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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빛미르: Chapter 31 - Chapter 40

94 Chapters

미르와 여인 (1)

“이보게! 여보시게!”누군가가 꿈결 속에서 그를 부르는 듯했다.천우의 눈앞에 작은 점이 하나 맺히더니, 점점 원을 그리며 커졌다.그리고 삽시간에 정신이 들며 주위가 밝아졌다.머리가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지끈거렸다.“괜찮은가?”정신을 차린 천우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운의 얼굴이었다.지운은 갑자기 천우가 말을 않자 선채로 정신을 잃은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기면증(嗜眠症)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네.”“송구합니다. 갑자기 머리가…….”아직도 그가 보았던 광경이 방금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손아귀에 느껴지던 검 손잡이, 칼날의 날카로움, 그리고 온몸을 불태우고 남았던 열기와 냉기…….“권사.”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도가 가만히 인기척을 냈다.“괜찮습니까?”“네. 우리 젊은 기우사가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엄청난 얘기를 들었으니까요.”지운이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천우는 얼른 이도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실로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전하! 부디 저를 벌하여 주옵소서!”“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감히 국왕 앞에서 딴생각을 하다니. 각오하고 있어라.”이도가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그러나 당사자인 천우의 가슴 속에 돌덩이가 들어앉는 소리는 듣지 못한 듯했다.“그나저나 자네 정말 괜찮나?”지운이 아무래도 걱정되는 듯 천우를 돌아보며 물었다.“갑자기 온몸이 굳더니 넋이 나간 것처럼 굴던데. 혹시 남모를 병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아, 아닙니다. 갑자기 이상한 그림이 떠올라서…….”“이상한 그림?”“네. 아마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를 너무 깊게 받아 들였나 봅니다.”“붉빛미르와 물빛미르에 대한 것 말인가?”“그렇습니다.”“무슨 그림을 보았는가?그저 무엇일지 모를 환상을 보고 난 뒤라 어지러울 뿐인 천우 앞에서, 지운은 무언가 석연찮은 점을 느낀 모양이었다.“자세히 얘기해볼 수 있겠나?”워낙 정색을 하고 물어보니, 천우로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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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와 여인 (2)

   “저는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졸리면 자는 사람…….”“모친께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었지.” 지운이 천우의 입을 막았다. “혹시 자네는 자네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 얘기는 들은 적이 없나?”“제 아버님은 남들과 똑같이 저를 키우셨습니다.”“그렇다 한들, 자네는 진실로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았나? 물을 다룰 줄 알면서? 자네는 그게 평범한 사람의 인생이라 생각하나?” 지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우를 발가벗기는 듯했다. 평범했냐고? 그럴 리 없었다.다섯 살 때부터 시냇물을 사람 형상으로 빚어 데리고 놀았고, 고을 장터에서 괜히 시비를 거는 패거리의 논밭이 물난리로 엉망이 되게 만든 적도 있었다.천우에게 있어 물과 비를 다루는 것은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쉬운 행위였다.물론, 그런 천우의 남다른 면모를 알아챈 백사성은 절대로 남들 앞에서 이를 펼쳐 보이지 못하도록 했다.그러나 꼭 필요할 때만 비와 물을 불러야 한다며 권능을 통제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는, 평소의 백사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필요하게 될 날이 올 테니.’ 그렇게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백사성은 그의 아들을 힘껏 가르쳤다.궁도(弓道)를 익히는 것 마냥 어렵고 힘든 길이었으나,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 속에 천우는 조금씩 그의 속에 내재한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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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용 (1)

이레.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마치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린 기분이었다.“이레……”“모르는 이름인가?”지운이 천우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네.”천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흔치 않은 이름이기는 하군요.”“정말 모르는가? 자네 아버지로부터 들어본 적 없나?”“그렇습니다. 입에 담으신 적이 없습니다.”“흠.”지운이 신음을 흘렸다. 무언가 성가시다는 기색이었다.“아무튼 간에.”지운이 우선 할 얘기를 마쳐야겠다는 듯 덧붙였다.“이레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물빛미르의 곁을 지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어. 죽을 뻔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더군. 물빛미르의 발톱이 눈썹을 스치고 지나간 적도 있다 했으니, 얼마나 대담한 여인이었는지 짐작하겠지.”“알만하군요.”“이레는 꿋꿋하게 미르를 돌봤다네. 물을 먹이고, 상처를 닦고, 약초를 빻아 바르고……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기우사 열 명이 할 일을 해냈어. 아마 이레가 그리 나서지 않았다면, 물빛미르는 진즉에 소멸해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허상이 되어 버렸을 걸세.”“당찬 여인이었군요.”“만인의 연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네. 사람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모두 아끼고 연모할 만한……”지운의 눈두덩 위로 어둠이 내렸다.그 광경을 보던 천우는 지운 또한 이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에게 연정을 품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혹시……”천우가 조심스레 운을 띄었다.“권사께서도……”“그래서.”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천우는 입을 다물었고, 지운은 무슨 소리 하느냐는 투로 천우를 노려보았다.어색한 침묵이 흘렀다.“그래서 물빛미르가……”지운이 이어 말했다.“이레를 아주 아끼고 사랑하였다네. 함께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 정도로 말이야.”“떠나다니요?”천우가 깜짝 놀라 물었다.“어디로 갔단 말입니까?”“그걸 알고 있다면 내가 이렇게 속상해하지 않았겠지.”지운이 푸념하듯 말했다.다시 보니, 꼭 손녀딸을 잃어버린 조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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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재회 (1)

