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191 - Chapter 200

211 Chapters

191화. 나란히 걷는 시간의 결

회사 건물을 나서는 순간, 바깥의 공기는 실내보다 한 톤 낮았다.차갑다기보다는 정리된 온도.민영은 그 온도가 지금의 마음과 이상하게 잘 맞는다고 느꼈다.보도블록 위를 천천히 걸으며 두 사람은 굳이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이 없는 산책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허락했다.말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아까,”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강산 씨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된 느낌이에요.”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잘 마무리된 겁니다.”“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정 사원님은 마무리가 안 되면 표정에 남깁니다.”그는 잠시 민영을 보며 덧붙였다.“오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민영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얼굴을 의식했다.정말로 어딘가 가벼워진 느낌이 있었다.아직 선언한 것도, 확정한 것도 없는데 마음의 결이 정돈된 상태.“사람 마음을 정리하는 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게 좀 신기해요.”민영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예전에는 늘 아프거나 시끄러웠거든요.”“아프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라는 착각을 많이들 합니다.”“대리님도 그랬어요?”최강은 잠시 시선을 앞에 둔 채 걸음을 맞췄다.한 박자 정도의 침묵 뒤에 말을 이었다.“저는 아프지 않은 감정을 잘 믿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늘 한 걸음 떨어져 있었죠.”민영은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었다.그가 늘 곁에 있었으면서도 넘어오지 않았던 이유,서두르지 않았던 태도. 그 모든 것이 이제야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그럼 지금은요.”최강은 민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짧게 마주쳤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지금은 믿어도 될 것 같아서 여기 있습니다.”그 말은 고백에 가깝지 않았고,그렇다고 업무적인 설명도 아니었다.그저 현재 위치에 대한 담담한 진술.민영은 그 진술이 이상하게 가슴 깊숙이 닿는 걸 느꼈다.가로수가 늘어선 길에 들어서자 바람이 잎 사이를 스치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햇빛은 잎의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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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말하지 않아도 남는 마음

해가 완전히 기울 무렵, 공원 밖으로 나서는 길은 낮과 밤의 경계처럼 애매한 색을 띠고 있었다.가로등은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았고, 하늘은 어둡다고 하기엔 조금 밝았다.민영은 그 애매한 시간대가 오늘의 감정과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꼈다.두 사람은 다시 보도블록 위를 걸었다.발걸음 소리가 같은 리듬으로 겹쳤다가 다시 흩어졌다.굳이 맞추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슷해지는 속도.“…이런 시간은,”민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말이 많아지면 오히려 사라지는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민영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말하지 않기로 한 선택이 침묵을 만든 게 아니라,지금은 침묵이 가장 정확한 언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둘은 나란히 멈춰 섰다.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며 짧은 소음을 남겼다.그 소음 속에서도 민영은 옆에 있는 사람의 기척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어깨의 거리, 숨의 온도,서로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지까지.“정 사원님.”“네.”“아까 하신 말”최강은 한 박자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약속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민영은 고개를 들었다.그가 그 말을 꺼낸다는 건 그만큼 신중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네.”“저는”최강은 시선을 신호등에 둔 채 말을 이었다.“그게 거절로 들리지 않았습니다.”민영은 그 말에 가슴 안쪽이 조용히 울리는 걸 느꼈다.“…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약속을 거절한 게 아니라,”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속도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신 것 같아서요.”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민영은 몇 걸음쯤 걸은 뒤에야 대답했다.“맞아요.”“저는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서두르지 않는 거예요.”그 말은 변명이 아니었다.지금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이었다.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고개 끄덕임에는 설득도, 타협도 없었다.그저 이해가 있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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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밤이 정리해 주는 마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낮보다 조용했다.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불빛들이 하나같이 조금 느린 속도로 민영의 시야를 지나갔다.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밤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려보냈다.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은 뒤에도 민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몸은 이미 집 안에 들어왔는데, 마음은 아직 오늘의 길 위에 남아 있는 듯했다.불을 켜자 거실이 부드러운 빛으로 채워졌다.아까까지의 어둠은 순식간에 물러났지만,그 어둠이 남긴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민영은 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말하지 않아도 전해진 것들.’그 문장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형태를 갖추었다.오늘 하루는 그 문장을 증명하는 시간 같았다.부엌으로 가 물 한 컵을 따르며 민영은 컵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이 시간에 머릿속이 더 시끄러웠을 텐데,오늘은 이상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는데도.소파에 앉아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그 온기는 낮에 느꼈던 커피의 온도와 조금 닮아 있었다.지나치게 뜨겁지 않고, 그렇다고 식어버리지도 않은 상태.민영은 그 온기를 느끼며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다.‘나는 왜 이렇게 편안해졌을까.’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누군가가 자신의 속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재촉하지 않고, 앞서지 않고, 그렇다고 뒤로 숨지도 않는 사람.민영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오늘 나눴던 말들, 말하지 않은 순간들,그 사이에 놓였던 침묵의 결.그 모든 것이 한 장면처럼 겹쳐졌다.강산의 차분한 눈빛,자기 위치를 정확히 알고 물러섰던 태도.그리고 최강의 말 없는 동행,옆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확인이 되었던 존재감.사람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남길 수 있구나.민영은 그 사실을 이제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누군가의 진심이 반드시 붙잡거나 소리 내어 고백하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는 걸.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잠깐 빛났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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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고백보다 늦게 오는 것

