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10
에:  그림자운방금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언어: Korean
goodnovel16goodnovel
10
3 평가 순위. 3 리뷰
59챕터
4.6K조회수
읽기
보관함에 추가

공유:  

보고서
개요
장르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 “……예?” 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 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숨이 순간 멎은 듯. 당혹감, 굴욕감, 분노까지 뒤섞여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폐하, 지금 그게 무슨-” 황제 카르안은 여전히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잘랐다. “손을 다쳤으니 입으로 차를 따르라고.” 카르안은 아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닿았다. 표정은 똑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흥미로웠다. “…아직 이해가 안되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더 보기

1화

1화. 베르나의 약초꾼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 좀 부르지 말라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

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

“입으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예? 뭐라고요?”

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

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차 말이다.”

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금… 무슨, 장난을…”

“장난처럼 들리나?”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

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

몇 달 전.

베르나 마을.

“아야! 또 가시야!”

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

“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투덜투덜 말하며 풀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바구니엔 엉성하게 모은 약초가 반쯤 담겨 있었다.

라페 꽃, 노란 뿌리풀, 흉터 잎까지.

정리는 조금 서툴었지만 약초 캐는 건 전문가급이었다.

세레인—지금은 ‘리나’라 불리는 그녀는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 속에선 역시 내가 제일 최고지!”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약초꾼이라고 불렀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그녀를 슬쩍 훔쳐봤다.

“리나 누나ㅡ!! 거기 있지?”

초록색 털모자를 눌러쓴 토비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또 왔어, 토비?”

“응! 근데 오늘은 진짜 용건 있어!”

소년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장날 전에 이 약초 꼭 좀 부탁한대! 향 좋은 걸로!”

세레인은 쪽지를 받아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또 혼자 온 거야?”

“응! 걱정 마! 나 길 다 외웠다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약초 퀴즈! 이 잎은 뭐게?”

“음… 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는 왜 혼자 살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심심하지 않아?”

“네가 자꾸 오잖아.”

“풀요정 리나 누나~!!”

토비는 풀잎을 그녀 머리에 얹고는 도망치듯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세레인은 조용히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세레인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안고 입김을 호호 뿜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우 추워… 옷을 더 두꺼운 걸로 입을걸.”

혼잣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베르나 마을은 칼데론 왕국의 끝자락.

세레인이 혼자 사는 깊은 산 속과는 다르게 활기가 있었다.

벽돌로 쌓은 낮은 담벼락과 창문에 걸린 수세미 덩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사이로 흘렀다.

길모퉁이에서 돌을 고르던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리나 누나다!”

세레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레인은 흐느적거리는 바구니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간판을 향해 갔다.

나무 간판에는 '식료품점'이라 적혀 있었다.

