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Chapter 1 - Chapter 10

16 Chapters

1화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나 좀 부르지 말라고……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입으로 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예? 뭐라고요?”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차 말이다.”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지금… 무슨, 장난을…”“장난처럼 들리나?”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이걸 진짜 하라고?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몇 달 전.베르나 마을.“아야! 또 가시야!”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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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출입문 위에는 마른 허브다발이 묶여 흔들리고 있었다.문을 열자 따뜻한 난로 열기와 함께 녹진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마델렌 아주머니, 저 왔어요!”선반 위에는 건과일, 말린 치즈, 과일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마델렌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으로 찻잔을 닦다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있고 말고. 안 그래도 어제 혼자서 밀 옮기다 허리 나갈 뻔했어.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살지.”세레인은 가게 뒷편에서 물건을 옮기고 바닥을 쓸었다.상징인 진열대도 깨끗이 닦고 정리했다.작은 노동이 끝나고 마델렌이 채소 몇 가지, 통밀빵 그리고 잼을 싸서 건네주었다.“약초는 저기 선반 옆에 두고. 내가 약초상에게 전해줄게”마델렌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자, 이건 약초 값. 리나 이것도 좀 마셔”“고맙습니다.”세레인은 건네받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마셨다.마델렌은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레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요 며칠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마을 기록도 새로 정리하고 있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을 텐데… 이번엔 좀 오래 갈 것 같아. 너도 늦게 다니지말고, 리나.”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네, 알겠어요."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게를 나설 무렵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그녀는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 목소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췄다.“그래도 이번엔 진짜 심각하대. 서쪽 지방에서도 반발 움직임이 슬슬—”“쉿!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장작을 쌓으며 이야기 중인 중년 남자 둘이 보였다.그들은 허름한 외투를 여미며 손을 비벼대고 있었고 둘 사이의 말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요즘엔 마을에도 이상한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더라. 어쩌려고 그리 입이 가볍냐.”“알았어 알았어, 이젠 말 안 해.”한 사람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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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장이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상인들은 하나둘 물건을 정리하며 짐을 수레에 옮기고 있었다.세레인은 장작을 파는 노인에게 다가갔다.“앗, 잠시만요! 아저씨! 남은 거 있나요?”노인은 손가락 네 개를 들어 보였다.“네 개 남았어. 싸게 줄게. 가져가.”세레인은 남은 동전 몇 개를 털어 건네고 장작을 바구니에 나눠 담았다.그녀는 서둘러 산길로 향했다.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온 세레인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바구니를 내려놓고 찬장 문을 열자 오래된 밀랍 병, 마른 치즈 조각, 감자 몇 알이 보였다.그녀는 오늘 구해온 소중한 양식들을 천천히 채워 넣었다."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네."그렇게 오늘도 작은 오두막의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얼었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한 계절이었다.봄이 가까워지자 작은 마을 베르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햇살이 조금 더 길게 머물렀고 길모퉁이엔 얼어있던 진흙은 녹아서 질퍽이는 소리를 냈다.그 틈새로 노란 꽃대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사람들도 이전보다 분주해지고 있었다.“성문 근처에서 검문이 시작됐다더라.”“진작부터 불안했지. 국경지대에 병사 늘린 것도 그렇고…”"제러드, 당신도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요. 저번에 필리도 가게에서 불시검문 당해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집에 왔다고 했잖아요.""아니, 내가 또 뭘 언제 늦게 돌아다녔다고 그래!?""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사람들 틈을 지나며 물건을 사던 세레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두 손에 든 바구니가 묵직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건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었다.ㅡ칼데론 왕국ㅡ그녀가 태어난 나라이자 모든 것을 잃은 곳.한때는 백작의 영애로 자랐지만 지금은 성 한 글자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예전보다 병력 숫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금속 갑옷이 반사하는 햇빛이 눈에 따가웠다.