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 “……예?” 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 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숨이 순간 멎은 듯. 당혹감, 굴욕감, 분노까지 뒤섞여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폐하, 지금 그게 무슨-” 황제 카르안은 여전히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잘랐다. “손을 다쳤으니 입으로 차를 따르라고.” 카르안은 아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닿았다. 표정은 똑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흥미로웠다. “…아직 이해가 안되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더 보기“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 좀 부르지 말라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
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
“입으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예? 뭐라고요?”
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
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차 말이다.”
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금… 무슨, 장난을…”
“장난처럼 들리나?”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
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
몇 달 전.
베르나 마을.
“아야! 또 가시야!”
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
“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투덜투덜 말하며 풀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바구니엔 엉성하게 모은 약초가 반쯤 담겨 있었다.
라페 꽃, 노란 뿌리풀, 흉터 잎까지.
정리는 조금 서툴었지만 약초 캐는 건 전문가급이었다.
세레인—지금은 ‘리나’라 불리는 그녀는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 속에선 역시 내가 제일 최고지!”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약초꾼이라고 불렀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그녀를 슬쩍 훔쳐봤다.
“리나 누나ㅡ!! 거기 있지?”
초록색 털모자를 눌러쓴 토비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또 왔어, 토비?”
“응! 근데 오늘은 진짜 용건 있어!”
소년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장날 전에 이 약초 꼭 좀 부탁한대! 향 좋은 걸로!”
세레인은 쪽지를 받아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또 혼자 온 거야?”
“응! 걱정 마! 나 길 다 외웠다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약초 퀴즈! 이 잎은 뭐게?”
“음… 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는 왜 혼자 살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심심하지 않아?”
“네가 자꾸 오잖아.”
“풀요정 리나 누나~!!”
토비는 풀잎을 그녀 머리에 얹고는 도망치듯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세레인은 조용히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세레인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안고 입김을 호호 뿜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우 추워… 옷을 더 두꺼운 걸로 입을걸.”
혼잣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베르나 마을은 칼데론 왕국의 끝자락.
세레인이 혼자 사는 깊은 산 속과는 다르게 활기가 있었다.
벽돌로 쌓은 낮은 담벼락과 창문에 걸린 수세미 덩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사이로 흘렀다.
길모퉁이에서 돌을 고르던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리나 누나다!”
세레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레인은 흐느적거리는 바구니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간판을 향해 갔다.
나무 간판에는 '식료품점'이라 적혀 있었다.
냄새? 오염? 내가 무슨 역병이라도 된다는 거야? 카르안이 했던 말보다 더 잔인하게 가슴을 후벼파는 말이었다. "오브리엔 공작가요?" 숙소로 돌아온 세레인은 동료 시녀 에나의 방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속이 상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세레인의 물음에 에나가 토끼처럼 눈을 뜨며 목소리를 낮췄다. "리나, 설마 디켄 공작님이랑 마주친 거예요? 아니면 레이나 영애? 세상에 표정 보니까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보네." 에나는 세레인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는 지방 남작가의 영애라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사교계의 거물들에 대한 정보는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해야 해. 오브리엔 공작가는 권세가 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예요. 디켄 공작님은 무역국장인데 상무회 의장직을 노리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요. 오브리엔가는 제국으로 들어오는 어지간한 사치품 유통권을 다 쥐고 있어요. 그 밑에서 자란 레이나 영애는 오죽하겠어요? 아 그리고 오라버니인 자렐도 세력 키우고 있다고 하고요." 세레인은 아까 온실에서 들었던 비천한 냄새라는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종류의 멸시였다. 고작 두어 번 짧게 마주쳤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본인은 태생부터 고결한 존재고, 나는 존재 자체로 세상을 더럽히는 오물인 양 치부하던 그 눈빛.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하녀 출신이라서? 아니면 폐하의 옆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했지만 무력감이 더 컸다. 에나의 말대로 그 여자는 제국의 정점에 선 공작가 영애였고, 자신은 이름조차 가짜인 도망자일 뿐이니까. 그래. 싸우던 뭘 하던 누가 내 편을 들어주겠냐? 게다가 나는 정말 혼자인데. “에나, 저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나 같은 남작가 출신도 저들 눈엔 평민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일걸요.
