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Chapter 131 - Chapter 140

225 Chapters

#130. 들끓는 마음, 집착(執着)

엘에프가 넘버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선사한 일종의 연회가 시작되었다.그 화려한 음식의 향연은 현신에게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했고, 좋아하는 디저트가 다양해 뭐부터 먹어야 하나 황홀하기까지 했다.현신은 잠깐 구석에서 핸드폰을 열었다.[회의 끝나면 연락해.]계영의 연락이 또 와 있었다. 이건 정말 온몸에 피가 들끓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현신의 요즘 삶의 낙이라면 바로 계영과의 메시지 주고받기다.[계영 님. 저는 회의 잘 끝냈어요. 계영 님도 바쁘시겠지요? 식사 잘 챙겨 드세요.]잠시 뒤 금방 답장이 왔다.[그래. 너도 위험한 일 하지 말고, 바빠도 꼭 잘 먹어.]현신은 그냥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바로 옆에서 계영이 말을 해주는 것처럼 그리 다정할 수가 없어 마음이 수런거렸다.[네.]현신은 이 글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몇 줄 글만 읽어도 기뻐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넘버 30번 님!”그때 팔에 깁스를 한 왕첸이 현신을 보자마자 달려왔다.“왕첸, 잘 챙겨 먹고 약도 잊지 마세요.” “네! 제 생명의 은인이신 에스 님! 지하 넘버 10명은 모두 에스 님께 목숨을 바칠 겁니다.” “그건 사양이에요. 나 말고 엘에프 선배와 조직에 충성을 다해 주세요.”와인 잔, 샴페인 잔, 맥주잔 등 넘버들이 애주가 현신 주변으로 술잔들을 들고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했다.“한잔하시죠! 형님!” “제 잔도 받아주세요!” “그때 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넘버 30번 님! 건배!”오늘은 조직이 좋은 일로 이제 홍콩 마무리를 끝내고 상하이로 갈 준비를 하면서 들뜬 분위기에 사람들의 잔에는 술과 웃음이 넘쳤다.하지만 몸집 작고 주량도 적은 애주가 현신은 너무 빨리 취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디저트나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하도 여기저기서 고맙다며 달려드는 넘버들의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자 순식간에 머리가 핑- 돌아버렸다.손에서 잔을 놓지 않은 채 테이블에 앉아 넘버들을 상대하고 있는 그 순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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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경계선(境界線) 위에 선 남자들

엘에프는 품에 안긴 현신을 내려다보며 걸어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토록 무방비하게 경계를 풀어버리다니.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연회장에 가득한 그 거구의 넘버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현신은 머리가 어지러운지 가느다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술기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실루엣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와······. 엘에프 선배, 변했어요? 나 지금······ 안아 준 건가? 와, 높다.”“나의 에스가 아주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속을 뒤집는군. 지루할 틈을 안 주어.”“아, 졸려······. 계영 님에게 답장해야 하는데.”현신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헤실헤실 웃으며 중얼거리자, 엘에프의 수려한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내 짙은 안개 속으로 가라앉듯 흐려졌다. 그때, 멀리서 독한 술을 즐기던 헤르만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엘에프에게 다가왔다. 현신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시선이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뽀얗고 둥근 이마와, 붉게 물든 뺨 위로 길게 음영을 드리운 속눈썹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에스는 술 마시고 완전히 뻗은 건가?”“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군.”헤르만은 상념에 잠긴 듯한 엘에프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서늘한 비즈니스 톤으로 화제를 전환했다.“엘에프. 조금 전 코드명 ‘휼&r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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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하룻밤을 건 승부(勝負)

