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81 - Chapter 190

211 Chapters

181화. 평범해서 더 선명한 저녁

퇴근 시간이 서서히 사무실을 비워낼 때, 민영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모니터 속 문장은 이미 여러 번 읽은 것들이었지만, 마우스를 쥔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집중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또렷해서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어진 상태에 가까웠다.하루가 이대로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창밖을 보니 해는 거의 저물어 있었고,건물 유리벽에 반사된 노을이 천천히 어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오늘은 이런 속도로 끝나도 되겠지.’민영은 마지막 메일을 정리한 뒤 컴퓨터를 껐다.의자를 밀고 일어설 때, 몸이 전혀 무겁지 않았다.피곤함보다 정리된 감정이 먼저 느껴지는 날이었다.사무실을 나서며 민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최강이었다.그는 민영을 보자 잠시 시선을 맞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서로가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아직 계셨네요.”“네.” 민영은 짧게 웃었다.“생각보다 정리할 게 많았어요.”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기계음이 공기 속을 천천히 가르며 울렸다.그 소리 사이에서 민영은 괜히 말을 고르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오늘은 어떠셨어요.”그 질문은 안부에 가까웠지만, 민영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평소랑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최강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다만 조금 차분했습니다.”그 대답에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차분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나오자 바깥의 공기가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밤공기는 낮의 잔열을 아직 완전히 놓지 않은 상태였다.“…저녁 드셨어요.”민영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약속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지금 이 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아직입니다.”그 짧은 대답에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숨을 고르듯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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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밤의 끝에서 남은 말

식당을 나선 뒤, 밤공기는 조금 더 차분해져 있었다.저녁의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고, 도시는 하루를 정리하는 호흡으로 넘어가고 있었다.민영은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어깨가 어느새 편안하게 내려가 있다는 걸 느꼈다.오늘 하루를 끝까지 끌어안고 있던 긴장이 이제야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집까지 멀진 않으시죠.”최강이 민영의 보폭에 맞추며 물었다.그 질문은 길을 확인하는 말이었지만,그 안에는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조금만 더 가면 돼요.”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걸어도 괜찮은 거리예요.”그 ‘괜찮다’는 말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겹쳐 있었다.걷는 것이 괜찮고, 함께 걷는 것이 괜찮고, 이 밤이 조금 더 이어져도 괜찮다는 뜻까지.두 사람은 굳이 손을 다시 잡지 않았다.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순간도 없었다.그 사이의 거리는 이미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정도로 정해져 있었다.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민영은 문득 자신의 그림자가 두 개로 늘어나는 걸 보았다.바닥 위에서 나란히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조금 겹치다가, 다시 나뉘었다.이렇게 민영은 속으로 생각했다.'가까워졌다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지금의 우리구나.'그 깨달음은 서운하지 않았다.오히려 지속될 수 있는 관계의 형태처럼 느껴졌다.“…아까,”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녁 먹자고 한 거 괜히 부담되진 않으셨어요.”최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부담이었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그 직선적인 대답에 민영은 작게 웃었다.그의 말은 늘 단순했지만,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저는”민영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어서 말했다.“이렇게 하루가 끝날 때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조금 낯설어요.”“나쁘게요?”“아니요.”민영은 고개를 저었다.“좋은 쪽으로요. 그래서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고,상대에게 건네는 솔직함처럼 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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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아직 이름 없는 확신

