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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복종은 끝나지 않는다: Chapter 41 - Chapter 50

59 Chapters

41화. 그 손수건은 누구의 것인가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세레인은 서류 정리를 마치고 행정동 뒤편으로 향하는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현장 상황 위주로 간결하게 보고하겠습니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세레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통로 너머, 차가운 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단장 알릭스 옆으로 낯익은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그 색깔. 세레인은 단번에 알아봤다.세레인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공자님!”작은 부름에 기사단장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기둥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녀 복장의 세레인을 발견한 다비안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리나?”다비안은 알릭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조차 잊은 채 홀린 듯이 세레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멀어 보였던 거리는 금새 좁혀졌다.“정말 여기 있었다니…… 무사해서 다행이야.”다비안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세레인의 심장이 울컥 내려앉았다. 황제 앞에서 독기를 품고 버티던 마음은, 믿고 의지했던 사람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공자님, 잘 지내셨어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어디 아픈 곳은요?”“응. 나는 괜찮아. 네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다비안은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세레인을 바라보았다. 다비안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벨라한테 대강 전해 들었어, 리나. 네가 갑자기 갔다는 말을 듣고…… 베르탄 공작님께도 청을 드렸는데,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셔서 방법이 없었어.”“아, 아가씨는 잘 계시나요? 마사랑 남작 부부께서도 다들 잘 있는 거죠? 벨라 아가씨가 많이 울지는 않던가요?”세레인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다비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를 보내고 다들 많이 그리워하긴 하지. 그리고 벨라도... 잘 지내고 있어. 마사도 씩씩하게 자기 일 잘 해내고 있고. 다들 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따뜻한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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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기사의 목숨값

세레인은 계단식 복도를 오르며 몇 번이고 제 손등을 쓸어내렸다. 다비안의 손수건에 배어 있던 향은 꿈 속의 잔상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바뀌었지. 넌 이제 시녀부 소속이 아니라, 내 직속이다.'황제의 직속 시녀. 황제의 변덕이 어디로 튀는지 짐작하는 것조차 지쳤다. 세레인은 집무실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문을 지키던 비서관들이 슬쩍 시선을 던졌다가 거두었다.도대체 왜 또다시 나지? 행정동에서 이제 좀 업무가 익숙해지려고 했는데 참나.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집무실에서 나온 카르안은 평소의 차림이 아니었다. 짙은 흑색 예복 위로 정교한 자수가 놓인 외투를 걸친 그는 격식을 더 갖춘 모습이었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세레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옆을 지나쳤다.“따라와.”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세레인은 반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가 내딛는 발소리가 복도에 규칙적으로 울릴 때마다 세레인의 심장도 덩달아 조여들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천장과 좌우로 늘어선 기둥들. 낯선 귀족들이 복도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황제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그들의 시선은 뒤따르는 세레인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머물렀다. 화살처럼 꽂히는 그 무수한 눈동자들을 견디며 카르안의 뒤를 쫓았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중앙 대회의장 앞이었다. "폐하, 저는 밖에서 대기...할까요?" 목소리가 떨렸다. 카르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눈빛이 세레인의 떨리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는 대답 대신 세레인의 팔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억센 손길에 세레인은 비명을 삼키며 질질 끌려 들어갔다. 회의장 안. 높은 천장 아래 좌우로 반원형을 그리며 층층이 쌓인 좌석에는 제국의 중신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사생활에 있어서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했던 황제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카르안이 웬 시녀의 팔목을 잡고 나타나자, 대신들과 귀족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미친 새끼. 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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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폭군의 구애

회의장이 텅 비어가는 과정은 지지부진했다. 대부분은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채 세레인에게 시선을 던졌고, 몇몇은 바닥만 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폐하, 요청하신 자료는 자정 전까지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대신들에게 상당히 기이한 메시지로 읽힐 듯합니다. 원로원의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는 해두겠습니다.”시릴 베르탄 공작이 인사 후 회의장을 떠나자, 거대한 문이 닫히고 회의장엔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카르안은 높은 보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를 넘겼다. 마치 세레인을 공기 취급하는 그 무심한 태도가 그녀의 인내심을 끝내 바닥나게 만들었다.“더 줄까?”한참 만에 툭 던져진 목소리. 카르안은 과일 접시를 가볍게 두드렸다.“……안 먹습니다.”“뭐?”“안 먹는다고요!”세레인의 외침이 넓은 회의장에 울려퍼졌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다급하게 황제에게 사과를 덧붙였지만, 카르안의 미간은 좁혀진 채 펴지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옆에 놓인 과일 조각을 손으로 집어 세레인의 입가로 밀어 넣었다.“읍……!”입술이 벌어지고 과육이 또다시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세레인, 점심엔 뭘 먹여줄까. 방금 먹은 것보다 더 달콤한 걸로 준비할까 하는데.”그의 어조는 지나치게 평온했다.“……이 미친 새끼.”세레인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당신, 진짜 미쳤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사람이 장난감이야...? 사람이 장난감이 아니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잖아!”“제정신?” 세레인의 악에 받친 외침에도 카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옆에 있는 세레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쥐었다. 그리곤 사냥감의 털을 고르듯 집요하게 만지작거렸다.“기대하는 게 너무 많네, 세레인. 나에게서 상식 같은 걸 찾다니.”카르안의 손가락이 그녀의 젖은 눈가를 엄지로 거칠게 문질렀다. 연약한 살이 짓눌리는 통증에 세레인이 고개를 비틀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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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비굴한 시녀