엘에프는 품 안에서 잠든 채 무어라 웅얼거리는 현신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나의 에스는 꿈속에서조차 평화롭지 못한 모양이군. 대체 이런 너를 어떤 체스 말로 써야 하나.”객실로 돌아온 엘에프는 일단 소파 위로 현신을 조심스레 눕혔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아 조금 전 무휼이 정황을 흘려보낸 극비 정보부터 찬찬히 확인해 나갔다. 자료를 훑어내리는 그의 수려한 눈매가 가늘어졌다.‘한비단 놈들도 하는 짓거리는 빅토리아와 매한가지군.’결코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입안이 씁쓸해진 엘에프가 와인병과 잔을 챙겨 소파로 돌아왔을 때, 현신이 마른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며 의식을 부지하려 애쓰고 있었다.“어······ 왜 제가 여기에······.” “글쎄. 네가 왜 내 침실 소파에 누워 있을까.” “저······ 체스 둬야 하나요?” “나는 시체와 게임을 즐기는 취향은 없는데.” “······다행이네요.”여전히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지 그녀는 멍한 상태였다. 현신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제 앞에 앉은 엘에프를 그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대책 없는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엘에프가 와인잔을 부딪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에스. 나는 술주정 부리는 인간이 제일 질색이야. 지금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독일어가 뭐야?” “이히 리베(Ich liebe)······ 아, 아니다. 음, 으음. 데어, 데스, 뎀, 덴(der, des, dem, den)······.” “가르친 보람이 있군.”그제야 현신은 엘에프를 바라보며 피식, 짧은 실소를 터트렸다.“효진 님도 계시는데······ 그런 금지어는 함부로 안 쓸 거예요. 그런데 선배······ 효진 님을 정말 좋아하긴 하세요?”감히 격의 없이 이런 사적인 질문을 던져오다니.엘에프는 제 처지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홀린 듯 그녀의 말에 순순히 대꾸를 해주고 있었다.“그 섹시하고 어여쁜 레이디와는 그저 가볍게 즐기는 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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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본능, 흑(黑)과 백(白) 사이에서

홍콩의 밤바다가 화려하게 부서지듯, 현신을 응시하는 엘에프의 보랏빛 눈동자에도 위험한 불꽃이 켜졌다.체스판 위로 흐르는 침묵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그래, 에스. 실력이 몇 분 사이에 녹슬어버린 건가?” “······선배가 너무 틈을 안 주시네요.”“나와 밤을 지새우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어설프게 둬도 돼.”엘에프는 심장을 덜컥이게 만드는 흉흉한 양자택일을, 기분이 아주 좋은 아이처럼 즐겁게 뱉어내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중이에요.”집중하려 애쓸수록, 체스 말을 쥔 손끝에 긴장 어린 땀방울이 맺혔다. 가라앉은 침묵을 깨고 엘에프가 툭, 질문을 던졌다.“그 남자가 왜 좋은 거지?” “존경하는······ 분이니까요.”술에 취했음에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체스판에 영혼을 빼앗긴 현신을 보며, 엘에프의 시선이 한층 더 깊어졌다.“너, 그 남자를 사랑해?”사랑. 예상치 못한 단어가 날아와 박히는 순간, 현신의 머릿속이 일순간 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네?”현신이 놀라 급하게 고개를 들자 엘에프의 집요한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는 눈을 맞춘 채,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트를 전진시켰다. 계속해서 곤란한 덫을 놓는 엘에프의 태도가 못마땅해진 현신이 홧김에 도발을 시도했다.“선배는······ 누군가를 사랑해 보신 적은 있나요?” “난 사랑 따위 믿지 않아.” “그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밤을 보낼 수 있는 거고요?” “서로 몸을 원한다면, 본능에 충실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결국 먼저 혼란의 늪에 빠진 쪽은 현신이었다. 감정을 배제한 그의 건조하고도 노골적인 가치관에 머리가 아찔했다. 현신은 간신히 룩을 옮기며 대화를 받아쳤다.“도대체 저한테······ 뭘 원하시는 거예요?” “그럼 넌 도대체 그 남자와 무얼 하고 싶은 건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반칙이에요.”엘에프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우아한 손가락이 퀸을 움직였다.“에스, 아무래도 내가 이길 것 같지?” “아, 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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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빌런과 잠자리는 싫어-결심(決心)

분명 꿈속을 헤매고 있었는데, 현신은 눈을 뜨자마자 일단 상황부터 파악했다.악마와 같은 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워야 한다는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나, 지독하게 밀려든 취기 탓인지 모든 감각이 아스라이 먼 환상처럼 여겨졌다. “아, 머리야······.”현신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숙취로 깨어난 아침, 익숙한 두통과 함께 사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감싸는 이례적인 포근함, 기묘할 정도로 드넓은 침실, 그리고 몸을 돌리자 느껴지는······ 온기가 머물러 있는 옆자리까지!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제 대국에서 패배한 뒤, 쏟아지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엘에프의 품에 안겨 침대에 눕혀졌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기억이 통째로 증발해 버리다니. 그곳에는 정갈하게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 오만한 남자는 어쩜 한글조차 이리도 수려하게 잘 쓰는지. 유려하게 뻗은 필체 속에 담긴 메시지가 현신의 눈동자에 박혀들었다. *******************[ 나의 에스.독창적인 방식으로 나를 즐겁게 해준 사랑스러운 너에게 포상을 내리지.오늘 자정까지, 자유 시간을 허락해.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엘에프로부터. ]******************* “자유 시간?”현신은 스프링처럼 인형을 튕겨 일어나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단 한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찍어 내렸다.[계영 님, 저 오늘 밤 자정까지 자유 시간이 생겼어요. 저는 계영 님 생각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 같이 들렀던 디저트 가게에 가보려고요. 부디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벅차오르는 해방감은 반드시 그와 나누어야만 했다.현신은 전송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짐을 챙겨 번개 같은 속도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순식간에 씻고 옷을 갈아입은 현신은 거리를 달리다 훅 끼쳐오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마카오에서 숨 막히는 진압 작전을 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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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당신에게 몸과 마음을 던져요-고백(告白)

