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의 딸은 모쏠입니다.: Chapter 201 - Chapter 210

211 Chapters

201화. 말보다 먼저 닿은 온기

오후의 빛은 회의실 블라인드를 지나 가늘게 갈라져 들어왔다.민영은 그 빛의 끝이 테이블 위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말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온기는 벌써 도착해 있다는 것을.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서류를 들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문이 닫히고, 의자 소리가 멎자 공기는 조금 느슨해졌다. 민영은 정리된 자료를 가방에 넣으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지금 이 호흡이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고마웠다.복도로 나왔을 때 최강은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그런데도 민영은 그의 부재를 공백으로 느끼지 않았다.어제의 말, 오늘의 눈빛, 아주 짧은 고개 끄덕임들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지금의 공기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람은 이렇게 곁에 없을 때도 곁에 있을 수 있구나.’그 깨달음은 마음을 한층 더 차분하게 만들었다.자리에 돌아와 업무를 이어가던 중, 민영은 문득 손이 조금 차가워졌다는 걸 느꼈다.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손을 모아 천천히 비볐다.그때 옆자리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정 사원님.”고개를 들자 최강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아까와는 달리 조금 더 가까운 거리. 그러나 여전히 선을 넘지는 않았다.“손이 차가워 보입니다.”그 말은 관찰이었고, 배려였다.민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조금요.”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최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자신의 머그컵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김이 아직 남아 있는 컵. 그가 가볍게 밀어 민영 쪽으로 가까이 두었다.“따뜻합니다.”그는 짧게 말했다.민영은 그 행동을 한참 바라보다가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천천히 몸 안으로 번져 들어왔다.그 순간,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아래에서 부드럽게 풀렸다.“…감사합니다.”“말씀 마십시오.”그는 담담하게 답했다.“필요해 보여서 한 겁니다.”그 말에는 의미를 더 얹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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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마음이 먼저 고개를 끄덕일 때

오후의 시간은 의외로 빨리 지나갔다.점심 이후의 공기는 늘 조금 느슨해지기 마련인데, 민영은 그 느슨함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붙잡으려 애쓴 것도 아니었다.그저 지금의 리듬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서류를 덮는 손끝이 자연스럽게 멈추고, 다시 이어졌다.집중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정렬의 결과처럼 느껴졌다.마음이 제자리에 앉아 있으면 생각은 굳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일을 해낸다는 걸 민영은 요즘에서야 체감하고 있었다.복도 건너편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민영은 그 소리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누군가의 하루가 자신의 하루와 겹치지 않아도 괜찮아진 상태였다.문득 모니터 화면이 살짝 흐려 보였다.민영은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하늘은 아직 밝았고, 그 밝음은 끝을 향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끝이 있다는 건 지금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그 생각은 일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오히려 지금의 시간을 조금 더 정확하게 붙잡게 만들었다.퇴근 시간이 다가왔을 때, 민영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자리를 정리했다.일이 남아서가 아니라,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오늘은 기다림도 선택이 될 수 있는 날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췄을 때,민영은 자신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다만 어디에 서 있는지가 익숙해졌는지 확인하는 시선.“정 사원님.”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민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최강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오늘도 급하지 않은 걸음.그 속도는 민영의 발걸음과 자연스럽게 맞아 있었다.“퇴근하십니까.”“네.”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대리님도요?”“같은 생각이었습니다.”그 짧은 대답이 묘하게 안정적이었다.같이 내려간다는 말도, 따로 간다는 말도 굳이 붙지 않았다.그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남았다.엘리베이터 안에서 둘은 나란히 섰다.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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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아직 부르지 않은 이름이 머무는 자리

