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 Chapter 31 - Chapter 40

All Chapters of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Chapter 31 - Chapter 40

59 Chapters

31화. 불경한 시녀를 길들이는 법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입에 찻물을 머금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옷깃을 잡으려다 멈췄다. 여전히 순종하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은 지키려는 눈빛. 어디까지 밀어붙이면 무너지나 싶어 던진 농담이었고, 그저 놀려보고 싶었을 뿐인데.시녀가 입술을 달달 떨며 얼굴을 들었을 때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입으로 시중을 들라니. 황제의 체면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 시녀 한 명의 사소한 표정 하나가 보고 싶었을 뿐. 입술이 붉어지고 눈이 흔들리던 그 열기 띈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입술에 미세한 웃음기가 어렸다. 차 한 모금으로 시작된 이 장난이 그녀를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지 이제는 그게 궁금해졌다. ***황궁 대회의실 안.정적 속에서 재무국 고문 마르셀 다우렌이 서류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따라서 카스피안 요새의 추가 증축안은 반려입니다. 현재 추가예산의 최우선 순위는 황궁 외곽 운하 사업입니다.”마르셀의 거절에 북부 총사령관 블레이크 에르빈 공작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작, 요새의 균열을 방치하겠다는 뜻입니까? 북부 마물들의 출현 주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이미 지난 번에도 보고했을 텐데요.”블레이크의 묵직한 압박에 엔리망 마르크 후작이 말을 툭 던졌다. “에르빈 공작님, 제국의 창이라 불리는 군부가 어째서 자꾸 성벽 뒤로 숨으려 하십니까? 나가서 베어 넘기면 될 것을, 왜 자꾸 벽 뒤에 숨는 데 예산을 쓰려 하시는지 모르겠군요.”노골적인 비아냥에 블레이크 에르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때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이 끼어들었다. “기세만으로 국경을 지키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마르셀 백작, 방벽 증축 예산을 우선 배정하세요. 내무부의 최종 결정입니다.”시릴이 직권으로 쐐기를 박으려던 찰나 로데릭 무르젠 후작이 깃펜을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말을 가로챘다. “내무대신 각하, 그건 너무 독단적인 결정 아닙니까? 운하 사업은 이미 상무회와 수많은 영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Read more

32화. 르브단 시찰

르브단 시찰은 갑작스레 정해졌다. 황제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내일 아침, 르브단으로 간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다음 날 아침, 세레인은 시종들이 마차를 정비하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금장으로 장식된 거대한 마차와 그 앞을 호위하는 기사단. 이른 시각부터 불려 나온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전날 밤, 제 턱을 잡아 올리던 황제의 손길과 입술에 닿던 그 뜨거운 감촉이 여전히 생생했다. 제발 오늘은 조용히 넘어가길 빌었건만, 그 바람은 마차 앞에 선 카르안을 마주하는 순간 박살 났다.“시녀, 타라.”뒤에서 들려온 낮고 단정한 음성. 카르안은 푸른 제복 위로 망토를 걸친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네, 알겠습니다.”말은 순순히 따랐지만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카르안은 마차에 먼저 올라타며 제 옆자리를 가볍게 손으로 가리켰다. 또 죽을 듯이 싫다는 얼굴이네. 세레인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창가 끝에 몸을 틀어 앉았다. 마차 안은 고요했고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세레인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응시하며 속으로 계속 궁시렁거렸다.이 또라이… 무슨 짓을 하려고 옆에 타라고 한 거지? 또 이상한 짓 하면 확 문 열고 뛰어내릴 거야. 그의 입술과 낮게 울리는 목소리. 부정하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쩌면 그는 이 좁은 공간에서 자신의 반응을 즐기려는 것일지도 몰랐다.절대 틈을 보이지 말자 세레인. 어제처럼 말려들지 않을 거야.하지만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은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조금씩 늘어지기 시작했다.아, 안 돼! 자면 안 돼…! 세레인은 손바닥을 손톱으로 짓누르며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는 어느새 그녀의 의식을 갉아먹고 있었다. 결국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기울었다.카르안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제 어깨 쪽으로 조금씩 허물어지는 시녀를 무심히 응시했다. 그렇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Read more

33화. 이제 와서 나가겠다고?

