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31
By:  그림자운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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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 “……예?” 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 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숨이 순간 멎은 듯. 당혹감, 굴욕감, 분노까지 뒤섞여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폐하, 지금 그게 무슨-” 황제 카르안은 여전히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잘랐다. “손을 다쳤으니 입으로 차를 따르라고.” 카르안은 아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닿았다. 표정은 똑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흥미로웠다. “…아직 이해가 안되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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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베르나의 약초꾼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 좀 부르지 말라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

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

“입으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예? 뭐라고요?”

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

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차 말이다.”

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금… 무슨, 장난을…”

“장난처럼 들리나?”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

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

몇 달 전. 베르나 마을.

“아야! 또 가시야!”

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

“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투덜투덜 말하며 풀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바구니엔 엉성하게 모은 약초가 반쯤 담겨 있었다. 라페 꽃, 노란 뿌리풀, 흉터 잎까지. 정리는 조금 서툴었지만 약초 캐는 건 전문가급이었다. 세레인—지금은 ‘리나’라 불리는 그녀는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 속에서 역시 내가 제일 최고지!”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약초꾼이라고 불렀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그녀를 슬쩍 훔쳐봤다.

“리나 누나! 거기 있지?”

초록색 털모자를 눌러쓴 토비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또 왔어, 토비?”

“응! 근데 오늘은 진짜 용건 있어!”

소년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장날 전에 이 약초 꼭 좀 부탁한대! 향 좋은 걸로!”

세레인은 쪽지를 받아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또 혼자 온 거야?”

“응! 걱정 마! 나 길 다 외웠다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약초 퀴즈! 이 잎은 뭐게?”

“음… 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는 왜 혼자 살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심심하지 않아?”

“네가 자꾸 오잖아.”

“풀요정 리나 누나~!!”

토비는 풀잎을 그녀 머리에 얹고는 도망치듯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세레인은 조용히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세레인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안고 입김을 호호 뿜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우 추워… 옷을 더 두꺼운 걸로 입을걸.”

혼잣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베르나 마을은 칼데론 왕국의 끝자락. 세레인이 혼자 사는 깊은 산 속과는 다르게 활기가 있었다. 벽돌로 쌓은 낮은 담벼락과 창문에 걸린 수세미 덩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사이로 흘렀다. 길모퉁이에서 돌을 고르던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리나 누나다!”

세레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레인은 흐느적거리는 바구니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간판을 향해 갔다. 나무 간판에는 '식료품점'이라 적혀 있었다. 출입문 위에는 마른 허브다발이 묶여 흔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난로 열기와 함께 녹진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

“마델렌 아주머니, 저 왔어요!”

선반 위에는 건과일, 말린 치즈, 과일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마델렌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으로 찻잔을 닦다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있고 말고. 안 그래도 어제 혼자서 밀 옮기다 허리 나갈 뻔했어.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살지.”

세레인은 가게 뒷편에서 물건을 옮기고 바닥을 쓸었다. 상징인 진열대도 깨끗이 닦고 정리했다. 작은 노동이 끝나고 마델렌이 채소 몇 가지, 통밀빵 그리고 잼을 싸서 건네주었다.

“약초는 저기 선반 옆에 두고. 내가 약초상에게 전해줄게.”

마델렌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자, 이건 약초 값. 리나 이것도 좀 마셔.”

“고맙습니다.”

세레인은 건네받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마셨다. 마델렌은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레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요 며칠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마을 기록도 새로 정리하고 있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을 텐데… 이번엔 좀 오래 갈 것 같아. 너도 늦게 다니지 말고, 리나.”

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네, 알겠어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게를 나설 무렵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 목소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췄다.

“그래도 이번엔 진짜 심각하대. 서쪽 지방에서도 반발 움직임이 슬슬—”

“쉿!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장작을 쌓으며 이야기 중인 중년 남자 둘이 보였다. 그들은 허름한 외투를 여미며 손을 비벼대고 있었고 둘 사이의 말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요즘엔 마을에도 이상한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더라. 어쩌려고 그리 입이 가볍냐.”

“알았어 알았어, 이젠 말 안 해.”

한 사람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그때—갑자기 얘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 참, 내 친척이 제국 변방에서 일하잖아. 그 양반 말로는 거기 황제가 머리는 새까맣고 눈이… 붉다던데.”

“그래,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더라고.”

