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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111 - Chapter 120

146 Chapters

111화. 폐점 후에 도착한 청첩장

문을 닫는 소리가 유리문에 얕은 파문처럼 번졌다.“CLOSED” 팻말을 뒤집고 돌아서자, 커피 향이 가라앉은 카페 안쪽이 한 단계 낮은 조도로 숨을 골랐다.제하는 싱크대에 컵을 엎어 두고 물기를 털었다. 수경은 오늘 들어온 상담 문의를 분류해 바인더에 꽂고 있었다. 탁자들 위로 남은 손자국을 천천히 닦다가, 나는 휴대폰 화면에 찍힌 새로운 알림을 바라봤다.[수신: 익명]제목: 부모님이 정한 결혼을 취소하고 싶습니다.열어 보았다.메일의 첫 문장은 놀라우리만큼 간결했다.“저는 불효녀’가 되고 싶지 않지만,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나는 화면을 확대해 문단 사이의 호흡을 더듬었다.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예식장 리허설 날짜와 양가 상견례 일정, 혼주가 이미 내려놓은 식순 수정본의 사진만 덧붙였다. 그중 한 장에는 축가: 아버지의 친구분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글씨의 눌림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의 결정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새 문의야?” 제하가 물기 맺힌 컵을 말리며 물었다.“응. 아크 여섯 번째 타입.”나는 서랍에서 회색 바인더 하나를 꺼냈다.겉표지에 굵은 펜으로 적어 둔 라벨. A-06. 부모 픽 결혼.수경이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앉았다. “디테일 들어가려면, 혼주 동선부터 잡아야겠네요. 예식장 쪽과는 내가 먼저 연락해 볼까요?”“아직 이름이 없어. 신뢰 설정부터.”나는 메일 하단에 짧은 답장을 썼다.“안녕하세요. 저는 신나리입니다.불효녀라는 단어를 잠시 서랍에 넣어 두고, 당신의 언어로 사정을 들려주세요.우리는 가족의 체면을 보존하면서도, 당신의 삶을 망치지 않는 방법만 제안합니다.내일 오전 10시, 우리 카페로 오실 수 있나요?”전송 버튼을 누르자, 제하가 바인더를 받아들며 묻는다. “예식장 리허설은?”“이번 주 토요일. 리허설의 리허설을 우리가 당겨서 할 거야. 동선과 퇴로, 혼주 좌석 배치, 사회자 스크립트까지.”“가장 중요한 건?” 수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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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리허설의 리허설

예식장 스태프들이 철수한 뒤, 홀 안은 다른 세계처럼 조용했다.형광등이 반쯤 꺼진 통로에 발소리만 또렷이 울렸다.제하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조명 팀, 다 갔네. 지금부터가 진짜 리허설이지.”나는 홀 중앙에 서 있었다. 반쯤 정리된 꽃 장식, 의자 위에 남은 리본 자락, 누군가가 흘린 향수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지안은 신부대기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표정은 망설임과 결심의 경계였다.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그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 종이가 손끝의 땀을 머금어 약간 눅눅해진 느낌.그 손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지금이라도 뒤로 가고 싶으면, 말해요.”내 말에 지안은 고개를 저었다.“뒤로 가면, 그 길은 더 이상 제 길이 아니에요.”나는 작게 웃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만.”수경이 뒤에서 조명 밝기를 조정하며 물었다. “대본은 준비됐어요. 근데… 사회자한테 최종 멘트 전달했죠?”“응. 바꿨어. ‘두 사람의 걸어온 시간을 축복한다.’ 이제 그 문장은 지안 씨한테도, 우리한테도 안전해.”제하가 짧게 끄덕였다. “시작하자.”지안이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이힐의 굽이 바닥을 칠 때마다, 음이 하나씩 또렷하게 홀 안을 메웠다.그 리듬이 긴장처럼, 혹은 해방처럼 느껴졌다.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숨을 고르게 맞추었다.“그 사람에게 말해야 할 문장은 세 개뿐이에요.”“첫째,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둘째, 미안하지 않아요. 셋째, 당신의 행복을 빌어요.”지안은 그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눈동자 안에 반사된 스팟 조명이 일렁였다. 그 빛이 그녀의 떨림을 감싸듯 부드럽게 흘렀다.“이게 진짜 결혼식 같네요.”그녀가 작게 웃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 리허설이에요.”제하가 커프스 단추를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저 남자도 그 단추를 바꿨을까.”“바꿨을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사람이 결심을 하면, 작게라도 뭔가 바꿔요. 버튼 하나, 머리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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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사라진 시간과 남겨진 보폭

