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이별전문가! 신나리: Bab 91 - Bab 100

146 Bab

91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하루

윤서는 그가 떠난 첫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집 안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냉장고가 돌아가는 작은 진동음, 창밖의 차소리, 벽시계의 초침 소리까지 모두 익숙했지만, 오늘은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닿지 않았다. 공기가 달랐다.그가 남긴 온도가 빠져나간 집은 마치 진공 상태처럼 무겁고 고요했다.윤서는 커피를 끓이려다 멈췄다. 늘 두 잔이었는데, 습관처럼 포트를 더 채운 자신이 우스웠다.“아, 그렇지… 이제 한 잔이면 돼.”입속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너무 낯설었다.테이블 위에 혼자 남은 머그컵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그 안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점점 옅어지며 사라졌다.그녀는 식탁에 앉아 그가 남긴 메모를 또다시 읽었다. 글씨마다 숨결이 배어 있었다.‘조금 떨어져서, 다시 숨을 쉬고 싶어.’그 문장은 마치 자신이 쓴 것 같았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읽을 때마다 그 문장에 베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그녀는 천천히 손끝으로 종이를 접었다.얇은 종이 하나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그날 오후, 나는 윤서를 찾아갔다.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커튼은 닫혀 있었지만, 미세한 햇살이 틈 사이로 새어들었다.그 빛이 윤서의 머리카락에 닿으며 희미하게 흔들렸다.“오늘은 조금 괜찮아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괜찮아요. 그냥… 너무 조용해서 낯설어요.”“조용하다는 건, 이제 당신에게 시간이 생겼다는 뜻일지도 몰라요.”그녀는 그 말을 듣자 잠시 웃었지만, 그 웃음은 금세 부서졌다.“시간이 생겼는데, 쓸 데가 없어요. 그 사람이 없는 시간은 그냥… 텅 비었어요.”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그녀의 슬픔은 절제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래서 더 아팠다.그녀는 무너지는 대신, 버텼다.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차를 따르고, 웃고, 고개를 끄덕였지만그 모든 행동이 ‘살아 있는 연습’ 같았다.윤서의 집을 나서며, 나는 오래된 감정 하나가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온유가 내 곁에서 사라진 첫날, 나도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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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이제야 들리는 안녕

윤서는 며칠 동안 집을 나서지 않았다.문밖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하루는 정지된 사진처럼 고요했다.냉장고 안에는 마시다 남은 우유가 상했고, 신문은 문 앞에 쌓여 있었다.그녀는 그것들을 치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모든 게 아직 ‘그가 있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는 유일한 위로였다.그날 오후, 윤서는 결심하듯 장롱 문을 열었다.그의 셔츠들이 고르게 걸려 있었다.흰 셔츠, 네이비색 정장, 회색 니트…섬유유연제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옷깃을 손끝으로 만졌다.“당신은 떠났는데, 냄새는 남아 있네…”말끝이 부서지자 눈물이 따라 흘렀다.옷을 한 벌씩 꺼내 접던 그녀는 니트 사이에서 작은 휴대폰 녹음기를 발견했다.기억이 났다. 그가 종종 음악을 녹음하던 그 기기였다.“이게 왜 여기…”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원을 켰다.짧은 정적 후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윤서야, 오늘은 네가 출근하기 전에 커피를 내려봤어. 생각보다 어렵더라.근데 이상하게도, 네가 없는 부엌이 더 따뜻했어.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랬어.’윤서는 숨을 죽였다.기계음 뒤로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너무 생생했다.그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며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내가 널 사랑하는 방식이 네게는 벽처럼 느껴질 거란 걸 알았어.근데 멈출 수가 없었어. 그게 나니까.그래도 언젠가, 내가 먼저 손을 놓을 용기가 생기길 바랐어.’그녀는 녹음기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왜 이제서야 이런 걸…”목소리가 끊어질 듯 떨렸다.그의 진심은 떠난 뒤에야 들려왔다.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녹음기를 품에 안았다.이건 미움도 원망도 아닌 끝내 전하지 못한 ‘사랑의 잔향’이었다.그날 밤, 나는 윤서의 전화를 받았다.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지만, 그 안에 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나리 씨, 그 사람이 남긴 녹음이 있어요.”“녹음이요?”“네. 저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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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돌아가고 싶은 마음

