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을 빌었더니, 계약이 시작됐다: Chapter 61 - Chapter 70

122 Chapters

61화

다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고역은 아침마다 시작되는 그들의 노출 공세였다.펠과 엘은 습관을 못 고치는 건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매번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조각 같은 식스팩 근육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으나, 서아는 은밀한 사심을 담아 더는 강하게 제지하지 않기로 했다.뜻밖의 눈 호강은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으니까.평일 아침 출근길은 늘 펠과 함께였다.잠시나마 엘을 떼어놓고 둘만의 시간을 가진다며, 펠은 아침마다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서아의 곁을 지켰다.주말 야간 아르바이트 역시 펠의 전담 감시 구역이었다.그는 피시방 구석 자리에서 밤새 두 눈을 부릅뜨고 서아를 지켜봤지만, 이제 서아와 엘은 그 강렬한 시선쯤은 가벼운 배경음악 정도로 여기며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이 동거의 가장 큰 수혜는 역시 식사와 청소였다.엘의 신성한(?) 능력 덕분에 집안은 늘 먼지 하나 없이 멀끔했고, 식탁에는 소고기, 삼계탕, 각종 샐러드 등 영양가 넘치는 진수성찬이 차려졌다.야간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이 막대한 식비를 어떻게 충당하느냐는 서아의 물음에 엘은 태연하게 답했다.“내가 살면서 인간계 생활을 얼마나 했을 것 같아요?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다고 했었죠? 나, 생각보다 돈 아주 많아요.”돈 걱정 없는 능력자 백수라니.서아는 그가 진심으로 부러워졌다.오늘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하루였다.치킨집 손님이 한창 몰리는 저녁 시간, 그 아이만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변함없이 평온했을 하루였다.서아는 새로 온 손님의 주문을 받기 위해 바삐 테이블로 향했다.“주문하시겠어요?”“잠시만요, 아직 못 골라서……. 어라? 어머, 너!”“네?”“너 윤서아 아니야?”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든 서아는 눈앞의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화려한 화장과 명품 로고가 선명한 가방을 든 여자가 아는 체를 해왔다.“누구신지…….”“나야! 장민지! 우리 중·고등학교 동창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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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하지만 장민지는 펠의 슈트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도 알아보지 못한 채 코웃음을 쳤다.“하! 꼴에 남자 친구도 있어? 얼굴만 번지르르한 백수 하나 건졌나 보네. 끼리끼리 논다더니!”“장민지! 너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나한테 사과는 못 할망정 내 주변 사람까지 욕보여?”“뭐? 구제 불능? 이게 진짜!”장민지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으나, 이번엔 허공에서 펠의 강철 같은 손아귀에 붙잡혔다.“한 번만 더 손대면 폭행죄로 고소하는 건 물론이고, 네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주지. 당장 서아한테 제대로 사과해.”“당신이 뭔데 사과하라 마라야? 돈 좀 있어 보여?”“나? 이런 사람이다.”펠은 주머니에서 금박이 박힌 명함을 꺼내 장민지의 가슴팍에 툭 던졌다.명함을 집어 든 장민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헬렌 호텔 대표, 강시우?”“한 번만 더 서아 앞에서 입 함부로 놀리면 네가 가진 그 얄팍한 직장부터 전부 매장해 버릴 줄 알아. 입조심해. 가자, 서아.”펠은 서아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가게 밖으로 끌고 나왔다.분노로 인해 힘 조절이 되지 않는 듯 그의 손은 평소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서아를 압박했다.“펠. 이거 놔.”서아의 부름에도 펠은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었다.“아파! 이것 좀 놓고 가라고!”그제야 펠은 걸음을 멈추고 서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뒤돌아본 그의 눈동자에는 서아를 향한 걱정과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그리고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미안.”펠은 짧은 사과와 함께 잡고 있던 서아의 손목을 놓았다.붉게 손자국이 남은 서아의 손목과 부어오른 뺨이 펠의 가슴을 난도질했다.서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펠을 매섭게 쏘아붙였다.“왜 네가 화를 내는 거야? 화내고 싶은 사람은 난데! 왜 네가 더 난리냐고!”“못 봤으면 모를까, 그걸 보고도 내가 모른 척해? 네가 맞고 있는데!”“그까짓 거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어! 난 이제 그때의 무기력한 중학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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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꾸만 딱딱하고 어색한 말투가 튀어나왔다.