아침이 조금 늦게 찾아온 듯한 날이었다.민영은 눈을 뜨고도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어제의 밤이 아직 몸 어딘가에 잔향처럼 남아 있어서였다.시계를 보지 않아도 대략의 시간이 느껴졌다.서두를 필요가 없는 아침, 그 자체가 이미 조금은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이불을 걷어내며 민영은 천천히 앉았다.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움보다 안정이 먼저 전해졌다.몸이 오늘의 속도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창문을 열자 공기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어제보다 조금 더 맑은 공기. 민영은 그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숨이 어깨에서 멈추지 않고 아랫배까지 내려가는 걸 느끼며.오늘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겠다.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민영은 잠시 자신의 눈을 바라봤다.어제와 같은 얼굴인데도 시선의 깊이가 달라 보였다.확신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만 의심이 눈에 띄게 줄어든 표정이었다.출근길은 늘 지나던 길이었다.횡단보도, 편의점 앞, 버스 정류장.그 익숙한 풍경들 사이에서 민영은 문득 어제와 오늘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회사 로비에 들어서자 아침 특유의 소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서둘렀고, 누군가는 이미 회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민영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췄다.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최강이었다.그는 민영의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그 짧은 시선 교환만으로 어제의 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좋은 아침입니다.”“네. 좋은 아침이에요.”그 인사는 형식적이지도, 과하지도 않았다.마치 하루의 첫 문장을 같이 열어보는 느낌에 가까웠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다.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민영은 그 거리가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해졌다는 걸 느꼈다.“…오늘 회의 많으시죠.”민영이 먼저 물었다.대화의 시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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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리듬을 정돈해 주는 사랑

점심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오전의 일정이 큰 파동 없이 흘러간 탓에 민영은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시간의 이동을 실감했다.마음이 어디에도 끌려가지 않고 지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복도를 나서며 민영은 문득 발걸음이 가볍다는 걸 느꼈다.어제의 밤, 오늘의 아침, 그리고 지금의 낮이 어느 한 지점에서 무리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끊어짐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을 주었다.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민영은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어깨는 조금 내려가 있었고, 시선은 쓸데없이 흔들리지 않았다.누군가를 떠올리느라 집중을 잃는 대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중심이 잡힌 얼굴이었다.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최강이 서 있었다.서로를 확인하는 데 굳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눈이 마주치고, 고개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그 정도면 충분했다.“…회의는 괜찮으셨습니까.”“네.”민영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생각보다 정리할 게 많지 않았어요.”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침묵은 의미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 민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얼굴을 스쳤다.각자의 점심, 각자의 생각, 각자의 속도.그 속도들 사이에서 자신은 누군가와 나란히 같은 시간을 향해 걷고 있었다.“…오늘은 뭐 드실래요.”최강의 질문은 선택을 묻는 말이었지만,그 안에는 함께 결정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가볍게요.”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오후에 집중해야 할 게 있어서.”“그럼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그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민영은 그 자연스러움이 괜히 마음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누군가가 자신의 리듬에 조용히 맞춰오는 순간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창가 자리에 앉자 햇빛이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민영은 잠시 그 빛을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오늘의 식사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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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흔들림이 머무는 자리

오후의 빛은 아침과 달리 결정을 재촉하지 않았다.창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햇살이 서류 위에 잠시 머물다다시 흘러가듯, 민영의 마음도 한 곳에 오래 눌러앉지 않고 부드럽게 이동하고 있었다.키보드 위를 오가던 손끝이 잠시 멈췄다.민영은 문장 하나를 지우고, 다시 쓰지 않았다.지금은 완성보다 여백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그때 회의실 쪽에서 낯익은 기척이 조용히 흘러 나왔다.발소리는 낮았고, 속도는 일정했다.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 걸음.민영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강산이었다.그는 회의실 유리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문 너머로 민영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고개를 약간 숙인 채, 집중한 사람 특유의 고요한 자세.강산은 그 모습을 오래 보지 않았다.대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이제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분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그러나 민영의 시야에는 또렷하게 들어왔다.“…들어오세요.”강산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차분했지만,그 차분함 아래에는 조금 다른 결의 집중이 깔려 있었다.“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네.”민영은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세요.”강산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대신 회의실 안쪽에 서서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안정되셨네요.”그 말은 칭찬 같기도, 확인 같기도 했다.민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편이에요.”“…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민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창밖으로 한 번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강산을 보았다.그 사이의 짧은 침묵에는 피하려는 기색도, 망설임도 없었다.“예전에는 흔들리는 게 익숙했거든요.”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그런데 요즘은 흔들려도 돌아올 자리가 어딘지 알겠어요.”강산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변화는 누군가의 말에 가슴이 먼저 반응했을 때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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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하루 끝에 확인한 온기