현신은 오늘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계영의 심중을 살피는 것에 온 총력을 기울였다.그런 절박한 속내를 알 리 없는 계영은 소유한 K 호텔 면세점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현신에게 가볍고 따뜻한 하늘색 캐시미어 코트를 손수 입혀 준 뒤, 곧장 옥상 헬기장으로 향했다. 마카오에 도착해서도 현신은 계영의 손에 이끌려 전용 리무진에 올랐다. 그의 세심한 안내 덕에 화려한 도심이 완벽하게 눈에 담겼다. 임무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곳만 헤맬 때는 몰랐는데, 빛의 세계에서 마주한 마카오는 휘황찬란하여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와, 여기 꼭 이탈리아 베네치아 같네요.” 현신은 진짜 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주는 천장을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에메랄드빛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곤돌라(gondola)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짝였다.“우와, 저런 것도 똑같네요?” “같이 탈까?” “네! 계영 님!”선물처럼 주어진 하루만큼은 오직 웃음으로만 채우고 싶었다. 곤돌라에 올라 잔잔한 물길을 따라가며 현신은 이 금쪽같은 시간을 온몸으로 만끽했다.“베네치아 간 적 있어?”계영은 풍경 대신 오직 현신의 얼굴만을 응시하며 과거를 물었다. 이미 요원 신분도 밝혔고 더한 비밀까지 모두 말하겠다고 각오한 참이었기에, 현신은 솔직하게 이탈리아 시절을 풀어내었다.“바포레토(vaporetto: 수상버스)를 타고 무라노섬으로 들어가 밤새 도망친 배신자를 진압하러 간 게 전부였어요.” “임무 때문에 다녀온 거였군. 나 역시 유럽에 있을 때는 험한 일들을 많이 처리했지.”그 순간 현신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탈리아 요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구전되던, 한국 출신의 전설적인 요원 ‘프리모 우노(Primo Uno)’에 대한 일화였다.“저······ 전설의 갑부인 한국인 요원이 계영 님이셨어요?”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부드러운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럴지도.” “하하! 역시 세상 정말 좁네요. 정말 영광이에요.”동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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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마음이 흘러 넘쳐-범람(汎濫)

“계영 님을 만나 행복해서 이 관계가 끊어질까 봐 진실을 밝히기가 너무나 두려웠어요.”현신의 나지막하고도 애틋한 고백에, 계영 역시 응답하듯 낮게 말을 이었다.“그래, 나도 네가 좋아서 추잡하게 제 뒤나 따라다니며 스토커 노릇도 해보고······이성을 잃고 빠져 버린 것도 평생 처음이야. 그래서 난 너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너무 거대한 의미가 되어버렸어. 그러니 뭐라도 다 말해.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으니까.”가느다란 웃음기마저 완전히 거두어낸 무겁고도 고압적인 계영의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현신의 귓가에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거짓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애써 진실을 피하며 둘러댔던 과거의 자신이었기에, 바로 이 순간만큼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했다. “계영 님, 전 계영 님이 좋아서 계속 거짓말만 했어요. 죄송합니다.”현신이 간신히 입술을 떼려는데, 억눌려 있던 진실을 먼저 토해낸 쪽은 되레 계영이었다.“난 네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 해도 네 생각만 했었어. 밥을 먹을 때도 네가 굶지는 않는지 온통 신경이 쓰이고, 잠을 청할 때조차 네가 또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어.” “······.” “어디선가 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만 들리면······ 네가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계영의 묵직한 한마디 한마디는, 현신의 온몸 마디마디와 손끝 발끝까지 저릿한 전류를 흘려보내 통증을 안겨주었다.시야가 흐려질 만큼 눈이 따가워 손등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찍어 눌렀다. 평생 흘릴 눈물보다 계영을 만나 흘린 눈물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도 현신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카지노 입구를 가리켰다.“전······ 저기 카지노에도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어요. 열일곱 소년이 아니라······ 전 스물한 살인 어른이에요.”계영의 감정이 격해진 만큼 현신 역시 숨이 가빠지며 목소리가 가파르게 격앙되었다.“······계영 님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속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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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탐닉(耽溺): 날 구원해줘, 제발

