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21 - Chapter 130

211 Chapters

121화. 모르는 것보다 무서운 진실은 없다

철문이 완전히 잠긴 이후에도공기 속에는 금방 꺼지지 않는 떨림이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 있었다.민영은 문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방금 들었던 자신의 이름을 귀 안에서 천천히 되감았다.정민영.누군가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이름만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어떤 의미'까지 알고 있는 듯한 부드럽고 낮은 호명.그 소리가 귓속에서 오래 맴돌수록 민영의 심장도 어지럽게 흔들렸다.“…정 사원님.”최강의 목소리는 숨을 가다듬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듯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민영은 늦게서야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짙은 어둠 위에서 단단히 자리잡은 빛처럼 흔들림이 없었다.“괜찮습니까.”민영은 대답하려다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괜찮다는 말은 거짓이 될 것 같았고,무섭다는 말은 지금의 자신을 더 작게 만들 것만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아주 솔직한 말 하나만 꺼냈다.“…저… 그 소리가 아직도 들려요.”그 말은 흔들림을 고백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목소리는 투명했다.두려움을 말하면서도 도망치고 싶다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최강은 그녀의 손에서 아직 남아 있는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정 사원님.”그는 조용히 말했다.“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정답이요?”“누군가가 정 사원님의 감정을 흔들려고 소리를 만든 겁니다.이름을 부른 것도, 돌려받겠다고 말한 것도 모두 의도된 교란입니다.”민영은 그의 말을 듣고도 문을 바라보던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근데… 그 소리가 너무… 알고 있는 사람처럼 들렸어요.”그 말은 그녀가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소리에 느낀 진짜 체감이었다.그러나 최강은 단단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그건 정 사원님이 그렇게 느끼도록 설계된 겁니다.”민영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은 단호했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녀가 이 일에 너무 깊이 끌려가 버릴까걱정하는 사람의 미세한 떨림이었다.“…대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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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진실의 숨결을 더듬는 밤

보호 구역을 벗어나 긴 복도 끝에 가까워졌을 때,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발걸음은 앞으로 향하는데,마음은 조금 전 그림자가 남긴 차가운 여운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기분이었다.그때“정 사원님.”최강의 목소리가 공간의 냉기를 부드럽게 가른다.민영은 그 소리만으로도 조금 전 가슴을 옥죄던 긴장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네, 대리님.”“지금은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무엇이 남았는지’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민영은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되새겼다.단순히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붙들리지 말라’는 조용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가볼게요.”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지만서로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부딪힐 만큼 그 거리는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복도의 끝에서 최강은 걸음을 멈추었다.“정 사원님. 방금 들은 말… 기억하시죠?”민영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말’은 기억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몸 안쪽 깊은 곳에 박혀버린 말의 조각이었다.“…이름을… 돌려받으러 왔다고 했죠.”민영이 조용히 말했다.“그렇습니다.”최강은 그 말 자체를 분석하는 듯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올렸다.“저 소리는 정 사원님이 알고 있는 세계를 흔들기 위한 말입니다.”“…흔들기 위해?”“네. 정 사원님을 ‘대상’으로 알고 있다면 절대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민영의 숨이 가늘게 떨렸다.“…그럼… 그 사람은… 저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정 사원님의 심리를 알고 있는 겁니다.”그 말은 민영의 눈을 크게 흔들었다.“…제가 느낄 감정을… 예측했다는 뜻이에요?”“정확히 말하면 정 사원님이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그쪽이 원한 그대로입니다.”그 말은 민영의 가슴을 한 번 더 깊게 흔들어 놓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래도 피하고 싶지 않아요.”최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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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혼자 걷게 두지 않겠다는 약속

