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61 - Chapter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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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넘어질 자유를 허락한 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들렸다.아니, 소리가 커진 게 아니라 민영의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손바닥에 남아 있는 미세한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아까 복도에서 들었던 질문들,부드럽게 포장된 말 속에 숨겨진 의도가 뒤늦게, 아주 천천히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선택한 겁니까.’‘아직도 미루고 계신 겁니까.’민영은 고개를 가만히 숙여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어서..안정되어 있던 표정에 작은 균열이 나 있었다.문이 열리자 보안팀 쪽 복도의 공기가 조금 더 차가웠다.민영은 몇 걸음을 옮기다 발걸음을 멈췄다.“…정 사원님.”그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낮고 고른 톤이었다.그 고른 톤이 오늘은 이상하게도 민영의 심장을 더 세게 두드렸다.최강은 문 옆에 서 있었다.마치 우연처럼, 그러나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자리에.“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민영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큰 문제는 없었어요.”“다행입니다.”그 짧은 대화 속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정리된 것 같았다.그런데 민영은 그 평온이 조금 버거웠다.최강이 민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표정이 조금 달라 보이십니다.”강산의 말과 같은 문장이었다는 사실이 민영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건드렸다.“…그런가요?”“네.”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해 보이시진 않는데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민영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햐할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방금,”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강 팀장님을 만났어요.”최강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놀람도, 경계도 아닌 그저 집중이었다.“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질문은 담담했지만 민영은 느꼈다.이 사람은 자신이 들을 수 있는 말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별건 아니었어요.”민영이 말했다.“그냥 요즘 제 표정이 달라졌다는 이야기.”최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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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흔들림이 머무른 자리

복도는 이미 사람들의 발자국을 대부분 흘려보낸 뒤였다.형광등 불빛 아래 남은 공기는 낮보다 얇고, 밤보다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중간쯤에 머물러 있었다.민영은 그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방금 전까지 함께 내려오던 최강의 기척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는데도,그의 말들은 여전히 등 뒤 어딘가에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넘어지면, 잡겠습니다.’그 문장은 다정한 위로라기보다 묵직한 약속에 가까웠다.그래서 더 민영의 마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마치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데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안은 조용했다.아직 퇴근 시간이 다 지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고,그 공백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민영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지만 화면을 바로 보지는 않았다.시선은 키보드 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아까 강산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사람은 사랑할 때 한 번쯤 흔들려야 한다.’그 문장은 정답처럼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완전히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민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흔들림이라는 단어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하기 어려웠다.편안함은 여전히 있었다.최강의 곁에서 느끼는 안정은 여전히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그런데 그 위에 아주 얇게 다른 감각이 겹쳐지고 있었다.마치 잔잔한 수면 위에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살짝 원을 그려놓은 것처럼.민영은 그 원을 애써 지우지 않았다.지금은 그 흔들림이 사라지는 것보다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문득 모니터 화면이 켜졌다.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강산이었다.회의 자료, 추가 검토했습니다.내일 오전에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짧은 문장이었지만, 민영은 그 문장에 담긴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업무 이야기라는 외피 아래,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 조용히 숨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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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정답을 미루는 시간

밤은 회사 건물 안에서도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형광등 불빛 아래 남은 책상들은 하루의 온기를 잃은 채각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민영은 모니터를 끄고 의자를 밀어냈다.앉아 있는 동안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오히려 또렷해진 상태였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닿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렸다.이 시간의 사무실은 사람보다 생각이 많았다.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민영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기다린다는 감각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를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그 자리에 몸을 붙잡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아직 계셨네요.”그 목소리는 예감보다 먼저 공기를 갈랐다.민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강산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급하지 않은 걸음,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의 속도였다.“…네.”민영의 대답은 짧았지만 건조하지는 않았다.그 역시 이 만남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시간까지 남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강산은 엘리베이터 옆에 멈춰 서며 민영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는 늘 그랬듯 관찰과 계산이 섞여 있었지만 오늘은 그 아래에 다른 온도가 깔려 있었다.“정리할 게 조금 있어서요.”민영은 늘 하던 말로 답했다.그 말이 지금의 마음을 전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강산은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대신 잠시 침묵을 두었다.그 짧은 공백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정 사원님.”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편안해 보이십니다.”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어딘가 끝이 열려 있었다.“…그렇게 보이나요?”“네.”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불안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누군가 곁에 있다는 뜻이겠죠.”민영의 손끝이 가볍게 움직였다.가방 끈을 쥐었다가 놓는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그 안에 잠깐의 긴장이 스쳤다.“그게 문제가 되나요.”민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산은 그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대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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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마음은 먼저 움직인다.

