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엔 습기가 묻어 있었다.서울의 겨울은 차갑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낯설었다.수진은 공항 게이트를 나서며 그 낯선 공기가 목구멍 깊숙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한국의 냄새는… 따뜻하다니.’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훈련소에서 맡던 금속 냄새와는 달랐다.이곳의 냄새는 도시의 먼지, 커피, 사람, 그리고 기억이 섞여 있었다.함께 온 작전팀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누구도 서로의 얼굴을 완전히 보지 않았다.그녀의 짐 속엔 서류 한 장과 휴대전화 한 대, 그리고 위조된 신분증이 있었다.김수진, 28세, 플로리스트. 그 이름은 단순한 가면이었지만,그녀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진짜 이름’이기도 했다.그녀는 택시에 올랐다.“해남까지요.”운전기사가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거기요? 꽤 멀어요.”“멀어도 돼요. 조용한 데가 좋아서요.”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서울의 빌딩들이 천천히 뒤로 밀려갔다.네온사인과 광고판, 그리고 길가의 사람들.그 풍경 속에서 그녀는 이상하게 마음이 저릿했다.‘이 도시에… 언니가 전한 진실이 있겠지.’그 시각, 서울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국정원 9과 사무실 안에서 한 남자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그의 이름은 강혁. 전직 요원, 현 은퇴자.하지만 그를 완전히 놓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는 서류 위에 적힌 이름을 바라봤다.〈배신구. 현 국정원장. 내사 비공개〉그는 종이를 손끝으로 접었다.그 종이의 모서리에서 미세하게 금속 냄새가 났다.그 냄새는, 그가 가장 잊고 싶었던 그날의 냄새였다.캄보디아, 총성, 피, 그리고 한 여자의 울음.그 여자의 이름은 수민. 그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입에 담는 순간, 목이 막혔다.“이제 그만 잊어라.”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기억은 잊는 게 아니라, 묻히는 거라는 걸.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겨울 바람이 들어왔다.그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속엔 이상한 냄새가 섞여
Huling Na-update : 2026-03-10 Magbasa 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