윤서의 사건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며칠 동안 사무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늘 울리던 전화벨 소리도, 문을 두드리는 의뢰인의 발소리도 없었다.그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끝났다’는 단어의 공허함을 느꼈다.이별은 언제나 새로 시작되는 듯하지만, 끝나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건 텅 빈 침묵뿐이었다.그날 오후,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낯선 여자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차분한 듯하면서도, 불안한 기운이 가득한 눈빛이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어서 오세요. 신나리 상담실입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혹시, 헤어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되돌릴 수도 있나요?”그 한 문장이 공기를 흔들었다.나는 의자에 앉으며 시선을 맞췄다.“되돌린다는 건, 이미 끝난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뜻인가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는 이미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근데… 그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돼요.숨도, 일도, 사람도 다 무의미해졌어요.”그녀의 이름은 하린이었다.서른둘, 광고회사 디자이너. 이별한 지 석 달이 지났다고 했다.남자는 그녀와 6년을 함께한 연인이었다.“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 사람은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무서워졌어요.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평생이라는 단어가 너무 버겁게 느껴졌어요.”하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렇게 떠나보냈는데… 하루라도 그 사람 없는 세상이 익숙해지질 않아요.”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으세요?”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아니요. 그 사람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만남이 아니라 귀환이에요.”그 문장이 이상하게 내 가슴에 남았다.‘귀환’이라는 단어엔 미련보다 깊은 무게가 있었다.그건 다시 사랑을 시작하겠다는 뜻이 아니라,자신이 버린 마음을 되찾고 싶다는 절박함이었다.그날 밤,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아 하린의 프로필을 정리했다.그녀의 연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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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되돌릴 수 없는 온도

하린은 다시 도윤을 만난 뒤로,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정해졌다.그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속에 담긴 무언의 거리감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분명 서로를 그리워했는데, 막상 다시 마주하자 모든 것이 낯설었다.익숙해야 할 손끝이 어색했고,한때 웃으며 걷던 길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알 수 없었다.그날 밤, 하린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리 씨… 우리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상해요.”“이상하다니요?”“그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달라졌어요.예전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게 편했는데, 지금은 너무 조심스러워요.그 사람의 숨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쓰여요. 내가 실수라도 할까 봐.”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이건 후회의 끝자락이 아니라, 되돌린 관계가 만들어낸 새로운 두려움이었다.“혹시, 그를 잃을까 봐 겁나서요?”“네. 이번엔 정말로 그가 나를 떠나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아요.”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되돌림의 사랑은 언제나 더 아프다.사랑이 끝난 뒤에는 둘 다 변하기 때문이다.그때의 온도, 그때의 눈빛, 그때의 말투. 시간은 그것들을 조금씩 빼앗아간다.그래서 다시 만나도 그때의 사랑을 ‘다시 느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칠 뒤, 나는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하린은 미소를 지으려 애썼고, 도윤은 여전히 말이 적었다.나는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봤다.“요즘은 어때?” 도윤이 먼저 물었다.“그냥… 잘 지내. 회사는 바쁘고, 밤엔 잠이 잘 안 와.”“예전엔 피곤하면 잘 자던 사람이었잖아.”하린이 작게 웃었다.“그땐 당신이 옆에 있었으니까.”그 말에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지금도 옆에 있잖아.”“같은 자리지만, 느낌은 달라.”“그건… 네가 달라졌다는 뜻이겠지.”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대화하고 있었다.현재의 서로를 보기보다,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하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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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나를 붙잡는 이름

