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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제대로 키스하면, 못 본 걸로 쳐줄게.

그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세레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짓눌렀다. 붉은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 밀려 힘없이 벌어지자, 카르안이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상체를 바짝 밀착해왔다. 그의 단단한 몸이 세레인의 가슴을 단단히 압박했고, 허벅지 아래로 맞물리는 열기에 세레인은 숨이 턱 막혔다.세레인이 굳어버린 틈을 타, 그의 길쭉한 팔이 다시 서랍 손잡이로 향했다.딸깍.불길한 마찰음과 함께 서랍이 당겨지는 순간, 세레인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으으응……!”세레인은 비명 대신 콧소리를 내며 카르안의 목을 왈칵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 허벅지와 엉덩이로 열리려던 서랍을 거칠게 밀어 닫아버렸다.평소 같으면 닿는 것조차 질색하는 여자가 제 발로 가랑이 사이에 올라타 매달리는 꼴이라니. 카르안의 머릿속에 불쾌한 가설이 스쳤다.이 정도로 숨기려는 게 대체 뭐지? 설마 그 망할 기사 놈이랑 연서라도 주고받은 건가.질투로 얼룩진 카르안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기색에 세레인이 움찔하는 찰나, 카르안이 세레인의 턱을 돌려 잡고 거칠게 입을 맞추어 왔다.“으읍……!”괘씸해서 벌을 주려는 듯 숨을 집어삼킬 듯한 진한 키스였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릴 것 같은 자극 속에서 세레인은 숨을 헐떡였다.세레인이 흥분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 카르안의 한 손이 세레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은밀하게 움직였다.스윽.그의 긴 손가락이 닫혀있던 서랍을 가볍게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노트를 낚아챘다. 입술을 살짝 뗀 카르안은 세레인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리며, 훔쳐낸 노트를 세레인의 품에 슥 쥐여주었다.“이걸 그렇게 숨기고 싶었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레인이 번쩍 눈을 떴다. 품에 닿는 겉 종이 질감을 확인한 세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뒤 재지 않고 노트를 바닥으로 확 내던져버렸다.그러나 그 짧은 찰나마저 불운했다. 세레인이 평소에 가장 자주 펼쳐 들여다보았던, 유독 손때가 탄 페이지가 활짝 펼쳐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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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세레인 드 아르빌

달빛이 창백하게 퍼진 뒷골목에서, 검은 외투를 두른 사내가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복면을 깊게 눌러쓴 그는 주변을 신중하게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디켄 오브리엔 공작이었다.복면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외투 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우편 관리인 하나 매수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디켄은 조용히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인을 뜯고 안의 편지를 꺼내자, 꼼꼼하게 눌러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받는 이: 칼데론의 베르나 마을 식료품점, 마델렌 아주머니][보내는 이: 리베르츠 가, 리나]그 아래 접힌 편지지 하단. 누군가 손에 힘주어 적은 글자가 디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레인.다음 날, 오브리엔 공작저의 비밀 회의실.테이블 위에는 뒷골목에서 가로챈 편지와 함께, 칼데론 왕국의 가계도 기록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디켄은 마침내 한 페이지에서 손가락을 멈추며 낮게 읊조렸다.“세레인 드 아르빌.”맞은편에 앉아 대조 작업을 돕던 자렐 오브리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아르빌? 저는 처음 듣는 가문입니다만.”“그럴 만도 하지. 몇 년 전에 완전히 몰락해 멸문당한 칼데론 왕국의 백작가니까.”디켄이 수년 전 칼데론과의 거래 장부를 자렐의 앞으로 밀어주었다.자렐은 아버지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며, 얼마 전 전달 받은 전황 보고를 떠올렸다. 리하우와의 충돌 소식. "얼마 전 북부 국경지에서 기사단과 리하우 놈들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리하우 쪽에서 심어둔 첩자일 수도 있습니다.""그럴 수도 있다. 칼데론과 분쟁 중이니 제국의 황제 곁에 붙일 눈과 귀가 필요하겠지. 정체가 탄로나면 곤란하니 일부러 끄나풀을 접근시킨거고...... 애초에 저 아르빌 백작가가 내통하던 반역자 무리였으면 더더욱이다."자렐이 조소 어린 미소를 띠고 와인잔을 내려다보았다."아버지, 만약 이 가설이 맞고, 저 천출 계집 배후가 리하우 왕국이라면......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운 시릴 베르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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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특이한 선물

