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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Chapter 21 - Chapter 30

59 Chapters

21화. 황제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

"...폐, 폐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세레인은 초점이 살짝 풀린 눈으로 제 앞에 드리워진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역광을 등지고 선 검은 준마와 그 위의 주인. 응접실의 무거운 정적 속에서 자신을 쓸모없다고 비웃던 황제가 방금 늑대의 숨통을 끊어놓은 활을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카르안은 활을 쥔 손을 느릿하게 내리며 세레인을 관찰했다. 응접실에서 찻잔 하나 제대로 못 옮기던 하녀가 지금 제 눈앞에 있었다. 가방을 멘 채 맹수의 이빨 앞에서 팔을 벌려 영애를 지키려는 그 모습. 공포로 짓눌릴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는 그 무모함은 카르안이 평생 보아온 귀족들의 생리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세레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흙바닥을 짚었다. 사람을 휘두르는 오만한 황제인 줄로만 알았는데 화살은 지독할 정도로 정확했다. 늑대를 단숨에 숨지게 한 무력 앞에 서자 그가 왜 제국의 지배자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무섭고 어려운 존재이지만 어찌 됐든 그는 오늘 제국민인 자신들을 구해줬다. "리베르츠 영애." "예, 폐하!" 벨라는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냥터 제2구역을 달랑 하녀 하나 데리고 들어온 건가?" 황제의 질책에 벨라는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은색 여우가 예뻐서 저도 모르게 쫓아오다 보니, 여기까지 들어온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카르안은 벨라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흙먼지로 옷이 얼룩진 채 땀범벅이 된 하녀 세레인을 가리켰다."거기 너. 무기는?"예상치 못한 질문에 세레인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카르안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늑대와 세레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세레인은 얼떨결에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을 황제 앞에 내밀었다. 철제 수통이었다."어, 이것뿐입니다."곁에 있던 시릴 베르탄 공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폐하께 무기라고 내미는 건가? 그걸로 늑대 정수리라도 깨려던 모양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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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다정한 기사, 오만한 황제

정적을 깬 건 시릴이었다."영애, 오늘 폐하가 아니셨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시지요."시릴의 재촉에 세레인은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조아렸다. 떠나려는 말머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카르안은 고삐를 쥔 채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일을 한거니 그만 일어나. 그리고 영애는 즉시 1구역으로 돌아가."평소라면 할 말 다 했을 벨라는 완전히 풀이 죽어있었다."...네, 폐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전 구역에 다다르자 멀리서 말을 급히 몰아오는 기사의 인영이 보였다. 다비안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카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시릴이 짧게 상황을 설명하자 다비안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곧장 뒤편에 있는 벨라와 세레인에게 향했다."벨라! 너 지금 제정신이야? 거기가 어딘줄 알고 리나만 데리고 구역을 넘어가!""아, 알았어! 잘못했어!"벨라가 고집스럽게 소리치자 다비안은 기가 찬 듯 한숨을 내쉬며 벨라를 자신의 뒤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던 세레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리나, 너 어디 다친 데는 없어?"다비안의 물음은 나직했으나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그는 세레인의 소매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저는 괜찮아요, 공자님. 아가씨가 안 다치셔서 다행이에요." 다비안의 손이 세레인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긁힌 자국이라도 찾으려는 듯 그는 세레인의 팔목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안 다쳤다니 다행이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다비안의 다정한 목소리가 길어질수록 말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르안의 얼굴에는 달갑지 않은 것에 반응하는 기색이 드러났다.지극히 당연한 광경이었다. 가문의 기사가 제 식구의 안위를 살피는 것뿐이다. 굳이 황제인 자신이 끼어들어 떼놓을 만한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하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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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빼앗긴 하녀

