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31 - Chapter 140

211 Chapters

131화. 정리해야 할 진실의 무게

병원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자 새벽 공기가 조용히 밀려 들어왔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공기였다. 다만 밤과 아침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온도였다. 그 애매한 온도 속에서 민영은 자신도 어떤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민영은 그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쉬는 동작이 의식적인 선택처럼 느껴진 건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실감났다."밖에 나오니까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몸이 먼저 반응해요.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요."최강은 그녀의 옆에서 차를 향해 천천히 걸으며 대답했다. "사람은 결심을 하면 몸이 먼저 알아봅니다. 마음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몸은 이미 방향을 잡고 있는 거죠.""결심이요." 민영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렸다. "저는 아직 큰 결심을 한 것 같진 않은데요. 그저 한 발 한 발 걷고 있을 뿐인데."최강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큰 결심은 대개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다만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만 남기죠.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민영은 그 말에 자신의 발걸음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차에 올라타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차 안은 이제까지의 긴장과는 다른 현실적인 공간이었다. 병원의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민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리님.""네.""제가 라오네트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최강은 시동을 걸며 잠시 생각했다. "정리입니다.""정리요?" 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네." 그는 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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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시선이 먼저 말을 걸 때

라오네트 본사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민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유리 외벽에 비친 하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바라보는 방식이 이미 달라졌다는 것을."이상하네요."민영의 낮은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 최강은 차를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몰며 대답을 기다렸다."늘 보던 회사인데요." 민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이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 안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에요."최강의 손이 핸들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였다."그건 정 사원님이 이 공간을 더 이상 피난처로 보지 않게 됐다는 뜻입니다.""피난처요.""네." 그는 차를 세우며 말했다. "이제는 도망쳐 숨는 장소가 아니라 서야 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계신 겁니다."차 문이 열리고 지하 주차장의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소음, 그러나 민영의 감각은 그 모든 것을 조금 더 또렷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민영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옷매무새를 한 번 정리했다."저요." 그녀가 말했다. "괜히 신경 쓰이네요.""무엇이요.""사람들 시선이요."최강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정 사원님은 늘 시선 한가운데에 계셨습니다.""전 몰랐는데요.""그건 정 사원님이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민영은 자신의 숨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대리님.""네.""제가 조금 바뀌었죠."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최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어떻게요.""눈이 달라졌습니다.""눈이요?""주변을 보는 눈이 아니라, 정 사원님 자신을 보는 눈이요."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숫자가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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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고요가 먼저 흔들릴 때

키보드를 누르는 소리는 사무실 안에서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백 번 반복되는 익숙한 소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민영은 자신의 손끝에서 울리는 그 소리가 오늘따라 조금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딱, 딱.문장을 입력하고, 수정을 하고, 다시 읽는 법무팀의 아침은 늘 그랬다."정 사원."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민영은 고개를 들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네."팀장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걱정도, 의심도 아닌,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몸은 괜찮고?""네, 문제 없습니다."그 짧은 대답 사이로 민영은 팀장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신입', '유학파', '조용한 애'였다면, 지금은 그 단어들 사이에 설명되지 않은 여백이 하나 더 있었다."오늘 오전 회의는 정 사원도 들어와.""제가요?""응." 팀장은 가볍게 말했다. "이제 정 사원이 봐도 될 단계야."그 말은 업무 지시처럼 들렸지만, 민영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알겠습니다."팀장이 자리를 떠나자 옆자리 동기가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였다."민영아.""응?""너, 뭔가 달라졌어."민영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어디가?""글쎄." 동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로 설명은 안 되는데, 예전엔 네가 이 공간에 조금 숨어 있는 느낌이었거든."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지금은?""서 있는 느낌?"그 말에 민영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게 불편해?"동기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아니! 그냥 신기해서."민영은 그 반응이 어쩐지 고마웠다. 불편함도, 질투도 아닌 그저 변화에 대한 솔직한 감각이었으니까.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걸음을 옮길수록 민영의 시야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몇몇은 분명히 민영을 두 번 보았다. 짧은 시선, 잠깐의 멈칫, 그리고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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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물결이 서로를 찾을 때

회의실을 나선 뒤의 사무실은 다시 일상의 리듬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프린터가 돌아가고, 전화벨이 울리고, 커피 머신에서 김이 올랐다. 하지만 민영은 그 리듬의 바닥에서 아주 미세한 어긋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멈춘 타이밍, 누군가가 고개를 드는 각도, 그리고 자신을 지나치며 한 번 더 남겨두는 시선."정 사원."팀장이 다시 불렀다. 민영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부름이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네.""아까 이야기한 정리안, 오늘 중으로 초안만 정리해서 공유해.""알겠습니다."그 말은 업무의 연장이었지만, 민영에게는 한 단계 위로 옮겨졌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자리에 돌아와 문서를 열자 커서가 잠시 깜박였다. 민영은 손을 키보드 위에 얹은 채 바로 입력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방금 회의실에서 오갔던 말들과 그 사이의 침묵들이 차분히 정렬되는 것을 기다렸다.그때, 메신저 알림이 하나 떴다.강산: 잠깐 이야기 가능해요?민영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강산.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그저 같은 회사의 이름이 아니었다. 항상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시선, 불필요할 만큼 정확한 질문,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태도."대리님." 민영이 메시지를 닫은 채 낮게 불렀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최강이 고개를 들었다. "네.""강산 씨가 얘기 좀 하자고 하는데요."최강은 민영의 표정을 먼저 읽었다. 불안도, 망설임도 아닌 판단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정 사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피하지는 않으려고요."최강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있겠습니다."그 말은 개입의 예고가 아니라 거리의 약속이었다.민영은 메신저에 짧게 답했다.민영: 네, 잠깐이면 괜찮아요.잠시 뒤 강산이 다가왔다. 그의 걸음은 늘 그렇듯 조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았다."회의 잘 끝났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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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는 법