“그리고 손 짓에 땅이 날아간다네. 괴물이지 괴물!”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세레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나오는 얘기들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칼데론 왕은 식사 시간에 평민 머리통을 올려서 먹는다. 공작가 영애는 밤마다 사람 비명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든다. 그럴싸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돌았다. 못된 귀족들이나 왕은 사람 하나 쯤은 휘파람 불다 휙 날려버리는 게 일상이고. 그 사람들은 와인 대신 피를 마시는 게 틀림없다느니…

“그야 제국 황제니까 뭐 여기보다 좀 더 무서울 수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고?”

세레인은 콧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참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냐?

허무맹랑했다. 칼데론 왕국의 백작가 영애로 자란 그녀로선 그런 말은 순수한 시골 사람들의 괴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예전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 집무실에 문서를 가져다주던 어느 날, 귀족들의 대화.

"발테리움 새 황제 소문이 심상찮다더군."

"나이가 어린데 잔인하다고 하더군요."

가볍게 넘겼던 말들. 어딘가 기시감 같은 이질적인 느낌. 단순한 허풍이라 넘기기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레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이 날아가기는 뭘 날아가, 감자 한 자루도 못 드는 사람들이…”

예전 그녀가 속했던 귀족 세계의 사람들은 흙먼지 안 묻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군림했었다. 심지어 손톱 하나 상하지 않게 사는 게 미덕인 사람들도 꽤 많았다. 지금의 세레인은 산길을 오가며 장작도 패고, 무거운 밀 자루도 거뜬히 나르는 몸이 됐다. 진짜 산에 살아본 사람은 산을 날린다느니 그런 말 못 해.