퇴근 무렵의 사무실은 하루의 끝을 스스로 알고 있는 듯했다.서류를 덮는 소리, 의자를 밀어 넣는 기척,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오늘을 접는 손길들.민영은 모니터를 끄고도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다만 오늘이 어떤 하루였는지를 몸에 남기고 싶었다.급하게 정리하지 않고, 가볍게 흘려보내지도 않으면서.가방을 들고 일어나 복도로 나섰을 때,창밖은 이미 저녁의 색으로 기울어 있었다.햇빛이 유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번졌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순간.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췄을 때, 민영은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강산과의 대화, 혼자였던 점심,업무에 집중하던 시간들.그리고 아직 마주하지 않은 한 사람.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익숙한 기척이 이미 그 안에 있었다.최강이었다.서로를 발견한 순간, 인사는 필요 없었다.고개가 아주 조금 움직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점검은 잘 끝나셨어요?”민영이 먼저 물었다.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네.”최강은 짧게 대답했다.“예상보다 조금 길었습니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그 짧은 공간 안에서 말은 많지 않았지만, 하루의 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점심은”민영이 말을 이었다.“각자 먹었습니다.”그 대답에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쉬움은 이상하게도 없었다.각자의 하루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한 번에 스며들었다.민영은 그 공기를 짧게 들이마셨다.“…오늘 잠깐 걸을까요.”최강의 제안은 부담 없는 톤이었다.약속이 아니라, 가능성처럼.“네.”민영은 곧바로 대답했다.“괜찮을 것 같아요.”두 사람은 회사 건물을 나서 조용한 길로 접어들었다.차량 소음이 조금 멀어지고, 발걸음 소리만 또렷해졌다.“…오늘은 어땠습니까.”최강의 질문은 포괄적이었다.업무를 묻는 것도, 기분을 캐묻는 것도 아닌 그냥 하루 전체를 향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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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고요가 깊어지는 방향

잠은 깊지도, 얕지도 않았다.민영은 몇 번인가 천천히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고, 그 사이마다생각은 짧은 숨처럼 왔다가 사라졌다.붙잡을 만한 꿈도, 밀어낼 만한 악몽도 없이그저 몸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을 받아들이는 밤이었다.새벽녘, 창밖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빛이 아니라 공기였다.차가운 기운이 커튼 틈을 스치며 방 안으로 살짝 들어왔다.민영은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고르게 했다.아침이 곧 온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눈을 떴을 때, 시계는 알람이 울리기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영은 굳이 다시 잠들지 않았다.어제의 감정이 오늘로 넘어오는 지점에서 한 번쯤 의식적으로 머물고 싶었다.천장을 바라본 채 민영은 자신에게 솔직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대답은 즉시 오지 않았다.하지만 기다림이 불안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불안하지 않은 기다림은 이미 방향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자 아침빛이 조용히 방 안을 채웠다.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색. 민영은 그 빛 속에서 잠시 서 있었다.서두르지 않아도 시간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느낌.출근 준비를 하며 머리를 묶는 손길도 어제와 달랐다.완벽하게 정돈하려 하지 않고, 흐트러진 부분을 그대로 두는 선택.그 사소한 선택이 이상하게도 지금의 마음과 잘 어울렸다.현관을 나서며 민영은 잠깐 멈춰 섰다.문을 닫기 전, 어제 받은 메시지가 문득 떠올랐다.‘오늘, 걸어 주셔서 고맙습니다.’그 문장은 아직도 마음 안쪽에서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민영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닫았다.회사로 향하는 길, 도시는 이미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신호등 앞에 멈춘 사람들,서둘러 길을 건너는 발걸음들.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도 민영은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늘 그렇듯 바빴다.그러나 민영은 그 소란 속에서도 자신이 차분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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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선택이 말을 배우기 전

