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41 - Chapter 150

211 Chapters

141화. 문턱을 넘지 않는 용기

차가 신호 앞에 멈추자 차창 너머의 불빛이 잠시 민영의 얼굴 위로 흘렀다.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초록으로 바뀌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민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것들이 가슴 안에서 정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대리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문턱에 앉아 있다는 느낌이요." 민영은 시선을 창밖에 둔 채 말했다. "처음엔 머뭇거림 같았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최강은 운전대를 잡은 채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가 스스로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넘지 않겠다고 정한 것 같아요." 민영이 이었다. "아직은.""두려워서입니까."민영은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이 자리가 필요해서요."차가 다시 움직였다. 민영의 말은 속도를 따라가지 않고 차분히 이어졌다."문을 열면 사람들이 들어올 거고,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 다른 말을 하겠죠.""그럴 겁니다.""그럼 제 목소리가 흐려질 것 같아요."그 말은 약함이 아니라 자기 인식에 가까웠다.최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문턱에 앉아 계신 겁니다.""용기 없는 선택일까요.""아닙니다." 그는 단호했다. "넘지 않는 것도 분명한 선택입니다."민영은 그 말에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금의 속도도 괜찮다'고 말해준 것처럼.차는 민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민영은 문을 열기 전 잠시 망설였다."대리님.""네.""저요."그녀는 손을 가방 위에 얹고 천천히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아무도 저한테 큰 기대를 강요하지 않았어요.""네.""그게 이상하게 제일 큰 변화 같아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정 사원님이 기대를 정리하셨기 때문입니다.""제가요?""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응답할지, 어디서 멈출지를 정하셨습니다."민영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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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빛은 스스로 방향을 찾는다

아침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왔다.알람이 울리기 전, 민영은 먼저 눈을 떴다. 이불 위로 스며든 빛이 어제와는 다른 각도로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눈을 뜬 채로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이미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어제의 고요는 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 남아 조용한 무게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민영은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창밖의 하늘은 아직 완전히 맑지도, 완전히 흐리지도 않은 중간의 색을 하고 있었다."괜찮아." 그녀는 어제와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확인이라기보다는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 앞에 섰다. 정리된 머리, 단정한 옷차림.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민영은 자신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조심스러움은 남아 있었지만, 망설임은 확실히 줄어 있었다.집을 나서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문은 어제보다 가볍게 열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민영은 오늘 하루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대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통과할지만을 생각했다. 피하지 말 것. 과장하지 말 것. 내 속도 지킬 것. 그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아침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민영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로비로 들어섰다."좋은 아침입니다." 경비 데스크에서 익숙한 인사가 들렸다."네, 좋은 아침이에요."어제와 같은 말, 어제와 같은 장면. 하지만 민영은 그 인사가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같은 방향으로 다가왔다."정 사원." 강산이었다."안녕하세요.""네." 민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둘 사이에는 어색함도, 특별한 친밀함도 없었다. 다만 서로가 상대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강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회사에서 이름이 자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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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여백을 채운 확신

회의실의 공기는 늘 그렇듯 조금 늦게 반응했다.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이 공간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드러나는 식이었다.민영은 회의실 끝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오늘은 발표자가 아니었고, 주도하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저 참관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허락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허락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그럼 이 안건은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죠." 기획팀장의 말이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민영은 그 문장을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적어 내려가는 손끝은 차분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분명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에는 의심도, 호기심도 아닌 확인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어디까지 들을까.'''어디서 반응할까.''민영은 그 질문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흘려보냈다. 지금은 대답할 차례가 아니었다.회의가 중반을 넘어갈 즈음, 법적 검토 항목이 자연스럽게 언급되었다."이 부분은 법무팀 쪽에서 추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기획팀장의 말에 회의실의 시선이 한 번에 법무팀 쪽으로 쏠렸다. 그 중심에 민영이 있었다."정 사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의견 있습니까."민영은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숨을 고르지도 않았다."네." 그 한 마디가 회의실의 공기를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이 안건은 계약 구조상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민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다만 향후 분쟁 가능성을 고려하면, 조건 하나를 명확히 하는 게 좋겠습니다.""어떤 조건이죠.""책임 범위입니다."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자료를 한 번 짚었다. "지금 상태로는 해석의 여지가 남습니다."회의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그 말을 이미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그럼 그 수정안은 법무팀에서 정리해줄 수 있습니까.""네." 민영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가능합니다."그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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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의미는 조용히 고개를 든다