‘분위기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바꾸지?’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처럼 변해버린 그를 보며, 지희가 싱긋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어렵나요?”“아, 아니요!”무심결에 튀어나온 큰 소리에 아스모데우스는 부끄러움이 밀려와 고개를 푹 숙였다.명색이 지옥의 악마인 그가 인간 여자 한 명에게 휘둘리는 꼴이라니.달봉이나 펠이 봤다면 기함할 노릇이었다.“전에 강 대표님이 그러셨죠.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않겠냐고.”“예, 그랬죠.”“그래서 나왔어요. 아빠의 권유는 핑계고, 저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강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감사…… 합니다.”지희의 직구에 아스모데우스의 심장은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그러나 이어지는 지희의 질문은 그의 심장을 다른 의미로 멈추게 했다.“그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될까요?”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스모데우스의 눈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온 통증이 다시금 살아났다.“죽었…… 습니다. 아주 오래전에.”“어머, 죄송해요. 전 그냥 헤어진 정도로만 예상했어요.”“지희 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죠. 모르고 계셨으니까.”“이상하게 들리실 수 있지만, 전 그날 강 대표님이 그분을 떠올리듯 아련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아스모데우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예?”“역시 이상하죠? 좋았어요, 그 표정이. 누군가를 깊이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건 참 소중한 감정이잖아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그 다정한 목소리가 아스모데우스의 죄책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를 많이…… 힘들게 했거든요.”“사랑은 때론 상대를 힘들게도 하죠. 하지만 신뢰만 있다면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상대방을 믿는 게 사랑에서 무엇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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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의외의 대답에 서아가 되물었다.“뭐?”“그럼 적어도, 가장 믿고 의지했던 친구의 배신 같은 건 겪지 않아도 되니까.”펠의 목소리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서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내가 타락하기 전, 나와 미카엘은 신의 오른팔과 왼팔 격인 최고의 천사로 자리하고 있었지. 지금은 3대 천사로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이 꼽히지만, 내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이름은 아마 바뀌었을 거야.”“......“내가 너무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은 탓이지. 그중 라파엘이 제일 심했어. 결국 그 녀석은 내가 신을 넘어서서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고 모함했지. 내 동료들은 그 터무니없는 소문에 휘말려 내게 등을 돌렸어. 심한 조롱과 비난도 서슴지 않았고. 결국 그 거짓에 신마저 넘어갔고, 나를 천상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어.”“그럼…… 미카엘은?”서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펠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라파엘의 편에 서서, 가장 앞장서서 나를 밀어내려 했어. 아니, 실제로 밀어냈지. 난 차마 그 녀석만큼은 없앨 수가 없었어. 끝까지 망설였던 나와 달리, 그는 단호했어.”“뭐라고? 엘이 그랬다고?”“결국 그렇게 날 몰아내고 라파엘이 그 공석을 차지했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이런 배신감은 들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가끔 해.”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펠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엘도 혹시…… 라파엘에게 속았던 건 아닐까?”“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이라도 날 믿어줄 순 없었을까 하는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누구보다 내 진심을 잘 알던 녀석이 제일 먼저 앞장서서 나를 쳐냈으니까.”펠의 말에는 수천 년이 지나도 풍화되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서아는 비로소 왜 펠이 엘을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유대감을 버리지 못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서아는 아무런 말 없이 펠의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차갑게 식어있던 펠의 손가락 사이로 서아의 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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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결국, 참고 있던 달봉의 인내심이 임계점을 넘었다."