그날 새벽,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깼다.밖은 고요했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휴대폰 화면을 켜니 새벽 네 시.도시가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시간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렸다.마치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기분이었다.책상 위에 올려둔 작은 녹음기가 눈에 들어왔다.윤서가 남기고 간 그 기계.그 안엔 아직도 남편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며칠째 켜지 않았지만, 나는 이유 모를 충동에 전원을 눌렀다.“윤서야, 혹시 내가 없어도 괜찮다면… 그땐 웃어줘.”그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숨소리, 말끝의 떨림, 그리고 조용한 공백까지.나는 녹음기를 품에 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 말이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온유야, 나도 이제 괜찮을까?’그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그 이름 하나가, 아직도 나를 붙잡고 있었다.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아침이 밝자마자 제하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커피 향이 함께 들어왔다.그는 늘 그랬듯 나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했다.“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내가 묻자 그는 무심히 대답했다.“너한테 커피 빚이 있어서.”나는 피식 웃었다.“언제 그런 빚이 생겼는데?”“언제나. 너는 사람의 마음을 대신 정리해주면서, 정작 네 마음은 아무도 대신 정리 못 하잖아.”그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속엔 날카로운 진심이 있었다.“제하야, 가끔은 네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아.”“그게 내 장점이자, 단점이지.”그는 웃으며 커피잔을 내밀었다.“오늘은 내가 상담받을 차례야. 의뢰인은 나.”나는 놀라며 물었다.“무슨 말이야?”“이별을 정리하고 싶거든.”그 한마디가 공기를 멈추게 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우리는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상처투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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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이별은 다시 살라는 허락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흐렸다.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린 오후, 도시는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사무실 창가에 앉아 있는 제하의 뒷모습이 묘하게 낯설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노트를 넘기고 있었지만, 그 손끝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느렸다.책상 위엔 나와 찍은 사진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며칠 전, 함께 찍은 그 사진.웃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내 웃음이 어딘가 슬펐다.“나리.”그가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묘하게 다정했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왜?”“혹시 오늘, 시간 돼?”“응, 아마… 될 거야.”“그럼 저녁에 같이 가자. 보여줄 게 있어.”그가 보여주고 싶다는 게 뭘까.괜히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그는 예고 없이 내 일상을 흔드는 사람이라,늘 그 한마디가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리곤 했다.늦은 저녁, 그는 내게 주소 하나를 보냈다.낡은 골목길 끝, 작은 카페였다.문을 열자 낯익은 향기가 스쳤다.그건, 오래전에 온유가 좋아하던 커피 향과 같았다.“여기, 예전에 네가 자주 왔던 곳이라며.”제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어떻게 알았어?”그는 웃지 않았다.“온유 형한테 들었어. 예전에.”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온유를… 알았다고?”“응. 몰랐지? 형은 내 선배였어. 내가 이 일 시작하기 전, 그와 같은 팀이었어.”공기가 멈췄다.손끝이 떨렸고, 의자에 앉아있던 다리가 서서히 힘을 잃었다.“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그땐 말할 수 없었어. 너한테는 그 이름이 아직 너무 아팠으니까.”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온유 형은… 네 얘기를 자주 했어.그는 늘 네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섬세하게 본다고 했지.그러면서도 네가 자신한테만은 솔직하지 않다고.”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그럼, 그날도… 네가 같이 있었던 거야?”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그래. 그날 사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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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다시, 살아가는 일

그날 이후, 나는 오랜만에 사무실의 불을 환하게 켰다.책상 위엔 의뢰인들의 서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커피 잔에는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그동안 일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마음이 늘 비어 있었다.누군가의 사랑을 대신 정리해주면서도, 내 안의 감정은 늘 멈춰 있었다.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나리 씨.”수경의 목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깨웠다.그녀는 늘 그렇듯 밝은 색 블라우스를 입고, 고개를 기울이며 내 책상을 살짝 엿봤다.“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그래 보여?”“네. 요즘엔 웃을 때 눈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어요.”그녀의 말에 잠시 웃음이 났다.예전 같았으면 그 말이 가식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는, 누군가 내 표정을 알아봐주는 일이 그저 고마웠다.나는 커피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요즘은 어때? 지난번 일은 잘 정리됐어?”“네. 나리 씨 덕분에요.”수경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나리 씨는, 이별 후에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 믿어요?”그 질문이 순간 공기를 멈추게 했다.나는 잔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그리고 천천히 말했다.“사랑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다만 모양이 바뀌는 거야.사람을 잃으면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그 사람을 통해 배운 온기가 다른 곳에 남는 거지.”수경은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떤 망설임 같은 게 어렸다.“그럼… 그런 온기를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도 있을까요?”“그건 네가 아직 다 식지 않았다는 뜻이야.”“식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이미 식었어요.”그녀의 웃음은 슬펐지만 단단했다.“그래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예요.사람 마음은 결국, 더 사랑하려고 다시 뛰니까.”그날 오후, 제하가 나를 불렀다.“이거 봐.”그가 내민 태블릿 화면엔 새로 들어온 의뢰서가 떠 있었다.제목은 짧고, 문장은 서툴렀다.“그를 떠나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도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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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엇갈린 주소로 도착한 안녕

며칠 동안 비가 그칠 줄 몰랐다.도시는 늘 젖어 있었고, 그 젖은 공기 속엔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유리창에 비친 회색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이별이란 건, 어쩌면 이런 날씨 같다.그치지 않지만 언젠가 희미하게 멎어 있는 것처럼,눈치채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는 시간 속의 슬픔.그날 오후, 도연이 다시 찾아왔다.그녀의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폴더폰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그걸 내 앞에 조심스레 올려두며 말했다.“이거, 그 사람이 두고 간 거예요.”“그 사람이라면, 전에 말씀하신…?”“네. 사라졌던 남자요. 며칠 전, 그가 남긴 박스를 우연히 받았어요.택배엔 발신인 이름도 없었는데, 안에는 이 폰이 있었어요.”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나는 조용히 폰을 집어 들었다.옛날 모델이라,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였다.도연이 낮게 속삭였다.“그 안에 녹음 파일이 하나 있어요. 그걸 들으면… 왜 떠났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삐’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도연아, 이건 아마 마지막일지도 몰라.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하지만 너한테 상처 주지 않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지만, 어딘가 익숙했다.나는 숨을 멈추었다.도연이 내 눈빛을 보고 물었다.“알겠어요? 이 목소리… 나리 씨, 어디서 들어본 적 있나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 안이 말라붙었다.그 남자의 목소리는 아무나 명확하게 기억나는 사람이었다.그의 말투, 문장의 끝에서 살짝 멈추는 호흡,그건… 온유의 목소리였다.“그럴 리가…”내 손에서 폰이 미끄러질 뻔했다.도연이 놀라며 손을 뻗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랐어요.”“왜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폰을 다시 쥐었다.심장이 두근거렸다. 녹음은 계속 이어졌다.“내가 아픈 걸 말하지 않은 건, 네 탓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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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봄의 문턱에서