“그거 거짓말이지? 리나는 내 사람이야! 내가 뽑은 사람이야! 못 데려가!”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벨라 영애의 외침이 리베르츠가의 정원을 가로질렀다.황궁 시종의 손에 이끌리듯 짐 가방을 들고 나온 세레인을 보자 벨라는 주저 없이 달려왔다. 작은 발이 차갑게 젖은 잔디 위를 세차게 밟았다.“공작님!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아버지랑 얘기한 거 아니었어요?!”벨라는 울먹이며 소리쳤다.“벨라 영애.”시릴 베르탄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리나는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이미 이관되었습니다.”“황궁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요…! 왜 하필 리나를? 리나를 데려가지 마세요!”“폐하의 명령은 거절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시릴은 냉정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묻어있었다.“아가씨… 너무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어요.”“네가 왜 사과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되는거야?”벨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울지마세요 아가씨.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세레인의 대답에 벨라가 다시 시릴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이유가 도대체 뭔데요? 뭔가 착오가 있을거에요! 리나는 내가 데려온 사람이에요…! 아무도 못 데려가요!!”“…아가씨 제가.”세레인이 벨라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황궁 소속 경호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춰 세웠다.이어서 벨라의 뒤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오폴트 리베르츠 남작이었다.“…벨라.”“아빠!! 리나는!”“그만해라.”레오폴트는 조용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벨라의 모든 저항을 멈추게 할 만큼 단호했다.“황제 폐하의 명령이다.”“……”벨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절망감만이 가득했다.“물러나. 이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벨라.”벨라는 분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하지만 결국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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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황제의 시녀

리베르츠 저택에서 황궁으로 옮겨진 지 나흘. 세레인은 흰 색과 진청색이 배색된 시녀복을 입고 복도 끝에 선 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이른 시간부터 불려온 이유는 묻지 않아도 대강 알 수 있었다.황제의 호출이겠지.“아가씨,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부드러운 목소리의 시종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어색했다.황제의 명에 따라 그녀는 황궁의 시녀가 되었고 일부 시종들과 하녀들은 그녀를 상위자로 대했다. 세레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서재 안은 고요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부드럽게 빛이 들어오는 넓은 공간 안, 황제 카르안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세레인은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의 손엔 문서가 있었고 그 위에는 며칠 전부터 황궁에 상주 중인 귀족들의 출입 명단이 적혀져 있었다.그는 시선을 문서에서 떼지도 않고 말했다.“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오래 걸려? 누구는 울면서 겨우 마음 정리했는데 그게 할 말이야?세레인은 입술을 꽉 눌렀다가 이내 결심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께서 저를 이렇게 데려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카르안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그녀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녀가 숨 죽이고 눈치 보던 연회 때의 모습과는 말투도 표정도 조금 달랐다.“내가 너한테 이유를 말해야 하나?”그는 읽던 문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당황한 세레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아닙니다, 죄송합니다.”“…네가 평생 리베르츠에서 일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건가.”…그건 아니야.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주던 이들에게 자신을 거짓으로 둘러싸고 진실인 척 하고 있었으니까.거짓말로 꾸며낸 리나라는 가명을 썼고 어디서 왔는지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언젠가 벨라 아가씨가 리나의 가족은 어디에 지내고 있냐는 물음에 시골에 계셨는데 일찍 돌아가셨다고 둘러댔다.황제의 말은 세레인의 마음을 쿡쿡 아프게 찔러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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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돌아가고 싶어요

※ 경고: 이야기 전개상 정서적 위협, 강압적 상호작용 등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하지만 그녀는 담담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저 변방에서 생긴 개인사일 뿐입니다. 폐하께서 굳이 눈길 주실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그는 눈길을 거두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너무도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에 세레인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았다.지금 또 피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결국, 그녀는 마지막까지 말해버렸다.“폐하께서 얼마나 한가하시든 저 따위 일로 시간을 낭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한순간 서재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카르안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하.”웃음 같기도 위협의 전조 같기도 한 낮은 숨이 흘러나왔다. 붉은 눈동자가 그 미소와 어울리지 않게 점점 날카로워졌다.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한가하다고 했나, 지금?”그는 그녀를 붙든 채 나직하게 말했다.“그리고… 조롱.”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있었다.“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네가 생각보다 더 멍청하단 뜻이겠지.”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턱에서 목덜미까지 미끄러졌다. 그 짧은 순간 세레인은 숨을 삼키는 것조차 위태로웠다.차가운 손이 피부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본능적으로 생명에 대한 위협이 느껴졌다.“그 입으로 다시 말해 봐. 돌아가겠다고.”명백한 즐거움.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지금처럼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내 얼굴 보면서.”붉은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집무실은 여전히 고요했다.빛은 한낮의 정점을 지나 창가를 비스듬히 기울었지만 그 빛은 이 공간의 냉기를 덜어내지 못했다.책상 위 문서에 시선을 두고 있던 카르안은 문득 세레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폐하께서 얼마나 한가하시든 저 따위 일로 시간을 낭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조롱이었다. 분명히 의도적인 조롱. 그가 누구인지 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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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장점 넷, 그가 없다