수경이 숨을 들이켰다.“혹시…”“아직 몰라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이번 사건, 단순히 ‘이별의 연출’이 아닐 수도 있어요.”창밖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햇살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상한 불길함이 스며들었다.그리고 내 안에서 오랜만에 느껴지는 감정이 꿈틀거렸다.직업적 감각이 아니라, 인간적인 두려움.“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요.” 제하가 냉정하게 말했다. “자발적 연락일 수도 있으니까.”“그래도…” 수경이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하지만, 만약 내일까지도 연락이 없다면 우리가 찾아야 해요.”그 말이 끝나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서 번지고, 그 위로 희미한 그림자 셋이 겹쳤다.그리고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누군가의 이별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라짐일지도 몰라.”그 말은 공기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일이 단순한 ‘이별의 연출’이 아닌,진짜 진심을 구하는 탐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밤공기가 유난히 무거웠다.카페 안은 조용했고, 커피머신의 스팀 소리가 멎자마자 정적이 더 깊어졌다.전날 밤, 예식장 리허설이 끝나고 한지안이 남겼던 “이제 저는, 제 시간으로 돌아갑니다.”그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노트북 화면에는 예식장 CCTV 캡처가 여러 장 겹쳐 있었다.오후 여덟 시 십칠 분, 그녀가 부모와 함께 홀을 빠져나가는 장면.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그 이후, 한지안은 세상에서 사라졌다.“너 언제부터 그 화면 보고 있었어?”제하가 문가에 기대서 말했다.그의 셔츠 소매는 걷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피곤보다 걱정이 앞서 있었다.“새벽 세 시쯤.”“이제 여섯 시간이잖아. 그만해.”“쉬면 뭐가 달라져?”“너까지 무너지면 다 끝이야.”나는 한숨을 삼켰다.“우리가 만든 무대에서, 누가 사라졌어.그건 단순한 ‘의뢰 종료’가 아니라… 우리가 관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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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부산으로 가는 길