많은 일이 벌어진 하루였으나, 저녁 때가 되니 기분이 괜찮았다.이포교는 제법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남은 일을 처리며 시간을 보냈다. 실로 오랜만에 금화도감이 제대로 활약한 날이었다.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금화도감이 나선다는 정의에 걸맞게 제대로 녹봉 값을 한 듯한 성취감이 가슴을 메웠다. 게다가 낮에 만났던 지운이라는 이상한 노인은 이포교를 주상전하께 좋게 말해주겠다 얘기했다.허언(虛言)이라고 해도 기꺼운 말이었다. ‘살면서 한번쯤은 이렇게 뿌듯한 날도 있어야지.’ 불과 맞서겠다는 신념으로 포교가 되어 금화도감 소속으로 발령된 이후로 의외로 화재를 진압하러 나선 경우는 많지 않았다. 끽해야 방화범으로 의심되는 작자들 잡는데 포청에서 손 딸린다며 불려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게다가 포청에서는 불 잡는 것은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연기 냄새만 나도 금화도감에 모두 떠맡기니, 쓸데없이 바쁘기만 하고 영 실속이 없었다. 또한 금화도감이 그다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관들은 일찍이 나태해졌다. 오늘처럼 근무 시간도 지키지 않고 퇴청해버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 달에 이런 날이 나흘, 아니 사흘만 있어도 좋겠어. 삶의 질이 달라지는군.’ 아무리 그래도 이포교는 성실한 인물이었다. 몸은 피로해도 보람찬 마음이 더 컸다.포청 밥이 그리 뒤쳐진다 말 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지만, 오늘 퇴청 후에 간만에 맛난 것으로 저녁식사를 할까 고민될 정도였다. 일 열심히 한 자신에게 주는 보상으로 말이다. ‘듣기로는 저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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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고기와 화해 (2)

이포교가 고기 씹던 입을 웅얼거리며 말했다.“앞으로 자네도 여러 번 오게 될 곳이니.”“여기를 말입니까?”“음식 맛도 맛이거니와, 전국 팔도를 누비는 장사꾼들이 여럿 드나드는 곳이네. 보부상(褓負商)들 말이야.”이포교가 양념으로 나온 새우젓에 고기를 푹 담그며 중얼거렸다.“그러니 바깥세상 돌아가는 소식 듣기에는 제격이지.”“포교가 이런 곳에서 정보를 얻고 그럴 일이 많소이까?”“생각보다는 쓸 만하다네.”꾸역꾸역 고기를 씹던 이포교가 천우에게 사발을 건네며 말했다.“범죄자는 어디에서든 나타나고, 또 어디서 어떤 흔적을 남길지 모르거든. 이것저것 잡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야 그나마 대처할 수 있다네.”“명심하겠소.”“일단 한 잔 먼저 받게.”천우가 사발을 받아들자, 이포교가 술 한 잔을 넘치도록 따라주었다.사발에서 뭉근한 술향기가 풍겼다.“자네를 옥에 가둔 사죄의 의미일세.”이포교가 자기 사발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청했다.“지금 술 한 잔으로 퉁치려나 보오?”천우가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그럴 리가.”이포교가 투덜거렸다.“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일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지. 약조하겠어.”“흠.”“당연히 자네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 있을 것이야. 범죄자 취급을 하고, 옥에도 가두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나도 나랏일을 하는 입장에서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네. 고작 술 한 잔으로 자네 노기(怒氣)를 가라앉힐 수야 없겠지만, 우선은 이것으로 화해의 물꼬를 트려 하네.”이포교가 사발을 더 가까이 다가대며 말했다.“오늘 일. 미안했네.”진중하기 그지없는 얼굴과 목소리였다.술 한 잔으로 퉁치겠냐는, 반쯤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천우는 그런 이포교의 목소리에서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사내대장부답구려.”천우가 조심스럽게 사발을 들어올렸다.벌써부터 눈앞의 사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시원시원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이포교님의 사죄를 받아들이겠습니다.”“고맙군.”두 사내가 힘차게 사발을 맞부딪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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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잃은 자 (2)

  천우는 붉빛미르, 그리고 물빛미르에 대한 사실을 제외한, 세상에 비가 내림을 기원하는 집단에 대한 사실을 이포교에게 전해주었다.다 듣고 난 이포교의 얼굴에는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보게.” 이포교가 가만히 천우를 불렀다. “듣고 있네.”“자네 같으면, 그 기우사라는 술사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원할 때 비를 내리게 하고, 원할 때 그치게 한다는 것이 말일세.”“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네.” 지금껏 그리 살아왔던 천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평범한 세상에 속해있는 이포교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을 정리해보면…….” 이포교가 더듬더듬 말했다. “기우사였던 자네의 부친께서 2년 전에 한양 대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한성으로 오셨고, 그 와중에 변을 당해 아직까지 행방불명된 상태. 그래서 금화도감의 기록을 통해 아버님의 행방을 조사하고자 한다는 말인가?”“그렇다네.”“그리고 대화재를 일으킨 것으로 의심되는 배후 세력이 자네 아버님은 물론, 기우사 전체를 몰살시켰고. 함께 오셨던 그 지운이라는 노인장만 빼고.” 포교답게 정확한 정리였다.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포교에게 전하지는 아니하였으나, 2년 전에 벌어진 대화재를 기점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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