예무부 디자이너들이 잘게 쪼개지는 발소리를 내며 서둘러 가림막 뒤로 물러섰다.중앙궁 별실의 넓은 가림막 안쪽, 세레인은 제 손에 쥐여진 고급 실크 드레스 자락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화장품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제 얼굴은 낯설었고, 허리를 조여오는 코르셋은 숨통을 턱턱 막히게 했다.“……저, 폐하.”세레인이 조심스럽게 가림막 틈새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그를 불렀다. 카르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그녀를 향했다.“응, 세레인. 사이즈가 맞지 않아?”“그게 아니라…… 제국의 귀족 영애들도 아닌 고작 시녀인 제가 이런 드레스를 입고 대공의 연회에 참석하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까? 베르탄 공작 각하께서 아시면 기절하실 겁니다.”어떻게든 이 미친 동행을 무르고 싶어 시릴 베르탄의 이름까지 팔아보았지만, 카르안은 되려 피식 실소를 터뜨릴 뿐이었다.“시릴이 고작 그런 일로 기절할 리가. 그리고 넌 짐의 ‘개인 시녀’ 자격으로 공식 수행하는 거니 법도에 위반될 건 없지.”카르안이 일기장을 엄지로 튕겨내듯 두드리며 잔인하게 쐐기를 박았다.“아니면, 대공의 연회 대신 지금 당장 이 일기장에 적힌 ‘까만 대가리 정신이상자’라는 단어에 대해 황실 모독죄로 처벌을 받고 싶어?”“……아닙니다! 제가 끝까지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세레인은 단박에 꼬리를 내리며 가림막 뒤로 머리를 처박았다. 저 얄미운 황제가 이 족쇄를 아주 야무지게 써먹을 작정임이 분명했다.그 시각, 황궁의 대연회장은 마치 제국의 영광 자체를 옮겨놓은 듯 찬란했다. 천장은 눈부신 황금빛과 보석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회장 한편에서는 악단이 장엄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고, 무희들과 공연단이 황제의 행차를 앞두고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황제의 입장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연회장 내부의 분위기가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다.연회장 입구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오브리엔 공작가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레이나 오브리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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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대공님