아침은 예상보다 느리게 왔다.창밖의 빛이 단번에 방을 밝히지 않고,커튼 사이를 망설이듯 조금씩 밀어내며 들어왔기 때문이다.민영은 눈을 뜬 채로 한동안 그 빛을 바라보았다.어제의 고요가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곧바로 따라오지 않았다.게으름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를 조금 더 느끼고 싶다는 선택에 가까웠다.이불을 걷어내며 민영은 발끝으로 바닥의 온도를 확인했다.차갑지도, 낯설지도 않았다.‘오늘도 괜찮겠지.’그 문장은 다짐이 아니라 확인처럼 마음에 놓였다.세면대 앞에서 물로 얼굴을 씻으며 민영은 거울을 보았다.눈빛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안쪽을 향해 있었다.스스로에게 묻지 않아도 되는 상태.그게 무엇인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출근길의 공기는 어제보다 조금 더 맑았다.민영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가방 끈을 어깨에 다시 올리며 자신의 자세를 고쳐 잡았다.급하게 정렬할 필요는 없었다.이미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회사 로비에 들어섰을 때, 민영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멈췄다.습관처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제처럼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상태.그 균형이 오늘의 민영을 편안하게 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민영은 한 걸음 뒤에서 같은 방향으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다.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최강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민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네. 오늘은 조금 밝네요.”“그렇습니까.”그는 민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제보다 편안해 보이십니다.”그 말에는 비교가 있었지만, 평가나 판단은 없었다.민영은 그 차이를 분명히 느꼈다.“잠을 잘 잤어요.”“다행입니다.”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둘은 나란히 서 있었다.어깨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그러나 그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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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흔들림이 머무는 방향

회의실 문이 닫힌 뒤에도 공기는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사람들이 남긴 말의 잔향과 의자의 미세한 마찰음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공간 안쪽에 묘한 여백을 만들고 있었다.민영은 노트북을 덮은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회의 내용이 정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급하게 넘기고 싶지 않아서였다.조금 전 복도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이 속도로 가도 괜찮다.’그 말은 허락처럼 들리지 않았다.함께 확인한 방향에 가까웠다.그래서 민영은 그 문장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만든다는 걸 느꼈다.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재개하려던 순간,모니터 화면 위로 새 메신저 알림이 천천히 떠올랐다.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는 데 민영은 아주 짧은 시간 시선을 멈췄다.‘강산.’그 이름은 요즘 들어 자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 왔던 이름이었다.의식적으로 피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생활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존재.‘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문장은 정중했고, 어디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 무채색 같은 말투가 오히려 민영을 조금 긴장하게 했다.민영은 답장을 바로 보내지 않았다.그 대신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강산과의 대화는 늘 정보와 계산이 섞여 있었다.그래서 그의 연락은 로맨스와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동반하곤 했다.피할 이유는 없어.그녀는 속으로 정리했다.지금의 자신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다.그래서 짧게 답장을 보냈다.‘네. 잠깐이면 괜찮아요.’잠시 후 강산은 법무팀 층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 주변을 한 번 훑는 관찰의 시선. 그 눈빛이 민영을 향해 멈췄을 때,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회의 끝나신 것 같아서요.”“네.”민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무슨 일이세요.”강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복도 창가 쪽으로 몇 걸음 옮긴 뒤, 밖을 한 번 바라보고서야 입을 열었다.“요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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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선택

저녁의 공기는 낮보다 조금 더 솔직했다.사람들의 발걸음이 집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정렬되고, 거리의 소음도 불필요한 장식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시간.민영은 그 흐름 속에 섞여 자신의 걸음을 천천히 맞추고 있었다.오늘은 어제보다 말이 더 적었다.그러나 말이 줄어든 자리에 빈칸이 남지는 않았다.오히려 그 빈자리를 서로의 호흡이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었다.최강은 민영의 반 걸음 앞에서 같은 속도로 걸었다.앞선 것도 아니고, 끌고 가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같이 이동하는 사람의 자세였다.민영은 그 등선에서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다.기댈 필요가 없어서 더 든든한 종류의 안정.“정 사원님.”그가 조용히 불렀다.목소리는 늘 그렇듯 낮았고, 불필요한 힘이 없었다.“네.”“오늘 많이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질문은 단순했다.그러나 그 단순함이 민영의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괜찮다고 말해도 되는 질문이었고,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물음이었다.“괜찮아요.”민영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몸보다 머리가 정리된 느낌이에요.”최강은 그 대답을 곧바로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은 잘 지나간 겁니다.”그 말에는 평가가 없었다.하루를 점수로 환산하지 않는 사람의 언어였다.민영은 그 태도가 왜 이렇게 자주 마음에 남는지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결과보다 상태를 묻는 사람이구나.집 근처에 다다르자 민영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의식한 건 아니었지만,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챈 듯했다.최강도 그 속도를 자연스럽게 맞췄다.“정 사원님.”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아직 말이 되지 않은 선택이 있으십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놀라서가 아니라, 정확히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네.”그녀는 천천히 말했다.“있어요.”“그 선택은 급합니까.”“아니요.”민영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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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빗장 없는 마음의 방향

