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 “……예?” 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 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숨이 순간 멎은 듯. 당혹감, 굴욕감, 분노까지 뒤섞여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폐하, 지금 그게 무슨-” 황제 카르안은 여전히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잘랐다. “손을 다쳤으니 입으로 차를 따르라고.” 카르안은 아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닿았다. 표정은 똑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흥미로웠다. “…아직 이해가 안되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View More“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 좀 부르지 말라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
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
“입으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예? 뭐라고요?”
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
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차 말이다.”
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금… 무슨, 장난을…”
“장난처럼 들리나?”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
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베르나 마을.
“아야! 또 가시야!”
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
“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투덜투덜 말하며 풀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바구니엔 엉성하게 모은 약초가 반쯤 담겨 있었다. 라페 꽃, 노란 뿌리풀, 흉터 잎까지. 정리는 조금 서툴었지만 약초 캐는 건 전문가급이었다. 세레인—지금은 ‘리나’라 불리는 그녀는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 속에서 역시 내가 제일 최고지!”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약초꾼이라고 불렀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그녀를 슬쩍 훔쳐봤다.
“리나 누나! 거기 있지?”
초록색 털모자를 눌러쓴 토비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또 왔어, 토비?”
“응! 근데 오늘은 진짜 용건 있어!”
소년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장날 전에 이 약초 꼭 좀 부탁한대! 향 좋은 걸로!”
세레인은 쪽지를 받아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또 혼자 온 거야?”
“응! 걱정 마! 나 길 다 외웠다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약초 퀴즈! 이 잎은 뭐게?”
“음… 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는 왜 혼자 살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심심하지 않아?”
“네가 자꾸 오잖아.”
“풀요정 리나 누나~!!”
토비는 풀잎을 그녀 머리에 얹고는 도망치듯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세레인은 조용히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세레인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안고 입김을 호호 뿜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우 추워… 옷을 더 두꺼운 걸로 입을걸.”
혼잣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베르나 마을은 칼데론 왕국의 끝자락. 세레인이 혼자 사는 깊은 산 속과는 다르게 활기가 있었다. 벽돌로 쌓은 낮은 담벼락과 창문에 걸린 수세미 덩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사이로 흘렀다. 길모퉁이에서 돌을 고르던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리나 누나다!”
세레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레인은 흐느적거리는 바구니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간판을 향해 갔다. 나무 간판에는 '식료품점'이라 적혀 있었다. 출입문 위에는 마른 허브다발이 묶여 흔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난로 열기와 함께 녹진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
“마델렌 아주머니, 저 왔어요!”
선반 위에는 건과일, 말린 치즈, 과일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마델렌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으로 찻잔을 닦다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있고 말고. 안 그래도 어제 혼자서 밀 옮기다 허리 나갈 뻔했어.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살지.”
세레인은 가게 뒷편에서 물건을 옮기고 바닥을 쓸었다. 상징인 진열대도 깨끗이 닦고 정리했다. 작은 노동이 끝나고 마델렌이 채소 몇 가지, 통밀빵 그리고 잼을 싸서 건네주었다.
“약초는 저기 선반 옆에 두고. 내가 약초상에게 전해줄게.”
마델렌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자, 이건 약초 값. 리나 이것도 좀 마셔.”
“고맙습니다.”
세레인은 건네받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마셨다. 마델렌은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레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요 며칠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마을 기록도 새로 정리하고 있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을 텐데… 이번엔 좀 오래 갈 것 같아. 너도 늦게 다니지 말고, 리나.”
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네, 알겠어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게를 나설 무렵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 목소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췄다.
“그래도 이번엔 진짜 심각하대. 서쪽 지방에서도 반발 움직임이 슬슬—”
“쉿!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장작을 쌓으며 이야기 중인 중년 남자 둘이 보였다. 그들은 허름한 외투를 여미며 손을 비벼대고 있었고 둘 사이의 말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요즘엔 마을에도 이상한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더라. 어쩌려고 그리 입이 가볍냐.”