밖으로 나와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신관 중 한 명이 황제와 그녀를 안내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르브단은 제국에서도 오래된 도시입니다. 처음엔 그저 강과 맞닿은 조용한 마을에 불과했죠. 특히 황제 폐하의 조부께서도 살아계시던 시절 이 신전을 자주 찾으셨습니다.”그 말에 걸음을 멈춘 이는 황제였다. 얕은 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다.세레인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말투도 표정도 늘 위압적이고 무서운데. 저 사람도 누군가의 어린 손자였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황제도 그리움 같은 걸 느끼겠지?세레인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전 자신의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너는 아직도 책보다 창 밖 구경이 더 좋으냐?”어린 세레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서재에 앉아 조용히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고 눈빛도 매서웠다.그리고 그 옆에 말없이 앉아 있던 사람이 있었다.아버지.조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어린 그녀의 앞에 조용히 과일 접시를 밀어주던 손. 기억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눈 앞의 풍경이 일렁였다.그만 세레인, 그만 생각해.몰려오는 무거운 감각에 그녀는 고개를 위로 휙 올려 억지로 기억을 끊어냈다.“…이곳의 조용함을 좋아하셨죠. 제국이 다소 들끓던 시절 이 르브단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 같았으니까요.”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신전 옆 벤치를 가리켰다.“잠시 쉬시겠습니까, 폐하.”카르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나무 그늘 아래로 이동했다. 잠시 후, 신관이 다시 다가왔다.“폐하, 곧 기도 의식이 있습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카르안은 한쪽 다리를 자연스럽게 꼰 채 다소 느긋한 눈빛으로 신관을 바라봤다.“기도라.”“간단한 의식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카르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좋다. 해보지.”신관이 안내하자 카르안은 발걸음을 옮겼고 세레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그림자가 하늘색 대리석 위에 길게 드리웠다.“제국의 시조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Read more

34화. 시녀는 참지 않는다

“이제 와서 나가겠다고?”카르안이 낮게 읊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좁혀진 거리만큼 그의 서늘한 체취가 목욕물의 열기를 짓눌렀다. 세레인은 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침대 기둥에 등이 닿아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카르안의 시선은 느릿하게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얇은 실크 아래로 비치는 가슴의 굴곡과 짧은 밑단에 머물렀다.……이 정도로 정성을 들인 시중이라면 꽤 만족스러운데.카르안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영주 놈이 제멋대로 판을 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굳이 바로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소 단정한 시녀복 속에 감춰져 있던 몸이 이런 선을 그리며 제 눈앞에서 떨고 있는 광경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였으니까.“그쪽에서 정한 거잖아. 나야 모를 일이지.”“…네?”세레인은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지만, 카르안은 여전히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쭉 뻗을 뿐이었다.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나 평온하고 나른했다. 세레인은 순간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제국의 황제라면 시녀에게 겉옷이라도 던져주며 비키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헛된 기대.“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제 방으로 가보겠습니다.”세레인은 숨을 깊게 들이키며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당장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고 반쯤 젖히려는 순간, 복도 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발소리와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아차 싶었다.……이 꼴로 복도를 어슬렁거린다고?이대로 나갔다간 내일 아침 황제를 유혹하려다 밤중에 쫓겨난 시녀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세레인은 멈춰 선 채 떨리는 눈으로 카르안을 돌아보았다. 제발 누구라도 불러서 안내해주라고 한마디만 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고개만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 평이롭고 나른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오히려 더 큰 굴욕을 안겼다.“왜. 복도에 사람이 있어?”정곡을 찔린 세레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카르안의 그림자가 세레인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나가보든가. 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7
Read more

