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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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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고백

사무실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은 유난히 희뿌옇게 번져 있었다. 구름이 두텁게 깔린 탓인지 빛은 따뜻하기보단 무겁게 내려앉았고,내 눈꺼풀 역시 더 깊게 짓누르는 듯했다. 서류를 정리하는 손끝은 자꾸만 멈칫거렸다. 어젯밤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 들은 목소리, 온유가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떨림은 환청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선명했다.커피포트가 다 끓었다는 소리를 낸 순간, 제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내 눈을 보자마자 단박에 표정을 굳혔다.“또 그 문을 본 거지?”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침묵이 곧 인정이라는 걸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내 앞에 서더니 팔짱을 풀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너, 언제부터 본 거야? 그 문.”“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그냥 어느 날, 그림자처럼 나타나더니 점점 또렷해졌어.”“왜 지금까지 숨겼어?”“말한다고 믿어줄 것 같았어? 오히려 내가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거잖아.”제하는 대답 대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화보다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잠시 뒤, 수경이 들어와 우리 둘 사이의 묘한 공기를 눈치챘다. 그녀는 서류 뭉치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결국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일인데 두 분 다 이렇게 심각해요?”나는 대답을 망설였지만, 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리가… 문을 봤대.”“문이요?” 수경이 의아하게 되물었다.나는 결국 숨을 고르며 설명했다. “내 앞에 문이 서 있어.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고, 문틈에서… 온유의 목소리가 들려.”순간, 수경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언니, 그건… 언니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 아니에요?”“환영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해. 차갑고, 또렷하고, 마치 현실처럼.”수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눈빛엔 믿기 어렵다는 두려움과 나를 향한 애틋한 연민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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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다시 울리는 벨소리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오래된 상처가 벌어지듯 떨려 있었다.“신나리 씨… 저...이번엔 정말 혼자 힘으론 못할 것 같아요.”익숙한 이름. 예전 의뢰인 은정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 남편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다며 찾아왔고, 나는 그녀가 준비한 마지막 순간을 함께 설계해주었었다. 그 이별은 담담했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울려온 벨소리, 다시금 떨리는 호소.나는 깊게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무슨 일인가요, 은정 씨. 지금 어디 계세요?”“근처 공원이에요. 그때와 똑같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어요.”그 목소리에는 공허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바로 외투를 챙겨 문을 나섰다.밤공기는 살을 파고들 듯 차가웠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 은정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벤치 끝에 앉아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번져 있었다. 나를 보자 그녀는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잘 지내신 줄 알았는데…”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그땐 괜찮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사람이 자꾸 꿈에 나와요. 웃으면서도, 원망하면서도. 깨어나면 숨이 막혀요. 이별했는데, 왜 자꾸 마음이 덜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그 말은 그대로 내 심장을 찔렀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질문이기도 했으니까. 왜 아직 끝나지 않았을까. 왜 문이 나타날까.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는 거예요. 우리가 끝냈다고 생각했어도, 가슴 속에 묻어둔 말들이 있으면 그렇게 찾아와요.”은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다시 그 사람을 만나야 할까요? 이미 떠난 사람인데…”“꼭 직접 만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 안에서 그와 마주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꺼내야만 끝낼 수 있어요.”나는 그녀의 손에 작은 수첩을 쥐어주었다.“여기에 적어보세요. 원망이든, 고마움이든,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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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목소리가 닿는 자리