“알았어 알았어, 이젠 말 안 해.”
한 사람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그때—갑자기 얘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 참, 내 친척이 제국 변방에서 일하잖아. 그 양반 말로는 거기 황제가 머리는 새까맣고 눈이… 붉다던데.”
“그래,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더라고.”
“그리고 손 짓에 땅이 날아간다네. 괴물이지 괴물!”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세레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나오는 얘기들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칼데론 왕은 식사 시간에 평민 머리통을 올려서 먹는다. 공작가 영애는 밤마다 사람 비명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든다. 그럴싸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돌았다. 못된 귀족들이나 왕은 사람 하나 쯤은 휘파람 불다 휙 날려버리는 게 일상이고. 그 사람들은 와인 대신 피를 마시는 게 틀림없다느니…
“그야 제국 황제니까 뭐 여기보다 좀 더 무서울 수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고?”
세레인은 콧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참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냐?
허무맹랑했다. 칼데론 왕국의 백작가 영애로 자란 그녀로선 그런 말은 순수한 시골 사람들의 괴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예전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 집무실에 문서를 가져다주던 어느 날, 귀족들의 대화.
"발테리움 새 황제 소문이 심상찮다더군.""나이가 어린데 잔인하다고 하더군요."
가볍게 넘겼던 말들. 어딘가 기시감 같은 이질적인 느낌. 단순한 허풍이라 넘기기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레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이 날아가기는 뭘 날아가, 감자 한 자루도 못 드는 사람들이…”
예전 그녀가 속했던 귀족 세계의 사람들은 흙먼지 안 묻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군림했었다. 심지어 손톱 하나 상하지 않게 사는 게 미덕인 사람들도 꽤 많았다. 지금의 세레인은 산길을 오가며 장작도 패고, 무거운 밀 자루도 거뜬히 나르는 몸이 됐다. 진짜 산에 살아본 사람은 산을 날린다느니 그런 말 못 해.
그녀는 코웃음을 흘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교계의 정점에서 온갖 교활한 권모술수를 배우며 자란 레이나에게, 일개 하녀의 반박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레이나는 제 손을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상처받은 세레인을 향해 더 사정없이 모욕을 퍼부었다.“입 닥쳐, 해충 같은 년아. 네년이 폐하의 이름을 그 주둥이에 담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다. 네까짓 게 폐하의 곁에 머무는 매 순간이 제국의 수치고.”세레인은 내리꽂는 독설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막으려 입술을 꽉 악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하고서도 세레인은 레이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제가 원해서 이 궁에 온 게 아닙니다. 폐하가 억지로 데리고 가신 건데, 왜 제게 이러시는 겁니까.”“뭐?”“폐하 앞에서는 감히 한마디도 못 하면서. 내가 만만하니까 여기 와서 화풀이하는 거잖아요. 그깟 춤이 뭐라고!”서러움에 받쳐 내뱉은 항변이었으나, 감히 제국의 주인을 탓하는 시건방진 태도에 레이나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이제는 네년이 폐하의 뒤에 숨어 책임을 전가하는구나.”레이나가 다가와 세레인의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채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피가 뜯겨 나갈 것 같은 통증에 세레인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아아악!"레이나는 세레인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주제를 알아. 그리고 똑똑히 들어. 만약 오늘 일을 쥐새끼마냥 폐하께 전하기라도 한다면, 넌 이 제국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내 오라버니 자렐은 제국의 핵심 군부 귀족이며, 그가 움직이는 병사만 3만 명이다.”3만 명.칼데론 왕국에서는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가문을 걸어야 사천에서 육천 명 안팎의 군세를 소집할 수 있었다. 아직 승계도 안 한 공작가 영식이 무슨 군사를 3만 명이나 부린단 말인가? 에나에게 들었던 오브리엔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비로소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순간이었다.“네가 이 제국에서 발을 딛는 곳마다, 숨을 쉬는 길목마다 우리 가문의 눈과 귀가 널 쫓을 것이다. 황