펼치기
다음 화 보기
다운로드

최신 챕터

더보기

독자들에게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리뷰

푸바오
푸바오
와~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재밌네요~ 업뎃 빨리 돼서 많이 많이 읽고 싶네요 ^^
2026-05-05 14:27:58
1
0
빈
너무너무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항상 화이팅!!!!
2026-03-26 20:27:49
1
1
임종현
임종현
고생하는 뗑컨한테 만점주고 읽어야지!
2026-03-26 13:53:58
1
1
59 챕터
1화. 베르나의 약초꾼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나 좀 부르지 말라고……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입으로 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예? 뭐라고요?”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차 말이다.”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지금… 무슨, 장난을…”“장난처럼 들리나?”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이걸 진짜 하라고?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몇 달 전.베르나 마을.“아야! 또 가시야!”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2화. 허무맹랑한 괴담의 무게
출입문 위에는 마른 허브다발이 묶여 흔들리고 있었다.문을 열자 따뜻한 난로 열기와 함께 녹진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마델렌 아주머니, 저 왔어요!”선반 위에는 건과일, 말린 치즈, 과일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마델렌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으로 찻잔을 닦다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있고 말고. 안 그래도 어제 혼자서 밀 옮기다 허리 나갈 뻔했어.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살지.”세레인은 가게 뒷편에서 물건을 옮기고 바닥을 쓸었다.상징인 진열대도 깨끗이 닦고 정리했다.작은 노동이 끝나고 마델렌이 채소 몇 가지, 통밀빵 그리고 잼을 싸서 건네주었다.“약초는 저기 선반 옆에 두고. 내가 약초상에게 전해줄게”마델렌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자, 이건 약초 값. 리나 이것도 좀 마셔”“고맙습니다.”세레인은 건네받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마셨다.마델렌은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레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요 며칠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마을 기록도 새로 정리하고 있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을 텐데… 이번엔 좀 오래 갈 것 같아. 너도 늦게 다니지말고, 리나.”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네, 알겠어요."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게를 나설 무렵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그녀는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 목소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췄다.“그래도 이번엔 진짜 심각하대. 서쪽 지방에서도 반발 움직임이 슬슬—”“쉿!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장작을 쌓으며 이야기 중인 중년 남자 둘이 보였다.그들은 허름한 외투를 여미며 손을 비벼대고 있었고 둘 사이의 말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요즘엔 마을에도 이상한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더라. 어쩌려고 그리 입이 가볍냐.”“알았어 알았어, 이젠 말 안 해.”한 사람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3화. 잊히지 않는 처형대
얼었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봄이 가까워지자 작은 마을 베르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사람들도 이전보다 분주해지고 있었다.“성문 근처에서 검문이 시작됐다더라.”“진작부터 불안했지. 국경지대에 병사 늘린 것도 그렇고…”"제러드, 당신도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요. 저번에 필리도 가게에서 불시검문 당해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집에 왔다고 했잖아요.""아니, 내가 또 뭘 언제 늦게 돌아다녔다고 그래!?""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사람들 틈을 지나며 물건을 사던 세레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두 손에 든 바구니가 묵직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건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었다.ㅡ칼데론 왕국ㅡ그녀가 태어난 나라이자 모든 것을 잃은 곳.한때는 백작의 영애로 자랐지만 지금은 성 한 글자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병력 숫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금속 갑옷이 반사하는 햇빛이 눈에 따가웠다.세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바구니 속 허브 뿌리와 약초가 바스락 거렸지만 손잡이를 쥔 손은 얼어붙은 듯이 굳어있었다.그때였다.말발굽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은빛 갑옷을 입은 군사 넷이 말을 몰며 행진해왔다.사람들이 일제히 양 옆으로 비켰고 세레인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었다.검문병 하나가 스치듯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피가 식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언뜻언뜻 보이는 상징.