엘리베이터 안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지만,민영의 감각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아직 복도에 남아 있었다.강산의 마지막 말이 귀가 아니라 가슴 안쪽에 걸려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대부분 불편함 쪽이다.’그 문장은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 온 사실을 다시 꺼내 놓은 것에 가까웠다.민영은 등을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 뒤로 전해졌고,그제야 지금 자신이 조금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천천히 숨을 내쉬자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편안함.’그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민영에게 안전한 말이 되어 있었다.상처 입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 최강이 있었다.그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그의 곁은 지금도 민영을 안정시키는 곳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 안정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자 짧은 진동과 함께 문이 열렸다.밤의 공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낮보다 느리고, 낮보다 솔직한 공기였다.민영은 한 걸음 내디뎠다가 잠시 멈췄다.로비 한편, 기둥 옆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최강이었다.그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지만, 민영이 시야에 들어오자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을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대리님.”민영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하루가 길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감정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정 사원님.”최강은 짧게 인사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눈에 띄게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시선은 늘 그렇듯 세심했다.“아직 퇴근 안 하신 줄 알았어요.”“서류 하나 더 확인할 게 있어서요.”그는 간단하게 말했다.그리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같이 가시겠습니까.”같이 가자는 말은 늘 하던 제안이었는데도, 오늘은 그 안에 다른 의미가 겹쳐 들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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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사라지지 않는 진동의 밤

차 안의 공기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음에도 이상하리만큼 가득 차 있었다.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꺼내지 않은 감정들이서로의 숨결 사이에 겹겹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민영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을 천천히 눈으로 따라갔다.불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마음 한쪽이 같은 속도로 밝아졌다가 조용히 식어 갔다.방금 전의 대화는 끝난 것 같았지만 완전히 닫힌 느낌은 아니었다.마치 문을 닫아두었는데도 안쪽에서 미세하게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대리님.”민영은 부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의 감정이 조금 더 분명해질 것 같아서였다.“네.”최강은 운전대를 잡은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의 옆모습은 늘 그렇듯 안정적이었고, 그 안정감은 민영에게 익숙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아까 강 팀장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민영은 말을 하면서도 그 문장을 그대로 옮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강산의 말은 문장이라기보다 감정의 형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편안함이 항상 정답은 아니라고.”최강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차는 차선을 따라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강 팀장다운 말이군요.”그 대답에는 비난도, 동의도 섞여 있지 않았다.그저 그 사람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톤에 가까웠다.“…대리님은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세요?”민영의 질문은 단순한 의견을 묻는 것처럼 들렸지만,실은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 가까웠다.최강은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은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말을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간격이었다.“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민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향했다.“다만,”그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편안함이 정답이 되지 못하는 순간은 그 안에서 자신이 사라질 때입니다.”그 말은 민영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크게 울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리를 잡았다.“…제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나요.”민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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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머무는 마음과 나아가는 마음

