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빛은 유리창을 통과하며 각도를 바꾸고 있었다.같은 사무실, 같은 자리였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공기의 결은 조금씩 달라졌다.민영은 문서를 넘기다 말고 손끝을 잠시 멈췄다.집중이 흐트러진 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고요해서 스스로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질문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이 선택이 맞는지, 이 방향이 옳은지,지금의 감정이 잠깐 스쳐 가는 건 아닌지.하지만 오늘은 그 질문들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대신 이상할 정도로 분명한 감각만이 남아 있었다.'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부담 없이 자리를 잡았다.민영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확답을 요구받지 않는 상태.그 여유가 자신을 나태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오히려 이런 여백이 있어야 다음 걸음을 정확히 내딛을 수 있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회의실에서 바로 나온 듯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민영은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잠깐 괜찮으십니까.”그 말투에는 언제나처럼 강요가 없었다.민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복도를 따라 함께 걸으며 둘은 나란히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누가 맞추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 있었다.그 사실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는 점이 민영에게는 작은 안정으로 다가왔다.“아까 말씀드린 외부 일정 말입니다.”최강이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정 사원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민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머릿속에서 일정과 감정이 빠르게 정리되었고,그 과정에 망설임은 없었다.“동행할게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지금은 피할 이유가 없어요.”최강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표정에는 안도도, 놀람도 없었다.마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알겠습니다.”그는 차분하게 말했
Last Updated : 2026-05-06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