새벽 다섯 시, 서울역은 아직 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플랫폼 위로 흰 김이 얇게 피어올랐고, 전광판의 시간 숫자들이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무뎠다.나는 배낭을 한쪽으로 메고, 늘 쓰던 회색 머그 대신 텀블러를 쥐었다. 금속 표면이 손바닥 체온보다 차가워서, 정신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표.”제하가 손에 쥔 두 장을 내게 내밀었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잠기운이 한 톤 남아 있었다.“창가 자리 줬어. 바다 보일 쯤이면, 도착하겠지.”“좋다. 바다는 늘, 끝이 아니라 시작 같으니까.”“너 이런 날에도 문장으로 버티네.”“방법이 그거밖에 없어서.”나는 웃었다. 억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오늘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찾으러 가고 있으니까.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커졌다. 철로 위 금속의 마찰음이 정확한 리듬으로 박자를 찍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먼저 밀려들고, 그다음에 사람들의 작은 탄식이 뒤따랐다. 우리는 말없이 탔다. 앉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뒤집었다. 알림이 쌓여 있었다. 수경이었다.[수경] 선배, 영도 쪽 버스 앱 기록 확인했어요. 한지안 씨 카드로 어제 저녁 9:41에 27번 노선 탑승, 동삼동 방향이에요.[수경] 10:05 하차 기록. 정류장 이름은 '조도휴게소 앞’. 바닷가 라인입니다.나는 그 메시지를 제하에게 보여줬다.“바다 라인.”그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예식장에서 빠져나와 바로 이동하면… 시간대 대충 맞아.”“그 정류장 근처에 뭐 있지?”“구 포구, 방파제, 폐창고 몇 개. 그리고 오래된 게스트하우스 라인.”“숙소면, 기록이 남았을 거야.”“현금으로 하면 안 남지.”“지안이는, 그런 디테일을 생각할 정도로 지쳐 있었을까?”“나리야, 그 여자는 마지막까지 문장을 다듬던 사람이야. 디테일로 버틴 사람이면, 디테일로 사라질 수도 있어.”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문장으로 버티는 사람. 그건, 나였다.나는 창밖을 보았다. 따뜻한 객실 안, 유리창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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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문장보다 깊은 숨의 약속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에, 낡은 횟집 앞을 지났다. 유리창 너머에서 아주머니 하나가 우리를 힐끗 보았다. 지나치려는데, 그녀가 문을 열었다.“얘들아.”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누굴 찾는 모양이네.”“네.” 내가 대답했다. “어제 밤에 모자 눌러쓴 젊은 여자 분 못 보셨어요? 베이지 코트에, 마른 편.”“봤지. 여덟 시 반쯤? 그쯤이었을 거야. 우리 집 앞에서 한참 바다만 보고 서 있더라고. 밥 먹고 가라니까, 됐다고 손사래 치고.”“그 뒤론요?”“음… 이쪽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어. 혼자.”“감사합니다.”“그래. 근데 너희, 가족이야?”“아니요. 친구예요.”“그래. 근데 친구 찾을 때는 자기들도 밥은 먹어야지.”그녀는 웃으며 문을 닫았다.문 안쪽에서 생선 굽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짭짜름하고, 따뜻하고, 이상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냄새.목욕탕은 정류장 바로 옆 골목에 있었다. ‘대중사우나’라는 네 글자가 오래된 네온으로 간판 위에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젖은 타일 냄새와 보일러 소리가 동시에 밀려왔다. 카운터에 앉은 중년 남자가 신문을 접었다.“코인락커 205번, 열쇠를 잃어버린 친구 물건 찾으러 왔어요.”내가 열쇠를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거긴 개인 사물함이 아니라, 짐 보관함이야. 밖으로 돌아나가면 오른쪽.”우리는 안내대로 밖으로 나와 측면 복도로 들어갔다. 금속 도어 위에 가로로 번호가 줄지어 있었다. 199, 201, 203… 그리고 205.“준비됐어?” 제하가 물었다.“응.”열쇠를 꽂아 돌렸다. 딱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안에는 작은 캔버스 백 하나, 검은색 노트, 그리고 봉투가 있었다. 봉투 겉면엔 내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신나리 님께.손끝이 얼어붙듯 서늘했다. 나는 봉투를 천천히 열었다.종이 두 장. 첫 장에는 짧은 인사. 두 번째 장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선생님, 제 시간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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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잔향의 법칙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플랫폼 위 공기가 낯설 만큼 차가웠다.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밟힌 건, 영도에서 마지막으로 본 바다였다.그곳의 햇빛과 이곳의 형광등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한쪽은 끝이었고, 한쪽은 다시 시작이었다.그 둘 사이를 오간 하루의 잔향이 몸 안에 남아 있었다.“택시 잡자.”제하가 가방을 옮기며 말했다.“아니, 걸을래. 좀 걸어야 이게… 정리될 것 같아.”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걸어.”서울역을 나서자, 새벽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하늘은 푸르지도, 까맣지도 않았다.오래된 나무의 그림자와 버스 정류장 불빛이 뒤섞인 색이었다.우리는 말없이 걷다가, 골목 끝 신호등 앞에서 나란히 멈췄다.빨간 불이 깜박이며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지안이는 괜찮겠지.”제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괜찮을 거야. 그 애 눈빛이 달라졌잖아. 마지막에, 숨이 안정됐어.”“숨.”그는 그 단어를 되뇌었다.“그래, 그게 결국 다였지. 살아 있다는 게 숨쉬는 거라면, 그 여자는 살아 있었어.”“응.”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일은 결국, 사람한테 숨을 돌려주는 일이잖아.”“근데 나리야.”“응.”“그걸 하면서, 넌 네 숨은 잘 쉬고 있어?”그 말에 나리는 걸음을 멈췄다.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진심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잘 모르겠어.”“그럼 이젠 좀 쉬어. 누군가의 숨을 살려주려면, 네 숨부터 회복해야 하잖아.”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리의 손에 텀블러를 쥐여줬다.“뜨거운 물. 수경이 챙겨줬더라.”나리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그 애,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너무 어른 같아.”“그래서 더 걱정돼. 스물여섯짜리 얼굴에 책임이 너무 많잖아.”“그건 우리 둘도 마찬가지야.”그들이 동시에 웃었다.그 웃음은 긴 하루의 마지막 숨이었다.카페 문을 열자, 공기가 달라졌다.오래 비워둔 공간 특유의 냄새가 났다.커피콩 냄새보다 먼지의 온도가 먼저 들어왔다.불을 켜자 조명이 한 번 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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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품위 있게 멀어지는 중