병사의 어깨엔 왕가의 상징, 두 개의 검 위에 사자 문양이 있었다.칼데론 왕가의 문양.그녀는 그 표장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이봐! 거기 멈춰!”뒤에서 외침이 들렸다. 군사 하나가 누군가를 붙잡았다. 보따리를 들고 허겁지겁 걷던 행인이 팔을 붙잡혔다."신분증을 보여!”세레인은 몸을 더 움츠렸다.심장이 벌컥벌컥 뛰었고 귓가에 맴도는 과거의 잔상이 다시 떠올랐다.그날 밤 하늘을 뒤덮던 연기와 쏟아지는 불꽃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4화. 베르나를 떠날 시간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국경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뻣뻣한 시선이 세레인을 훑고 지나갔다.몇 번의 질문과 짧은 검사, 그리고 돈 몇 닢.병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가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은 느낌이 들었다.자신을 붙잡고 있던 족쇄가 풀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됐습니다. 지나가세요.”짧은 한 마디와 함께 국경의 장벽이 옆으로 열렸다.ㅡ 발테리움 제국 ㅡ이질적인 공기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길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이국의 땅답게 세레인의 눈에는 모든 풍경이 낯설고 선명했다.작은 시골 마을의 정취와는 달리 제국은 훨씬 더 차가운 질서를 두르고 있었다.“와… 씨 미쳤다. 정말 진짜 와 버렸네.”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살면서 국경을 넘은 건 처음이었다."……후우."바구니 안에는 마델렌이 챙겨준 음식들과 이곳에 도착하면 팔아보려고 말려온 약초들이 들어 있었다.“괜찮아! 리나 여기서 잘 시작하면 되는거야.”그녀는 자신의 가짜 이름을 되뇌었다.어차피 발테리움에선 날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거잖아?하지만 그녀의 머리 속에는 온갖 나쁜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걸어가다가 혹시 야생동물이 튀어나오면 어떡하지?제국엔 몬스터도 많다고 들었는데?괜히 길가의 덤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쫄깃해졌다.***[발테리움 제국 수도 브리스의 중앙감옥] 감옥 내부. 좁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타일을 비췄지만 그 너머의 공간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살 너머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가 울리고,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옥의 퀘퀘한 공기와 달리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듯한 완벽한 형상이었다.“폐하, 셀바리스카 5구역 보관실에서 적발된 자입니다. 아레시아 소속 정보원으로 하급 관리직 공석을 노리고 치밀하게 조작된 신분으로 잠입했습니다.”비서관 에릭 노드란이 절제된 동작으로 서류를 내밀며 보고했다. 그의 앞에는 온몸이 포박된 채 떨고 있는 사내가 처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5화.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1)
도착한 곳은 루메데스, 발테리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황궁의 외부 연회가 열리는 지역이었다.정교한 첨탑과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과 화려한 풍경.넓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세레인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어보았지만 이따금씩 발걸음을 멈춘 채 자신이 얼마나 다른 세계에 도착했는지 실감해야만 했다.여관의 안주인은 그녀에게 제국 연회 하녀 모집 공고를 알려주었고 세레인은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듣기로는 무려 숙식에 옷까지 제공해준다고.타국에서 하는 일이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다.그래도 살벌한 귀족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거기다 베르나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해왔다.그래 난 잘해낼 수 있다!입구엔 많은 여성들이 줄을 서 있었고 모두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세레인은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놓이는 것을 느꼈다.면접장으로 들어서자 공간 가득 긴장감이 맴돌았다.벽을 따라 늘어선 하녀 후보들의 외양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이름이 뭐죠?”“리나입니다.”“나이는요?”“스물둘입니다.”“출신은 어디인가요?”“칼데론 왕국 베르나입니다.”면접관들의 시선이 낯선 그녀를 낯낯이 훑어내리는 듯했다.낡은 옷차림에 발테리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억양, 하지만 눈빛은 맑아보였다.“하루 10실바르, 연회 삼일 이후 나흘 근무로 70실바르 지급됩니다.”세상에 10실바르? 잘 못 들은건가?세레인은 떡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며 속으로 계산했다.저 정도면 따뜻한 여관에서 넉넉히 머물 수 있다! 새 옷도 몇 벌 살 수 있고!“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무사히 면접을 마쳤다.***어떻게 또 붙었다?후, 진짜 다행이다!바로 외부 연회장 준비라니 벌써부터 다리가 아플 것 같은 기분인데.“안녕. 난 마사야.”“난 리나야. 스물둘이고 잘 부탁해.”"하녀로 일 해본 적 있어?"“하녀 일은 처음인데 난 시골에서 왔거든. 시골에선 별의별 일 다 했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6화.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2)