세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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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길 마델렌 아주머니의 가게에 잠시 들렀다.“리나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픈거 아니야?”마델렌은 세레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왔다.“어, 그냥 요즘 분위기가 좀 그래서요. 혹시… 동쪽으로 넘어가는 길 아세요? 국경 쪽 말이에요.”“동쪽?”마델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긴 발테리움 제국 땅이야. 너 설마 거길 가려는 건 아니겠지?”세레인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이미 굳어졌다.“그래도 정착하면 여기보다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하하…”"발테리움 귀족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도 들었을텐데, 그 사람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야. 명령 없이도 사람을 죽이는 살벌한 곳!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기가 쉽지 않아."마델렌 아주머니의 말이 맞았다.중앙집권적인 관료체계.치밀한 정보조직과 막강한 군사력.칼데론도 엄격하지만 제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발테리움 제국은 철저한 절대 권력국가였다.특히 전쟁이나 반란의 기운이 감돌 때면 거리에 깃발과 군홧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공개적인 처형과 고문도 있어서 주민들이 끊임없이 두려움에 떤다고 들었다."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면 더 기회가 많은 곳에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칼데론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요. 기술을 배우는 것도 비싸서, 뭘 배우는 것도 엄두 못 내구요."맞는 말이었다.연고가 뚜렷하지 않은 세레인을 정식으로 채용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려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사실 칼데론에서 군사들에게 잡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끔찍한 제 미래가 그려져서 도망치는 것에 가깝지만.이것도 떠나려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맞으니까."에휴… 토비도 한참 찾을텐데 너 혼자서 제국까지 가도 괜찮겠니?""그렇죠. 저도 정이 많이 들었는데… 토비에겐 사정이 생겨서 이사 갔다고 전해주세요…""가는 건 그렇다고 해도 거기서 또 일 구하고 하려면, 고생을 많이 할거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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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러나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나는 계속 살아갈 거야.하늘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고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다.언덕을 넘어 항구로 향하는 길.국경을 넘은 뒤 세레인은 강가의 항구 마을에서 배를 탔다.유려한 곡선의 흰색 선체, 금빛 장식이 박힌 발테리움 제국의 여객선은 마치 귀족의 마차처럼 고귀하고 우아했다.선실 안은 정제된 대리석과 짙은 남색 벨벳 커튼으로 꾸며져 있었다.세레인은 처음 보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 채로 도시로 향하는 물길을 따라갔다.역시 강국은 다르구나.도착한 곳은 루메데스, 발테리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황궁의 외부 연회가 열리는 지역이었다.정교한 첨탑과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과 화려한 풍경.넓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세레인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어보았지만 이따금씩 발걸음을 멈춘 채 자신이 얼마나 다른 세계에 도착했는지 실감해야만 했다.여관의 안주인은 그녀에게 제국 연회 하녀 모집 공고를 알려주었고 세레인은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듣기로는 무려 숙식에 옷까지 제공해준다고.타국에서 하는 일이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다.그래도 살벌한 귀족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거기다 베르나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해왔다.그래 난 잘해낼 수 있다!입구엔 많은 여성들이 줄을 서 있었고 모두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세레인은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놓이는 것을 느꼈다.면접장으로 들어서자 공간 가득 긴장감이 맴돌았다.벽을 따라 늘어선 하녀 후보들의 외양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이름이 뭐죠?”“리나입니다.”“나이는요?”“스물둘입니다.”“출신은 어디인가요?”“칼데론 왕국 베르나입니다.”면접관들의 시선이 낯선 그녀를 꿰뚫는 듯했다.낡은 옷차림에 조금 다른 억양, 하지만 눈빛은 맑아보였다.“하루 10실바르, 연회 삼일 이후 나흘 근무로 70실바르 지급됩니다.”세상에 10실바르? 잘 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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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장막 안쪽의 하녀들 사이에서도 흠칫 놀라며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세레인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어 장막 너머 붉은 융단 위를 걷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방금 전 입장한 귀족들을 단숨에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그 순간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크고 곧은 체격 위로 황금 자수가 놓인 검은 망토가 어깨 위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밤처럼 짙은 제복은 날렵하고 절제된 장식으로 빛나고 있었다.칠흑 같은 머리카락.