바닥에 떨어진 그 작은 흔적은 처음엔 단순한 빛의 잔조각처럼 보였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민영은 설명할 수 없는 낯섦을 느꼈다. 마치 그것이 이 공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어딘가 다른 세계의 온기 한 점이 잠시 틈을 파고들어 자리를 남겨놓은 것 같은 느낌.“…이게… 뭐죠?”민영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최강은 그 흔적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도록조심스레 비켜서며 시선을 낮췄다.“잔흔입니다.”그는 잠시 숨을 멈추듯 말한 뒤 조용히 이어 말했다.“정 사원님을 향해 온 존재가 여기를 지나갔다는 신호죠.”민영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방금 그 그림자와… 연결된 걸까요?”“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떤 불안도 감추지 않았다.“저건 단순한 그림자가 아닙니다. 어딘가에서 보내진 ‘형태’입니다.직접 들어올 수 없으니 흔적으로 자신을 남긴 거죠.”민영은 그 말 끝에서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그 존재가 문 너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이 병원의 구조 어딘가에서 그림자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저걸… 만질 수 있나요?”민영이 손을 내밀려 하자 최강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정 사원님.”민영은 그의 손길에 놀라 멈춰섰다.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보다 그와 맞닿은 순간의 온기 때문이었다.“이건… 절대 만지면 안됩니다.”최강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조금 더 주고 있었다.“…위험해요?”“위험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위험한 겁니다.”민영은 그제야 천천히 손을 내렸다.그러나 눈은 그 흔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찬빛과 따뜻한 빛이 섞인 듯 묘하게 은색을 띠고 있는 잔흔.그 빛은 병원 복도의 차가운 조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이런 게… 어떻게 남겨지죠?”“에너지.”최강은 아주 낮게 말했다.“정 사원님을 알고 있는 존재라면 정 사원님이 있는 곳에 ‘흔적’을 남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민영의 눈이 흔들렸다.“…저를… 계속 보고 있었던 건가요?”“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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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흔적들이 모여드는 자리

바닥의 잔흔은 빛인지, 온기인지, 혹은 남겨진 숨의 조각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했지만한 번 눈에 익자 마치 길을 따라 놓인 작은 등불처럼흐릿한 병원 복도에 일정한 방향을 그렸다.민영은 그 빛을 따라 걷는 동안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느꼈다.흔적은 그녀를 처음 보는 게 아니라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을 천천히 이끌 듯한 움직임이었다.“…대리님.”민영이 조용히 말했다.“저 빛… 저를 아는 것 같아요.”최강은 그녀의 속삭임에서 두려움보다 더 짙은 감정을 읽었다.그 감정은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려는 사람만이 갖는 섬세한 떨림이었다.“정 사원님이 느끼는 감정, 틀린 감각 아닙니다.”그는 고요하게 말했다.“저 흔적은 정 사원님에게만 반응하고 있습니다.”“…저에게만?”“네. 제가 다가갈 때와 정 사원님이 다가갈 때의 움직임이 다릅니다.”민영의 눈끝이 흔들렸다.“…그럼 저를 알고 있는 사람이 흔적을 남겼다는 뜻이겠죠…?”최강은 단정짓지 않았다.조심스레, 그러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방식으로 말했다.“적어도 정 사원님을 ‘목표로’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민영은 그 말의 무게를 천천히 받아들였다.자신이 모르던 어떤 과거가, 어떤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자라오고 있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실은 그녀를 무너뜨리기보다는 걸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저는… 괜찮아요.”민영이 속삭였다.“이제는… 정말 알고 싶어서요.”최강은 잠시 멈춰 그녀를 바라봤다.그 말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다시 붙잡으려는 사람의 아주 진지한 결심이었다.“…정 사원님은 강한 사람입니다.”그가 조용히 말했다.민영은 그 칭찬에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그렇다면 제가 먼저 알아본 겁니다.”그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가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민영의 목이 서서히 뜨거워졌다.“…대리님은… 너무 단단해요.”“정 사원님을 지켜야 하니까 그렇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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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떨림을 녹이는 단단한 온기