결국 올 것이 왔다. 세레인은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방금 전 회의장에서 그렇게 몰아세워 놓고,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혼자 생각에 빠져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꼴을 단 1분도 두고 볼 생각이 없는 이기주의자.“……몸이 좋지 않다고 전해 주세요.”평소에 비해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폐하의 명입니다. ‘죽어가는 게 아니라면 안아서라도 데려오라’고 명하셨습니다.”화가 또다시 울컥 치밀었다. 진짜 황제라는 사람이 시녀 하나를 지독하게 못살게 구는구나. 그래, 그래야 네가 미친 인간이지. 세레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독기가 서려 있었지만 세레인은 또다시 황제 앞에서 대거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역할 수 없는 권력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 불공평한 관계. 나만 손해에, 나만 힘들고, 고통 받다가 지치는 관계.거울 속의 자신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세레인은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살랑이며 집무실 안으로 오후의 공기를 불어넣었다. 대회의실에서의 그 난도질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세레인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반쯤 부은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던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었고, 정신이 마모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달칵.카르안이 직접 내린 커피를 잔에 따라 세레인의 앞에 놓았다. 진한 카페인 향이 코끝을 스쳤으나 세레인은 잔을 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한참을 잔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카르안이 낮게 읊조렸다.“이것도 먹여줄까?”세레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이중적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그 이상하고 야릇한 차시중, 그리고 방금 전 회의장에서 강압적으로 입안에 밀고 들어오던 과일.“아, 아닙니다. 제가 먹을 수 있습니다.”세레인은 당황하여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었다. 혹여 그가 정말로 자기 입술을 빌려 커피를 흘려 넣을까 겁이 나, 빠르게 입술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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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감히, 폐하를 길들이다

대회의장의 파문이 황궁 전체를 휩쓴 지 4시간. 살롱 안은 이미 시가 연기와 말소리로 가득했다. 차가운 얼음이 잔 벽에 부딪히며 내는 맑은 소리가 그제야 열기를 조금 식혀주는 듯했다. 시릴은 동료들과 가벼운 농담을 섞었다.“베르탄 공작님께서 공을 좀 많이 들이셨나 봅니다? 여기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시고.”한 후작이 시가의 재를 툭툭 털어내더니, 앞에 앉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능글맞게 다가왔다.“아까 그 시녀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직접 들였다면서요? 폐하의 기호를 저토록 정확히 파악하다니, 역시 수완이 대단하십니다.” 후작은 시릴의 완벽하게 관리된 구두를 훑고는 보란 듯이 연기를 내뿜었다.“어떤 약을 먹였기에 회의장까지 시녀를 끼고 오신 건지... 아니면 공작님께서 밤마다 직접 교육이라도 시키는 겁니까?” 시릴과 함께 있던 귀족들의 안색이 굳었고, 구경하던 귀족들 사이에서는 웃음소리와 저열한 농담이 번졌다.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불쾌감. 제국을 위해 밤낮없이 서류와 씨름하는 그를 잠자리 뒷바라지하는 간신 취급하는 건 굉장한 모욕이었다. 시릴은 잔에 남은 브랜디를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하면 배경 없는 시녀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내가 그깟 시녀 하나 때문에 베르탄의 명예를 이딴 오물에 던져야 하나? 시릴은 짜증을 짓씹으며 오해를 방치하기로 했다.“후작의 상상력이 정무보다 사생활에 특화되어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저 폐하의 안위를 위해 배치한 인사일 뿐이니까요. 그 시녀가 폐하의 손을 타는 것까지 제 수완이라 칭송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시릴은 한쪽 장갑을 거칠게 고쳐 끼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제 통제하에 있는 계획으로 받아쳐 버리는 여유.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릴은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장소를 옮기죠. 연기 때문에 술 맛이 느껴지질 않으니.” ***카르안은 제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독을 내뿜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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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황제의 곰인형이 된 시녀