무대 중앙의 왈츠는 마침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카르안의 능숙한 리드 덕분에 세레인은 몇 번이나 넘어질 위기를 간신히 넘겼고, 음악의 템포가 서서히 느려지며 마지막 선율이 연회장의 높은 천장으로 흩어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세레인의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혔다. 술기운에 숨이 가빠오자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카르안은 받치고 있던 세레인의 허리에서 살짝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지만, 수십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 위였다. “수고했어, 내 파트너.” 카르안이 낮게 속삭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세레인은 발목을 슬쩍 움직여 보더니, 제 발에 몇 번이나 밟힌 카르안의 신발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폐하…… 진짜 발 괜찮으세요? 계속 밟아서 죄송해요. 발가락 다치신 거 아니죠?” “미안하면 네가 치료해주던가.” 카르안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세레인이 술기운에 비틀거리자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세레인은 이제 체면이고 뭐고 따질 기운도 없어, 덥석 황제의 팔을 붙잡고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이 무대를 빠져나오자, 연회장에는 폭풍 같은 박수갈채와 수군거림이 동시에 쏟아졌다. 황제가 시녀의 발을 맞춰주며 춤을 추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일 아침 사교계는 발칵 뒤집힐 터였다. 연회장의 열기가 절정에 달할 무렵, 세레인은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카르안은 대신들과 아쉔 대공에게 둘러싸여 외교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더 여기 있다간 술이 깨는 게 아니라 내 머리가 터지겠어. 세레인은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상석을 탈출했다. 다행히 귀족들은 세레인을 그저 ‘황제의 기행에 이용된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였기에, 대놓고 길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무도회장과는 거리가 먼, 한적한 별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세레인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 막히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혼자만의 안락한 공간이었다. "아휴, 살 것
담소를 나누던 아쉔 대공과 방계 황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지만, 카르안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세레인만 내려다볼 뿐이었다.“춤? 술 먹는다고, 내가 아래에서 뭘 하는지 보기는 했나?세레인은 술기운으로 몽롱해진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보았지만, 심술이 잔뜩 난 아이 같은 황제의 심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아, 그... 다 봤어요. 엄청 번쩍번쩍 화려하게 잘 추시던데요…….”세레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름대로 칭찬이랍시고 건넨 말이었지만, 카르안의 인상은 더 구겨졌다. 다른 여자랑 춤 추고 있는 걸 다 보고서도 시릴이 주는 술이나 받아먹고 그렇게 헤벌레 웃고 있었다는 말이지.카르안의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턱짓으로 세레인의 뺨에 감도는 홍조를 가리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경계심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네? 독주를 주는 대로 홀짝홀짝 잘도 받아먹고." "독주가 아니고 와인인걸요. 그리고 공작님이 친절하게 따라주신 거라…….” 제국의 황제를 눈앞에 두고, 다른 사내의 호의를 두둔하는 세레인의 태도는 카르안의 인내심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너.”낮게 내리깔린 황제의 목소리에 세레인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러면 제국의 공작님이 주는 건데 나더러 그 앞에서 '저는 안 먹습니다.' 이렇게 하기라도 하란 말이야?두 사람의 유치한 대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시릴은, 제 이름이 언급되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폐하, 그나저나 저 아래 오브리엔 영애는 저렇게 바람맞혀 두고 오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대 중앙에서 폐하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만."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도발이었다. 카르안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받아쳤다.“베르탄 공작. 공녀 걱정을 해줄 정도로 심심하면, 저기 계속 네 쪽 쳐다보는 영애들이랑 춤이나 추러 가지 그래?”“아하하,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만.”시릴이 어깨를 으쓱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레이나 오브리엔 공녀의 뒷모습은 세상 그 어떤 영애보다 화려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뒤로한 채, 중앙 상석에 남겨진 세레인은 그저 뻘하게 앉아 슥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주변에 흐르는 공기는 여전히 숨이 막혔다. 