아침 햇살은 평소보다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그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작은 녹음기를 바라보며, 나는 밤새 내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고개를 파묻고 울먹이며 겨우 남긴 말, “사랑했어, 그리고 안녕.” 그 한마디가 내 귓속에 메아리치며 맴돌았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주문처럼.제하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내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커피잔을 내밀었고, 나는 뜨거운 향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커피향보다 진하게 내 속을 휘감은 건 어젯밤의 울음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녹음했어. 마지막 말.”“그럼, 네 안에선 조금이라도 가벼워졌겠네.”“응… 그런데 동시에 더 두려워졌어. 내가 그 말을 들려주면, 정말 끝이 날까 봐.”제하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손등을 살짝 포개왔다. 그의 손길은 무겁지 않았지만, 쉽게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어. 네가 멈춰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면, 다른 길이 열릴 거야.”그의 말이 선명하게 가슴에 닿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녹음기를 꼭 움켜쥐었다.그날 오후, 의뢰인 상담이 끝난 뒤 수경이 다가왔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차분했다.“언니, 어제 말했던 거… 아직 생각하고 있어요.”나는 알았다.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곧 내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고백. 수경은 두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혹시 저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언니가 문 앞에 설 때, 뒤에서라도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커졌다. 내 싸움에 누군가를 끌어들여도 될까? 하지만 수경의 표정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저도 언니처럼 마무리 못 한 게 있어요. 언니가 그 문을 열 때, 저도 제 안의 무언가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요.”그 순간, 나 혼자라는 외로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며 홀로 짊어지려 했던 짐. 그러나 어쩌면 함께 나눌 수도 있는 걸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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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문 앞에 선 첫 발걸음

그날은 이상하게 하루 종일 심장이 조급하게 뛰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오후 내내 가벼운 빗줄기가 내렸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바삐 걸었지만,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머릿속은 끝없이 복잡해졌다. 오늘 밤, 문이 나타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몸과 마음이 동시에 긴장하며 예고하는 듯했다.사무실 불을 끄기 직전, 제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빛은 단호하면서도 떨리고 있었다.“오늘이구나. 네 얼굴을 보니까 알겠다.”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숨길 수도 없는 거네.”“숨기지 마. 이번만큼은… 네 곁에 있게 해 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달싹였지만,혼자 해야 한다는 말과 곁에 있어 달라는 마음이 충돌했다. 그 갈등은 고스란히 내 표정에 드러났을 테고,제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내 손에 작은 종이를 쥐여줬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 혼자가 아니야.”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대충 묶은 채, 손에는 그동안 모아둔 수첩을 들고 있었다.“언니, 기록을 다시 봤어요. 오늘이 맞는 것 같아요.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요.혼자 있고, 늦은 밤이고, 마음이 불안정할 때.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느껴.”“그럼 오늘, 같이 해요. 저도 언니 뒤에 있을게요. 절대 방해하지 않고, 그냥 지켜볼게요.”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평소의 장난기나 투정은 사라지고, 오직 의지와 두려움이 동시에 엉킨 눈빛.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고마워. 하지만… 문 앞에서는 나 혼자 설 거야.”“알아요. 그래도 뒤에서 잡아 줄 수는 있잖아요.”그 대답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밤이 깊어가고, 집 안이 고요해졌을 때였다. 공기 속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더니, 거실 한쪽 벽에 어김없이 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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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이제야 시작된 나의 숨

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치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벽은 평범한 흰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그림자가 스르르 걷혀 나가는 듯한 가벼움이 퍼졌다. 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 밀려드는 공허가 더 깊었다. 온유의 목소리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내 가슴을 채우기도 하고 비워 내리기도 했다. “나리, 잘 가. 그리고 살아.”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울음이 그치자 오히려 더 아득했다. 마치 끝을 맺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다 뒤에서 들려온 기척에 정신이 돌아왔다.제하가 조심스레 내 어깨를 감쌌다. 그의 손길은 뜨겁지 않았지만, 묵직하게 나를 붙들어 주었다.“잘했어. 정말 잘했어.”그의 목소리가 잔잔히 스며들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잠시 몸을 기댔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세상이 나를 흔들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수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눈물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언니… 드디어 끝냈네요. 이제는 정말 자유로워진 거예요.”나는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겨우 떨렸을 뿐이다. 자유라는 말이 아직은 낯설게만 들렸다.자유는 달콤한 동시에, 새로운 공허를 품고 있었다.그날 밤, 모두 돌아간 후 혼자가 되자 방은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문의 그림자가 사라진 벽을 바라보며, 나는 손끝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유가 떠난 자리, 그 빈 공간이 새삼스레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였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바람 속에서 스쳐 가는 추억들을 떠올렸다. 온유와 나눴던 웃음, 싸움, 약속들. 이제는 미련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 모든 장면들이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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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새로운 의뢰, 변해버린 시선