회의실을 나선 뒤 민영은 바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복도 끝, 창이 길게 이어진 공간에 서서 잠시 바깥을 바라보았다.유리 너머의 하늘은 한낮의 밝음을 지나 조금씩 색을 낮추고 있었다. 빛은 여전히 충분했지만, 아침처럼 무작정 퍼지지는 않았다.'이제는 비추는 방식이 달라졌구나.'민영은 그 사실을 설명 없이 받아들였다.자리로 돌아오자 사무실은 다시 일상의 리듬을 되찾고 있었다. 전화가 울리고, 프린터가 돌아가고, 누군가는 웃으며 지나갔다. 그 속에서 민영의 자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투명하지는 않았다."정 사원." 법무팀 팀장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네.""아까 회의에서 언급한 수정안, 오늘 중으로 1차 정리 가능하겠죠."그 말은 요청이었지만, 신뢰가 먼저 담겨 있었다."네."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구조부터 정리해서 공유드릴게요.""좋아요." 팀장은 짧게 웃었다. "그 방식이 요즘 상황엔 제일 맞네요."요즘. 그 단어가 민영의 귀에 천천히 남았다. 요즘이라는 말 속에는 변화에 대한 조심스러운 인정이 담겨 있었다.민영은 자리에 앉아 파일을 열었다. 계약 조항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훑으며 필요한 수정 포인트를 표시했다. 일에 집중할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거리감은 외면이 아니라, 존중에 가까웠다."대리님." 민영이 낮게 불렀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강이 다가왔다. "네.""회의 끝나고 분위기, 느껴지셨죠.""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지켜보는 쪽이 확실해졌습니다.""불안하지는 않아요." 민영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정확해진 느낌이에요.""의미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의미요?""정 사원님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설명 없이도 작용하고 있습니다."민영은 그 말을 잠시 마음속에 두었다. 설명 없이 작용한다. 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오후가 깊어질수록 민영은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답을 받고, 필요한 경우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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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발이 먼저 길을 안다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한 톤 낮았다. 맑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눌려 있고, 흐리다고 하기엔 빛을 품고 있는 애매한 상태였다. 민영은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자신의 숨이 평소보다 고르다는 걸 느꼈다. 생각을 정리하려 애쓰지 않아도 호흡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몸이 마음보다 먼저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회사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로비의 소음이 익숙한 파형으로 귀에 닿았다. 어제와 같은 공간, 같은 조명, 같은 동선. 그런데도 발걸음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걸음이었다."정 사원님."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기획팀의 실무자였다."네." 민영이 고개를 돌렸다."어제 보내주신 수정안 검토하면서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지금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그 대답은 계산된 친절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자연스러웠다."이 조항이요." 실무자는 태블릿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렇게 정리하신 이유가 혹시 추후 분쟁을 염두에 두신 건가요?"민영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은 문제없어 보여도 나중엔 해석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그럼 이 방향이 맞겠네요.""맞다기보다는..." 민영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안전한 쪽이에요."실무자는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각자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짧은 대화 속에는 불필요한 설명도, 의미 없는 탐색도 없었다. 민영은 그 사실을 엘리베이터 안에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익숙한 춤을 추듯, 몸이 먼저 움직였다.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메일 알림이 몇 개 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회의 일정 변경 안내였다. 민영은 일정을 확인하며 별다른 감정 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예전 같았으면 '왜 내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지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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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반 박자 늦게 도착하는 마음