그 어둠 안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얼굴.높고 반듯한 콧날,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매끄럽고 차가운 듯한 피부.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조각상 아니 그보다 더 이질적인 무언가 같았다.세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하고 삼켰다.…미쳤다. 저게 진짜 사람이야?잠시, 눈과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뭐지? 나 보고 있는 거 아니지?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입을 다물 수도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그때였다.툭ㅡ세레인의 손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졌고 트레이가 살짝 기우뚱하며 유리잔 하나가 기울어졌다.쨍그랑!잔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장막 안을 가르며 퍼졌다.조각 일부는 근처 장식 천을 건드렸고 뒤에 있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괜찮아?”“피, 피는 안 나?”하녀장 펠타가 헐레벌떡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세레인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리에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아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나… 어떡해…?”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 입장 중이었는데… 이런 실수를…그 순간 장막 너머 황제의 걸음이 딱 멈췄다.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도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반 쯤 열린 장막 사이로 느껴지는 날 선 기류.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잠시 그 붉은 눈으로 장막을 바라보았다.바로 그곳에 세레인이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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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황제 카르안이 자리에 앉자 근처에 있던 측근 고위 귀족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이는 변방에서 중앙으로 올라와 입지를 다진 노련한 정치가 로델 무르젠 백작이었다.“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니, 진정 연회가 시작된 듯합니다.”“연회답게 분위기가 훌륭합니다, 폐하.”곁에 있던 시릴 베르탄 공작이 웃으며 말을 보탰다.그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전임 내무대신인 부친을 이어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 인물이었다.깔끔하게 정돈된 백금발과 회청색 눈, 고급스러운 제복 차림이 이성적이고 냉정한 인상을 풍겼다.“연회에는 좋은 음식과 약간의 수군거림이 따라야 제 맛이지요. 오늘은 사절단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많더군요.”“라우하 사절단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하더군요.”“이 시기에 말입니다.”“그쪽이 제국의 움직임을 먼저 살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폐하. 그런 시선조차도 결국 제국의 위상을 반증하는 셈이니까요.”황제는 잠시 시선을 멈춘 채 잔을 들어올렸다.“연회는 단지 즐기기 위해 여는 것은 아니지.”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주변의 측근들을 스쳤다.“명심하겠습니다, 폐하.”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는 아무 말 없이 잔을 기울였다.하지만 그와 먼 위치에 앉아 있는 나머지 귀족들은 그의 눈빛과 숨결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있었다.작은 손짓 하나에도 의미를 찾으려는 눈빛.카르안은 비웃었다. 내가 잔을 어느 손에 들었는가까지 기록해 둘 판이지.음악이 다시금 높아지고 춤을 청하는 이들이 홀 중앙으로 향하는 사이 제국의 고위층은 잔을 들며 대화를 이어갔다.“우와... 너무 예쁘다.”세레인은 연회장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벽의 눈부신 장식들은 베르나의 조용한 돌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이었다.천장이 어찌나 높고 반짝이는지 마법 조명도 너무 신기해 한참이나 바라봤다.여러 계절이 뒤섞인 듯한 공기와 자연의 향기가 섞여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했다.연회 전후로 이곳을 통과하는 인원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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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바람이 옅게 감돌던 루메데스의 밤.은은하게 깔린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가면을 쓴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세레인은 손에 트레이를 든 채 구석에서 몸을 반 쯤 숨기듯 서 있었다.정원 구석 나무 그림자 사이. 시선은 아래로, 숨소리는 얇게, 이제는 익숙해진 하녀의 자세였다.그 순간.귀족 몇몇이 허리를 숙이며 한 인물을 향해 길을 비켰고 그 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검은 천 위에 금빛 자수가 반짝이는 제국의 문장이 선명했다.황제였다. 아무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를 향해 눈을 맞추지 않는 가운데, 그의 붉은 눈동자는 정원 구석의 하녀 하나에게 닿아 있었다.이유는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살아있는 포식자의 것처럼 날카롭고 권태에 젖은 것처럼 느슨했다.세레인은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시선이 자신을 뼛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잘생겼다, 아마 그날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게 문제지. 그런 자리에서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세레인은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가설과는 달리 본능적으로 눈을 내려깔고 바닥만 바라봤다.