모리 님이야말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평소의 유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달봉의 격앙된 어조에 그레모리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뭐……?"달봉은 대답 대신 그레모리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달봉은 그 와중에도 그녀의 머리가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커다란 손으로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분명 제 마음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마음은 전혀 안중에도 없으신 채,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루루 님만 찾으시면…… 제 기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그, 그건…….""그만큼 제 존재가 모리 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 같아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달봉의 얼굴이 점점 그레모리의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다.슬픔을 억누르는 그의 눈빛에는 서늘한 열망과 숨길 수 없는 상처가 뒤섞여 일렁였다.늘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던 남자의 낯선 위압감에 그레모리는 숨을 들이켜며 굳어버렸다.“미, 미안. 난 그저…….”그레모리는 눈동자를 잘게 떨며 말을 흐렸다.늘 제멋대로 굴던 그녀였지만, 지금 제 눈앞의 달봉은 그녀가 알던 순한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벽과 그의 가슴 사이에 갇힌 채, 그녀는 처음으로 달봉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남자의 향취와 위압감을 느꼈다.“압니다. 모리 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루루 님만을 바라보며 지내왔는지. 그런데 이제 제 마음도 알게 되셨으니, 손톱만큼이라도 제 생각 좀 해주시면 안 됩니까?”“봉봉…….”“이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요?”달봉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안에는 억눌린 갈증이 서려 있었다.그레모리는 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난…… 루루 말고는 누군가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그럼, 이제부터라도 생각해 주십시오.”달봉의 얼굴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그의 숨결이 뺨에 닿을 때마다 그레모리의 심장이 고장 난 시계처럼 불규칙하고 빠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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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엘!""배신자!""우리 왔다!"현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왁자지껄한 소란이 좁은 원룸을 가득 채웠다.어깨동무를 한 채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서아와 펠을 본 엘은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뭐야, 둘이 술 마신 거예요? 그것도 같이? 서아 씨, 괜찮아요?""엘! 나 오늘 굉장히 용기 냈다? 나 좀 칭찬해 줘어."서아가 엘의 앞까지 비틀비틀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엘은 술 냄새와 함께 전해지는 서아의 흐트러진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네? 용기라니, 그게 무슨…….""나도 오늘 되게 멋있었다? 서아를 때리려는 나쁜 계집애의 손을 내가 탁! 하고 잡아서 막았지롱."옆에서 펠이 혀 꼬인 소리로 무용담을 늘어놓자 엘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뭐? 서아 씨를 때려? 어떤 인간이 감히!""아, 됐고! 엘은 왜 그랬어요? 네? 우리 펠 왜 배신했어여? 왜 그래 써어. 착한 엘이 왜 그랬냐구우."갑작스러운 서아의 질문에 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는 당황하며 펠의 눈치를 살폈다."서아 씨, 그걸 어떻게…….""엘은 천사니까아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렇죠? 내 말이 맞죠?"서아가 엘의 옷깃을 잡고 흔들며 대답을 종용하자, 펠이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이유는 무슨! 저건 날 친구로 생각 안 한 거라니까아!""서아 씨, 루루. 둘 다 너무 취했어요. 일단 좀 앉아요. 시원한 물부터 가져올게요."엘이 상황을 회피하려 주방으로 향하려 했지만, 서아의 가냘픈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엘. 나는 사람 믿는 게 사실 무서워요. 근데에 두 사람이 너무 나한테 가까워지니까 자꾸 두려워. 믿었는데 또 상처받으면 어떡해? 그래서 사랑해 달라고 했어요.""사랑이요……?""그래, 사랑! 이 자식아. 내가 원 없이 서아 사랑해 주고, 그 대가로 서아 영혼을 가질 거야."펠이 의기양양하게 선언하자 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그게…… 정말 계약 내용이야?""