오후의 빛은 어느새 사무실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아침보다 낮아진 각도, 조금 더 길어진 그림자들이 책상과 책상 사이를 조용히 나누고 있었다. 민영은 모니터를 바라본 채 한 문장을 여러 번 읽고 있었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해한 의미가 마음 안쪽으로 천천히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손은 이미 다음 작업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한 발 뒤에 있었다. 괜찮아.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조급해질 이유는 없었다. 지금의 속도는 틀리지 않았고, 다만 조율이 필요할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정 사원."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고개를 들자 같은 팀 선배가 서류를 들고 서 있었다. "이 부분, 네가 한 번 더 확인해 줄 수 있을까?""네, 물론이죠." 민영은 서류를 받아 천천히 훑었다. 조항 하나, 표현 하나를 차분히 살폈다."여기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이 문장, 의미는 같은데 뉘앙스가 조금 강해요.""아, 그래?""네, 상대가 받아들이기에 방어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요." 민영이 설명했다.선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그걸 먼저 보네."민영은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에 가까운 관찰로만 조용히 받아들였다. 과한 겸손도, 과한 자부심도 필요 없었다."요즘." 선배가 말을 이었다. "일하는 리듬이 많이 안정됐어. 보기 좋아.""그런가요?""응, 급하지 않은데 늦지도 않아. 딱 적당해."그 표현은 민영의 마음을 조금 풀어주었다. 선배가 자리를 떠난 뒤 민영은 서류를 정리하며 잠시 숨을 고르었다. 발은 이미 길을 알고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그 사실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간극이 지금의 피로를 만들고 있다는 걸 민영은 느꼈다."대리님." 민영이 조금 떨어진 자리의 최강을 불렀다.최강이 고개를 들었다. "네.""제가 조금 늦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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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속도는 결국 나를 따른다

밤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창밖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도시 위에 얇게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굳이 잠들 필요가 없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루를 정리하기보다는 그저 느끼고 싶었다.오늘 하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다만 몸과 마음이 서로를 기다려 주는 법을 배운 하루였다. 이 정도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은 하루였어. 완벽하지 않아도, 나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배워가고 있었다.눈을 감자 낮 동안의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회의실의 공기, 선배의 목소리, 서류 위에 얹힌 손끝의 감각. 어느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사실이 민영을 조금 놀라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모든 장면 뒤에 '내가 맞았을까'라는 질문이 붙어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 질문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대신 이런 생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나는 이 속도로도 충분히 서 있을 수 있구나. 알람이 울리기 전, 민영은 자연스럽게 잠들었다. 편안한 잠이었다.아침은 전날보다 조금 더 맑았다. 햇빛이 커튼 틈을 밀어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민영은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숨을 느꼈다. 고르고, 편안했다. 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 앞에 섰을 때, 어제와 다른 점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달랐다. 급하게 다잡지 않아도 이미 자리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회사로 향하는 길, 발걸음은 더 이상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았다. 딱 자신의 속도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영은 층수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마음이 이제야 발을 따라왔구나. 드디어 같은 속도로 걷고 있다는 것을.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는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든 반응이 자연스러웠다.민영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에는 새로운 메시지 몇 통이 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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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시선이 먼저 멈춘 날