“괜찮아?”“피, 피는 안 나?”하녀장 펠타가 헐레벌떡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세레인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리에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아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나… 어떡해…?”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 입장 중이었는데… 이런 실수를…황제의 입장 도중 일어난 소란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반 쯤 열린 장막 사이로 느껴지는 날 선 기류.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잠시 장막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곳에 세레인이 있었다.그는 한 손을 천천히 들었다.“리네브.”그 순간 공기 속에 미묘한 진동이 퍼졌다.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흘러나와 부서진 유리잔 조각들을 감싸 안았다.파편들은 마치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황제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붉은 융단 위로 길고 고요한 발소리만이 남았다.장막 안의 하녀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자리에 도착하자 그에 맞춰 주변 귀족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작게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회가 시작되었다.폐하가 뭐라고 안하고 그냥 지나가는게 더 무서워.마사는 세레인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리나, 괜찮아? 근데 하녀장님 완전 난리 날 텐데…”“나, 진짜 왜 그랬지 나… 나 뭐가 들렸던 거야 진짜…”세레인은 쟁반을 내려다보다가 부서진 유리잔이 정리된 바닥을 다시 쳐다봤다.깨끗하게 정리되긴 했지만 사고 친 순간이 사라지진 않겠지.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그때 뒤 쪽에서 일어나던 하녀 하나가 세레인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마리안느.세레인은 다가가서 조심스레 사과했다.“미안해...나 때문에 다칠 뻔했지?”가느다란 발목을 문지르던 그녀는 유리잔 파편이 자신의 치맛단을 스치던 걸 떠올린 듯했다.“아슬아슬하게 안 다쳤네… 뭐.”그러나 그녀의 말투와 눈빛은 제법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7화. 연회의 밤(1)
“우와... 너무 예쁘다.”세레인은 연회장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벽의 눈부신 장식들은 베르나의 조용한 돌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이었다.천장이 어찌나 높고 반짝이는지 마법 조명도 너무 신기해 한참이나 바라봤다.여러 계절이 뒤섞인 듯한 공기와 자연의 향기가 섞여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했다.연회 전후로 이곳을 통과하는 인원들이 많아 하녀들은 대부분 이곳에 배치되었다.세레인은 홀 바깥, 연회장을 드나드는 입구 쪽에서 하녀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그녀가 금빛 천을 정리하고, 식기를 옮기며 바삐 움직이던 와중이었다.홀 안쪽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렸다.레이나 오브리엔.연분홍 드레스, 청초한 미소, 은은한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영애였다.그녀는 오브리엔 가의 후계 구도에서 뒤늦게 치고 올라와 빠르게 입지를 넓히는 인물이었다.레이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아버지 디켄 오브리엔 공작 곁을 지켰다.“아버님, 오늘 연회가 성대하네요.”"그래.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날이지.”"디켄 오브리엔 공작가의 레이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그녀는 곁에 모인 귀족들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레이나 영애, 오늘 착용한 목걸이가 무척이나 영롱하군요. 처음 보는 빛깔의 보석이네요.”한 후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레이나는 우아하게 부채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알아봐 주시니 기쁘네요. 이건 최근 남부 광산에서 소량 발견된 마나크리스탈이에요. 마력 전도율 덕분에 요즘 마법사들과 자산가들 사이에서 금보다 귀하게 거래되곤 하죠. 저희 가문에서 이번에 유통을 맡게 되었답니다.”돈이 되는 정보를 넌지시 흘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 귀족들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변했다.“확실히 외부 연회라 그런지 낯선 얼굴이 많군요. 어디 출신인지 모를 하녀들이…”그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부채 뒤로 속삭였을 때 세레인은 짐짓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낯선 이방인의 외모와 금발머리가 레이나의 눈에 미묘하게 튀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3
더 보기
8화. 연회의 밤(2)
바람이 옅게 감돌던 루메데스의 밤.은은하게 깔린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가면을 쓴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세레인은 손에 트레이를 든 채 구석에서 몸을 반 쯤 숨기듯 서 있었다.정원 구석 나무 그림자 사이. 시선은 아래로, 숨소리는 얇게, 이제는 익숙해진 하녀의 자세였다.그 순간.귀족 몇몇이 허리를 숙이며 한 인물을 향해 길을 비켰고 그 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검은 천 위에 금빛 자수가 반짝이는 제국의 문장이 선명했다.황제였다. 아무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를 향해 눈을 맞추지 않는 가운데, 그의 붉은 눈동자는 정원 구석의 하녀 하나에게 닿아 있었다.이유는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살아있는 포식자의 것처럼 날카롭고 권태에 젖은 것처럼 느슨했다.세레인은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시선이 자신을 뼛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잘생겼다, 아마 그날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게 문제지. 그런 자리에서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세레인은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가설과는 달리 본능적으로 눈을 내려깔고 바닥만 바라봤다.