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얘기를?”
이포교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들어봤자 별거 없는 일개 포교 나부랭이 얘기를 뭐에 쓰려고?”
“내가 금화도감에 들어와야 했던 이유가, 이곳에서 일하는 당사자의 증언이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네.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얘기군.”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네.”
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포도대장께서는 이포교 자네를 좋게 평가하시더군.”
“그래? 영감께서 뭐라 하시던가?”
“자네를 신임하시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네. 금화도감에 남아있기는 아깝다고도 하셨고.”
<‘뭔가 급하게 마무리를 지은 느낌인걸.’2년 전에 큰 불이 났고, 갑자기 장대비가 내렸고, 물과 불이 만나자 수상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화재로 피폐한 백성들이 집단으로 증언한 망상이라는 것.관청에 정식으로 등록된 문서에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마치 그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듯 건조하고 딱딱하게 말이다.사건일지를 여러 번 들춰봐도 그것이 끝이었다.더 이상 2년 전의 한양 대화재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는 보이질 않았다.‘화재로 불탄 가옥이 2천 4백 7십채.’‘사상자는 3백여명.’‘대부분의 사인(死因)은 연기로 인한 질식.’‘복구에 필요한 나무를 캐기 위해 경상도에까지 파발이 당도하다.’애초에 금화도감보다 먼저 발생한 사건인 탓인지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은 듯했다.피해를 입은 가옥의 숫자, 사상자, 손실된 재산의 규모 등 행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백사성,기우사,붉빛미르 등등 천우를 괴롭히는 것들은 무엇 하나 모호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산술은 있으나, 천우에게 필요한 정보는 없었다.“후우…….”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사건일지를 살펴보고 난 뒤에 찾아드는 감정이 실로 천우를 맥 빠지게 했다.큰 산 하나가 가
불을 막으려다 죽고 다친 사람도, 불을 지르려는 범인을 막다 변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어느 농사꾼은 화상으로 팔이 떨어져나간 와중에도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는 내용도 있었다.지아비를 잃은 그 부인이 수절하면서도 매일 밤낮으로 울음 삼키며 홀로 된 아픔을 견디고 있다는 포청발 소식도 접하고 나니 마음이 심히 좋지 않았다.강 건너 어떤 고을에서는 부모가 모두 화재로 사망하여 일곱 살, 다섯 살 된 형제 둘만 남았는데 칡뿌리를 캐먹겠다고 산에 올랐다 형제 모두 호랑이에게 잡혀간 일도 있었다.방화는커녕, 일평생을 화기(火氣)와 거의 담을 쌓고 지내온 천우였다.밥을 짓거나 화전을 새로 일구어야 할 때, 불씨를 살린다고 장작 크게 넣었다가 불길이 번진 경우야 있었지만, 물을 다룰 줄 아는 천우에게는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불똥이 지붕으로 옮아 붙든, 숲속으로 튀어버리든 천우에게는 해가 되질 않았다.그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어디 양동이에서 물을 끌어오거나, 시냇물을 가져다가 뿌려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불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한양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체감하지 못할 사실이었다.비가 오지 않아 바싹 마른 논밭을 걱정하던 사람들만 익히 보아 와서 그런지,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한 터였다.새삼 불을 가벼이 여기던 자신이 반성이 되었다.울컥-갑자기 불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분노가 솟았다면,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었을까. * * *정신없이 사건일지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서고 절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햇수로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러니까 아버지 백사성이 한양 다녀오겠다며 집을 떠났던 그때, 그 시간이었다.‘드디어 아버님이 떠나셨던 2년 전의 기록이다.’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사건일지에 눈을 고정했다.한양이
‘관청의 문서를 읽는 것은 처음인데.’천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건일지를 펼쳐들었다.고향에서 읽던 저열한 서적과는 달리, 좋은 먹물과 종이가 조합을 이룬 정갈한 자료가 한눈에 들어왔다.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칠 사안들마저 기록한 현장의 수기(手記)하며, 예상되는 재산상의 피해와 사후 대책까지 마련되어 있었다.어지간히 꼼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흉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기름이 발화하면서 중등품의 질그릇 4개와 상등품 3개가 박살이 났고, 그 중에서 고쳐서 쓸 수 있을 법한 것은 6할로 추정된다.’‘옆의 유기가게로 옮겨 붙은 불이 천막의 1할을 태웠고, 유기 가게상인이 경상을 입었다.’‘금화도감과 인력 여덟을 동원하여 화재 초기진압을 노렸다. 기름에 의한 화재라 물 대신 흙과 공기차단을 우선으로 두었다.’