35화. 폭군의 변덕

“요즘 재정은 어떻게 돌아갑니까.”군부 쪽 귀족 하나가 화제를 돌렸다.“세율 조정 후로는 전반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중입니다.”황제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들었다. 그제야 식탁 위의 긴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잔이 채워지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잠시 후,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식사는 여기까지 하지.”그는 귀족들에게 시선을 천천히 돌린 뒤 세레인을 향해 말했다.“따라와.”명령이었다. 세레인은 잠깐 멈칫했다.도망치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저 황제의 명이 이 진저리 나는 공간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그녀는 자신을 조롱하듯 속으로 비웃었다.세레인,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거야? 영주든 황제든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그럼에도 발이 천천히 움직였다. 세레인은 그의 뒤를 따라걸었다.오늘 자신은 거대한 탁자 위에 올려진 물건 같았다. 품평 당하고 값어치가 매겨지는 대상. 그리고 황제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자기를 그런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고된 일보다도 훨씬 지독했다. 그냥 고서 반나절 동안 정리하는 게 훨씬 낫지.그는 말 없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세레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유달리 지쳐서인지 손에 힘줄 여력이 없었다.황제는 손등을 살펴보며 조용히 말했다.“아직 조금 붉어.”그 말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이었다.상처는 이미 낫다시피 했지만, 마법이 그녀 안에 숨어 있던 감정까지 함께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세레인은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망할 놈.“오늘 자리는 불편했을 거다.”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습니다.”시선 집중될 걸 알고도 일부러 데려간 거면서. 가증스러워.황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붉은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세레인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폐하께서는 다 아시면서 왜 저를 데리고 다니시는 건가요?”세레인이 말을 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7
Read more

36화. 르브단의 노을

호숫가의 공기는 고요했다.하늘은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고 잔잔한 바람이 물결 위를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세레인의 손에 들린 자수틀은 어느새 무릎 위에서 느슨하게 기울어 있었다.그때,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졌다. 카르안이었다.“여기 있었네.”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잔디밭에 무릎을 굽혔다. 검은 머리칼엔 금빛 햇살이 비쳤고 붉은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짙게 보였다. 세레인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폐하께서… 왜 여기에…”“르브단 영주가 만찬 준비로 자리를 비웠다. 네가 무료할 것 같아서.”그의 눈길이 자수틀에 닿았다.“그건 누구 줄 건가?”“…이건 그냥 연습입니다.”그녀는 대충 얼버무리며 바늘을 집어 들었다. 바늘 끝이 손가락을 스쳤고 그녀가 작게 소리를 내자 카르안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이렇게 다칠 거면 왜 해?”묘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자수 연습해 두면 나쁠 건 없으니까요. 나중에 필요할 때도 많고…”그녀의 말에 카르안은 시선을 내렸다. 실이 꼬여 형태가 모호한 꽃 모양을 바라보며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이건 꽃이야?”“…네.”“못생겼네.”“폐하!”세레인이 단박에 항의하려는 찰나 그의 손이 조용히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세레인은 숨을 멈췄다.“누가 봐도 못생긴 건 맞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세레인이 시선을 피하자, 카르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너, 이거.”황제는 긴 손가락으로 허술한 자수 꽃무늬를 가리켰다.“네?”“계속 가지고 있을 거야?”“아, 아니요. 제가 쓸 건 아닌데…그냥 여성용으로 만들었어요.”“그럼, 이건 내 거다.”“네?”세레인이 놀라서 그를 바라봤을 때, 황제는 자수가 아닌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세레인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시선을 호수 너머로 고정하고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보았다.바람이 불어와 세레인의 치맛자락이 살짝 살랑거렸다. 황제는 여전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8
Read more

37화. 내 몸이 그렇게 탐나나?