해가 완전히 기울고 나서야 사무실의 공기가 조금 느슨해졌다.퇴근을 준비하는 기척들이 복도에 얇게 퍼졌고,의자 끄는 소리와 서류를 정리하는 손끝의 마찰이 하루의 끝을 알렸다.민영은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아까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장처럼 천천히 재배열되고 있었다.강산의 시선, 그가 고른 단어들, 말끝에 남아 있던 미묘한 여백.그 모든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 사소하지도 않았다.‘정확한 자리에 있었다는 말…’민영은 속으로 되뇌었다.그 말은 자신을 향한 평가라기보다 강산 스스로에게 내린 결론처럼 들렸다.그리고 그 결론이 어쩐지 마음을 건드렸다.사람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는 순간만큼은 대개 성장에 가깝다.민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방을 들고 사무실 불을 끄며 오늘을 정리하듯 숨을 한 번 고르게 내쉬었다.복도로 나서자 저녁의 기운이 벌써 스며들어 있었다.창밖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았고,건물 사이로 남은 빛이 도시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최강이 서 있었다.민영은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섰다.“…기다리셨나요.”“아니요.”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마침 내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문이 닫히자 조금 전보다 공기가 조용해졌다.민영은 손잡이를 잡은 채 층수가 내려가는 걸 바라보았다.숫자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마음도 차분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오늘 강산 씨를 만났습니다.”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지만,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최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들었습니다.”“들으셨어요?”“표정으로.”그는 짧게 덧붙였다.“조금 생각이 많아 보이셨습니다.”민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누군가에게 자신의 상태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읽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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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가까워진 질문

차는 도시의 불빛 사이를 천천히 흘러갔다.라디오를 켜지 않은 채 엔진 소리만 남겨 둔 공간에서 민영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지나가는 불빛들이 유리 위에서 잠깐씩 번졌다가 사라졌다.말이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지금의 침묵은 서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완충재처럼 느껴졌다.민영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손가락을 가만히 맞물렸다.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내 자리. 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오늘,”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제가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죠.”최강은 전방을 바라본 채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아닙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오히려 정리된 느낌이었습니다.”민영은 그 대답에 조금 안도했다.누군가의 마음을 헝클어뜨리지 않았다는 확인은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빨간 불빛이 유리에 반사되며 차 안을 잠깐 붉게 물들였다.민영은 그 빛 속에서 문득 강산의 얼굴을 떠올렸다.회의실에서의 차분한 표정, 그 아래에 잠겨 있던 감정의 결.그 역시 누군가의 선택을 재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걸 민영은 알고 있었다.“…대리님.”민영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사람 마음이 정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그렇습니다.”“그런데 가끔은 시간보다 먼저 알아버릴 때도 있는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의 끝을 재촉하지 않았다.대신 민영이 스스로 이어갈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겼다.“아직 이름을 붙일 단계는 아닌데,”민영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조금 보이는 느낌이요.”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차는 다시 움직였다.최강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보이는 방향이 있다면”그는 차분하게 말했다.“그걸 부정하지 않는 게 제일 어렵고, 또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민영은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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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잠들지 않는 선택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눈을 감고 있어도 의식은 자꾸만 하루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갔다.민영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창문 틈으로 스며든 도시의 미세한 소음이 오히려 생각을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천장은 검은 종이처럼 평평했다.그 위에 감정들이 천천히 적혔다가 지워졌다.지워진 자리에 다시 남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었다.나는 어떤 사람과 어떤 시간을 살고 싶은가.질문은 조심스러웠다.정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다만 회피를 허락하지 않을 뿐이었다.민영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체온이 천천히 안정되며 몸의 긴장이 풀렸다.그 순간 문득 최강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같은 속도로 옆에 있겠습니다.그 문장은 어떤 약속보다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사랑을 앞서 정의하지 않는 태도,상대의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 방식.그 선택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안정을 주고 있는지 민영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그와 동시에 강산의 메시지도 마음의 다른 면을 건드렸다.정확한 거리, 절제된 문장, 한 발 물러서 있으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태도. 그 역시 민영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사람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마음을 건네는 걸까.'그 생각이 씁쓸하지는 않았다.오히려 자신이 선택받는 존재가 아니라선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게 했다.민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숨이 폐를 가득 채우고 다시 빠져나갈 때,마음도 같은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정리하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렬되는 감각.그때 휴대폰이 다시 한 번 미세하게 진동했다.이번에는 알림의 무게가 조금 달랐다.민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켰다.-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오늘, 말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다만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강산이었다.문장은 조심스러웠고, 끝에는 여백이 남아 있었다.대화를 강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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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겹치지 않는 온도