오후의 사무실은 오전보다 소리가 많았다. 전화벨이 조금 더 잦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한 톤쯤 낮아져 있었다. 민영은 모니터 속 문서를 따라가며 그 소리들을 배경처럼 흘려보냈다. 집중하고 있다는 신호는 더 이상 얼굴의 긴장이 아니라 문장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고 있었다."정 사원."팀장이 다시 불렀다. 민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예전처럼 고개부터 숙이지 않았다."네.""아까 정리한 안, 임원 쪽에서도 검토 들어간다더라."그 말은 가벼운 전달이었지만 민영에게는 공기가 한 겹 더 얹히는 느낌을 주었다."알겠습니다.""부담 갖지는 말고." 팀장은 덧붙였다. "지금 단계에선 방향만 보는 거니까."민영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향을 본다는 말은 이제부터는 선택의 책임이 생긴다는 뜻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자리에 돌아오자 메일함에 새로운 메일 하나가 떠 있었다.‘ 회의자료 공유 요청’발신자는 기획팀이었다. 민영은 메일을 열어보며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한 번 고쳤다."대리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강이 서류를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네.""이제 제 이름으로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아요."그 말에는 놀람도, 불안도 아닌 상황을 확인하려는 차분함이 담겨 있었다. 최강은 메일 제목을 힐끗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흐름이 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고요.""빠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정 사원님이 이전에는 그 흐름의 바깥에 계셨기 때문입니다."민영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지금은요.""한가운데에 계십니다."그 대답은 부담을 주기보다 이상하게도 민영의 등을 곧게 세웠다.메일에 답장을 보내고 다시 문서로 돌아오려던 순간, 회의실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이 타이밍에 그 안을 가져오는 건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강산이었다.민영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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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방향은 소리 없이 앞선다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의 사무실은 묘하게 느슨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마감 전의 긴장도, 퇴근을 앞둔 가벼움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시간.민영은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조금 묵직했지만 머리는 오히려 또렷했다."정 사원." 팀장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민영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네.""아까 말한 초안." 팀장은 그녀의 자리 옆에 서서 말했다. "이 방향이면 임원 쪽에서도 문제 삼지는 않을 것 같아."그 말은 확답도, 칭찬도 아니었지만 민영에게는 분명한 신호였다."그럼 보완해서 오늘 안에 공유하겠습니다."팀장은 잠시 민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리하지는 말고."그 말이 예전 같았으면 걱정으로 들렸을 텐데, 지금의 민영에게는 신뢰에 가까웠다.팀장이 떠난 뒤 민영은 의자에 깊게 기대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문서를 열었다. 수정해야 할 부분은 이미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문장, 의도를 흐리는 표현, 애매하게 남겨둔 여지들. 민영은 하나씩 지워 나갔다. 망설임 없이."대리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강이 다가왔다. "네.""지금 이 작업이요." 민영은 화면을 가리켰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조심스럽다고 보일 수도 있겠죠.""그럴 수 있습니다.""그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요."최강은 문서를 잠시 들여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 사원님은 싸우는 방향이 아니라, 흐르게 하는 방향을 선택하신 겁니다.""흐르게요.""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흐름을 바꾸는 쪽이 더 오래 갑니다."민영은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아버지가 좋아했을 방식이네요."최강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네. 정 회장님은 항상 정면충돌을 피하셨습니다.""대신 길을 바꾸셨죠.""그렇습니다."민영은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문서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무실의 소음은 조금씩 잦아들었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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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말이 되기 전의 숨

다음 날 아침, 라오네트의 로비는 언제나처럼 단정했다. 유리 바닥에 반사된 조명, 정돈된 화분의 잎, 출근 시간에 맞춰 흐르는 사람들의 동선까지.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민영은 그 로비를 가로지르며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은 대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 가장 잘 만들어진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좋은 아침입니다." 경비 데스크에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네, 좋은 아침이에요." 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 인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민영은 그 눈길이 아주 잠깐 더 머물렀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민영이 들어서자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사소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 배려가 이전에는 없던 거리라는 걸 민영은 느꼈다."정 사원."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강산이었다."좋은 아침이에요.""네." 민영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조금 더 팽팽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말할 생각일까.'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민영과 강산은 나란히 복도로 걸어 나왔다."어제." 강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들어갔어요?""네.""오늘도 바쁘겠네요.""그럴 것 같아요."그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이었지만,서로가 그 이상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각자의 자리로 향하기 직전, 강산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요즘 회사 분위기, 느껴지죠."민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불편하지는 않아요?"그 질문은 안부처럼 들렸지만, 본질은 그 너머에 있었다.민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 "불편한 건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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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질문이 말이 되는 순간

