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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71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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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눈을 감고 마주한 진실

방 안의 공기는 이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듯 낯설게 떨리고 있었다.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었고, 균열은 문이라는 형체를 갖추며 검고 은빛의 섞인 빛을 쏟아냈다. 그 빛 속에서 나는 여전히 한 손에 열쇠를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부러질 듯 경직되어 있었고, 심장은 단순한 박동이 아니라 내 몸을 찢어버릴 듯한 굉음을 만들어냈다.나는 속으로 수십 번 외쳤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이 빛이, 이 틈이 나를 집어삼켜버릴 거야.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게 너무 두려웠다. 열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열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기다린다는 공포가 동시에 뼈 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균열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온유의 목소리였다. 낮게, 그러나 분명히 내 이름을 불렀다.“나리… 이제 그만 고생해. 날 기다리는 시간도, 눈물도… 다 끝낼 수 있어. 문만 열면 돼.”목소리에 따라 균열의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바람은 따뜻하고도 차가웠다. 귀를 스치는 순간엔 포근했지만, 피부에 닿을 때마다 얼음처럼 나를 묶었다. 온유의 목소리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를 불렀다. '정말 네가 맞니? 정말 네가 거기 있는 거니?'그러나 그 달콤한 유혹은 곧 다른 현실의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제하가 내 손목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는 마치 내가 잊고 있던 생의 무게를 일깨우듯 뜨겁고 진득했다.“나리, 제발 정신 차려! 그 목소리는 네 기억을 파고들어 만든 거야. 네가 원했던 얼굴, 네가 기다린 사랑… 그걸 이용하는 거라고! 문을 열면 너는 네가 아니게 돼!”나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 속에는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의 처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분노와 두려움, 애정이 뒤엉킨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내 흔들리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수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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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닫히는 순간, 끊어진 속삭임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을 때, 귓가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소용돌이쳤다. 하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의 언어, 다른 하나는 지금 내 곁에서 절규하는 현실의 외침이었다. 손바닥에 쥔 열쇠는 뜨거워서 도저히 잡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올랐지만,나는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이 열쇠를 놓아버리면 내 선택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속으로 외쳤다. 온유, 정말 네가 맞다면… 왜 이렇게 잔인하게 날 시험해? 왜 네 목소리로 나를 끌어들이는 거야?'하지만 균열 너머의 목소리는 대답 대신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나리, 이제 그만. 넌 너무 지쳤잖아. 날 사랑한다면, 이제 와. 더 이상 혼자 울지 않아도 돼.” 그 순간 균열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이 방 안을 완전히 삼켰다. 눈꺼풀을 닫고 있어도 빛이 시야를 뚫고 들어와 눈물이 흘러내렸다.나는 눈을 번쩍 뜨며 열쇠를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심장이 쪼개질 듯 뛰고, 온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열쇠를 균열 쪽이 아닌, 내 몸 반대편으로 세게 꺾었다. 마치 무언가를 닫는 듯, 열쇠는 내 손 안에서 둔탁하게 돌아갔다.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운 빛이 일순간에 꺼지듯 사라졌다. 균열은 금속이 부서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흔들리던 벽이 서서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고, 그림자 손은 내 손목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흩어졌다. 온유의 목소리도, 그 따스한 속삭임도, 마치 수십 겹의 장막 뒤로 밀려나듯 사라졌다.나는 무릎을 꿇으며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귓가에는 더 이상 달콤한 유혹이 남지 않았고, 오직 내 선택의 무게만이 잔인하게 가슴을 눌렀다.“나리!”제하가 나를 부둥켜안으며 숨을 고르지 못하는 나를 붙잡았다. 그의 품은 뜨거웠다. 마치 내가 진짜 살아 돌아왔음을 확인시키듯, 그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나… 나 닫았어. 그 문을, 내가 직접 닫았어…”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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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내가 닫은 것은 사랑이었을까

균열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방 안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가슴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듯 불규칙하게 요동쳤고, 목울대는 갈증에 메말라 몇 번을 삼켜도 건조했다. 창문으로 스며든 새벽빛이 천천히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밝음마저 차갑게만 느껴졌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 남은 열쇠는 고요했지만,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제하는 내 옆에 앉아 있었고, 그의 어깨에 기대자 심장의 박동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손끝으로 내 손을 감싸며 가만히 있었다. 그 단단한 온기가 균열 너머의 차가운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지워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눈가에 깊게 드리운 그림자와 입술의 굳은 선이 그가 얼마나 두려움과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제하…”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낮게 울렸다.그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더는 꺼내지 못할 말들이 가슴에 고여 버렸다.“괜찮아질 거야.” 그가 낮게 속삭였다.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균열의 빛이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 그 문은 닫혔지만, 언제든 다시 열리려는 기척이 내 손안의 열쇠에서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는데.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수경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앉아 있던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등으로 뺨을 훔친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저… 아까 언니가 무릎 꿇은 채 열쇠를 쥐고 있을 때, 진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언니가 그 문 안으로 사라질까 봐, 제가 아무리 붙잡아도 끌려갈까 봐…”나는 수경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울음은 더 이상 단순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내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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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새 의뢰, 흔들리는 숨