방문을 잠글까 말까.세레인의 손가락이 차가운 금속 잠금쇠 위에서 머뭇거렸다.사실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어제의 그 기묘한 빛이 어깨에 내려앉던 순간처럼, 카르안은 언제나 예고 없이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곤 했다. 하지만 어젯밤, 제 입술을 집어삼킬 듯 눌러오던 그 생경한 감촉은 르브단의 차가운 공기보다 더 선명했다.…생각보다 부드럽고.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세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오만함도 사람을 제 뜻대로 휘두르는 그 무심한 눈빛도 진저리나게 싫은 게 맞는데. 머릿속의 이성적인 거부감과는 별개로 심장 부근에서 일렁이는 이 기묘한 생리적 반응이 도무지 통제되지 않았다.결국 세레인은 잠금쇠를 반쯤 돌리다 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다음 날 아침. 르브단 영주는 황제의 기색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폐하, 간밤에는 르브단의 정취가 폐하의 휴식에 방해되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신전의 기운이 너무 차가워 잠자리가 불편하셨다면 당장 침구를 ...”“평소보다 깊게 잤다. 르브단이 생각보다 조용한 도시라... 아, 자극적인 게 있긴 했지.”카르안은 나른하게 대답하며 물잔을 들었다. 곁에서 물병을 들고 대기하던 세레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극적인 것.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직감한 세레인은 비어가는 그의 잔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물을 더 채워드릴까요, 폐하.”카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잔을 내밀었다. 찰랑거리며 물이 차오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찰랑거리며 물이 차오르는 동안 카르안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안색이 어제보다 못한데.”카르안의 무심한 지적에 세레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 때문이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핑계를 댔다.“방 안이 생각보다 건조해서 잠을 좀 설쳤습니다. 르브단의 공기가 워낙 신비롭다 보니 적응이 필요한 모양입니다.”“그래? 브리스보다 여기가 더 불편한 건가.”카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9
Read more

38화. 어린 황제의 낙서장

다음 행선지는 르브단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소였다. 번잡한 광장을 지나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거짓말처럼 시야가 탁 트이며 '하늘의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보리색 석재 기둥들이 웅장하게 원형으로 늘어선 그곳은 신기하게도 천장의 절반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푸른 하늘이 원형 액자 속 그림처럼 담긴 모양이었다.길을 안내하던 영주는 성소의 입구에 다다르자,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폐하, 영적인 기운이 강한 성지에 여러 명이 발을 들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인지라, 저희는 이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카르안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까딱이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카르안은 성소를 찬찬히 바라보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난간에 팔을 비스듬히 기댄 채 멈춰 섰다.“여기는 선대황제… 나의 조부께서 가장 좋아하셨던 곳이다.”그는 하늘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 그분을 따라 이곳에 한 번 온 적이 있었지. 그때 그분은 내게 이곳의 소리가 가장 정직하다고 하셨다. 지붕이 없으니 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말이야.”세레인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살폈다.“조부 되시는 선대 황제 폐하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응. 평소에는 엄하셨지만 집무실에서 가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제국의 지도를 그려주곤 하셨다. 내가 옆에서 이건 뭐냐고, 저건 뭐냐고 덧칠하며 방해하는 통에 낙서장으로 변하곤 했지.”낙서하는 어린 황제의 모습이라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데.“폐하께서 낙서를 하셨다니 상상이 잘 안 가요. 어떤 걸 물으셨기에 지도가 낙서장이 된 건가요?"“제국의 끝에 뭐가 있는지, 바다 너머에는 신이 사는지 같은 것들. 그때의 나는 황손이 아니라 그저 궁금한 게 많은 어린 아이였으니까.”그때, 허공을 응시하던 카르안의 시선이 세레인에게로 향했다.“너는 어땠지? 너의 조부도 너한테 지도를 그려주셨나?”갑작스러운 질문에 세레인이 멈칫했다.“…아니요. 제 할아버지는 예법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0
Read more