대공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냉정했다. 계단 아래에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아리따운 귀족가 영애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세레인은 솔직히 빼어난 용모도 아니었다. 제 사촌 동생인 황제가 도대체 저 시녀의 어디에 매료되어 이 자리까지 대동했는지, 대공의 머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공의 선물은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앉지.” 카르안이 가볍게 응수하며 세레인의 어깨를 감쌌다. 세레인은 겉으로는 옅은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제발 보지 마세요……. 안 그래도 가시방석이니까. 나라고 좋아서 따라온 게 아니란 말이야. 그 숨 막히는 응시를 깨뜨린 건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대공 전하, 오늘처럼 기쁜 날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면 연회장 분위기가 다 얼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시녀이니, 전하께서도 귀엽게 봐주십시오.” “베르탄 공작이 그리 말하니 내가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만.” 잠시후, 아쉔은 중앙 계단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연회장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공은 옅은 미소를 띠며 황금빛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제 생일이기도 하지만, 발테리움 제국의 영광을 함께 기념하는 밤이기도 합니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부디 모두, 이 밤을 마음껏 즐겨주시길." 대공의 묵직한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지자, 귀족들이 일제히 잔을 부딪치며 환호했다. 악단의 장엄한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화려한 마법 조명들이 연회장을 오색빛으로 물들였다. 카르안은 유유히 황좌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세레인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혹은 앉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런 거창한 자리는 몰락하기 전 백작가 영애 시절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대단한 자리였다.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으려 슬쩍 카르안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의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려던 찰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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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네 자리는 내 옆이야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레이나 오브리엔 공녀의 뒷모습은 세상 그 어떤 영애보다 화려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뒤로한 채, 중앙 상석에 남겨진 세레인은 그저 뻘하게 앉아 슥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주변에 흐르는 공기는 여전히 숨이 막혔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바로 옆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쉔 대공을 포함해서 방계황족들까지.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은 특유의 잔을 가볍게 들어 아쉔 대공을 향해 건넸다.“대공 전하, 생일 축하드립니다.”“고맙군, 베르탄 공작.”아쉔이 묵직한 목소리로 답하며 잔을 부딪쳤다. 딱딱한 아우라는 여전했으나, 사촌 동생이 남기고 간 묘한 즐거움 때문인지 입꼬리를 올리며 앉은 이들과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세레인은 이따금 닿는 시선들이 불편해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리고 제 앞 탁자 위에 놓인 화려한 와인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와인을 그대로 꿀꺽꿀꺽 들이켰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후…… 살 것 같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잔이 비어버리자 세레인은 머쓱한 듯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릴이 눈매를 접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잘 마시네요, 리나 양.”시릴은 세레인의 빈 잔에 붉은 와인을 쪼르르 더 따라주었다.“아, 감사합니다, 공작님.”세레인은 감사합니다 인사하면서 또 주는 대로 잔을 홀짝였다. 달콤한 액체가 들어갈 때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말랑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무도회 중앙에서는 카르안과 레이나의 춤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이나 오브리엔의 수려한 얼굴은 이미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비록 시작은 매끄럽지 못했으나, 지금 이 순간 수많은 귀족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으며 무대 중앙의 주인공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무엇보다 자신을 리드하는 카르안의 손길이 완벽했다. 제 허리를 감싸 쥔 그의 단단한 손길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레이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설레어왔다. 카르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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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돌덩이 시녀

담소를 나누던 아쉔 대공과 방계 황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지만, 카르안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세레인만 내려다볼 뿐이었다.“춤? 술 먹는다고, 내가 아래에서 뭘 하는지 보기는 했나?세레인은 술기운으로 몽롱해진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보았지만, 심술이 잔뜩 난 아이 같은 황제의 심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아, 그... 다 봤어요. 엄청 번쩍번쩍 화려하게 잘 추시던데요…….”세레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름대로 칭찬이랍시고 건넨 말이었지만, 카르안의 인상은 더 구겨졌다. 다른 여자랑 춤 추고 있는 걸 다 보고서도 시릴이 주는 술이나 받아먹고 그렇게 헤벌레 웃고 있었다는 말이지.카르안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턱짓으로 세레인의 뺨에 감도는 홍조를 가리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경계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네? 독주를 주는 대로 홀짝홀짝 잘도 받아먹고." "독주가 아니고 와인인걸요. 그리고 공작님이 친절하게 따라주신 거라…….” 제국의 황제를 눈앞에 두고, 다른 사내의 호의를 두둔하는 세레인의 태도는 카르안의 인내심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너.”낮게 내리깔린 황제의 목소리에 세레인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러면 제국의 공작님이 주는 건데 나더러 그 앞에서 '저는 안 먹습니다.' 이렇게 하기라도 하란 말이야?두 사람의 유치한 대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시릴은, 제 이름이 언급되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폐하, 그나저나 저 아래 오브리엔 영애는 저렇게 바람맞혀 두고 오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대 중앙에서 폐하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만."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도발이었다. 카르안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받아쳤다.“베르탄 공작. 공녀 걱정을 해줄 정도로 심심하면, 저기 계속 네 쪽 쳐다보는 영애들이랑 춤이나 추러 가지 그래?”“아하하,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만.”시릴이 어깨를 으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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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하녀 주제에