엘.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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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악마와 인간의 사랑이라고 다를까.만약 펠이 진심으로 서아를 사랑하게 된다면, 계약이 완료되는 순간 그는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영혼을 거둘 수 있을까.아니면 아스모데우스처럼 또 다른 파멸의 길을 걷게 될까.엘은 잠든 서아와 펠을 번갈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휴, 그나저나 무슨 술을 이렇게 무식하게 마신 거야? 아침에 일어나기만 해봐. 잔소리 폭격 좀 퍼부어줘야겠어!’***펠과 인사불성이 되어 귀가한 다음 날, 집 안은 엘의 성수 같은 잔소리 세례로 가득 찼다.그 후 며칠간은 펠도 눈치를 보는지 잠잠한 일상이 이어졌다.하지만 폭풍 전야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깨지고 말았다."수고하셨습니다, 누나.""네, 고생하세요."오전 편의점 아르바이트 교대를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려던 찰나였다.바로 앞에 세워진 화려한 스포츠카 앞에서,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가 앞을 가로막았다."야, 인간 여자."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붉은 입술과 고압적인 눈빛.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당신은…….""나 알아보겠어?""네. 전에 펠의 집에 계셨던 분 맞죠?""맞아."그레모리는 팔짱을 낀 채 서아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여기는 어떻게 알고…….""그거야 봉봉 족치면 바로 알 수 있지. 너, 루루 어디 있는지 알지?"서아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 불쌍한 달봉 씨. 결국 털렸구나.'"그거야 호텔에서 일하고 있겠죠. 대표님이시니까.""그거 말고! 퇴근하고 어디서 지내느냐 말이야!"그레모리의 집요한 질문에 서아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사실대로 우리 집에서 지낸다고 말했다가는, 이 좁은 동네가 불바다가 될 것만 같았다.'어떡하지? 우리 집에서 지낸다는 거 말하면 왠지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이거 봐. 바로 대답 안 나오는 거 보니 역시 알고 있었어!""그게……."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그때, 그레모리의 손에 든 화려한 케이스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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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헉. 한 시간에 15만 원……?'서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렸다.계산기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몇 시간 동안 하는데요?""최소 4시간?"'4시간이면 60만 원?'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며칠 전 장민지 사태로 치킨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어(정확히는 펠이 난장판을 만든 셈이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서아에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시간은 꽤 걸릴 거야. 넌 처음이니까 경력자보다 훨씬 더딜 테니까. 생각 외로 잘해 주면, 인센티브도 고려해 볼 테니까 서둘러. 뭐 해? 얼른 들어가서 준비 안 하고.""네, 네! 갈게요!"서아는 홀린 듯 분장실로 끌려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이 바쁘게 움직였다.베이스를 깔고, 눈매를 강조하고, 입술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마다 거울 속 서아의 모습이 낯설게 변해갔다."오, 화장이 정말 잘 받는 얼굴이네! 콘셉트 이미지랑 딱 맞는 페이스인데요?""아…… 그, 그런가요?""우리 루리앤 이번 디자인 콘셉트가 '사랑스러운 여인'이거든요. 역시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더니, 정말 사랑스럽고 예뻐요.""감사합니다, 하하……."'내가 사랑스럽다니.'서아는 거울 속을 멍하니 응시했다.잡티 하나 없이 매끈해진 피부와 발그레한 볼, 그리고 반짝이는 눈동자.거울 속에 있는 건 매일 아침 편의점 조끼를 입고 졸린 눈을 비비던 윤서아가 아니었다."자, 이제 첫 번째 옷부터 입어볼까요? 이쪽으로 와요, 옷 입는 거 도와줄게요."서아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탈의실로 향했다."아직도 준비 안 됐어? 시간이 금이라고!"그레모리가 초조한 듯 분장실 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왔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마지막으로 서아의 입술에 맑은 루비 빛 틴트를 얹으며 대답했다."아, 실장님. 마침 다 됐어요. 한번 보세요.""어디…… 오!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역시 내 안목은 죽지 않았다니까. 자, 지체할 시간 없어. 바로 촬영 시작하자."그레모리의 찬사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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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으악!""