문을 닫은 뒤 첫 아침, 창문을 여니 서늘한 공기가 방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스치며 내려가는데도 속은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밤새 잠깐씩 눈을 붙였지만 금세 깨곤 했다. 꿈에서 균열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았지만, 손바닥 속 열쇠는 은은한 진동으로 존재를 알렸다. 둔탁한 박동. 그건 내 심장과 다른 리듬으로 뛰었다.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뜨거움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닫았다고 끝난 게 아니야. '다짐처럼, 경고처럼 되뇌며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볼을 타고 내릴 때, 거울 속 내 눈동자는 오랫동안 울고 난 사람의 그것처럼 붉었다.거실로 나오니 제하는 이미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챙기지 못한 컵들이 설거지통에 겹겹이 쌓여 있었고, 수경은 소파 팔걸이에 앉아 이불을 끌어안은 채 졸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이불을 고쳐 덮어주자 그녀가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언니… 가지 마요.” 나는 이마에 떨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낮게 대답했다. “안 가. 어디에도.” 말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 자신에게도 붙들어매는 주문이 되었다.아침을 간단히 넘기고 일을 위한 노트를 펼쳤다. 손놀림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오래 비워 둔 서랍처럼 덜컹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한 번 꺼려지듯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혹시… ‘이별을 덜 아프게’ 해주는 곳 맞나요?” 맑은데 갈라진 여자 목소리. 나보다 조금 어릴까. “맞습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사연을 들려주세요.”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도연”이라고 소개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 저보다 두 살 많고, 오래 만나진 않았지만… 참 좋은 사람이에요.” 좋다는 형용사가 입술에 매달린 채 녹지 않고 흔들렸다. 그 뒤를 밟아 나온 문장이 곧바로 얼굴을 바꿨다. “그런데 아버지 사업이 무너졌어요. 보증도, 채무도…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고 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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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심장과 같은 박자로 뛰는 열쇠

그가 대답 대신 종이컵을 내밀었다. 뜨거운 김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잠깐, 어젯밤 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시간이 저만치 물러났다. 현실은 이렇게 무겁고 뜨겁고, 입술에 닿으면 쓴 향으로 확실하게 남는다.저녁 무렵, 도연과 그의 약혼자. 이름은 태수를 함께 만났다. 그가 카페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버릇,의자 다리를 끄는 소리를 줄이는 습관, 앉기 전 먼저 도연에게 “춥지 않아?” 하고 묻는 말투. 내 노트에 펜촉이 잠깐 머뭇거렸다. 한결같음. 도연이 말했던 단어가 그의 몸짓마다 묻어 있었다.“상담이라고 해서 왔습니다만,” 그는 단정히 미소 지었다.“사실 결혼은 우리의 문제지, 제3자가 끼어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를 말할 때 그는 도연을 향해 기울었다.그 기울기가 다정해서 더 조심스럽게 질문을 골랐다. “좋아하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내일도 ‘우리’일까요? 오늘과 아주 다른 내일에, 여전히 ‘우리’가 있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정리해보려는 거예요.”도연이 준비해온 메모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그녀는 내 눈을 한 번, 태수의 눈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준비한 말 대신, 자신의 목소리로.“태수야.” 그의 이름이, 연습한 문장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나는 네가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무서워.” 태수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도연은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하는 ‘우리’가 아름다워서, 그 말 안에 내가 작아지는 게 무서워. 아버지의 빚이 네 어깨로 넘어오고, 나의 불안도 너의 덕목 아래 숨게 될까 봐… 우리라는 말 아래, 내가 사라질까 봐.”잠시, 설탕 한 알이 물에 녹듯 침묵이 퍼졌다. 태수의 손등이 움찔했다.“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네게 또 다른 무게면… 난 무엇을 내려놔야 할까.” 그의 질문은 방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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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놓이는 쪽의 이별