현관 불을 켜자 익숙한 공간이 민영을 맞이했다.낮 동안의 소음도, 회사에서 흘려보낸 말들도이 문턱을 넘는 순간 모두 한 박자 늦게 따라 들어오는 듯했다.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며 민영은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손에서 놓는 순간, 오늘 하루의 감각까지 함께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도시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불빛들은 제각각의 리듬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그 속도가 어쩐지 자신의 마음과 닮아 보였다.‘머무는 마음과, 나아가는 마음.’그 두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어느 쪽이 더 옳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같은 사람을 당기고 있는 느낌.민영은 소파에 앉아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알림은 없었지만 화면을 켠 채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강산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그의 시선에는 항상 질문이 있었다.지금의 자신에게 안주하지 않게 만드는 눈빛,조금은 불편하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그리고 최강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졌다.묻지 않아도 곁에 서 있고, 재촉하지 않아도 같이 걸어주는 사람.둘 중 누구도 잘못된 위치에 있지 않았다.그래서 더 민영은 결정을 미룰 수 없게 느끼고 있었다.민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생각을 정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그저 지금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가슴 한가운데에서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됐다.불안은 아니었고, 설렘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이르다.다만 정지해 있지 않다는 확신에 가까운 감각.그때 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민영은 눈을 뜨고 화면을 바라봤다.강산이었다.-오늘 질문이 부담이었다면 미안합니다.다만 정 사원님이 스스로를 미루는 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민영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사과와 고백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문장이었다.곧이어 또 하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답은 지금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민영의 입술이 아주 조금 굳어졌다.답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말이 오히려 선명한 요구처럼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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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두 개의 온도, 하나의 속도

아침은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날의 공기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햇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 때, 민영은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의 문장들을 떠올렸다.-아직은 제 속도를 더 알고 싶어요.오늘도 감사합니다.보낸 말들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말을 고른 순간마다 민영은 자신이 어디까지 솔직해졌는지를 조심스럽게 되짚고 있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며 민영은 몸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날이었다.어깨는 무겁지 않았고, 숨은 고르게 이어졌다.‘괜찮다.’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았다.어제의 흔들림이 오늘의 불안을 끌고 오지는 않았다.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민영은 자신의 눈을 잠시 오래 들여다보았다.어딘가 달라 보였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는 변화.그 모호함이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출근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민영은 걸음을 재촉하지도, 의도적으로 늦추지도 않았다.어제 스스로에게 말했던 ‘내 속도’가 조금은 몸에 남아 있었다.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그녀를 맞았다.누군가는 급히 지나갔고,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고 있었다.그 사이에서 민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강산이었다.그는 민영보다 한 발 앞서 서 있었고, 서류 파일을 들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아침입니다.”그 인사는 어제의 대화를 전혀 끌고 오지 않는 톤이었다.그래서 민영은 조금 안심했다.“네. 좋은 아침이에요.”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둘은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그 침묵은 어색함보다는 서로의 선을 확인하는 간격에 가까웠다.“…어제,”강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가볍지는 않았다.“답장, 고마웠습니다.”민영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천천히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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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흔들림의 결을 따라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겹쳐 지나갔다.목소리는 낮아졌고, 발걸음은 정돈되어 있었지만그 안에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민영은 회의실 한쪽 자리에 앉아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글자들은 또렷했고, 논점은 명확했지만 어딘가 집중의 중심이 조금 비껴가 있었다.강산의 질문이 아직 마음을 떠나지 않았고,최강의 침묵은 그 질문을 더 오래 남게 만들고 있었다.“이 부분은 다시 한 번 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민영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말의 흐름도 어긋나지 않았다.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강산은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표정은 늘 그렇듯 단정했지만, 민영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주 미세하게 시선이 달라졌다.회의는 큰 파동 없이 마무리되었다.자료를 정리하는 소리, 의자가 밀리는 소리, 짧은 인사들이 차례로 이어졌다.민영은 노트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때 강산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정 사원님.”그 부름은 회의실을 벗어나기 직전,마치 따로 마련된 공간처럼 조용히 닿았다.“…네.”민영은 뒤돌아보며 짧게 응답했다.이미 이 대화가 단순한 업무 연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질문이었지만 압박은 없었다.그 점이 오히려 민영을 멈추게 했다.“…네. 잠깐이면.”회의실 옆 작은 휴게 공간에는 사람이 없었다.창가 쪽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바닥에 얇은 선을 만들고 있었다.강산은 그 선을 밟지 않도록 조금 옆으로 비켜 섰다. 의식적인 거리였다.“회의에서 말씀하신 부분,”그가 입을 열었다.“정확했습니다.”“…감사합니다.”“늘 그렇듯 정 사원님은 핵심을 놓치지 않으시죠.”그 칭찬은 업무에 대한 것이었지만,민영은 그 안에 다른 의미가 겹쳐 있다는 걸 느꼈다.“어제 보낸 메시지에 대해”강산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다시 이어 말했다.“추가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민영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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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흔들림은 이미 선택이다.