너 뭐 해? 문 앞에서 정신 사납게. 할 말 있어?"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틀에 기대섰다."어, 어떻게 아셨어요?""하도 왔다 갔다 해서 집중 안 해도 기척이 다 느껴지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나.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나 몰래 사고라도 쳤어?""그, 그게…….""뭐야, 진짜 사고 쳤어?"펠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달봉은 결국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으앙! 죄송해요, 루루 님!""뭐, 뭐야? 왜 이래, 징그럽게!""절대! 절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저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최대한 막아보려 했지만, 모리 님의 기세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달봉의 처절한 곡소리에 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이게 무슨 추태야? 이거 놔!""화 안 내신다고 약속하면 놓을게요!""하…. 들어보고 결정할게.""안 돼요! 무조건! 무조건 화 안 내신다고 약속해 주세요. 제발요!""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알았어, 약속해. 화 안 낼게. 무슨 일인지나 얘기해 봐."달봉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들고 펠의 눈치를 살폈다."정말이죠? 정말로 화 안 내실 거죠?""알았다니까. 빨리 얘기 안 하면 지금 당장 화낸다?""얘기해요! 얘기할게요! 그게…. 모리 님이 서아 님이 어디 계시는지 끈질기게 물어봐서…….""뭐?"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가며 살기가 서렸다.달봉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화 안 내시기로 했잖아요!""……후. 알았어. 참을게. 그래서, 집 주소라도 알려줬단 말이야?""아니요! 그것만은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그럼?""오전 아르바이트하시는 편의점을…… 알려드렸습니다.""미치겠네. 언제? 언제 알려줬어!""어, 어젯밤에요……."펠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그레모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너 지금 어디야?""어머, 루루. 네가 웬일이야? 내가 어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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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그레모리는 팔짱을 낀 채,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서아를 꽤 흡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사실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반강제적으로 데려온 것이었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서아는 '루리앤'의 의상을 마치 제 옷처럼 찰떡같이 소화해 냈고, 렌즈에 담기는 결과물 또한 예술이었다.시간이 흐를수록 서아의 긴장은 설렘으로 바뀌었다.경직되었던 입술 근처의 근육이 풀리자, 뷰파인더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미소는 보는 이의 가슴을 간질일 만큼 사랑스러웠다.‘흠. 원석을 발견한 느낌인걸?’"이 실장님, 이 모델 어디서 데려오셨어요? 화장도 잘 받고, 생초짜치고는 렌즈를 두려워하지 않네요. 이 정도면 다른 데서 스카우트 제의도 꽤 들어오겠는데요?"옆에서 모니터를 확인하던 박 팀장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아, 박 팀장님. 저도 꽤 흡족해하는 중이에요.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나와서 다행이죠.""역시 우리 실장님, 패션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델을 보는 안목도 탁월하시네요.""하하, 뭘요. 운이 좋았어요."그렇게 장장 7시간 동안 이어진 강행군 끝에 촬영이 마무리되었다.화려한 조명이 꺼지자, 긴장이 풀린 서아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어깨를 늘어뜨렸다."수고했어. 다행히 현장 반응이 나쁘지 않아. 많이 힘들지? 집에 데려다줄게. 아, 참. 우리 얘기도 아직 마무리가 안 됐잖아? 그리고 여기, 계좌번호 찍어.""아……."서아는 그레모리가 내민 휴대전화에 자신의 계좌번호를 입력했다.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곧 통장에 찍힐 숫자로 보상받는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운이 났다."가자."서아는 스튜디오 사람들에게 일일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그레모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어느새 서울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그레모리!"스튜디오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분노가 서린 펠의 외침이었다."루루?""펠! 여긴 어떻게 알고……."펠은 성큼성큼 다가와 대답도 없이 서아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 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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