그녀는 코웃음을 흘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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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자유인
자유인
업댓 해주세요~~재미있어요~~♡
2026-05-21 15:38:35
1
0
푸바오
푸바오
와~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재밌네요~ 업뎃 빨리 돼서 많이 많이 읽고 싶네요 ^^
2026-05-05 14:27:58
1
0
빈
너무너무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항상 화이팅!!!!
2026-03-26 20:27:49
1
1
임종현
임종현
고생하는 뗑컨한테 만점주고 읽어야지!
2026-03-26 13:53:5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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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베르나의 약초꾼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나 좀 부르지 말라고……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입으로 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예? 뭐라고요?”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차 말이다.”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지금… 무슨, 장난을…”“장난처럼 들리나?”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베르나 마을.“아야! 또 가시야!”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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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발테리움 제국의 주인
얼었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봄이 가까워지자 작은 마을 베르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도 이전보다 분주해지고 있었다.“성문 근처에서 검문이 시작됐다더라.” “진작부터 불안했지. 국경지대에 병사 늘린 것도 그렇고…” "제러드, 당신도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요. 저번에 필리도 가게에서 불시검문 당해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집에 왔다고 했잖아요." "아니, 내가 또 뭘 언제 늦게 돌아다녔다고 그래!?" "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사람들 틈을 지나며 물건을 사던 세레인은 귀를 쫑긋 세웠다. 두 손에 든 바구니가 묵직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건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이었다.ㅡ칼데론 왕국ㅡ그녀가 태어난 나라이자 모든 것을 잃은 곳. 한때는 백작의 영애로 자랐지만 지금은 성 한 글자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병력 숫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금속 갑옷이 반사하는 햇빛이 눈에 따가웠다.세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바구니 속 허브 뿌리와 약초가 바스락 거렸지만 손잡이를 쥔 손은 얼어붙은 듯이 굳어있었다.그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은빛 갑옷을 입은 군사 넷이 말을 몰며 행진해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양 옆으로 비켰고 세레인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었다. 검문병 하나가 스치듯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피가 식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언뜻언뜻 보이는 상징. 병사의 어깨엔 왕가의 상징, 두 개의 검 위에 사자 문양이 있었다. 칼데론 왕가의 문양. 그녀는 그 표장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이봐! 거기 멈춰!”뒤에서 외침이 들렸다. 군사 하나가 누군가를 붙잡았다. 보따리를 들고 허겁지겁 걷던 행인이 팔을 붙잡혔다."신분증을 보여!”세레인은 몸을 더 움츠렸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고 귓가에 맴도는 과거의 잔상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밤 하늘을 뒤덮던 연기와 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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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잊히지 않는 처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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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
“괜찮아?”“피, 피는 안 나?”하녀장 펠타가 헐레벌떡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세레인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리에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아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나… 어떡해…?”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 입장 중이었는데… 이런 실수를…황제의 입장 도중 일어난 소란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반 쯤 열린 장막 사이로 느껴지는 날 선 기류.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잠시 장막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곳에 세레인이 있었다.그는 한 손을 천천히 들었다.“리네브.”그 순간 공기 속에 미묘한 진동이 퍼졌다.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흘러나와 부서진 유리잔 조각들을 감싸 안았다.파편들은 마치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황제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붉은 융단 위로 길고 고요한 발소리만이 남았다.장막 안의 하녀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가 자리에 도착하자 그에 맞춰 주변 귀족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작게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회가 시작되었다.폐하가 뭐라고 안하고 그냥 지나가는게 더 무서워.마사는 세레인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리나, 괜찮아? 근데 하녀장님 완전 난리 날 텐데…”“나, 진짜 왜 그랬지 나… 나 뭐가 들렸던 거야 진짜…”세레인은 쟁반을 내려다보다가 부서진 유리잔이 정리된 바닥을 다시 쳐다봤다.깨끗하게 정리되긴 했지만 사고 친 순간이 사라지진 않겠지.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그때 뒤 쪽에서 일어나던 하녀 하나가 세레인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마리안느.세레인은 다가가서 조심스레 사과했다.“미안해...나 때문에 다칠 뻔했지?”가느다란 발목을 문지르던 그녀는 유리잔 파편이 자신의 치맛단을 스치던 걸 떠올린 듯했다.“아슬아슬하게 안 다쳤네… 뭐.”그러나 그녀의 말투와 눈빛은 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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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연회의 밤