사무실 복도를 벗어나자 공기의 밀도가 조금 달라졌다.업무의 소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방금 전까지 민영의 마음을 붙들고 있던 질문의 잔향은 그 소음과는 다른 층위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최강은 민영의 걸음에 자연스럽게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그저 같은 보폭으로.민영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몸은 이미 그 리듬에 익숙해져 있었다.“조금 공기가 답답하지 않으십니까.”최강의 말은 정확히 지금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었다.실내의 공기를 말하는 듯했지만, 실은 민영의 마음을 향한 질문이었다. “…네.”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조금요.”최강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말없이 먼저 선택한 길이었지만, 민영은 그 선택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계단을 내려가며 민영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아까,”민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계단의 울림이 목소리를 조금 낮춰주었다.“강 팀장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신호만 보냈다.“제가 머무르는 사람인지, 선택하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다고요.”그 말은 다시 꺼내는 순간에도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민영은 그 날카로움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최강은 한 계단 아래에서 잠시 멈췄다.민영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섰다.“정 사원님은,”그가 천천히 말했다.“이미 선택하는 사람입니다.”민영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째서요.”“머무르기만 하는 사람은,”최강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까지 의식하지 않습니다.”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정확했다.민영은 그 정확함이 조금 두려웠다.“…그럼 대리님은,”민영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제가 어디로 가든 괜찮으세요?”그 질문은 확인처럼 들렸지만, 실은 한 발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끝자락이었다.최강은 민영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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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흔들림의 끝에서

회사 앞 작은 공원에는 막 정리된 분수대의 물기가 아직 바닥에 남아 있었다.낮 동안의 소란이 모두 빠져나간 뒤의 공간은 사람보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민영은 그 벤치에 앉아 잠시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 소리가 마치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렸다.조금 전, 최강과 헤어진 이후에도 그의 말은 등 뒤에 남아 있었다.붙잡지도, 놓지도 않는 태도.그 거리감은 늘 민영을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그 안전함이 왜인지 완벽하지 않게 느껴졌다.민영은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천천히 엮었다.손바닥이 따뜻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다시 풀었다.‘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그 질문은 강산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안쪽에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었다.강산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그는 언제나 민영을 한 발 앞에 세워두었다.편안히 쉴 수 있는 자리를 내주지 않는 대신, 멈추지 않게 만드는 사람.그의 시선에는 기대가 있었고,그 기대는 민영에게 조금의 부담과 조금의 설렘을 동시에 안겨주었다.‘선택하는 사람.’그가 했던 말이 다시 귓가를 스쳤다.그 말은 민영을 칭찬하기보다 도전하는 말에 가까웠다.지금의 자신을 넘어서 보라는 요청처럼.민영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주 느리게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편안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최강의 곁에서 느끼는 안정은 여전히 분명한 형태로 존재했다.그 안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도 민영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그 안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자라나고 있었다.민영은 고개를 들어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구름 사이로 햇빛이 거의 사라지고, 대신 옅은 남빛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그 색은 완전히 어둡지도, 완전히 밝지도 않았다.지금 자신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그때 휴대폰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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