아침부터 창밖은 흐릿하게 젖어 있었다. 빗방울은 가늘고 잔잔했지만, 유리창 위에서 미세한 줄기를 만들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커피 향이 아직 퍼지지 않은 사무실은 적막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아둔 열쇠를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툭 밀었다. 어제보다 더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여전히 심장과 닮은 리듬이 미세하게 전해졌다. 오늘은 새로운 의뢰인, 남자. 그 사실이 어제부터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여성만 받는다’는 철칙을 스스로 깬다는 불편함과, ‘놓이는 쪽’이라는 단어가 남긴 여운이 자꾸만 뒤엉켰다.제하는 이른 아침부터 서류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단정한 셔츠에 걸친 재킷의 주름이 반듯했다.그는 내 눈치를 보듯 잠시 멈추더니 짧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옆에서 끝까지 있을 거야.”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답 대신 긴 한숨이 흘렀다. 어쩌면 내 안에서도 오늘은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약한 고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수경은 다소 늦게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스스한 머리와 짙은 다크서클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내 눈을 보자마자 반쯤 농담처럼 물었다. “오늘은 남자라면서요? 언니, 진짜 괜찮아요? 언니 철칙 어기는 거 처음 보네.” 말끝은 가볍게 흘렸지만 눈빛은 묘하게 진지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끔은 예외도 필요해. 그냥 느낌이 그랬어. 흘려들어선 안 될 의뢰 같았어.”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내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가 자리에 앉았다.의뢰 장소는 강남의 오래된 다방 같은 카페였다. 새로 생긴 체인점과 달리 낡은 간판, 짙은 커튼, 구식 소파가 이질적인 아늑함을 풍겼다. 그곳 한쪽 구석에 그가 앉아 있었다. 중년 즈음, 단정한 셔츠와 올곧은 자세, 그러나 눈빛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목례했다.“신나리 씨.”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끝자락이 미묘하게 흔들렸다.나는 조용히 맞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제하는 내 맞은편, 수경은 조금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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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이별이 남긴 마지막 품격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은 지 하루가 지났지만, 그날 카페에 앉아 있던 그의 얼굴이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단정히 정돈된 모습과는 달리 눈동자엔 어쩔 줄 몰라 하는 혼란이 담겨 있었고, 오래도록 매달리다가 마침내 손을 놓으려는 사람만의 체념이 스며 있었다. 그 표정은 내가 언젠가 온유 앞에서 지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눈빛이 비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그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제하는 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이번 의뢰는 너한테 위험할 수도 있어.”“위험?”“네 감정이랑 겹쳐. 다른 때보다 더 흔들릴 거야. 너도 알잖아.”나는 짧게 웃어 넘겼지만, 그가 맞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 신중해야 했다. 단순히 떠나는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는 일. 이건 ‘이별 전문가’라는 직함조차 새로운 의미로 맞이해야 하는 과제였다.우리는 사무실 회의 테이블에 모여 작전을 짰다. 수경은 노트를 펼쳐 의뢰인의 아내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정리했다. 그녀는 지금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혼 문제를 가족들에게 이미 털어놓은 상태였다. 다만 남편에게서 끝내 눈물이 묻어나올까 봐 마음이 약해지는 걸 가장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다.“아내분은 이미 마음을 다 정리했어. 그러니까 우리 역할은 단순해.” 수경이 말했다.“단순하지 않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순간, 그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돼. 그게 제일 어려워.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등을 돌릴 때, 매달리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난 알아.”제하는 내 말을 잠자코 듣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에 크게 적었다. '놓아주기'. 그 단어를 또박또박 쓰고는 우리를 돌아봤다.“오늘부터는 이게 우리의 목표야. 이번 건은 다른 수단 필요 없어. 화려한 연출도, 자극적인 유혹도. 오직 차분하게, 서로의 마음이 무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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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불 꺼진 방 안의 목소리

