜찮지?” “응, 상관없어.” 식당을 나서며 펠은 거침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아는 문득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참, 영화관 올 때도 펠의 차를 타고 왔었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딱딱한 보도블록의 촉감이 구두를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억지로 밀어 넣었던 발바닥과 발가락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기다려. 주차장에서 차 가지고 나올 테니까.” “그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서아는 식당 앞에 서서 욱신거리는 발을 달래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펠이 빨리 차를 끌고 나오길 기다리며, 서아는 남모르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통증을 분산시켰다. 매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육중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아 앞에 멈춰 섰다.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며 핸들을 잡은 펠의 조각 같은 옆얼굴이 드러났다. “타.” 서아는 홀린 듯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실었다. 먼지 하나 없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한 실내를 보니, 펠의 성격이 다시금 짐작되었다. ‘차까지 검은색이라니. 무슨 어둠의 자식이라도 되나?’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서아가 보기에도 제법 비싸 보이는 차였다. 펠은 시트에 몸을 깊게 묻은 서아를 힐끗 보더니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하고 괜찮은 드라이브 코스를 찾았어. 드라이브, 좋아해?”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버스 타고 창밖 구경하는 건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해도 되겠지?” “다행이네.” 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서아는 그가 앞을 보는 사이, 구두 속에서 욱신거리던 발을 몰래 빼냈다. 해방감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발가락 사이를 스치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구두 위에 발을 살짝 올리고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발, 많이 아팠나 보네.” “……!”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세심한 건지. 서아는 화들짝 놀라 다시 구두 안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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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정적이 감돌았다. 서아가 먼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정말 말해주겠지? 더는 도망갈 곳도 없잖아.” “궁금한 거 참느라 애썼어.” 펠이 여유롭게 대답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부드러운 눈매를 보며 서아가 툭 내뱉었다. “근데 너, 아까부터 안 웃는 사람이라더니 거짓말 아냐?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웃었는지 알아?” “내가? 난 웃은 적 없는데.” “아, 역시 넌 미친놈이 맞나 봐. 아니면 내가 어젯밤부터 제대로 홀렸거나. 웃지도 않은 네가 내 눈에는 웃는 걸로 보였다는 게 말이 돼?” 서아의 황당하다는 반응에 펠이 결국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좋아. 인정할게. 웃었어. 네가 너무 웃겨서, 그리고 네 반응이 꽤 재미있어서 말이야.” “너 진짜……!” 서아가 다시 뿔이나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였다. 펠의 커다란 손이 테이블 너머로 불쑥 다가와 서아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럽고도 단단한 그 악력에 서아의 심장이 발끝까지 덜컥 내려앉았다. “자, 준비해.” “뭐, 뭘 준비하라는 거야?” 서아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지만, 펠의 눈빛은 이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도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날 받아들일 준비.” “뭐?” 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서아의 사고 회로를 단번에 마비시키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르르, 공기가 기묘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펠의 등 뒤에서 칠흑보다 더 깊은 어둠이 일렁이더니, 이내 웅장하고 거대한 날개가 솟구쳐 올랐다. 카페의 천장을 가득 채울 듯 활짝 펼쳐진 검은 날개는 깃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느릿하게 펄럭였다.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카페의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소리만이 서아의 귓가를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서아는 말문이 막혔다. 비명을 지를 수도, 손을 뺄 수도 없었다.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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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서아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붙잡으려 했다.눈앞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한 계약이 진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펠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쐐기를 박았다.“장난이라니. 내가 분명 말했지. 오늘 나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그리고 지금 알려준 거야.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아닌 내 진짜 모습.”펠, 아니 루치펠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였다.“그래,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아니라고 치자. 일단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서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지며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사고의 흐름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닉 반응이었다.“루시퍼는 타락 천사,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악마’의 대명사라고! 아니, 그냥 악마 그 자체잖아! 만약 네 말이 진짜라면, 넌 미친놈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놈은 맞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서아는 눈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기이한 광채와 거대한 날개를 애써 외면하며 논리적인 허점을 찾으려 발버둥 쳤다.하지만 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오히려 등 뒤의 날개를 우아하게 접어 내리며, 마치 억울한 누명이라도 쓴 사람처럼 태평하게 대꾸했다.“내가 악마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건 인간의 영혼을 가져가기 때문이야. 난 계약 외의 해코지는 절대 안 해. 사람들이 나에 대해 편견이 너무 심하다니까.”“편견……? 지금 ‘영혼’을 가져간다는 말을 하면서 편견이라고 하는 거야?”얼이 빠진 채 부르르 떠는 서아와 달리, 펠은 여유롭기만 했다.서아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그러니까 네가 굳이 펠이라고 부르라고 한 이유도 루치펠의 그 펠에서 따온 거였어?”“정답. 머리가 좋네.”펠이 기특하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아니, 이건 머리가 좋은 거랑 상관없는 문제거든!”조금 전까지 스킨십 하나에 설레며 두근거렸던 심장이, 이제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전혀 다른 의미로 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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