39화. 그림자 밖으로

르브단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조용했다. 세레인은 방 안 침대 한편에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옷가지와 짐들은 이미 다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수에 시선이 닿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지난 일들이 되풀이되었다.호숫가 앞에서의 키스 그리고 오늘 성소에서 보았던 짓궂은 소년 같기도 하면서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모습까지.“후, 세레인. 뭘 생각하는 거야?”왜 나는 거부하지 않았을까. 왜 그림자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다정한 척하는 미인계에 정말로 마음이라도 내어준 걸까. 세레인은 밤새 잠을 설쳤다.다음날 아침, 르브단을 떠날 채비를 하던 세레인의 방에 앳된 얼굴의 하녀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자수실을 줬던 하녀였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가죽 서류함이 들려 있었다.“저, 아가씨… 실례합니다. 폐하께 온 서류함인데 전령이 잠금장치를 덜 채웠나 봐요. 제가 옮기다 덜컥 열리는 바람에 내용물이 섞여버렸는데… 폐하가 아시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순서만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겁에 질린 하녀의 부탁에 세레인은 서류함을 받아들었다. 세레인은 흐트러진 순서를 맞추기 시작했다. 서류들을 정리하던 세레인의 시선이 한 장의 문서에 멈췄다.[외국 세력 비인가 공작원 처분 명단]명단에는 5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 몇몇 이름 위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배후를 실토하지 않는 자들은 예외 없이 처형. 하단에는 카르안의 서명이 그려져 있었다. 세레인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바늘에 살짝 찔린 제 손가락을 감싸 쥐던 그 손으로 사람의 생이 이렇게 간단히 정리된다. 언제든지 나를 저 명단의 이름들처럼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 여전히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 또한 이런 방식으로 결정되었겠지. 막연한 공포가 이제야 선명한 실체가 되어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세레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1
Read more

40화. 어쩌면 서운한 해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아가씨, 테아입니다.”세레인은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쳤다.“들어와요.”​문을 연 테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들어왔다.“오늘은 정해진 업무가 없다고 전달 받았습니다. 동궁 시녀부 소속에서 변경되었고 모레부터 새 배속지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식사는 내일부터 다른 시녀들과 함께 드실 수 있으실 거에요.”“네?”“……진짜요?”“방은 그대로 계셔도 되고 근무지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셔도 됩니다. 내일까지 생각해보시고 전달주세요.”세레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식사도 따로, 방도 따로. 그동안 고립되다시피 다른 시녀나 하녀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나갈 때 들어올 때 몇 명과 시선이 오갔을 뿐. 황제의 곁에서 시중드는 유일한 시녀라는 건 여기저기서 시선을 받지만, 실상은 가장 외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게 진짜 해방인 건가.무슨 바람이 든거지 싶기도 하고.세레인은 여실하게 다 드러난 제 표정이 어떤 모습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테아가 세레인의 안색을 살피려는듯 가까이 다가왔다.“아가씨, 괜찮으신가요?”“네. 엄청.”엄청 괜찮고 말고.테아가 나가자, 세레인은 침대 옆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안쪽에서 노트를 조심스레 꺼냈다. 하늘색 커버에 누가 볼세라 흐릿하게 연필로 흘려쓴 ‘S.A’.“오늘은 무슨 글을 써볼까…”그녀는 표지를 손가락으로 팅겨내듯이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황궁에 도착한 이래로 가장 표정이 밝아진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펜을 손에 쥐었다.“아니지, 오늘은 칭찬을 좀 써줄까.”- 시녀복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그냥 칼에 찔리는 게 낫다. 진심으로 - 이젠 미쳤다는 말로도 부족하다.앞장을 가볍게 훑어보던 세레인은 입꼬리를 슥 끌어올렸다.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눈빛은 진지했다.그의 본모습을 조금은 들여다본 듯한 지난 며칠. 세레인은 펜을 들어 글을 적기 시작했다.‘그래, 그렇게 해.’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더는 불시에 불려갈 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Read more
PREV
1234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