아침 여덟 시, 카페 문을 열자 습기가 먼저 안으로 살짝 스며들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고, 바닥은 젖은 종이처럼 색이 한 톤 눅눅했다. 커피머신이 예열되며 낮은 숨을 뱉었다. 오늘은 커피 향보다 뉴스가 먼저 세상을 깨웠다.수경이 평소보다 서둘러 들어와 노트북을 펼쳤다.“선배, 기사 떴어요.”“제목.”“‘예식 중 신부 실종 소동, 끝내 무사귀가… 누가 그녀의 등을 밀었나.’”제하가 한숨을 길게 뱉었다.“자극적인 꼬리표 달았네.”“본문엔 실명 없고, 예식장 위치만 흐리게 표기했어요. 근데 댓글이…”“어지럽겠지.”나는 에스프레소 버튼을 눌렀다. 추출구에서 검은 빛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우린 확인된 사실만 다룬다. 추측엔 반응하지 말자.”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커뮤니티에서 ‘이별 컨설팅’ 얘기가 조금 나와요. 직업 윤리에 대한 논쟁이… 들어왔어요.”“들어왔다고?”“네, 상담 신청입니다.”그녀가 받은편지함을 돌렸다. 보낸 사람, ‘박소은(가명)’ 문장 첫 줄이 컸다.“부모님이 정한 결혼에서, 조용히 나가고 싶습니다.”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어제의 잔향이 오늘의 서막을 열어버렸네.”제하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응답 보내. 10시 상담, 오프라인. 실명 확인, 보호조항 강조.”수경이 짧게 메모를 눌렀다.“네, 선배. 그리고… 기자 연락이 와 있어요. 인터뷰 제안.”“거절.”“딱딱하게 거절하면 또 써요.”“그럼 문장 하나만.” 나는 수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개인의 이별은 공공의 오락거리가 아닙니다. 끝.”“네.”수경의 눈빛이 맑았다. 말은 존댓말이지만, 이미 팀의 리듬 속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열 시가 조금 넘자, 벨이 짧게 울렸다.박소은이 들어왔다. 단정한 차림, 서른 즈음의 피곤이 눈 밑에 반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좌석 선택조차 조심스러워 보였다. 나는 카운터에서 앞치마를 벗고, 한 걸음 먼저 다가갔다.“어서 와요.”내가 의자를 빼며 말했다.“박소은 씨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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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60초의 침묵, 그 너머의 진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슬며시 들어왔다.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웃음의 길이가 오늘은 조금 길었다.오후 세 시, 현장 관찰.예식장 측과 미리 잡아 둔 ‘공간 점검’ 미팅을 명목으로 들어갔다. 사회자와 플래너, 안내팀. 모두 어제의 기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표정은 중립을 가장했지만, 눈동자가 잔디처럼 바람에 눕다가 일어서는 속도로 흔들렸다.“사회자 멘트, 초안 공유해 주세요.”내가 종이를 받자마자 중간 문장을 가볍게 그었다.“양가의 깊은 뜻 대신 두 사람이 걸어온 시간으로 바꿔 주세요.”“왜죠?” 플래너가 물었다.“체면을 문장으로 강요하면, 끝날 때 누군가 반드시 부서져요. 우린 잔해를 최소화하려고 여기에 왔고요.”사회자는 내게서 종이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더 안전하네요.”안내팀에게는 동선을 수정했다. 혼주 대기석에서 무대까지 이어지는 경로에 정지 지점 하나를 추가했다. 그 지점은 조명이 한 칸 낮아지는 곳. 낮춘 빛은 작은 고백을 꺼내게 한다. 스스로 ‘그만하자’고 말하기에 알맞은 밝기와 거리. 우리는 그 거리의 수학을 잘 알고 있다.밖으로 나오며, 제하가 낮게 물었다.“혹시 오늘 밤에 기사 하나 더 뜨면?”“무시. 대신 소은의 호흡만 본다.”“가족 라인은?”“퇴로부터 깐다. 상대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주자.”“알았어.”그가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미등록 번호.“받아.” 내가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제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목이 약간 굳는 소리가 났다.“지금은 어렵습니다.”그가 통화를 끊고 나를 봤다.“누구.”“우리 예전 고객. 언론에 ‘익명 제보’를 하겠다고.”“돈?”“돈은 안 받는다고.”“그럼 감정.”“응. 내가 받을게. 오늘 밤.”“안 돼.”“왜.”“너도 사람이라서.”“나리야”“우린 감정으로 일하지만, 감정으로 망하진 않아.”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같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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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빛의 방향