그 질문은 예고 없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공기 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고, 사람들의 눈과 침묵을 빌려 천천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그래서 민영은 그 질문이 들렸을 때 놀라지 않았다."정 사원." 회의실 문 앞에서 기획팀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고, 공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잠깐 시간 괜찮습니까."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회의실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탁자 위에 고르게 퍼져 있었고, 그 밝음이 오히려 숨길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문이 닫히자 짧은 침묵이 흘렀다."요즘."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 사원 이름이 여러 회의에서 오르내리고 있어요."민영은 그 말을 중간에 끊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네.""불편하진 않습니까."그 질문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실은 다음 말을 위한 문이었다."불편하다기보다는..." 민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했다. "자연스럽다고 느껴요."팀장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연스럽다.""네." 민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한 말과 제가 한 일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건, 이 회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잠시의 침묵."그래서." 팀장이 다시 말했다. "정 사원은 이 상황을 어디까지로 보고 있습니까."그 질문은 드디어 본론에 닿아 있었다.민영은 탁자 위에 올려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은 차분했고, 마음은 의외로 고요했다."저는 제 역할만 보고 있어요.""역할이라면.""법무팀 사원으로서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요." 민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팀장은 그 대답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민영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분명하게 말했다. "기대는 사람들의 것이고, 선택은 제 것입니다."그 문장은 회의실의 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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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선은 조용히 자리를 만든다

회의실에서 나온 뒤 민영은 한동안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건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금 지나온 말을 자신의 안쪽에 완전히 내려놓기 위해서였다.말을 했다는 사실보다 어떤 말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크게 남아 있었다."괜찮으세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민영은 고개를 돌렸다. 같은 팀의 선배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운 눈빛."네." 민영은 짧게 답했다. "잠깐 생각 좀 했어요."그 대답은 필요 이상을 설명하지 않았다. 선배는 그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듯 더 묻지 않았다."아까 회의실에서 이야기 나눈 거..." 선배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웃으며 덧붙였다. "잘하셨어요.""고맙습니다.""다들 조금씩 느끼고 있었거든요. 누군가는 선을 정리해줄 필요가 있다는 거."그 말은 민영에게 의외의 울림으로 다가왔다.자리에 돌아오자 업무 메신저에 몇 개의 알림이 더 떠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즉각적인 대응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민영은 알림을 확인한 뒤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조금 미뤄도 되는 일, 그리고 아직은 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대리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최강이 고개를 들었다. "네.""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어떤 점에서요.""사람들이 말을 줄였어요." 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어서 말했다. "대신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에요."최강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선을 그으면 사람들은 그 선을 넘기보다 거리부터 계산합니다.""불편해질까요.""그럴 수도 있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편해질 수도 있습니다.""어느 쪽일까요.""정 사원님이 그 선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렸습니다."민영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아까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기획팀 팀장님이 존중하겠다고 했을 때,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네." 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중은 대개 첫 반응보다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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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문턱에서 마주한 조용한 여운

저녁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앉았다. 건물 밖의 하늘은 아직 빛을 조금 남겨두고 있었지만, 사무실 안의 조명은 이미 하루를 정리하는 밝기로 바뀌어 있었다.민영은 서랍을 닫고 가방을 챙기며 오늘 하루의 끝을 실감했다. 크게 소모되지 않았는데도 몸 안쪽에는 조용한 피로가 남아 있었다. 피로라기보다는 긴장을 오래 쥐고 있다가 이제야 손을 푼 사람의 느린 여운에 가까웠다."정 사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민영은 고개를 돌렸다. 법무팀의 다른 선배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신중한 표정."지금 퇴근해?""네.""잠깐만 같이 걸어도 될까."그 제안은 무언가를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속도로 몇 걸음 나아가고 싶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네." 민영은 자연스럽게 답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둘은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고, 서로의 리듬을 조심스럽게 맞추는 시간 같았다."아까."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획팀이랑 이야기한 거, 소문처럼 들리더라.""네.""많이들 궁금해해."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다들 쉽게 묻지는 못하는 분위기야."민영은 그 말이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신 거죠.""응."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오해 생길까 봐."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민영아." 선배는 이름을 한 번 불러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 혼자서 다 버티려고 하지 마."그 말은 충고라기보다 걱정에 가까웠다.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혼자는 아니에요.""그래도.""다만..." 민영은 시선을 내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누구의 말이든 제가 선택해서 받아들이고 싶어요."선배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많이 단단해졌네.""단단해진다기보다는..." 민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제 무너지지 않을 자리를 알게 된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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