아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분명했다.커튼을 밀어내는 빛이 망설이지 않았고,방 안의 공기도 밤의 잔여를 깔끔하게 걷어낸 얼굴이었다.민영은 눈을 뜬 채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서두르지 않아도 하루는 자기 속도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며 민영은 손목에 떨어지는 차가운 감각을 잠시 느꼈다.정신을 깨우기엔 충분했고, 어제의 고요를 지우기엔 과하지 않았다.거울 속의 자신은 단정했고, 어딘가 여유가 있었다.확신을 들고 나온 얼굴이라기보다, 확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얼굴에 가까웠다.출근길의 풍경은 늘 같았지만, 민영의 시선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사람들의 표정, 발걸음의 간격,정류장에 서 있는 침묵의 밀도까지 괜히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그것들은 자신의 하루를 방해하지 않았고,오히려 지금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 주는 배경처럼 느껴졌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로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회의가 많은 날 특유의 긴장도, 분주함도 아직 위로 올라가지 않은 시간.민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한 발짝 물러섰다.“정 사원님.”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민영은 고개를 돌려 최강을 보았다.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미세하게 밝아 보였다.“좋은 아침이에요.”“네.”민영은 미소로 답했다.“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회의 준비가 조금 있어서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둘은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오늘의 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웠다.의식하지 않아도 서로의 호흡이 겹치지 않는 위치.문이 닫히자, 민영은 자신의 손이 가방 끈을 가볍게 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그 손끝에서 긴장이 빠져나간다는 건,마음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였다.“…어제,”최강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잘 주무셨습니까.”“네.”민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덕분에요.”그 답에는 과장이 없었고, 부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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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숨이 먼저 맞닿는 거리

저녁 공기는 막 식기 시작한 도로의 열기를 아직 완전히 놓지 못한 채 천천히 흘렀다.민영은 그 공기 속을 걸으며 자신의 호흡이 아주 조금 바뀌어 있다는 걸 느꼈다.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누군가의 속도와 겹치기 쉬운 리듬.최강은 민영의 옆에서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어느 쪽이 먼저 맞췄다고 말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간격.그 거리 안에는 말이 없어도 충분한 정보가 오가고 있었다.“오늘” 민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게 내려앉았다.“조금 많이 걸은 것 같아요.”“그렇습니까.”최강은 짧게 대답했다.“그래도 속도가 무리하진 않았습니다.”민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속도를 무리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이상하게도 하루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요즘은”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걷는 게 예전보다 덜 어렵게 느껴져요.”“길이 바뀌었습니까.”“아니요.”민영은 고개를 저었다.“길은 그대로인데 제가 멈추지 않게 된 것 같아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해석하지 않았다.대신 몇 걸음 더 같이 걸은 뒤 낮게 말했다.“멈추지 않는다는 건 도망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민영은 그 문장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걸 느꼈다.예전의 자신은 결정을 미루며 자주 멈췄고, 멈춘 채로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곤 했다.지금은 그와 달랐다.완전히 들어서지 않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집 근처에 다다르자 가로등의 빛이 둘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민영은 그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았다.두 개의 선이 나란히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겹쳐 보이는 지점.그 지점이 괜히 눈에 남았다.“정 사원님.”최강이 조용히 불렀다.“네.”“오늘 강산 씨와 이야기하신 것.”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괜히 마음에 남아 있지는 않으십니까.”질문은 조심스러웠다.질투도, 확인도 아닌 상태를 묻는 순수한 물음.민영은 그 태도가 고마웠다.“…조금은요.”그녀는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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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새벽이 대답을 미루는 법