세레인은 소파 옆 의자에 걸터앉아 떨리는 손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저녁 시간을 넘긴 집무실 창문 밖으로는 분홍빛 노을이 사위어가고 있었다. 세레인은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고 낭독을 시작했다.“……옛날 아주 먼 옛날, 세상의 모든 생명이 숨을 죽이고 별빛조차 차갑게 얼어붙었던 시대에 찬란한 황금 갈기를 가진 사자가 살았습니다."묘사가 첫 대목부터 너무 고전적인 거 아냐?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한테 읽어주기엔 내용이 너무 유치한 거 아닐까. 세레인은 흠칫하며 카르안의 눈치를 살피며 뒷장을 넘겨봤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든 채, 세레인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자는 굶주림에 지쳐 온 숲을 헤매다 길을 잃은 어린 양 한 마리를 발견했답니다. 가련한 양아, 나는 며칠이나 굶어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란다. 너를 한입에 잡아먹으면 이 지독한 허기가 단번에 가시겠지!"세레인은 사자의 목소리를 낼 때는 짐짓 무서운 사자 흉내를 냈다. "그렇지만 너를 잡아먹으면 숲의 노래는 영원히 멈추겠지. 이번만은 이빨을 거두어주마. 사자는 이빨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의 찬란한 황금 갈기를 깎아 양에게 덮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위에 떨던 양은 사자의 품속에서 비로소 온기를 찾았고, 사자는 자신의 힘을 잃는 대신 숲의 유일한 친구를 얻게 되었답니다.”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정성을 다해 읽어댔건만, 카르안은 지루해 죽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와인 잔 가장자리만 두드리고 있었다.“이게 끝이야? 갈기를 내준 사자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결말이 빠진 것 같은데.”카르안의 냉소적인 태클에 세레인은 울컥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그, 그건 다른 판본이겠죠! 여기서는 둘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장 읽을게요.”세레인은 쉴 틈 없이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권이 끝나갈 때쯤, 세레인이 조심스레 책을 덮으려 하자 카르안의 서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뭐해? 다음.” “예? 벌써 한 권을 다 읽어드렸는데요.” “다른 거 읽으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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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폭군의 입맞춤

깊은 밤, 정적만이 감도는 집무실 소파 위에서 카르안은 불현듯 눈을 떴다. 제 몸 위에 겹쳐진 세레인이 자꾸만 무게를 실어가며 꼼지락거리는 탓이었다.“으응…… 추워…….”잠결에 내뱉는 세레인의 웅얼거림이 가슴팍에 닿았다. 그녀는 추위를 피하려는 듯 본능적으로 따뜻한 카르안의 품을 파고들며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온기를 찾는 신생아처럼 무방비한 꼴이었다.“……하.”카르안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성인 여자를 배 위에 얹고 잠을 청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거늘, 이 시녀는 자기가 누구 위에 누워 있는지도 잊은 모양이었다. 거슬리는 움직임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뺨을 비비며 안겨 오는 부드러운 감촉이 화를 기묘하게 억눌렀다.카르안은 한숨을 내쉬며 세레인을 안아 들었다. 그는 소파를 벗어나 안쪽 침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세레인을 눕힌 그가 곁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를 응시했다. 세레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부어오른 눈가와 한쪽 뺨만 눌린 자국. 조금 거칠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정적을 채웠다.카르안은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볼 살을 튕기듯 살짝 건드렸다. 세레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깨지 않았다.“……누가 황제고 누가 시녀인지 모르겠네.”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더니 정작 본인만 세상 편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젯밤의 구연동화는 실패였다. 그런데도 카르안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비안의 손수건에 코를 박고 순수하게 미소 짓던 그 표정. 그 미소 한 번을 제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오직 눈물과 공포만을 자아내게 하는 이 관계가 답답함을 불러일으켰다. 이 하찮은 시녀 하나 마음대로 못 하고 욕망을 억누르는 제 꼴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르안은 세레인을 다시 제 팔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 한 시간 뒤, 오전 정무를 앞둔 테이블.평소보다 늦은 아침 식사였지만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무거웠다. 아니, 적어도 세레인에게는 그랬다. 카르안은 흠잡을 데 없는 손놀림으로 나이프를 놀려 고기를 정갈히 갈라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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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혹시 저를 좋아하십니까

