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빛미르가, 이방원의 몸을 빌어 눈앞의 이성계를 노려보았다.“결국 세상 밖으로 나왔군.”“긴말하지 않겠다.”“네놈이 얼마나 이성계 그 인간을 아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었다. 내가 더 잘 알아.”“숨지 말고 나오라, 붉빛.”“오랫동안 물속에만 몸 담그고 있더니 이제야 좀이 쑤시더냐? 이제야 세상 한 번 다스려보겠다는 마음이 솟았어?”“다스리는 것에는 관심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을 뿐이야.”“그래서 네놈은.”이방원. 아니, 붉빛미르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날 이기지 못하는 거다.”서서히 이방원의 몸에서도 열기가 솟기 시작했다.물빛미르의 찬 기운과, 붉빛미르의 열기가 새하얀 수증기가 된 채로 근정전 전체를 뒤덮었다. * * *근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력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다름 아닌 대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 때문이었다. 높은 담장 너머로 엄청난 양의 안개가 뿜어져 나오더니, 언제부턴가 창칼이 부딪히는 쇳소리 외에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굉음도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주군의 명이 있었으니 한발자국도 여기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그러나 거기 모인 대부분이 무기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겁을 먹고 있었다.세상 그 누구도 눈앞의 광경 앞에서 평온하기는 힘들 것이었다.근정문 안쪽에서 솟은 안개의 벽 너머로, 드문드문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비쳐들고 있었다.용? 그래, 용이었다. 용이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 없는 형상이었다.긴 주둥아리에 길고 굵은 목, 다 자란 통나무만큼이나 두터운 다리, 그리고 낫과 같은 발톱.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길쭉한 몸체가 용이 아니고 무엇이랴.안개 속에서, 용의 그림자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두 마리였다. 둘은 서로의 명줄을 끊어놓겠다는 듯 맹렬하게 물고 뜯고 싸웠다.발톱은 산맥을 할퀼 듯했고, 포효는 바다를 가를 듯했다. 화약(火藥)이 폭발한 것처럼 안개 속이 시뻘겋게 물
Last Updated : 2026-03-23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