며칠 후.“황제 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황궁의 집무실 앞 그녀는 굳은 얼굴로 서있었다.그리고 문이 열렸다. 황제 카르안은 창가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르안은 고요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그걸 확인한 세레인의 눈이 그 순간 휘둥그레졌다.자신이 쓴 편지가 맞았다.아…… 황제 손에 넘어갔구나.그 순간 피가 머리 끝까지 끓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어내렸다.두 다리에 힘이 빠져서 쓰러질 뻔했지만 겨우 힘주고 버텼다.카르안은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봉투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이걸 나 몰래 전하려 했다고?”세레인은 입술을 떨었다. 목이 마른 모래더미처럼 잠겨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그건 그냥 제 개인적인……”그는 봉투를 마치 하찮은 종잇조각처럼 내려다보았다.“이런 사적인 감정도 허락받아야 하는 위치라는 걸 몰랐나 보지.”그는 손에 든 봉투를 천천히 뜯어 안의 종이를 꺼내 읽었다.몇 줄 읽지도 않은 채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마델렌 아주머니.오랜만이에요....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정말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황제가 무심히 말을 던졌다.“돌아가고 싶다고?”그에게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웃음은 멸시에 가까웠다.“한 번은 실수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세레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목이 잠겨서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런 걸 쓰면서 무슨 기대를 했을까. 누군가 너를 데리러 오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나?”이윽고 그는 천천히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누구일까, 그 리베르츠 꼬마…? 아니면 고국에 남아있는 인간?”그 말과 함께 그의 손이 움켜쥐어졌다.그리고 종이는 가차 없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아……”숨이 턱 막혔다. 세레인은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종이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찢겨진 종이가 바닥에 나뒹구는 그 모습.베르나의 포근한 햇살과 바람.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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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인성 파탄자

“……알겠습니다.”세레인은 옷장 문을 닫고 손을 닦았다. 거울을 슬쩍 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표정도 평소처럼 얌전하게 만들었다.세레인은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 황궁의 긴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말아 올린 머리 위로 얇은 천을 눌러 쓰며 속으로 생각했다.최대한 마주치지 말자 제발. 그냥 시키는 거만 하고 조용히 빠져나가자.“왔군.”카르안은 집무실이 아닌 접견실에 있었다.창 쪽은 햇살이 흘렀고 붉은색 융단 위로 금장 장식이 새겨진 탁자가 놓여 있었다.그는 서류 대신 찻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태가 남다른 모습이었다.“앉아.”세레인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앉으라는 말은 있었지만 앉을 만한 의자가 없었다. 의자가 없는 곳에서 앉으라는 건 바닥에 무릎 꿇고 앉으라는 얘기겠지. 그래, 앉으라니까 앉아 드려야지.오늘은 뭐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 하면서 발로 밟기라도 하실려나.카르안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한된 시야에서도 그 시선이 날카롭고 서늘하게 느껴져 가슴이 조여들었다.“다음부터는 내 일정을 정리해둬라. 시종이 아니라 너에게 직접 맡기겠다.”생각보다 무난한 업무를 줘서 의외라고 해야 하나. 왜 가까이서 일하는 업무를 주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지만.“네, 알겠습니다. 폐하.”“내가 쓰는 잉크와 인장 도구. 전부 네가 준비해. 빠지지 않게.”“네.”“차는 직접 따르도록.”이건 또 무슨 명령이야?차를 왜 나보고 따르라는 거지 이런건 주로 해오던 사람이 있을텐데.“…폐하께서 드시는 차를 제가 말입니까?”“명령이 이해되지 않나?”세레인은 고민 끝에 고개 숙이는 것을 택했다.“…아닙니다.”순간, 카르안의 입꼬리가 조금 사선으로 그어졌다. 그가 드러낸 표정은 흥미 반 조롱 반이었다.“좋아. 너처럼 변명할 여지도 없는 인간은 시중이나 들고 조용히 숨 죽이는 게 어울리지.”그래 말 참 예쁘게도 한다. 그래 저런 날선 말은 차라리 익숙해.세레인은 속으로 단단히 다물고 있던 마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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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황제는 시녀의 속마음을 모른다