황궁의 성문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마차 안에 몽글몽글한 공기가 일렁였다. 세레인의 무릎 위에서 숨을 내뱉던 카르안이 돌연 묵직한 무게감으로 변하며 그녀의 하체를 압박했다.“……아!”세레인은 숨을 들이켰다. 카르안은 긴 다리를 무릎 세워 구부린 채, 세레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카르안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린 황제의 조막만한 손을 잡고, 레이스 셔츠가 잘 어울린다며 깔깔대던 기억이 비현실적인 꿈처럼 멀어졌다.하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세레인의 허벅지 안 쪽으로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저……폐하,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세레인이 당황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카르안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는 입을 맞췄던 때와 같은 열기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왜 아까는 그렇게 꼭 껴안고 다니더니, 갑자기 멀어지네.”그는 세레인의 허벅지 위로 제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나른하게 읊조렸다. 아이의 모습일 때 보여주던 그 다정한 온기를 요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세레인은 당황해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그건, 그때는 폐하께서 작으셔서 제 품에 쏙 들어오셨으니까요.”“작다고?”카르안이 피식 웃으며 우월하게 긴 다리를 쭉 뻗어보였다.“지금은 저보다 한참 크시죠.… 그런데 폐하, 키가 정확히 몇이세요?”“글쎄, 최근엔 안 재봤는데. 191이었나.”“191이요…?”세레인이 입을 벌리고 놀라자 카르안은 그 모습이 즐거운 듯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입술 근처로 끌어당겼다.“앞으로도 아까처럼 해. 알겠지?”그는 세레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여린 살갗을 살짝 긁어 내렸다. 세레인이 숨을 들이켜자 카르안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비틀었다.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카르안은 자연스럽게 세레인을 에스코트하며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와 경호들이 절도 있게 길을 텄다.입구에는 최측근인 시릴 베르탄과 행정부 소속
“세레인, 내가 아무리 작아졌어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동그란 뺨을 실룩거리며 내뱉는 경고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세레인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 정점에 선 오만한 황제가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제 옷차림에 투정을 부리다니. 그가 정말로 황자였을 시절을 상상해보면 절대 불가능했을 이 상황이 꿈만 같아 즐거움이 배가되었다.결국 타협 끝에 카르안은 세레인이 고른 화려하고 귀여운 레이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왔다. 그 모습은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겹겹이 쌓인 하얀 레이스와 날카로운듯한 커다란 눈매가 대비를 이루며 천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마차에 돌아온 카르안은 문이 닫히고 세레인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작디작은 손으로 세레인의 말랑한 볼을 콱 움켜잡았다.“아, 폐…… 공자님. 아푸요!”카르안은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세레인을 쏘아보았다.“너, 누가 여자 옷 가져오래?”“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그랬죠……. 아! 아야야!”반대쪽 볼까지 사정없이 잡아당겨지자 세레인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카르안은 그제야 움켜쥐었던 세레인의 볼을 놓아주었다. 그는 자신의 목선부터 어깨까지 겹겹이 쌓인 화려한 레이스를 신경질적으로 툭 쳤다. 그의 시선이 가슴팍에 달린 하트 브로치에 머물렀다.“하…….”카르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세레인은 웃으며 슬쩍 브로치를 빼서 더 잘 보이는 중심부로 고쳐 달아주었다.“공자님, 마음에 드세요? 전 너무 마음에 드는데! 진짜 잘 어울리세요!”세레인이 헤실헤실 웃으며 묻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음에 드냐고?" 그는 브로치를 만지던 세레인의 손목을 덥석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난 네 눈에 내가 어린 영애 따위로 보인다는 게 불쾌해.”카르안은 세레인의 상의를 잡아당겨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세레인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카르안은 입술을 뗀 채, 굳어버
세레인은 침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는 카르안의 작은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 살배기 아이의 형상을 한 황제. 너무나 무해하고 순수하게 보이지만, 분명 그 얼굴 너머에는 저를 욕망하고 무너뜨렸던 황제가 투영되는 것만 같았다.“그....... 카인 공자님, 여기는 침대가 많이 넓지 않은 걸요. 주무시기 불편하시면 어떡해요.”“좁으면 더 가까이 오면 되지 않나. 여기서 자.”웅얼거리는 발음 탓에 투정에 가까웠으나, 그 눈빛만큼은 서늘했다. 결국 세레인은 못 이기는 척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침대 한쪽에 몸을 뉘었다. 그녀가 눕자마자 카르안은 기다렸다는 듯 세레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포동포동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세레인의 어깨에 보드라운 뺨을 부비며 자리를 잡았다.정말…… 인형 같아.세레인은 홀린 듯 카르안의 보드라운 흑발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넘겼다. 낮에 마주했던 그 잔혹한 폭군과는 도저히 매치되지 않는 포근함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칼데론에서 유모가 자신을 재워주며 불러주던 나지막한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고향의 정취가 섞인 단조로운 멜로디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세레인의 품에 안긴 카르안은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녀의 다정한 콧노래와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작은 귓가를 울렸다. 세레인은 정말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자가 제국을 피로 물들인 황제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저 지켜줘야 할 가련한 아이로 여기며 애정 어린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그래, 마음껏 보살피고 정을 줘, 세레인. 네가 이 작은 몸을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나를 더 떠나지 못할테지.카르안은 세레인의 옷을 작은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법을 풀고 그녀를 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이 연약한 척하는 인형 놀이는 더 큰 쾌락을 위한 투식(投資)에 불과했다. 그녀가 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무방비해질 때까지.“……세레인, 노래 멈추지 마.”카르안은 잠에 취한 듯 가느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