봄은 너무 조용히 왔다.한동안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마른 공기 사이로 꽃냄새가 스며들었다.어느새 거리의 가로수는 연둣빛으로 물들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하지만 이상하게, 계절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내 마음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었다.몸은 따뜻해졌는데, 마음의 한가운데엔 여전히 차가운 구멍이 남아 있었다.사무실 창가에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을 바라보다가, 나는 불현듯 생각했다.나는 이제 온유를 완전히 떠나보냈다.그런데 그를 놓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또다시 깨어났다.그건 슬픔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나리 씨.”뒤에서 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는 늘 그렇듯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오늘은 좀 쉬어. 요즘 며칠째 밤늦게까지 일하잖아.”“괜찮아. 일이 많아서 그래.”“일도 좋지만, 이제는 네 자신을 돌봐야 할 때야.”나는 커피를 내려주며 그를 바라봤다.제하는 봄빛을 닮은 사람이었다.어떤 날엔 너무 따뜻해서 숨이 막히고,어떤 날엔 조용해서 더 그리워지는 그런 온도.“제하야.”“응?”“나… 요즘 이상하게,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거, 좋은 증상 아니야?”“좋은데… 무서워.”“무서운 이유가 뭔데?”“다시 잃을까 봐.”그는 내 손에서 커피잔을 조심스레 빼앗으며 낮게 웃었다.“그럼 잃지 않으면 되잖아.”“사람이 어떻게 그래?”“잃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거야.”그의 말이, 봄바람처럼 천천히 가슴 안으로 스며들었다.며칠 후,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다.메일의 제목은 간단했다.[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의 이야기]내용을 읽는 동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사연의 첫 문장은 이랬다.“그를 너무 사랑했는데, 이제는 내가 더 이상 그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아요.”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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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사랑은 밑그림이 되어

그날 밤, 하늘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별빛이 또렷하게 내려앉은 도심의 공기는 차분했고,나는 제하와 함께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그의 발소리가 내 옆에서 일정한 박자로 맞춰졌다.이상하게 그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그와 함께 걷는 이 평범한 순간이 마치 아주 오래 기다려온 어떤 ‘평화’ 같았다.“오늘은 조용하네.”그가 말했다.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요즘은 이런 밤이 좋아. 누군가랑 걷기만 해도 마음이 덜 외로워지니까.”“그럼, 나한테 고마워해야겠네.”“고마워.”“진심이야?”“응.”“그럼 나한테 밥 한 끼 사줘.”“또?”“또지. 나는 사람보다 밥으로 기억되는 타입이거든.”둘 다 웃었다.그 웃음 사이에, 묘한 온기가 스며들었다.그건 오랜 세월이 만들어주는 익숙함이 아니라, 두려움을 넘어선 따뜻함이었다.나는 문득 물었다.“제하야, 넌 왜 나한테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었어?솔직히, 나 같은 사람한테는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건 네가 혼자서도 강한 척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외로워서야.”“…….”“난 그걸 알아버렸거든. 그래서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어.”그의 말은 잔잔했지만, 내 안을 단번에 파고들었다.그 순간, 한동안 숨겨두었던 눈물이 조용히 밀려왔다.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나, 아직 완전히 괜찮진 않아.”“괜찮아. 괜찮아지는 건 시간이 하는 일이야.나는 그냥 그 시간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고.”그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온유의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상하게 그 기억은 더 이상 나를 묶지 않았다.이제 그리움은 아픔이 아니라, 그저 한 장의 사진처럼 마음속에 자리했다.며칠 후,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안녕하세요. 이별 상담 맞죠?”낯선 목소리였다.고개를 들자,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단정한 정장 차림에, 낯익은 눈빛. 그런데 어딘가 익숙했다.“앉으세요.”그가 고개를 숙이며 앉았다.“저는… 이현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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