“여기다.”카르안이 손짓한 곳은 사서실이었다. 내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백 권의 고문서 더미가 쌓여있었다.“이걸 전부 정리해라. 분류 기준은 언어별로, 그다음은 시기순.”세레인은 산더미 같은 책들과 카르안을 번갈아 보았다. 제국인도 혀를 내두를 고대어 판본들. 타국 출신 시녀에게 맡기기엔 지나친 업무였다.“폐하, 이 정도의 분류는 담당에게 맡기시는 게…….”“너 말고 누가 이 일을 맡겠니?”그 말이 왜 칭찬이 아니라 비꼼처럼 들리는 걸까. 그리고 그 비꼬는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흘러나올 수가 있나?“네, 알겠습니다.”세레인은 다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시작한 지 4시간째. 팔은 저릿하고 먼지 때문에 눈이 따가워졌다. 10개가 넘는 언어가 뒤섞인 문서들은 마치 세레인의 처지처럼 엉망진창이었다.세레인은 혹여나 종이가 찢어질까 봐 손으로 조심스레 면을 떼어내면서도 속으로는 욕을 퍼부었다.이딴 사사로운 편지 쪼가리를 왜 내가 분류하고 있어야 하느냐고!그녀는 기억을 짜내며 눈대중으로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을 어거지로 맞추기 시작했다. 틀리면 저 오만한 황제에게 트집 잡힐 구실이 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긴장시켰다.확신 없는 분류가 이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졌지만 그녀는 오기로 버텼다. 베르나의 언 땅을 파헤치던 독종 기질이 발동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이질적인 글자가 가득한 문서들을 노려보았다.한참 후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그가 다시 나타났다.카르안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앞에 서더니 그녀가 정리해둔 고문서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잘 정리했네. 네 수준치고는.”그건 정말 칭찬처럼 들렸고 그래서 더더욱 짜증났다. 그가 돌아서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오늘 옷도 잘 어울린다.”세레인의 표정이 또다시 일그러졌다.황제는 정확히 그걸 봤다.“불만인가?”“전혀 아닙니다. 칭찬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또박또박 그러나 심장은 부글부글했다. 세레인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카르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남아있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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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입술로 올리는 시중

“저는…정말 괜찮습니다, 폐하.”이번엔 카르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와 멈췄다.세레인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었다.가슴 언저리가 불편하게 조였다.“손을 보여.”세레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그 말에 황제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꾹 눌러 참는 것처럼 잔잔해 보이던 시선이 가라앉았다.“너, 지금 손 다쳤다고.”당신이 언제부터 내 손 걱정을 해줬는데, 손가락 찢어버린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 미친 인간아.그냥 화를 버럭 내고 이 시녀를 다시는 들이지 말라고 해줬으면 좋겠다.“제가 실수해서 그런 거니 괜찮습니다.”“…세레인.”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차분하고 감정을 읽기 힘든 목소리였다.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세레인은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저는 정말 괜찮습니다.”하지만 카르안은 손을 뻗었다."난 괜찮다는 네 입보다 내 눈을 믿고 싶은데."그의 손이 그녀의 손등 위에 닿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반사적으로 힘을 주어 버티었다.명령 불복이라 해도 저 남자에게 내 상처 같은 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거였다.그마저도 곧 그에게 짓밟힐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손 펴.”“…”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의문을 표현했다."내 명령이 그리 불쾌한가?"그는 마치 일상의 업무를 말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좋아. 이제 손으로 하는 시중은 그만 두자.”“…네?”세레인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뭔가 여기서 해방된 건가 싶었지만 다음 말이 너무 순식간에 던져졌다.“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예?”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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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황제의 침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예? 뭐라고요?”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카르안은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차 말이다.”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지금… 무슨, 장난을?”“장난처럼 들리나?”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그 다음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그 붉은 눈동자는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카르안은 찻물을 삼켰다.그리고 어깨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조용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냉소가 스며들었다.“다음엔 내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네.”세레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치를 보다 그 자리를 슬그머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은 몸에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세레인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그걸 진짜 시키냐고…!”작게 소리치고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입으로 받아 마시라니 제정신이야? 너무 이상하고 야릇한 짓인데 어쩌자는거지? 아니 애초에 입이 닿을 수 밖에 없는데.“으악!”상상만으로도 소름이 확 끼쳤다. 아무리 귀족 사회가 괴짜 천지라고 해도… 뭐 그래 나는 제국의 황제니까 차도 보통의 귀족들하곤 남다르게 마신다 이건가.물 온도 안 맞는다고 식기를 내던지는 사람도 봤고,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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