이틀째 흐린 하늘이었다.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이 합쳐지다 길게 흘러내렸다.카페 안은 늘 같은 향인데, 이상하게 오늘은 공기까지 묘하게 눅눅했다.커피 향보다 ‘기다림’의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선배, 박소은 씨 일정 확인됐어요.”수경이 카운터 위 태블릿을 밀었다.“오늘 오전엔 회사, 오후엔 혼주댁 방문. 리허설은 토요일 오전으로 잡혔대요.”“좋아. 관찰 시작.”나리가 짧게 말했다.“회사 쪽은 내가 볼게. 네가 혼주 라인 정리해줘.”“네. 혼주 쪽엔 제가 식순 정리 메일로 요청해둘게요.”제하가 옆에서 덧붙였다.“오늘 기사 다시 떴다.”그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였다.“무슨 내용인데.”“‘이별 대행업체, 인간 감정의 장사인가?’ 제목이 이래.”“기사 쓴 기자 이름.”“윤태하. 사회부 프리랜서.”“익숙한 이름이네.”“응. 예전에 아크3 취재할 때, 우리한테도 메일 보냈던 놈.”“그럼 이번엔 의도적이네.”“그렇지.”제하가 신문을 접었다.“이제 외부의 시선이 본격적으로 들어올 거야.”“들어오게 놔둬. 대신,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자.”나리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삼켰다.쓴맛이 혀끝에서 잠시 돌다 사라졌다.“오늘은 감정선보다 동선이 먼저야. 언론 대응은 내일 회의에서.”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회사 앞 도착은 오전 열 시 반.건물 외벽에 붙은 유리 간판이 흐린 하늘을 그대로 비췄다.박소은은 1층 카페에서 동료와 마주 앉아 있었다.흰 블라우스, 깔끔한 머리, 표정엔 아무 감정이 없었다.‘연습 중이네.’나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사람은 결심을 오래 감추지 못한다.눈빛, 손끝, 호흡. 하나씩 새어 나온다.“왼쪽 창가 자리.”제하가 이어폰 너머로 말했다.그는 건너편 북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있었다.“응. 시야 확보 좋아.”“그 사람은?”“동료야. 이름은 안 들렸는데, 말투가 약간 불편해 보여.”“불편?”“형식적인 친절. ‘결혼 준비는 잘 돼가요?’ 이런 식. 서로에게 신뢰가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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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진심이 흐르는 안전한 통로

아침 햇살이 카페 창문을 반쯤 덮었다.비가 멈추자, 공기는 맑았지만 묘하게 무거웠다.신문과 포털, SNS.모든 곳에 이별전문가라는 단어가 떠 있었다.기자 윤태하의 기사였다.‘그들은 누군가의 끝을 설계한다. 감정의 장사를 하는 사람들, 그 이름은 이별전문가.’제목만 보면 흥미 위주 같았지만, 문장 속엔 뚜렷한 칼날이 있었다.나리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잔받침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읽었어?”“응.” 제하가 신문을 접었다.“자극적인 제목 밑에,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쌓아온 모든 게 의심으로 바뀌어 있었어.”“예상은 했잖아.”“그래도, 막상 당하니까 기분 나쁘다.”“기분으로 움직이면 진다.”나리의 목소리는 단단했다.“우린 감정으로 일하지만, 감정으로 변명하진 않아야 해.”수경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선배, 기자 쪽에서 인터뷰 요청 다시 왔어요. 공식 입장 취재 겸해서요. 장소는 기자 쪽이 제안했어요. 카페 스틸북. 오후 두 시.”“우리쪽에서 제안할래.”“네?”“그들이 우리를 분석하려면, 우리는 그들한테 ‘왜 분석하는지’ 물어봐야지.”“장소는요?”“여기. 우리 카페.”제하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괜찮겠어?”“응. 이별을 설계하는 사람들의 일상. 그걸 직접 보여주는 게 훨씬 정직하잖아.”“기자한테 정직이 통할까?”“정직이 통하지 않아도, 거짓보다 낫지.”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인터뷰 준비 미팅, 지금 바로 할까요?”“응.”나리가 노트북을 열었다.“오늘 대화의 주제는 세 가지야.하나, 이별을 돕는 이유.둘, 우리가 어디까지 개입하는가.셋, 우리가 끝내고자 하는 건 관계가 아니라 상’라는 점.”제하가 잔을 들어 올렸다.“결론은?”“사람은 끝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걸 돕는 게 우리의 일이야.”그 말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그건 설명이 아니라, 신념이었다.오후 두 시 정각. 문이 열리며 남자가 들어왔다.30대 중반, 단정한 정장 차림. 눈매는 날카롭고, 입술은 얇았다.“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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