의뢰인의 이별은 우리가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갔다. 매듭은 깔끔했고, 남겨진 사람의 품위도 지켜졌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건 늘 늦게 뒤따라오는 법이었다. 결과가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은 며칠째 먹먹했다. 그 남자가 마지막에 내게 남겼던 말, '덕분에 끝까지 남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라는 한 문장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고,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는 선택. 그것은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바라던 모습이었다.사무실의 불을 전부 끄고 혼자 남았다. 회색빛 커튼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며 가벼운 흔들림을 만들었다. 책상 위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들과, 손대지 못한 편지가 흩어져 있었다. 그중 한 장, ‘온유에게’라고 적힌 봉투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날 새벽 충동적으로 쓴 편지였다. 아직 내 손에서 그를 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증거였다.“온유야.”작게 불러본 이름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방 한가운데에서 미세한 바람이 일렁였고, 귓속을 스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심장이 요동쳤다. 불 꺼진 공간은 그대로인데, 내 안의 시간만 갑자기 휘몰아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 이건 환청일 거야. 단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소리. 하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그의 체온, 웃음소리, 마지막 시선까지 다 불려오는 듯했다.다음 날, 제하는 내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어제 잠 못 잤지?”“그냥… 좀 뒤척였어.”“네가 뒤척이는 건 그냥이 아니잖아.”나는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더는 묻지 않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대신 수경이 눈치를 채고 물었다.“언니, 요즘 자꾸 멍하니 있잖아. 무슨 일 있는 거죠?”“의뢰인 건이 오래 남아서 그래.”“그거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언니 눈빛이 달라졌어요. 뭔가… 누군가 붙잡고 있는 느낌?”수경의 예리한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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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거짓 없는 마지막의 무게

아침부터 흐릿한 안개가 골목마다 얇은 막을 드리운 듯 퍼져 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더딘 속도로 움직였고, 사람들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의뢰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날 사무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가 너무 상처받을 것 같다.'라고 하던 그의 눈빛. 그 속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청춘의 미숙함과, 동시에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순수한 진심이 교차하고 있었다.사무실에 도착하니 제하가 이미 커피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잔을 밀어주며 담담히 말했다.“이번 건은 네가 직접 붙잡아야 할 부분이 많을 거야.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감정의 선을 잡아줘야 해.”나는 잔을 들며 짧게 대답했다. “알아. 그래서 더 조심스럽네.”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안엔 나를 향한 걱정이 분명 담겨 있었다.수경은 서류를 넘기며 특유의 직설적인 어투로 끼어들었다.“솔직히 말하는 게 상처를 덜 준다는 보장은 없어요. 오히려 더 깊게 베일 수도 있죠. 그런데 언니는 왜 굳이 ‘정직한 이별’을 강조하는 거예요?”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냥… 내가 그때 듣지 못했던 말이어서. 차라리 거짓말이 아니라, 솔직한 마지막 한마디를 들었다면 내 지금 모습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내 말에 수경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복잡함이 스쳤다.며칠 뒤, 의뢰인과 여자 친구의 만남을 위한 장소를 섭외했다. 오래된 미술관 근처의 조용한 카페였다. 따뜻한 조명이 내려앉아 있었고, 벽에는 작은 전시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의뢰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문 앞에서 서성였다. 나는 그를 불러 세우고 작은 메모지를 건넸다.“여기 있는 문장들을 참고하세요. 하지만 그대로 읽지는 말고, 당신의 말로 바꾸어야 해요. 상대가 가장 아프게 느끼는 순간은 내 마음이 아닌 차가운 대본을 듣는 순간이니까.”메모지에는 짧은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고마웠다.”, “많이 배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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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문 앞에 선 발걸음

밤새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새벽이 되자 잦아들었지만, 내 마음의 웅성거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전날 밤 적다 만 편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잉크가 번져 얼룩진 종이는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내 안의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대학생 의뢰인의 눈빛과, 그가 '솔직한 이별은 잔인하다.'라며 떨리던 목소리가 겹쳐 떠올랐다. 그 잔인함 속에 담긴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감당하지 못해 눈물로 무너져내리던 여자 친구의 얼굴. 그 장면이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계속 돌아갔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제하가 내 표정을 살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내 안이 얼마나 어지러운지 알아차린 듯했다. 수경은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오늘은 새로운 의뢰 없죠? 언니, 며칠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쉬면 더 무너질 것 같아. 계속 움직여야 해. 그래야 내 안이 덜 흔들려.”수경은 입술을 깨물며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커피를 내오며 내 옆에 오래 앉아 있던 건, 아무 말 없이라도 내 곁에 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 조용한 배려가 오히려 마음을 더 저릿하게 만들었다.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래된 골목을 지날 때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전에도 몇 번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눈앞에 오래된 벽돌 담장이 펼쳐졌고, 그 한가운데서 기묘한 윤곽이 어른거렸다. 빛도 그림자도 아닌, 존재와 부재가 뒤섞인 선. 그것은 분명 문이었다.숨이 막히듯 발걸음이 멈췄다. '또다시 나타난 거구나. '이번에는 환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너무도 분명했고, 내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문틈에서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왔고, 그 바람 속에 목소리가 스며 있었다.“나리… 네가 원망하지 않으면, 이제 날 놓아줄 수 있겠니?”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아직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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