“우와... 너무 예쁘다.”세레인은 연회장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벽의 눈부신 장식들은 베르나의 조용한 돌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이었다.천장이 어찌나 높고 반짝이는지 마법 조명도 너무 신기해 한참이나 바라봤다.여러 계절이 뒤섞인 듯한 공기와 자연의 향기가 섞여 숨이 막힐 정도로 화려했다. 연회 전후로 이곳을 통과하는 인원들이 많아 하녀들은 대부분 이곳에 배치되었다.세레인은 홀 바깥, 연회장을 드나드는 입구 쪽에서 하녀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금빛 천을 정리하고, 식기를 옮기며 바삐 움직이던 와중이었다.홀 안쪽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렸다.레이나 오브리엔. 연분홍 드레스, 청초한 미소, 은은한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공녀였다.그녀는 오브리엔 가의 후계 구도에서 뒤늦게 치고 올라와 빠르게 입지를 넓히는 인물이었다.레이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아버지 디켄 오브리엔 공작 곁을 지켰다.“아버님, 오늘 연회가 성대하네요.”"그래.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날이지.”"디켄 오브리엔 공작가의 레이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그녀는 곁에 모인 귀족들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레이나 영애, 오늘 착용한 목걸이가 무척이나 영롱하군요. 처음 보는 빛깔의 보석이네요.”한 후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레이나는 우아하게 부채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알아봐 주시니 기쁘네요. 이건 최근 남부 광산에서 소량 발견된 마나크리스탈이에요. 마력 전도율 덕분에 요즘 마법사들과 자산가들 사이에서 금보다 귀하게 거래되곤 하죠. 저희 가문에서 이번에 유통을 맡게 되었답니다.”돈이 되는 정보를 넌지시 흘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 귀족들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변했다.“확실히 외부 연회라 그런지 낯선 얼굴이 많군요. 어디 출신인지 모를 하녀들이…”그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부채 뒤로 속삭였을 때 세레인은 짐짓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낯선 이방인의 외모와 금발머리가 레이나의 눈에 미묘하게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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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붉은 눈동자
바람이 옅게 감돌던 루메데스의 밤.은은하게 깔린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가면을 쓴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세레인은 손에 트레이를 든 채 구석에서 몸을 반 쯤 숨기듯 서 있었다.정원 구석 나무 그림자 사이. 시선은 아래로, 숨소리는 얇게, 이제는 익숙해진 하녀의 자세였다.그 순간.귀족 몇몇이 허리를 숙이며 한 인물을 향해 길을 비켰고 그 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 검은 천 위에 금빛 자수가 반짝이는 제국의 문장이 선명했다.황제였다. 아무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를 향해 눈을 맞추지 않는 가운데, 그의 붉은 눈동자는 정원 구석의 하녀 하나에게 닿아 있었다.이유는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살아있는 포식자의 것처럼 날카롭고 권태에 젖은 것처럼 느슨했다.세레인은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시선이 자신을 뼛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잘생겼다, 아마 그날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게 문제지. 그런 자리에서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세레인은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가설과는 달리 본능적으로 눈을 내려깔고 바닥만 바라봤다.첫 날, 연회장 안. 손에서 미끄러진 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졌던 아찔한 순간.설마 그 날의 책임을 다시 물으려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큰 소란은 아니었다. 금방 묻힌 소란이었다.그럴 리가 없지. 고귀한 왕족들은 일개 하녀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다. 단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시선일 뿐일거야.쿵. 쿵. 쿵.심장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상했다.세레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에 힘을 주고 잔떨림을 눌렀다.이틀만 더 지나면 끝이잖아.그 생각이 들자,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히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황제는 아무 말도, 아무런 손짓도 없이 지나갔다.***화려했던 연회가 천천히 막을 내렸고, 하녀들의 업무는 계속되었다.세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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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리베르츠 남작가
세레인은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사용인 면접을 직접 보는 귀족 아가씨가 있구나. 제멋대로인 영애들이야 많이 본 적 있긴 한데.“어! 마사?”벨라는 자연스레 소파에 앉으며 마사를 가리켰다.“아가씨 오랜만이에요~”“옆에 있는 사람이… 그 하녀야?”“네, 칼데론 출신의 리나에요. 저랑 같이 일했던 친구에요. 부지런하고 손도 야무져요.”“흠, 얼굴은 귀엽네. 일은 잘 하려나?”벨라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세레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사실 귀엽다는 표현에 가까운 건 벨라 아가씨 쪽이었다.갓 사춘기에 들어선 듯한 반짝이는 인상을 풍기는 작은 체구의 소녀. 이미 성인인 스물두 살 세레인과는 다르게 보는 이로 하여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앙증맞은 외모였다.세레인은 몸을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금빛 머리카락도 어깨 앞으로 살며시 흘러내렸다.“리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그래. 뭐, 너무 뻣뻣하게 굴 필요는 없고~”벨라는 손짓으로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오늘부터 이 애가 아가씨 옷이랑 방 정리 도와드릴 거예요.”“좋아! 지금 옷이 아주 그냥 폭탄 맞았거든. 따라와.”벨라는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갔고 세레인은 그 뒤를 따라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소매에 달린 하늘색 리본 장식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방 안은 상상 이상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화려한 드레스들이 침대와 바닥을 가득 메우고, 구두가 책상 위에 얹혀 있었으며 리본과 레이스가 뒹굴고 있었다.실크, 벨벳, 오간자 등 다양한 소재의 드레스들은 형형색색의 자수와 금사로 수놓아져 있었다.으악, 무슨 옷이 이렇게 많다고? 백작가 영애였을 때 나도 저랬나…? 난 옷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저, 이게 다… 벨라 아가씨 드레스인가요?”“당연하지! 자 이건 색깔별로 정리해 줘. 구두는 닦으면서 정리하고!”“헉, 알겠습니다.”세레인은 숨을 들이쉬고 옷걸이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든 드레스를 아무렇게 걸자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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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황제의 질문, 하녀의 거짓말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키가 크고 단정하게 제복을 갖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비안 리베르츠였다. 한눈에 봐도 훈련된 몸이라고 느껴지는 체격과 절제된 걸음걸이.