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점심시간 특유의 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람들의 짧은 대화, 휴대폰을 확인하는 손길,서둘러 버튼을 누르는 움직임들.그 틈에서 민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중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최강은 버튼 옆에 서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동선을 정리했다.습관처럼 몸이 먼저 움직이는 태도.민영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이 사람은 늘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구나.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갔다.민영과 최강은 그 흐름에서 조금 뒤에 남았다.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점심은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듯이.식당 안은 이미 붐비고 있었다.트레이를 들고 메뉴를 고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줄에 섰다.민영은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오늘은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강은 메뉴를 한 번 훑어본 뒤 담담하게 말했다.“정 사원님은 국물 있는 게 편하실 겁니다.”민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왜인지 그 판단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식판을 받아 자리를 찾는 동안,민영은 이 선택이 누군가에게 맡겨진 것 같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권유였지만, 강요는 아니었고, 결정은 여전히 자신의 몫이었다.창가 쪽 자리에 나란히 앉자 햇빛이 테이블 위에 얇게 내려앉았다.민영은 국을 한 숟갈 떠먹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확실히 이게 낫네요.”최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입니다.”그 한마디에 괜히 웃음이 났다.사소한 만족이 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순간.잠시 식사에 집중하던 민영은 문득 이 시간이 어제의 산책과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특별한 말도, 의미를 규정하는 문장도 없지만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해지는 시간.“…대리님.”민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같이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건 처음이에요.”최강은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어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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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말이 없어도 닿는 쪽

저녁 공기는 낮보다 한결 가벼웠다.회사 건물을 벗어나자 도시는 자신의 속도로 숨을 고르고 있었고,민영은 그 속도에 굳이 맞추지 않아도괜찮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잠시 발걸음을 늦추는 순간이 있었다.어디로 향할지 결정해야 해서가 아니라,오늘이라는 하루를 어디에 내려놓을지 생각하고 싶어서였다.최강은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방치가 아니라 동의처럼 느껴졌다.지금은 말이 필요 없는 구간이라는 묵시적인 합의.“…집으로”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췄다.그 말 뒤에 무언가를 더 붙일 수 있을 것 같았지만,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같은 방향입니다.”최강은 짧게 말했다.질문도, 확인도 아니었다.그저 현재 위치의 공유.두 사람은 나란히 보도블록을 걸었다.가로등 불빛이 발치에 번갈아 내려앉고,그 빛이 서로의 그림자를 겹치게 만들었다가 다시 풀어놓았다.민영은 그 그림자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항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말하지 않아도 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는 걸.“…오늘,”민영이 조용히 말했다.“정리가 됐어요.”“무엇이요.”“사람의 자리요.”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이어서 말했다.“누구를 밀어내거나 붙잡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자리.”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고개 끄덕임에는 질문도, 확인도 없었다.이미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신호.“정해진 자리는”그가 담담하게 말했다.“지키는 사람이 있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민영은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천천히 되뇌었다.지킨다는 말이 부담으로 들리지 않는 건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방식 때문이었다. 잠시 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둘은 나란히 멈춰 섰다.차들이 지나가며 짧은 소음을 남겼지만, 그 소음은 대화를 가리지 못했다.“…대리님.”민영이 그를 불렀다.“네.”“혹시”그녀는 말을 고르듯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제가 지금 말을 아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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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고백이 오기 전의 숨