‘때가 이른 소낙비가 내려 불을 한꺼번에 진압하였다.’‘화재를 일으키고 도주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형조에 넘겼다.’‘주요 참고인으로 간주된 1인을 금화도감에서 확보하여 자세한 내막을 조사할 예정.’기록을 살펴보던 천우는 ‘소낙비’라는 표현에 주목했다.때가 이른 소낙비가 내려 화재를 진압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청에 있는 사람들 눈에도 천우가 일으킨 신비는 희한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또한, 범인이라고 지목된 기록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얼른 그 곰보 왈패 놈을 체포해야 도둑맞은 기우사의 목걸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곰보 이 놈…….’한동안 잊고 있었던 곰보의 얼굴이 떠올랐다.워낙 바쁘게 돌아간 지난 이틀 사이에 곰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는데, 이렇게 다시 되뇌게 되니 끔찍하게 반가웠다.‘포청에도 들러야겠군.’흔한 장신구가 아니니 장물이나 암시장 같은 곳에서 발견됐을 수도 있고, 곰보가 이미 추포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어쨌거나 이포교가 얼른 돌아오고 볼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시간이 더디게 흐릴 것만 같았다.‘그나저나, 여기에 참고인이라고 표기된 사람이 직접 이 기록을 읽고 있을 경우가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한양 저자는 사람들과 물건들로 일찍이 북적이고 있었다.토목 공사 떠나는 인부들 먹이려는 가마솥 국밥이 펄펄 끓는가 하면, 또 어느 한쪽에서는 공중에 매달아놓은 아낙네들 장신구 따위가 쨍쨍- 소리를 내고 있었다.행인이 제법 있어 부득불 어깨를 접어야했다.이포교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천우를 한양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다 왔네. 우리 일터.”길이 넓게 퍼져있고, 주변 가옥들이 모두 지붕이 낮아 탁 트인 곳이었다.한성부 앞에 서 있었다.처음 여기 들어올 때는 끌려오다시피 한터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지만, 다시 보니 널찍하고도 우뚝 솟은 벽이 단단한 요새를 방불케 하는 외관이었다.높게 위치한 누각 위며, 정문에도 장병기로 무장한 군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이곳에서 한양의 많은 행정업무가 처리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나랏일하는 곳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들어가세.”이포교가 앞장서며 말했다.정문을 지나 관청 안으로 들어간 그들을 곧장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안쪽으로 향했다.일찍 등청한 관원들을 여럿 지나쳤고, 그중에 이포교를 알아본 몇몇과 짧게 인사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관옥이 하나 나왔다.금화도감이었다.다른 관옥에 비해 초라하다 할 만큼 작고 초라했으나, 현판에 쓰인 ‘禁火都監’이라는 네 글자 글귀만큼은 힘이 넘쳐보였다.&l
‘전해드릴 말이라도 있나? 오늘 돌아오신다면 내가 대신 말씀드리고.‘아닙니다, 딱히 그런 것은…….’‘그럼 조심히들 가시게.’그렇게 김초시와 수작을 마친 두 포교가 집을 나섰다.옆에 함께 걷던 이포교가 어찌나 풀이 죽어 있던지 천우가 되레 눈치를 보며 보폭을 맞출 정도였다.“저기, 음…….”천우가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이포교. 자네 괜찮나?”“나 말일세.”이포교가 대뜸 대답했다.“어어, 얘기하게.”“나도 자네와 함께 저 집에서 식객으로 있을까보네.”“어?”“좋지 않은가? 포교끼리 한집에서 먹고 자고 하다보면 사이도 돈독해지고, 이래저래 부족한 부분도 채워줄 수 있을 터이고…….”“자네 진짜…….”천우가 기가 막혀 뒷말을 흐렸다.“어리 그 여인에게 홀딱 빠졌군.”“티 났나?”이포교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혹여 어리가 품속에 안아주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도 남을 위인이었다.“당연하지, 이 친구야.&rd
“일어나게, 이 친구야!”꿈결 속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천우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조금씩 눈을 떴다.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찾아들고 있었다.밤새 타오른 군불 때문인지 누워있던 방안 공기가 제법 후끈했다.“언제까지 누워 있을건가? 일어나라니까.”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포교였다.이포교가 옆자리를 치우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구수한 밥 냄새가 방안에 그득하다 싶었는데, 언제 내왔는지 두 사람 몫의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쌀과 콩을 섞은 밥과 간장으로 간을 한 나물 반찬이 정갈하게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솟는 된장국에는 두부까지 들어 있었다.“웬 밥상인가?”천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포교는 방금 전에 김초시가 들고 온 것이라며, 식기 전에 한술 뜰 것을 권했다.“대감마님께서 특별히 잘 챙겨주라 하셨다는군.”“대감마님이?”“그래. 오랜만에 온 손님인데 절대 배곯게 할 수 없다고 그러셨다네. 지금은 집에 있는 게 없어서 이 정도이지, 밤에는 갈비짝이라도 내온다 하셨다더군. 내가 예전에 여기 머물 때 보다 훨씬 씀씀이가 커지셨어. 자넨 정말 내 덕에 복 받은 줄 알게.”“이 빚은 꼭 갚겠네.”“웃자고 한 얘기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