잠은 깊지 않았다.그렇다고 뒤척임으로 밤을 흩뜨린 것도 아니었다.민영은 눈을 감은 채 의식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떠다녔다.꿈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마치 새벽이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시간처럼.창밖에서는 아직 첫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시는 숨을 죽인 채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고,민영의 마음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무언가를 결론내려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대답을 미루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까.그 생각이 떠오르자, 민영은 오히려 안도했다.선택은 항상 즉각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왔던 자신에게이제야 조금의 여지를 허락하는 느낌이었다.이불 속에서 몸을 아주 조금 뒤척이며 민영은 어제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현관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말을 잇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짧은 정적.그 안에는 미완의 문장들이 수없이 쌓여 있었지만,그 문장들이 불완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말이 되기 전에도 의미는 이미 있었어.'그 사실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인지 심장은 괜히 조급해지지 않았다.조금 늦게 알아도 되는 답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민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빛이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커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침대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며 민영은 창가에 섰다.도시는 이제 막 호흡을 바꾸려는 중이었다.몇 개의 창에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들은 각자의 이유로 잠들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처럼 보였다.'어쩌면 그도 이 시간에 깨어 있을까.'그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지만, 민영은 그 상상을 붙잡지 않았다.지금의 감정은 상대의 행동으로 확인받지 않아도충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시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끌어당기며 민영은 몸을 옆으로 돌렸다.베개에 닿은 뺨이 조금 차가웠다.그 차가움은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머릿속을 정리해 주는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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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남겨진 말의 무게

복도로 돌아온 뒤에도 민영의 발걸음은 한동안 제 속도를 찾지 못했다.아까 강산과 나눈 대화가말 그대로 등 뒤에 남아 천천히 따라오는 느낌이었다.지나간 말인데, 이미 끝난 문장인데 그 무게만큼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어깨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도 화면 속 글자들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민영은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기보다는 방금 전의 선택이몸에 완전히 닿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말은 끝났는데 감정은 항상 조금 늦게 도착하네.그 생각이 스치자 민영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후회는 아니었다.다만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 방향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다시 한 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정 사원.”고개를 들자 최강이 책상 옆에 서 있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분한 표정.그러나 민영은 그의 시선이 아까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종류의 변화였다.“잠깐 괜찮으십니까.”민영은 의자를 밀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그는 굳이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그 선택 자체가 지금의 민영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대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까 강산 씨와 이야기하신 것 같습니다.”질문은 확인이 아니라 맥락을 잇기 위한 출발점 같았다.민영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정리해야 할 말이 있었어요.”“정리.”최강은 그 단어를 되풀이하지 않았다.그저 잠시 민영을 바라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이 오히려 민영을 편하게 만들었다.“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민영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 같았고,힘들었다고 말하기엔 지금의 마음이 그렇게 무너지지도 않았다.“…조금요.”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그래도 필요한 과정이었어요.”최강은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였다.설득도,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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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말보다 느린 확신

문이 닫힌 뒤에도 민영은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방금까지 같은 방향을 걸어오던 기척이 아직 문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 온기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민영은 그 사실이 조금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동시에 느꼈다.말로 붙잡지 않아도 남아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이제는 몸이 먼저 알아보고 있었다.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불을 켰을 때, 공간은 낯설지 않았다.늘 그래왔던 집인데도 오늘은 어딘가 조금 넓어 보였다.마음이 불필요한 짐을 하나 내려놓았을 때공간이 그렇게 느껴진다는 걸 민영은 예전엔 몰랐다.소파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정리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강산과 나눈 말들, 최강과 오간 시선들,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선택한 태도들.'나는 누군가를 밀어낸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정확한 자리에 놓았을 뿐이야.'그 생각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오히려 사실에 가까웠다.그래서 마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조용히 울렸다.이번에도 민영은 급하게 집어 들지 않았다.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천천히 화면을 켰다.-오늘 많이 무겁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짧은 문장. 부연도, 확인도 없는 말.그럼에도 그 안에는 민영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가 담겨 있었다.-괜찮아요. 오늘은 생각보다 잘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보내고 나서 민영은 잠시 휴대폰을 쥔 채 가만히 있었다.더 이어가도 되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그 선택지들 중에서 지금의 민영은 침묵을 택했다.그 침묵이 불안에서 오는 게 아니라 확신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창가로 가 커튼을 반쯤 열자 도시의 불빛이 조용히 거실 안으로 스며들었다.그 불빛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켜져 있을 텐데 그 수많은 이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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