문은 누군가의 손이 닿은 것도 아닌데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스스로 깨어나듯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스르륵~~그 소리는 낡은 문장에서 나와선 안 되는 너무 부드러운 울림이었다.마치 바람이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조심스레 문턱을 넘어오는 소리.민영은 문이 열리는 각도보다 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공기의 결에 먼저 심장이 반응했다.“…따뜻해요.”그녀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말했다.실제로 복도 공기는 차가웠다.그런데도 문틈 너머에서 스며드는 공기는 이상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그 안에서 오래 숨을 머금고 있다가 방금 토해낸 숨결처럼.최강은 그 온기 속에 섞여 있는 극히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아닙니다.”그는 단단히 말했다.“저 온도는… 사람의 온도가 아닙니다.”민영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도망치려는 기미는 없었다.“문 안쪽에 있는 건…사람이 아니라는 건가요?”최강은 대답을 쉽게 하지 않았다.말로 규정하는 순간 그 존재에게 형체가 생겨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확실하진 않습니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하지만 ‘형체’가 들어서는 건 아닙니다. 기척만 들어옵니다.”민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문틈은 이제 허리 높이 정도까지 열려 있었지만그 너머 내부는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어둠이 아니라, 빛도 아닌 마치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빠져나간 듯한 공간.“…저기… 뭐가 있나요.”민영이 묻자,최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그 순간 문틈에서 한 줄기의 움직임이 스쳤다.모양도, 그림자도 아니었다.그저 민영의 이름을 아는 존재가 그녀를 향해 손끝을 내미는 것 같은 감각의 흐름.민영의 호흡이 짧게 흔들렸다.“…대리님, 느껴졌어요?”“네.”최강은 즉시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다시 접근합니다.”민영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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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기억을 찾아가는 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지만, 그 안쪽에서 흘러나온 이름 하나는 민영의 안쪽 어딘가를 아직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흔들고 있었다.'영아.'그 이름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려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 불리지 않아서 잠들어 있던 이름처럼,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대리님."민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최강은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것을 즉시 알아채고 곁으로 다가섰다."네.""저요..."민영은 짧게 숨을 고르며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지금... 여기가 좀 이상해요.""어디가 이상하십니까?""심장 근처예요."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아프진 않은데... 마치 누가 기억 하나를 안에서 살짝 두드린 것 같아요. 깨우려는 것처럼."최강은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증상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흐름이 결국 닿게 될 지점의 전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정 사원님."그가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혹시... 어릴 때 기억이 이상하게 비어 있다고 느낀 적 있으십니까?"민영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있어요."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유치원 이전 기억이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흐릿해요.""완전히 없는 건 아니시죠?""네."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조각처럼... 냄새나 느낌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어요.근데 얼굴은 없고, 목소리도 없어요. 그냥 감각만 있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주 작게, 거의 속삭이듯 덧붙였다."...그래서 방금 그 이름이... 기억이 아니라 감각처럼 느껴졌나 봐요."최강의 숨이 조용히 깊어졌다.그 이름은 기억을 깨우는 열쇠가 아니라, 기억이 원래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는 흔적일지도 모른다."정 사원님."그는 더욱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지금 느끼시는 감정이 억지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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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되돌아갈 필요 없는 문턱 위에서

자동 조명의 빛은 두 사람의 발치에서 천천히 번지다가 이내 멈췄다. 빛이 멈춘 자리에서 그림자는 더 길어졌고, 길어진 그림자만큼이나 민영의 마음도 조용히, 천천히 늘어났다.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은 말보다 먼저 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리님."민영이 낮게 불렀다.최강은 그녀의 목소리에 즉시 고개를 돌렸다."네.""저요..."민영은 손바닥을 한 번 펴고 다시 천천히 쥐었다."지금 이 방향이... 맞는 것 같아요.""무슨 말씀이십니까?""제가 가야 할 방향이요."그 말은 막연하지 않았다. 불안에 떠밀린 선택도 아니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확신이 그 짧은 문장 사이에 단단히 스며 있었다.최강은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복도 끝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빛이 닿지 않는 쪽, 사람의 발길이 드문 쪽, 그러나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 법한 쪽이었다."왜 그렇게 느끼십니까?"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주 솔직하게, 숨김없이 답했다."그 이름이요.""영아."그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는 순간, 민영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사람처럼."그 이름이 저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앞에서 기다리는 느낌이었어요."최강은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새겼다."기다린다...""네."민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를 데려가려는 느낌도, 몰아붙이는 느낌도 아니었어요. 그냥... 여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조심스럽게 얹었다."이쪽이라고."최강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불안이 아니라,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서 있는 사람의 미세한 떨림이었다."정 사원님."그가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그 감각을 믿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민영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괜찮을까요?""네."그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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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종이 위에 잠든 온기