아침은 생각보다 천천히 열렸다.눈을 뜬 순간, 민영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이불 속에 남아 있는 밤의 온기가 아직 몸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창밖에서는 새로운 하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차 소리, 사람들의 발걸음,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도시의 숨결. 그 모든 소리가 한 겹의 막을 두고 전해져 왔다.민영은 천장을 바라본 채 어제의 밤을 조용히 되짚었다.말이 없었던 시간, 확인하지 않았던 마음,그럼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감각.‘이건 잠깐의 착각이 아니야.’그 생각은 확신이라기보다 몸의 기억에 가까웠다.이전에도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낀 적은 있었다.설렘도 있었고, 기대도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 어느 것과도 겹치지 않았다.조급하지 않았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다.민영은 이불을 걷고 천천히 일어났다.세면대 앞에 서서 얼굴에 물을 적실 때,차가운 감각이 생각을 현재로 끌어당겼다.거울 속의 얼굴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지만,눈동자에는 전날보다 조금 더 깊은 색이 머물러 있었다.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며 민영은 문득 어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문 앞에 남아 있던 그의 모습.붙잡지 않고, 돌아서지 않았던 태도.‘다가오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유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야.’그 문장이 마음속에서 조용히 정리되었다.회사로 향하는 길은 익숙했다.그러나 오늘의 민영은 그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결을 느끼고 있었다.불안이 아닌 기대, 설렘이 아닌 안정.회사 로비에 들어섰을 때, 민영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폈다.어디에선가 그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하지만 그 예감이 실현되지 않아도 실망은 없었다.보고 싶다는 감정이 기다림이 되지 않는 상태.그건 지금의 마음이 꽤 건강하다는 증거였다.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시작하자 시간은 차분하게 흘렀다.민영은 문서를 읽고, 수정하고, 필요한 메모를 남기며자신이 일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그때 메신저 알림이 짧게 울렸다.’-오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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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같은 쪽으로 기울 때

엘리베이터 안은 잠시 정지된 공간처럼 느껴졌다.문이 닫히고, 가벼운 진동이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숫자가 하나씩 바뀌는 동안 민영은 손에 쥔 가방 끈을 괜히 한 번 더 쥐었다 풀었다.말이 없었다.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오히려 서로의 호흡이 같은 속도로 가라앉고 있다는 확인에 가까웠다.‘이건 기다림이 아니라 정렬이야.’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자리를 잡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식당 쪽으로 사람들이 흘러나갔다.민영과 최강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섞였다.누군가 앞을 가로막아도 속도가 흔들리지 않았고,잠시 멈춰도 불안하지 않았다.식당 안은 점심시간 특유의 소음으로 가득했다.그럼에도 민영의 귀에는 그 소리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흐릿했다.의식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자리에 앉고, 식판을 내려놓고,수저를 집는 일련의 동작이 습관처럼 이어졌다.그 사이 최강이 말을 꺼냈다.“…오늘은 괜찮아 보이십니다.”그 문장은 안부이면서도 관찰이었다.민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작게 웃었다.“네.”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이상할 정도로요.”“이상하다는 건”“불안하지 않다는 뜻이에요.”민영은 숟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무슨 일이 당장 생기지 않아도, 괜히 미리 걱정하지 않는 상태.”최강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그 상태는 지켜야 합니다.”그 말에 민영은 그를 바라봤다.지켜야 한다는 표현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이유그가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대리님은”민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그 질문은 장난도, 확인도 아니었다.서로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려는 조용한 시도.최강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생각을 정리하는 아주 짧은 시간.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같은 쪽입니다.”“같은 쪽”“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그는 민영을 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정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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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화. 아직 닿지 않은 말

밤으로 넘어가는 길은 낮보다 조금 더 솔직했다.차들이 지나가며 남긴 소음은 빠르게 흩어졌고,가로등 아래에서는 발걸음 소리만 또렷하게 남았다.민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심장이 어떤 리듬으로 뛰고 있는지 조용히 가늠했다.빠르지 않았다.그렇다고 멈춰 있지도 않았다.지금의 박동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웠다.둘은 어제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지만, 공기는 분명히 달랐다.말이 조금 더 적어졌고, 그만큼 시선과 호흡이 많은 것을 대신하고 있었다.민영은 그 미묘한 변화가 불안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정 사원님.”최강이 낮게 불렀다.“네.”“혹시”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멈춤은 망설임이었지만, 두려움은 아니었다.“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민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정리되지 않은 채로 말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기 때문이다.“…이상한 생각이요.”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예전에는 고백이라는 말이 늘 끝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시작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최강은 그 말에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관심의 표시였지만 재촉은 없었다.“끝이라고 느낄 때는”그가 말했다.“그 뒤를 생각하지 않을 때입니다.”“그럼 지금은요.”“지금은 그 뒤가 보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민영은 그 대답이 너무 정확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정답처럼 들렸지만,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둘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민영은 자신의 손이 어디쯤에 있는지 느껴보았다.가방 끈을 잡고 있었고, 그 손은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만약 지금 손을 뻗는다면 그 가능성이 스치듯 지나갔지만,그녀는그 생각을 붙잡지 않았다.‘아직은 이 거리면 충분해.’그 생각이 스스로를 안심시켰다.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민영은 걸음을 늦췄다.이제 각자의 방향으로 나뉘어야 할 지점.늘 그렇듯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었겠지만, 그 아쉬움조차 불편하지 않았다.“…오늘,”민영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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