온유의 마지막 소식을 전해 듣고 며칠이 흘렀다. 방 안에 더 이상 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직도 낯설었다. 벽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앞에서 벌벌 떨며 숨지 않았다. 그 벽은 이제 그저 벽일 뿐이었다. 그러나 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묘한 적막과 넓은 여백이 남아 있었다. 그 빈자리는 나를 두렵게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롭게도 했다.나는 오랜만에 한숨이 아닌 깊은 호흡으로 아침을 맞았다.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람이 흘러들었다. 그 바람 속에서 마치 새로이 태어난 것처럼,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새로움 속에서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 질문이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사무실로 향하던 길,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순간 망설였지만 직업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여자의 낮고 떨린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이별을 도와준다는 분 맞으세요?”순간 심장이 움찔했다. 이별 전문가로서 듣는 익숙한 질문이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달랐다. 온유와의 작별 이후 처음 듣는 의뢰 요청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차분히 대답했다.“네, 맞습니다. 어떤 사연이신가요?”여자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치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듯 몇 차례 머뭇거리다 결국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남편이… 저를 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그 사랑이 이제는 감옥 같아요. 제가 더는 같은 마음이 아닌데, 그는 제가 떠난다는 생각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도와주세요.”그 순간, 그녀의 말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사랑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었을 때, 서로를 묶는 건 애정이 아니라 의무와 부담이라는 사실. 나는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만나서 얘기해요. 직접 사연을 들어야 도와드릴 수 있어요.”“정말…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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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다정한 지옥에서의 탈출

의뢰인의 이름은 윤서였다. 부드럽고 차분한 말투를 가진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눈동자 안쪽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갈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며칠 동안 남편을 관찰하기로 했다. 사실과 감정은 늘 어긋날 수 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첫날, 남편이 퇴근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봤다. 그는 큰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고, 아내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봉투를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고, 오히려 진심이 묻어났다.하지만 윤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에게 턱짓으로 '보라'는 신호만 보냈다. 그의 온화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았다.둘째 날, 남편은 아내를 위해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퇴근 후 그녀가 자주 들르는 카페에 미리 꽃을 두고 기다린 것이다. 하얀 백합이 유리병 안에서 곱게 피어 있었고, 그는 아내가 들어오자 곧장 의자를 당겨주며 손을 잡았다. 그러나 윤서는 그 손길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지만,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질 만큼 억지로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편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 사랑이 그녀에겐 족쇄로 변해 있었다. 문제는 사랑의 방향이 서로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남편은 ‘더 가까이’를 바라지만, 윤서는 '더 멀리'를 원하고 있었다. 그 거리감이 고통이자 균열이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제하와 수경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제하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그 남자, 나쁜 사람은 아니네. 오히려 좋은 사람이네.”“맞아. 그래서 더 어렵지. 윤서는 미워하지도 않아. 그런데 마음이 떠난 거야.”“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며 사는 게 지옥이지.” 제하의 목소리에는 씁쓸한 울림이 담겼다.수경은 조용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언니,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요? 남편이 착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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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균열 속으로 스며드는 첫 발자국