첫 날, 연회장 안. 손에서 미끄러진 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졌던 아찔한 순간.설마 그 날의 책임을 다시 물으려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큰 소란은 아니었다. 금방 묻힌 소란이었다.그럴 리가 없지. 고귀한 왕족들은 일개 하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다. 단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시선일 뿐일거야.쿵. 쿵. 쿵.심장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상했다.세레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에 힘을 주고 잔떨림을 눌렀다.이틀만 더 지나면 끝이잖아.그 생각이 들자,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히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황제는 아무 말도, 아무런 손짓도 없이 지나갔다.***화려했던 연회가 천천히 막을 내렸고, 하녀들의 업무는 계속되었다.세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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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세레인은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사용인 면접을 직접 보는 귀족 아가씨가 있구나. 제멋대로인 영애들이야 많이 본 적 있긴 한데.“어! 마사?”벨라는 자연스레 소파에 앉으며 마사를 가리켰다.“아가씨 오랜만이에요~”“옆에 있는 사람이… 그 하녀야?”“네, 칼데론 출신의 리나에요. 저랑 같이 일했던 친구에요. 부지런하고 손도 야무져요.”“흠, 얼굴은 귀엽네. 일은 잘 하려나?”벨라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세레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사실 귀엽다는 표현에 가까운 건 벨라 아가씨 쪽이었다.갓 사춘기에 들어선 듯한 반짝이는 인상을 풍기는 작은 체구의 소녀. 이미 성인인 스물두 살 세레인과는 다르게 보는 이로 하여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앙증맞은 외모였다.세레인은 몸을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금빛 머리카락도 어깨 앞으로 살며시 흘러내렸다.“리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그래. 뭐, 너무 뻣뻣하게 굴 필요는 없고~”벨라는 손짓으로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오늘부터 이 애가 아가씨 옷이랑 방 정리 도와드릴 거예요.”“좋아! 지금 옷이 아주 그냥 폭탄 맞았거든. 따라와.”벨라는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갔고 세레인은 그 뒤를 따라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소매에 달린 하늘색 리본 장식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방 안은 상상 이상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화려한 드레스들이 침대와 바닥을 가득 메우고, 구두가 책상 위에 얹혀 있었으며 리본과 레이스가 뒹굴고 있었다.실크, 벨벳, 오간자 등 다양한 소재의 드레스들은 형형색색의 자수와 금사로 수놓아져 있었다.으악, 무슨 옷이 이렇게 많다고? 백작가 영애였을 때 나도 저랬나…? 난 옷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저, 이게 다… 벨라 아가씨 드레스인가요?”“당연하지! 자 이건 색깔별로 정리해 줘. 구두는 닦으면서 정리하고!”“헉, 알겠습니다.”세레인은 숨을 들이쉬고 옷걸이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든 드레스를 아무렇게 걸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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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날 저녁, 벨라 아가씨는 또 다른 변덕을 부리며 외출을 결심했다.“나 밖에 나갈 거니까, 너희도 나 좀 도와.”세레인과 마사는 부랴부랴 드레스를 챙기고 보석함을 열고, 신발을 정리했다.세레인은 반짝이는 벨라의 오팔 귀걸이를 바라보다 무심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칼데론에서는 오팔이 정말 보기 드물게 귀한 원석이었다.“…저런건 엄청 비싸겠지?”“뭐?”앗 또 실수!산 속 오두막에 혼자 있을 때처럼 혼잣말이 그냥 나와버리네.“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저도 모르게 한 실언이었어요.”벨라는 눈을 가늘게 슥 뜨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내가 싫증나면 그때 너 줄까? 네가 소화를 할지는 모르겠다만.”“하하…아니에요. 아가씨 정말 실언이었어요.”아이고 내 심장이...외지에서 온 하녀가 감히 모시는 아가씨의 귀걸이를 탐냈다는 말이 들려올까봐 무서웠다.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아가씨 때문에 세레인은 하루에도 심장이 열 번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이야, 벨라 아가씨네 댁은 정말 저택이 아니라 궁전 같네요.”정원 너머로 언뜻 보이는 별채와 마구간, 그리고 잔디 위에 놓인 백색 찻상이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세레인은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살짝 옮기며 말했다.어느새 발테리움의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흐음, 옷 보는 눈은 최악이더니 그런 건 볼 줄 아네?”“…저 아가씨 때문에 저택에서 감각 없다고 소문 났어요.”“맞는 말이잖아~”벨라는 샐쭉하게 웃어보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니스커트처럼 짧은 드레스를 가볍게 털었다.“이거 짧다고, 엄마가 보면 또 뭐라 하겠지?”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귀여웠다. 세레인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마치 무대 위에서 걷듯 계단을 내려오는 벨라의 발치에는 작고 예쁜 리본이 달린 구두가 반짝였고,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붉은 루비처럼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경쾌하게 앞장서며 정원 쪽으로 향했다.“그나저나 오늘 아가씨 부모님께서 오신다면서요?”“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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