남겨진 세레인은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체온이 여전히 감각에 남아있었다. 미쳤어, 진짜 미친 거야.그녀는 속으로 수천 번 비명을 질렀지만, 벽면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은 그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채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시녀일 뿐이었다.연무장은 검과 검이 부딪히는 마찰음으로 가득했다. 카르안은 평소보다 공격적인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세레인은 구석에 선 채 그를 응시했다. 은빛 검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흩어지는 땀방울조차 그에게는 장식처럼 어울렸다."시녀, 가까이 와."카르안이 검을 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세레인은 화들짝 놀라 수건과 얼음물이 든 잔을 들고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방금 대기실에서의 기억이 살아나 걸음이 어색해졌다."여, 여기 수건입니다. 폐하."카르안은 그녀가 내민 수건을 받는 대신, 세레인의 손목을 낚아채 제 젖은 목덜미로 가져갔다. 축축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세레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네가 닦아줘.""그... 폐하, 여기는 보는 눈들이 많습니다. 제발…….""누가 감히 황제의 시녀가 황제를 보필하는 것에 토를 달지?"그의 말대로 주변의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돌리거나 훈련에 매진하는 척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목덜미와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혹여나 그의 눈과 마주칠까봐 손이 덜덜 떨렸다.이제는 기사들 앞에서까지...... 내 평판은 어디까지 떨어지는걸까? 여기서 더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있을까요, 폐하?세레인은 카르안의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랐다. 평소라면 집무실로 향했을 그의 발걸음은 익숙한 경로에서 벗어나 별궁의 정원으로 향했다.황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정원은 정오의 열기를 머금은 채, 고요했다.카르안은 평소보다 보폭을 늦춰 앞서 걸었다.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신발 소리가 정적 속에 낮게 깔렸다.“다리 안 아픈가.”카르안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툭 던졌다.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상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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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붉은 밀랍

말이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세레인의 귓가에는 제 심장 박동 소리만이 쿵쿵 울렸다. 폐부를 조여오는 압박감에 세레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응시했다. 마침내 카르안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질문의 수위가 제법 높네. 불충으로 목이 달아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는 세레인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번져 세레인은 한 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꽃을 보고 웃는 널 보는데, 문득 내 곁에서 숨 쉬는 네 모든 순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게 네가 말하는 좋아함이라면.” 카르안의 상체가 숙여졌다. 그의 짙은 붉은 눈동자가 덫처럼 세레인의 시선을 옭아맸다. “맞아. 너를 좋아한다, 세레인.” 카르안은 멍해진 세레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매끄러운 미소를 그렸다. 알았으면 됐다는 듯, 그는 천천히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가자. 정무 회의 시작할 시간이니까.” *** 별궁 정원을 벗어나 본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세레인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세레인은 저녁노을을 머금은 듯 달아오른 뺨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인장용 밀랍을 녹이는 데 집중했다. 달그락, 작은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두드릴 때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불꽃 위에서 뭉근하게 녹아내리는 붉은 밀랍 덩어리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아까 카르안의 고백이 환청처럼 들려와 손목이 가늘게 떨렸다. 카르안은 책상 너머에서 서신을 훑으며 깃펜을 놀리고 있었다. 고백을 내뱉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에 세레인은 억울함이 치밀었다. 저 남자는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지? 아까 정원에서의 고백은 백일몽이었던 것처럼. 지금 나만 미칠 것 같은 건가.그리고 그 억눌린 목소리가 세레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폐하.” 카르안의 사각거리던 깃펜 소리가 멎었다. 세레인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옷을 스치듯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사람을 좋아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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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버겁습니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이른 아침의 햇살은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천개(天蓋)를 비추고 있었다.눈을 뜬 세레인은 멍하니 천장의 문장을 응시했다. 침내 안의 공기는 밤새 엉겨 붙었던 온기를 버리지 못한 듯 눅진했다.어제의 기억은 책상 위에서 식어버린 붉은 밀랍처럼, 세레인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제국의 주인이라 칭송받는 사내가 제 이성을 어떻게 속절없이 허물어뜨렸는지.세레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하복부를 관통하는 묵직한 통증에 신음을 삼키며 다시 가라앉았다.버거웠다. 이 남자가 주는 모든 것이.“일어났어?”낮은 숨결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카르안은 상체를 비스듬히 세운 채, 세레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흑발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그가 손을 뻗어 세레인의 눈가에 맺힌 흔적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평소의 폭군과는 다른, 제 눈치를 살피며 곤란한 듯 미소 짓는 모습에 세레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몸 불편해? 나도 부드럽게 하려고 했는데, 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서.”그의 사과 아닌 사과에 세레인의 얼굴이 다시 화끈거렸다. 그녀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배가 아파요. 아랫배가 묵직하고…… 좀 힘듭니다.”카르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걱정인지, 아니면 다른 욕구의 발로인지 모를 감정. 열기를 머금은 손바닥이 이불 안으로 들어와 세레인의 아랫배 위에 가만히 얹혔다.제 손길에 의지해 가늘게 숨을 내뱉는 세레인의 홍조 띤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다는 뒤틀린 심보 때문인지, 카르안은 일부러 느릿하게 그곳을 문질렀다.“많이 아픈가?”“폐하가 워낙, 지나치게…… 크셔서 그렇잖아요.”세레인은 억울함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덧붙였다.“정말 버겁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순간, 카르안의 안광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의 그라면 제 체구에 비해 버겁다는 뜻으로 가볍게 넘겼을 말이었으나, 세레인이 말한 지나치게라는 단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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