첫 날, 연회장 안. 손에서 미끄러진 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졌던 아찔한 순간.설마 그 날의 책임을 다시 물으려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큰 소란은 아니었다. 금방 묻힌 소란이었다.그럴 리가 없지. 고귀한 왕족들은 일개 하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다. 단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시선일 뿐일거야.쿵. 쿵. 쿵.심장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상했다.세레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에 힘을 주고 잔떨림을 눌렀다.이틀만 더 지나면 끝이잖아.그 생각이 들자,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히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황제는 아무 말도, 아무런 손짓도 없이 지나갔다.***화려했던 연회가 천천히 막을 내렸고, 하녀들의 업무는 계속되었다.세레인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4
더 보기
9화. 리베르츠 남작가(1)
세레인은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사용인 면접을 직접 보는 귀족 아가씨가 있구나. 제멋대로인 영애들이야 많이 본 적 있긴 한데.“어! 마사?”벨라는 자연스레 소파에 앉으며 마사를 가리켰다.“아가씨 오랜만이에요~”“옆에 있는 사람이… 그 하녀야?”“네, 칼데론 출신의 리나에요. 저랑 같이 일했던 친구에요. 부지런하고 손도 야무져요.”“흠, 얼굴은 귀엽네. 일은 잘 하려나?”벨라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세레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사실 귀엽다는 표현에 가까운 건 벨라 아가씨 쪽이었다.갓 사춘기에 들어선 듯한 반짝이는 인상을 풍기는 작은 체구의 소녀. 이미 성인인 스물두 살 세레인과는 다르게 보는 이로 하여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앙증맞은 외모였다.세레인은 몸을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금빛 머리카락도 어깨 앞으로 살며시 흘러내렸다.“리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그래. 뭐, 너무 뻣뻣하게 굴 필요는 없고~”벨라는 손짓으로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오늘부터 이 애가 아가씨 옷이랑 방 정리 도와드릴 거예요.”“좋아! 지금 옷이 아주 그냥 폭탄 맞았거든. 따라와.”벨라는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갔고 세레인은 그 뒤를 따라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소매에 달린 하늘색 리본 장식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방 안은 상상 이상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화려한 드레스들이 침대와 바닥을 가득 메우고, 구두가 책상 위에 얹혀 있었으며 리본과 레이스가 뒹굴고 있었다.실크, 벨벳, 오간자 등 다양한 소재의 드레스들은 형형색색의 자수와 금사로 수놓아져 있었다.으악, 무슨 옷이 이렇게 많다고? 백작가 영애였을 때 나도 저랬나…? 난 옷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저, 이게 다… 벨라 아가씨 드레스인가요?”“당연하지! 자 이건 색깔별로 정리해 줘. 구두는 닦으면서 정리하고!”“헉, 알겠습니다.”세레인은 숨을 들이쉬고 옷걸이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든 드레스를 아무렇게 걸자 벨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4
더 보기
10화. 리베르츠 남작가(2)
그날 저녁, 벨라 아가씨는 또 다른 변덕을 부리며 외출을 결심했다.“나 밖에 나갈 거니까, 너희도 나 좀 도와.”세레인과 마사는 부랴부랴 드레스를 챙기고 보석함을 열고, 신발을 정리했다.세레인은 반짝이는 벨라의 오팔 귀걸이를 바라보다 무심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칼데론에서는 오팔이 정말 보기 드물게 귀한 원석이었다.“…저런건 엄청 비싸겠지?”“뭐?”앗 또 실수!산 속 오두막에 혼자 있을 때처럼 혼잣말이 그냥 나와버리네.“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저도 모르게 한 실언이었어요.”벨라는 눈을 가늘게 슥 뜨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내가 싫증나면 그때 너 줄까? 네가 소화를 할지는 모르겠다만.”“하하…아니에요. 아가씨 정말 실언이었어요.”아이고 내 심장이...외지에서 온 하녀가 감히 모시는 아가씨의 귀걸이를 탐냈다는 말이 들려올까봐 무서웠다.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아가씨 때문에 세레인은 하루에도 심장이 열 번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이야, 벨라 아가씨네 댁은 정말 저택이 아니라 궁전 같네요.”정원 너머로 언뜻 보이는 별채와 마구간, 그리고 잔디 위에 놓인 백색 찻상이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세레인은 나무 그늘 아래로 몸을 살짝 옮기며 말했다.어느새 발테리움의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흐음, 옷 보는 눈은 최악이더니 그런 건 볼 줄 아네?”“…저 아가씨 때문에 저택에서 감각 없다고 소문 났어요.”“맞는 말이잖아~”벨라는 샐쭉하게 웃어보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니스커트처럼 짧은 드레스를 가볍게 털었다.“이거 짧다고, 엄마가 보면 또 뭐라 하겠지?”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귀여웠다. 세레인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마치 무대 위에서 걷듯 계단을 내려오는 벨라의 발치에는 작고 예쁜 리본이 달린 구두가 반짝였고,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붉은 루비처럼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경쾌하게 앞장서며 정원 쪽으로 향했다.“그나저나 오늘 아가씨 부모님께서 오신다면서요?”“응,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4
더 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