커피 향이 복도 끝에서부터 천천히 번져왔다.갓 내린 향은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도 솔직하게 만든다.민영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잠시 그 따뜻함에 집중했다.“너무 뜨거우면 말씀하세요.”최강의 말은 습관처럼 부드러웠다.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조금 기울였다.입술에 닿는 온도가 적당했다.이상하게도 그 적당함이 지금의 관계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두 사람은 창가 옆 작은 테이블에 나란히 섰다.의자에 앉지 않은 채 잠깐의 시간을 공유하는 자리.오래 머물 필요도, 서둘러 떠날 이유도 없는 그런 위치였다.“…어제는 잠 잘 주무셨습니까.”“네.”민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깊지는 않았지만 괜찮았어요.”최강은 그 대답의 여백을 읽었다.괜찮았다는 말과 깊지 않았다는 말 사이에 놓인 감정의 층을 굳이 헤집지 않았다.“그 정도면 충분합니다.”민영은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인정처럼 느껴져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괜찮아도 된다는 허락.그 허락을 자신에게 가장 먼저 건네주는 사람이 지금 옆에 있었다.잠시 후, 민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복도 끝으로 향했다.유리문 너머에서 한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정확한 속도.강산이었다.민영은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게 들이마셨다.놀라거나 피하려는 기색은 아니었다.다만 이 순간이 겹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강산은 두 사람을 금방 발견했다.민영의 손에 들린 컵, 최강의 옆에 선 거리.그 모든 장면이 설명 없이도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정 사원님.”강산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은 정돈되어 있었다.“안녕하세요.”민영의 대답은 짧았지만 피하지 않았다.최강은 자연스럽게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누군가를 가리거나 차단하지 않는 선택. 그 역시 의도적인 배려였다.“잠깐 말씀드린 건”강산은 업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오후 미팅 전에 확인할 자료가 있어서요.”“네.”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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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음

오후의 시간은 결정을 재촉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회의실 유리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선명하기보다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이 민영의 시야를 조금 느리게 만들었다.자리에 앉아 문서를 넘기던 손이 한 번 멈췄다.민영은 마우스를 놓고 손끝을 가만히 책상 위에 얹었다.아까의 커피 온도가 아직 손바닥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느리게 식고 있었다.회의는 크게 길지 않았다.의견은 정리되어 있었고, 결론은 무리 없이 도출되었다.민영은 필요한 말만 했고, 그 말들은 제자리를 찾았다.그런데도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가슴 안쪽에 작은 질문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그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다만 머물러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눈빛처럼 조용히 존재했다.복도로 나왔을 때, 민영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눈동자는 안정되어 있었고,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 모양이었다.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정이 그 표정에 남아 있었다.그때 회의실 반대편에서 강산이 걸어 나왔다.그 역시 회의를 마친 듯 서류를 정리하며 주변을 살폈다.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번 스쳤다.“회의 괜찮았습니까.”강산의 인사는 늘 그랬듯 정확했다.상대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적정한 거리의 톤.“네.”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정리 잘 됐어요.”강산은 그 대답을 한 박자 늦게 받아들였다.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아까 커피 드시던 것 같던데.”“네.”민영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잠깐요.”“그렇군요.”그 한마디 뒤에 침묵이 놓였다.강산은 그 침묵을 서둘러 채우지 않았다.대신 서류를 한 번 더 정리하며 말을 고르듯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정 사원님.”그는 이번에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제가 지금 무리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민영은 그를 바라보았다.눈빛에는 경계도, 불편함도 없었다.다만 정직한 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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