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햇빛을 받자 살짝 밝아 보이는 머리색이 제복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는 푸른빛 눈동자가 엿보였다. 예리하게 보일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가볍게 미소 짓고 있어서 그런지 부드러워 보였다.확실히 괜히 남매가 아니구나. 벨라 아가씨하고도 많이 닮았다. 특히 눈매와 전체적인 윤곽이 비슷했다.“벨라! 너 또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있냐?”“내가 입고 싶어서 입었거든? 어디서 오자마자 시비야!”“그래, 반 년 만에 네가 변하면 이상한 거지.”“내가 왜 변해?! 죽어볼래?”두 남매는 오랜만에 보는 만남이었음에도 서로를 보자마자 거세게 부딪히기 시작했다.세레인은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나 인사를 올렸다.“리나에요.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하녀입니다.”청년의 눈길이 세레인에게 향했다. 깔끔하게 묶어 올린 금빛 머리와 자신의 어깨 높이를 조금 넘는 아담한 키.“아, 새로 온 하녀?”“네, 영애께서 잘 챙겨주셔서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걔가 그럴리가 없는데. 난 다비안.”“잘 부탁드립니다, 공자님.”그는 반쯤 농담하듯 말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시선은 한참이나 그녀에게 머물렀다.외지에서 온 하녀라더니, 발테리움의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다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동선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얼굴을 돌렸다.다비안이 돌아온 지 며칠 뒤, 저택에는 황금빛 밀랍으로 봉인된 두꺼운 봉투 한 장이 도착했다. 제국 황실에서 열리는 상무회 회의. 금빛 인장이 빛나는 문서 끝에는 황실의 표장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리베르츠 남작은 천천히 편지를 접으며 얼굴에 드러나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 카르안의 인장이 찍힌 소환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 브리스.수도 브리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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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못생긴 가면
“가 봐. 하지만 다음번에도 내 눈 앞에 ‘길을 잃었다’는 핑계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네 주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명백한 경고이자 동시에 자비로운 처분이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폐하."세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하고는 부리나케 훈련장을 빠져나갔다.“…숨 막혀.”세레인의 발걸음은 한동안 멈추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 정원이 보이기 시작해서야 겨우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방금 전의 일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듯 맴돌았다.…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아. 아니, 애초에 또 마주칠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거지.세레인이 심장 두근거림을 애써 진정시키며, 정원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벨라 아가씨는 이미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리나 늦었네. 어디까지 구경하고 온거야? 얼른 앉아!”“아 네!”“레이나 영애는 일이 있다고 방금 전에 갔어.”세레인은 양심에 찔려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황궁은 정말 넓네요… 사실 저 아까 길 잃어서 늦은거였어요… 아가씨.”“뭐야 어쩐지 늦다했네. 흐음 너 여기 위치 제대로 못 외웠지?”“네, 아직 잘 몰라요…”황궁은 넓어도 너무 넓고… 그리고 그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굳이 황제와 마주쳤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세레인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바라보다, 괜히 시선을 돌렸다.“그럼 황궁 구경가자!”“...네?”예상 외의 말에 세레인의 시선이 다시 벨라에게 향했다.“아침부터 뭔가 답답하기도 했고. 시원한 황궁 갔다가 시원한 디저트 먹으면 되겠다.”“어, 아가씨 저는-”달갑게 응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세레인은 다른 제안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말이 잘려버렸다.'그때는 네 주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다.“됐고! 아무튼 가.”벨라는 이미 기분이 잔뜩 들뜬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가는 곳에는 사용인들이 따라야 하는 법. 결국 세레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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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가면과 황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집안의 영애들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일찌감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을 마쳤다. 속눈썹에는 반짝이는 가루가 내려앉았고, 손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부채가 들려 있었다. 평소엔 사이좋게 웃던 친구 사이조차 오늘만큼은 서로의 가면을 은근히 견제했다. 누구의 것이 더 우아한지 누구의 것이 더 화려한지.크림색의 긴 테이블 위에는 화려하고 우아한 각양각색의 가면들이 놓여 있었다. 세레인은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내려다보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가장 눈에 띄지 않을 곳을 찾아 구석 자리에 내려놓았다.옆에 예쁜 가면들이 있어서 더 비교되는데… 하, 난 몰라… 아가씨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세레인은 가면을 두고 뒤로 몇 발짝 물러나 구석으로 이동했다. 아까 훈련장에서 황제가 했던 서늘한 경고가 자꾸만 떠올랐다.어차피 형식 상 보는거겠지...그때 후원 입구 쪽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붉은색 예복 차림의 황제 카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과 몇 명의 시종이 따르고 있었다.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하나씩 훑기 시작했다.“이건 라포르 백작가 영애의 작품입니다. 실크와 은실을 조합했군요.”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알리앙 가문의 엘리노어 영애가 만든 가면입니다. 진주를 붙여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처리했습니다.”황제의 시선이 머물 때마다 영애들의 얼굴은 기대와 실망으로 나뉘었다. 그러다 유난히 한산한 테이블 앞에서 황제와 시릴이 멈춰 섰다.“이건 뭐지?”황제의 짧은 질문에 시릴이 가까이 다가와 가면을 살폈다.“어… 음…”시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끼와 풀잎이 듬성듬성 덮인 괴상한 가면 옆에는 '리베르츠' 라고 적힌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시릴은 결국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죄송… 폐하, 이건… 푸흡, 이끼 맞죠?”세레인은 시릴의 웃음소리에 ‘뭐지? 많이 이상한가?’ 싶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하지만 황제의 시선이 자신의 가면에 닿여있는걸 발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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