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바로 옆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쉔 대공을 포함해서 방계황족들까지.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은 특유의 잔을 가볍게 들어 아쉔 대공을 향해 건넸다.“대공 전하, 생일 축하드립니다.”“고맙군, 베르탄 공작.”아쉔이 묵직한 목소리로 답하며 잔을 부딪쳤다. 딱딱한 아우라는 여전했으나, 사촌 동생이 남기고 간 묘한 즐거움 때문인지 입꼬리를 올리며 앉은 이들과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세레인은 이따금 닿는 시선들이 불편해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리고 제 앞 탁자 위에 놓인 화려한 와인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와인을 그대로 꿀꺽꿀꺽 들이켰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후…… 살 것 같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잔이 비어버리자 세레인은 머쓱한 듯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릴이 눈매를 접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잘 마시네요, 리나 양.”시릴은 세레인의 빈 잔에 붉은 와인을 쪼르르 더 따라주었다.“아, 감사합니다, 공작님.”세레인은 감사합니다 인사하면서 또 주는 대로 잔을 홀짝였다. 달콤한 액체가 들어갈 때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말랑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무도회 중앙에서는 카르안과 레이나의 춤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이나 오브리엔의 수려한 얼굴은 이미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비록 시작은 매끄럽지 못했으나, 지금 이 순간 수많은 귀족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으며 무대 중앙의 주인공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무엇보다 자신을 리드하는 카르안의 손길이 완벽했다. 제 허리를 감싸 쥔 그의 단단한 손길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레이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설레어왔다. 카르안은
달빛이 창백하게 퍼진 뒷골목에서, 검은 외투를 두른 사내가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복면을 깊게 눌러쓴 그는 주변을 신중하게 두리번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디켄 오브리엔 공작이었다.복면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외투 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우편 관리인 하나 매수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디켄은 조용히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인을 뜯고 안의 편지를 꺼내자, 꼼꼼하게 눌러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받는 이: 칼데론의 베르나 마을 식료품점, 마델렌 아주머니][보내는 이:
황궁의 성문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마차 안에 몽글몽글한 공기가 일렁였다. 세레인의 무릎 위에서 숨을 내뱉던 카르안이 돌연 묵직한 무게감으로 변하며 그녀의 하체를 압박했다.“……아!”세레인은 숨을 들이켰다. 카르안은 긴 다리를 무릎 세워 구부린 채, 세레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카르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황제의 조막만한 손을 잡고, 레이스 셔츠가 잘 어울린다며 깔깔대던 기억이 비현실적인 꿈처럼 멀어졌다.하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세레인의 허벅지 안 쪽으로 더
집무실 안은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세레인은 애꿎은 스커트만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툴툴댔다.세상에 진짜 어이가 없어서, 열세 살 벨라 아가씨한테까지 저렇게 질투를 하는 거야?살짝 설레긴 했지만, 동시에 황당함이 치밀었다. 그 지독하고도 유치한 소유욕의 근원이 대체 어디일까? 그러다 문득 행정동 서고에서 넋을 놓고 봤던 그 초상화가 떠올랐다. 금색 액자 안에서 맑은 선홍색 눈을 빛내던 세 살 무렵의 아기 황제, 카르안.지금의 그 오만하고 위험한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천사 같은 모습. 그래, 그 예쁜 아기 얼굴이라도
“폐하, 제발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내 집무실이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내가 곧 법인 곳.”카르안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세레인은 필사적으로 손바닥을 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밀어냈다. 방금 전까지 시릴 베르탄 공작이 서 있던 공간이었다. 그 서늘한 공작의 향수 잔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였다.“밖에는 수행관들도 있고, 조금 전까지 공작님도 계셨던 곳이라구요. 제발 체통 좀 지키세요!”“체통? 어차피 내가 널 총애한다는 건 온 황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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