윤서의 사연을 들은 뒤 며칠 동안 나는 그녀의 남편을 관찰했다. 그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종종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점심시간엔 동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외향적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고, 말투 역시 단정했다.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라는 윤서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그런 다정함이 아내에게는 철창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관찰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나는 카페에서 일부러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 손엔 두꺼운 서류철이 있었고, 바쁘게 메모하는 척 연필을 굴렸다. 그가 시선을 몇 번 내 쪽으로 돌리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혹시 무슨 공부하시나요?”나는 고개를 들어 자연스럽게 웃었다.“아, 네. 상담 관련 서류예요. 정리할 게 많아서요.”그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상담이요?”“네, 사람들 얘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이라서요.”그의 시선이 깊어졌다. 마치 마음속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굳이 먼저 묻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메모를 이어갔다. 그러자 그는 뜬금없이 책을 덮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저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얘기해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제 마음을.”나는 속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의외로 큰 힘이 되죠.”그는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후, 또다시 카페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조금 더 편안하게 다가왔다.“요즘은 아내가 많이 힘들어 보여요. 제가 뭘 해도… 웃질 않더라고요.”그 말에 나는 순간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혹시, 너무 많이 주고 계신 건 아닐까요?”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많이 줄수록 아내가 행복할 거라 믿었는데… 그게 잘못일까요?”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누군가의 마음을 억지로 안으려 하면, 그 무게가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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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다정함이 할퀸 선명한 자리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어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요.”“그럼 반대로요. 만약 당신이 없는 하루를 아내분이 보낸다면요? 어떤 모습일까요?”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듯 멈칫했다.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아마… 더 가볍게 숨 쉴지도 몰라요.”순간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분명 변하고 있었다. 충격,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틈 같은 것. 그 틈새가 언젠가 균열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노트에 조용히 기록을 남겼다.“사랑은 붙잡는 게 아니라 머무는 것.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인정할 때에만 진짜 온전해진다.”글을 쓰고 나니 내 안에서도 오래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온유와의 마지막 날, 그의 따뜻한 손길을 끝내 놓지 못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균열은 남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도, 손끝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체온처럼 남아 있었다.남편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돌아와 현관을 열자마자 윤서의 이름을 부르고, 그녀가 부엌에 있든 거실에 있든 발걸음을 서두르며 안부를 묻는 모습. 사람들은 그런 정성을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 다정함의 무게가 윤서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그들의 집을 관찰하며 그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같은 대사가 반복되고, 같은 행동이 이어졌다. 마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의식처럼.그날 저녁, 그는 조금 달랐다. 나는 우연을 가장해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내려왔고, 그가 초조하게 숨을 고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 앞에 서서도 쉽게 벨을 누르지 못하던 그의 손끝이 잠시 허공에서 떨렸다. 결국 들어간 뒤, 그는 조용히 윤서를 불렀다.“윤서야, 오늘 하루는 어땠어?”익숙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림이 섞여 있었다. 윤서가 대답을 망설이자, 그는 덧붙였다.“혹시… 내가 없는 하루를 상상해본 적 있어?”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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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무너지는 일상의 온도

윤서의 남편은 그날 이후로 조금씩 변해갔다.그가 회사에서 퇴근한 뒤 곧장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어느새 길 모퉁이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버릇으로 바뀌었다. 예전엔 윤서에게 빨리 돌아가야 마음이 놓였는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그 문 앞에 서면 숨이 막혔다.현관문을 열 때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TV 소리, 냄비 끓는 소리, 윤서가 내는 작은 콧노래.그 모든 것이 ‘사랑의 증거’였던 시간들이 이제는 그에게 책임의 소음처럼 들렸다.“다녀왔어.”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윤서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왔어요.”그녀의 짧은 대답은 조심스러웠고, 그 안에는 아무런 떨림도 없었다.그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허공의 냉기에 싸였다.따뜻해야 할 집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천천히 그를 파고들었다.그는 괜히 윤서에게 물었다.“오늘은 뭐 했어?”“별거요. 그냥 정리 좀 하고, 동생이랑 통화했어요.”그녀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손끝으로 머그컵을 굴리며 무언가를 견디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윤서야, 요즘 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아니면…”“없어요.”말이 끊겼다. 윤서는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그냥… 좀 피곤해서요.”그 한마디는 문장보다 깊은 벽이 되었다.그는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마치 유리장 속의 타인처럼 멀었다.며칠 후, 윤서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요즘… 말이 없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그게 힘들어요?” 내가 물었다.“이상하죠? 그렇게 조용하길 바랐는데… 이제는 그 침묵이 더 무서워요.”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의 끝은 대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고, 무너짐은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온다는 걸.“윤서 씨.” 나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이별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소멸이에요. 지금 그 침묵은 어쩌면… 그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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