기록 보관실의 공기는 밖과 완전히 다른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민영에게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한 번쯤 와본 적 있는 곳처럼,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종이 냄새는 단순히 오래된 냄새가 아니었다. 손때와 숨결, 그리고 누군가가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까지 함께 눌러 담긴 냄새였다. 세월의 무게가 곰팡이나 먼지가 아닌, 사람의 온기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민영은 문을 닫지 않은 채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아주 작게 울렸고, 그 울림은 마치 '여기까지 잘 왔다.'라고 낮게 응답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가 사이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대리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최강은 문가에 서서 실내 전체를 한 번 훑은 뒤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네.""여기요." 민영은 서가 사이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상해요.""어떤 점이요?""무섭지 않아요." 그 말은 자신도 조금 놀랄 만큼 담담하게 흘러나왔다.민영은 작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죠. 분명 제가 모르는 과거가 있을 텐데, 여기 서 있으니 두렵다기보다는..." 그녀는 적절한 단어를 찾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마음이 조용해져요."최강은 그녀의 옆에 섰다. 어느새 그들의 그림자는 서가 사이 바닥에서 나란히 포개져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윤곽이 하나처럼 겹쳐진 모습이 묘하게 안정적으로 느껴졌다."무서움은 위협에서 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여기는 숨겨졌던 것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깨우길 기다리며 고요히 누워 있는 것이죠."민영은 그 말의 차이를 몸으로 이해했다. 위협은 다가오는 것이지만, 잠든 것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 미묘한 경계선 위에서 그녀의 심장은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그래서 영아라는 이름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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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라오네트, 딸을 위해 세운 거대한 벽

파일을 덮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러나 민영에게는 그 소리가 한 시절이 조용히 자리를 옮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무거운 커튼이 천천히 내려오듯,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한 장면이 마침내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서가 옆 작은 테이블에 파일을 내려놓고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아 있었고, 그 감촉이 이름 하나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가볍게 느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 종이 한 장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영아.’기록 속의 이름은 차갑고 정제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을 바라보는 동안 민영의 가슴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대리님." 그녀가 낮게 불렀다.최강은 서가 반대편에서 주변을 확인하던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다가왔다. "네.""이상해요." 민영은 시선을 파일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이름을 봤을 뿐인데, 아버지가 어떤 얼굴이었을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이 기록을 남길 때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하고 계셨을지..."최강은 그 말에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민영의 옆에 서서 같은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무는 순간, 보관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어떤 얼굴입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겁내는 얼굴이요." 민영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호한 얼굴."최강은 그 단어들의 조합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는 그 두 감정이 얼마나 모순적이면서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정 회장님은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계셨을 겁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버지로서의 얼굴과, 무언가를 지켜야 할 사람의 얼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던 사람의 얼굴이요."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메어오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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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빛이 다시 닿는 자리

기록 보관실의 문을 나섰을 때 복도의 공기는 조금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같은 병원, 같은 복도, 같은 조명이었는데, 민영의 감각은 이 공간이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폐쇄되어 있던 방이 처음으로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뀌어 있었다."밖이요." 민영이 낮게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밝아 보여요."최강은 그 말에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은 변함없이 일정한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정 사원님이 변하신 겁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세상이 밝아진 게 아니라, 정 사원님의 눈이 이제 빛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예요."민영은 그 말의 의미를 굳이 되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더 이상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뒤를 경계하며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대리님." 민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이제 제가 뭘 해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새로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최강은 그녀의 옆에서 속도를 맞췄다. "어떤 겁니까?""숨지 않는 거요." 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는 것. 필요한 만큼만, 적절한 순간에만 앞으로 나가는 거요."그 말은 언뜻 모순처럼 들렸지만 지금의 민영에게는 이상할 만큼 명확했다.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무모하게 뛰어들지도 않는 균형. 아버지가 평생 걸어왔을 법한 그 미묘한 경계선 위를 걷는 일.최강은 그 문장을 조용히 곱씹었다. "정 회장님이 원하셨을 법한 방식이군요."민영은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였다."아버지는 늘 극단을 피하셨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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