무대 중앙의 왈츠는 마침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카르안의 능숙한 리드 덕분에 세레인은 몇 번이나 넘어질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음악의 템포가 서서히 느려지며 마지막 선율이 연회장의 높은 천장으로 흩어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세레인의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혔다. 술기운에 숨이 가빠오자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카르안은 받치고 있던 세레인의 허리에서 살짝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지만, 수십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 위였다. “수고했어, 내 파트너.” 카르안이 낮게 속삭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세레인은 발목을 슬쩍 움직여 보더니, 제 발에 몇 번이나 밟힌 카르안의 신발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폐하…… 진짜 발 괜찮으세요? 계속 밟아서 죄송해요. 발가락 다치신 거 아니죠?” “미안하면 네가 치료해주던가.” 카르안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세레인이 술기운에 비틀거리자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세레인은 이제 체면이고 뭐고 따질 기운도 없어, 덥석 황제의 팔을 붙잡고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이 무대를 빠져나오자, 연회장에는 폭풍 같은 박수갈채와 수군거림이 동시에 쏟아졌다. 황제가 시녀의 발을 맞춰주며 춤을 추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일 아침 사교계는 발칵 뒤집힐 터였다. 연회장의 열기가 절정에 달할 무렵, 세레인은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카르안은 대신들과 아쉔 대공에게 둘러싸여 외교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더 여기 있다간 술이 깨는 게 아니라 내 머리가 터지겠어. 세레인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상석을 탈출했다. 다행히 귀족들은 세레인을 그저 ‘황제의 기행에 이용된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였기에, 대놓고 길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무도회장과는 거리가 먼, 한적한 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세레인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 막히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혼자만의 안락한 공간이었다. "아휴,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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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누가 감히 너를

사교계의 정점에서 온갖 교활한 권모술수를 배우며 자란 레이나에게, 일개 하녀의 반박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레이나는 제 손을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상처받은 세레인을 향해 더 사정없이 모욕을 퍼부었다.“입 닥쳐, 해충 같은 년아. 네년이 폐하의 이름을 그 주둥이에 담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다. 네까짓 게 폐하의 곁에 머무는 매 순간이 제국의 수치고.”세레인은 내리꽂는 독설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으려 입술을 꽉 악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하고서도 세레인은 레이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제가 원해서 이 궁에 온 게 아닙니다. 폐하가 억지로 데리고 가신 건데, 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뭐?”“폐하 앞에서는 감히 한마디도 못 하면서. 내가 만만하니까 여기 와서 화풀이하는 거잖아요. 그깟 춤이 뭐라고!”서러움에 받쳐 내뱉은 항변이었으나, 감히 제국의 주인을 탓하는 시건방진 태도에 레이나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이제는 네년이 폐하의 뒤에 숨어 책임을 전가하는구나.”레이나가 다가와 세레인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채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세레인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아아악!"레이나는 세레인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주제를 알아. 그리고 똑똑히 들어. 만약 오늘 일을 쥐새끼마냥 폐하께 전하기라도 한다면, 넌 이 제국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내 오라버니 자렐은 제국의 핵심 군부 귀족이며, 그가 움직이는 병사만 3만 명이다.”3만 명.칼데론 왕국에서는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가문을 걸어야 사천에서 육천 명 안팎의 군세를 소집할 수 있었다. 아직 승계도 안 한 공작가 영식이 무슨 군사를 3만 명이나 부린단 말인가? 에나에게 들었던 오브리엔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비로소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다.“네가 이 제국에서 발을 딛는 곳마다, 숨을 쉬는 길목마다 우리 가문의 눈과 귀가 널 쫓을 것이다.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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