아침의 공기는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하늘, 같은 거리, 같은 회사로 향하는 길. 그런데 민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아주 잠깐,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느꼈다. 급하지 않았다. 앞서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자리에 정확히 서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몇 명의 직원이 먼저 들어갔다. 민영은 그 뒤를 따르며 습관처럼 벽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익숙한 기척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늦지 않으셨습니까." 최강이었다.목소리는 늘 그랬듯 낮고, 일정했고, 불필요한 억양이 없었다. 그 차분함이 민영에게는 안정감을 주었다."네, 오늘은 조금 여유가 있었어요."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최강은 그 말을 듣고 민영을 한 번 더 보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확인에 가까운 시선. "그래 보이십니다."엘리베이터가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계음이 공기를 채웠다.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 버튼 옆에 놓인 크고 단단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늘 봐왔던 장면인데, 오늘은 그 손이 이상하게 오래 눈에 들어왔다.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손가락의 윤곽, 팔목에 차인 시계, 소매 끝에 살짝 보이는 피부까지.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오늘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정 사원님." 최강의 목소리에 민영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네?""오늘 일정은 무리 없으시겠습니까?""네, 괜찮아요." 민영은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피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민영은 그 시선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아.' 속으로 짧게 숨이 들렸다. 지금까지는 그의 시선이 그저 곁에 있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나를 보고 있다'는 감각으로 다가왔다.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공기가 바뀌었다. 최강은 한 발 물러나 민영이 먼저 나갈 수 있게 했다."감사합니다." 민영이 작게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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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같은 방향의 그림자

퇴근 시간은 언제나처럼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갔다. 사무실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복도에 남은 발소리가 점점 줄어들 무렵, 민영은 마지막으로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컴퓨터를 종료했다. 오늘은 괜히 시간을 더 붙잡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끝났고, 마음도 이상하리만큼 정돈되어 있었으니까.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가방을 챙기려는 순간, 문득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다기보다는 조금 넓어진 느낌이었다. 혼자인데도 비어 있지 않다. 그 감각이 민영을 잠시 멈추게 했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몇 사람이 서 있었고, 민영은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타고, 문이 닫히기 직전, 익숙한 기척이 다시 한번 공기를 스쳤다."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최강이었다.민영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대리님도요."짧은 인사였다. 그런데도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데 민영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느꼈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민영은 유리 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나란히 서 있었고, 어느 쪽도 조금 더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런 게 같이 걷는다는 거구나.' 생각은 조용히 스며들었고, 굳이 말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1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로비는 저녁의 공기로 가득했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유리문을 흔들었다. 민영은 잠시 멈춰 섰다.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이유 없이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정 사원님." 최강이 조심스럽게 불렀다."네?""혹시 급한 일정 없으시면..." 그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같이 조금 걸으시겠습니까?"'같이.' 그 단어가 민영의 귀에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네, 조금이면 괜찮아요." 이번에도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유리문을 나서자 저녁 공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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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흔들리지 않는 자리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늘 같았지만, 그날의 공기는 조금 달랐다.민영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치며 호흡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회의 자료를 바라보았다. 긴장되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긴장은 있었지만 몸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종류였다.'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긴장.' 그 차이를 민영은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여러 부서의 의견이 오가고, 책임을 미루는 말과 애매한 표현들이 탁자 위를 떠다녔다. 예전 같았으면 민영은 그 흐름에 맞춰 조심스럽게 숨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이 부분은 법적으로 정리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단정했다. 말을 끝낸 뒤에도 민영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이 방 안에서 어디쯤에 놓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사원 말이 맞네요."그 한마디로 회의의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민영은 노트 위에 천천히 펜을 굴리며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서 있어도 괜찮아.'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뜰 때, 민영은 자신이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냈다고 해서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를 얻었다.복도로 나오자 익숙한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강이었다.그는 벽에 기대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민영이 나오자 고개를 들었다."끝나셨습니까.""네."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길어졌어요.""표정은 괜찮아 보이십니다."그 말에 민영은 잠시 웃었다. "괜찮았어요. 생각보다."최강은 그 웃음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의 시선에는 질문도, 재촉도 없었다. 그게 민영에게는 큰 안도였다.두 사람은 말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복도의 바닥이 발걸음에 맞춰 조용히 울렸다."회의 자리에서," 최강이 앞을 보며 말했다. "잘하셨습니다.""보고 계셨어요?""소리가 들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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