호텔 밖으로 들어서자, 깊어가는 가을밤의 청량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날렸다.이윽고 도착한 곳은 마카오의 화려한 정경을 가장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골든 릴(Golden Reel) 대관람차였다. 거대한 건축물의 그림자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두 사람이 탑승한 케이블이 서서히 대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도가 높아질수록 지상의 불빛들은 아득한 보석 파편처럼 작아졌고, 사방이 유리로 막힌 투명한 공간 속에서 오직 둘만의 은밀한 세계가 고요하게 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 것 같군.”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현신의 턱끝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을 오롯이 제 눈동자 속에 고정시켰다.“현신. 너는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어.”말을 뱉는 계영의 눈빛에는 깊은 다정함과 포근함이 서려 있었다. 작은 행동 하나, 눈빛 하나에서도 그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온전히 전해져 왔다.“높은 곳을 유독 좋아하던 너. 내 저택에 처음 왔을 때, 그 거대한 거실 창밖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네 빛나는 눈을 보았을 때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현신의 세계는 오직 가계영이라는 사내로만 가득 차 흘러넘쳤다.“텅 비어버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하지만, 지독하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본 순간······ 이미 내 영혼은 너에게 던져졌어.” “······.” “네가 내게 그 소중한 땅을 전부 넘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던 그날, 난 곧장 홍콩으로 날아왔어. 너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어서.”12월의 차가운 기류가 지배하는 마카오의 상공이었지만, 현신은 제 심장 밑바닥이 마그마처럼 펄펄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죄송하고······ 감사해요.”현신은 조금 전 모든 진실을 토해내며 눈물을 쏟아낸 덕분인지, 거짓말쟁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그녀의 눈빛은 한결 투명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오늘 이토록 솔직해진 너를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동안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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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침잠(沈潛): 깊게 빠져드는 밤

현신은 지금 계영의 거대한 몸속으로 제 모든 영혼이 속절없이 흘러 들어감을 느끼며, 태어나 처음으로 아득한 무아(無我)의 세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1분 1초, 흘러가는 시간이 이토록 아깝고 애틋할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현신에게는 생경하고 낯설었지만, 동시에 심장이 저릴 만큼 소중한 경험이었다.계영이 수트를 정갈하게 차려입었을 때도 그의 체격이 미끈하고 당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마주한 그의 육체는 현신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건장했다. 강철처럼 단단하게 잡힌 근육의 뼈대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요원 고유의 야성미를 풍기고 있었다.말끔하고 조각처럼 수려한 얼굴과 달리, 그의 다부진 가슴팍과 어깨죽지에는 과거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증명하듯 거친 흉터들이 야생의 훈장처럼 새겨져 있어 묘한 시각적 충격을 자아냈다.현신은 강압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빼앗으며 육체를 탐하려 했던 엘에프의 잔혹한 입맞춤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제 위를 거대하게 덮어오는 가계영이라는 남자의 움직임은 그에 비해 지독하리만큼 다정하고 숭고했다.‘계영 님이······ 처음이라, 다행이야.’현신은 밀려드는 야릇하고 뜨거운 열감에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저를 온전히 집어삼키려는 계영의 거칠고도 은밀한 애무를, 온 영혼을 열어 받아들였다. *** 현신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집요하게 입을 맞추던 계영의 커다란 손길이, 이윽고 그녀의 가장 은밀하고 유약한 곳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나 역시 능숙하지 못할 수도 있어.”나직하게 속삭이는 계영의 다정한 말에 가슴이 몽글하게 부풀어 올랐다. 계영이 피임 준비를 끝내고 다시금 밀착해오자, 현신의 굳어 있던 몸이 마법처럼 유연하게 풀어지기 시작했다.계영이 민감한 살결 곳곳을 촘촘히 훑고 지나갔고, 그의 단단한 손길 역시 온전한 '여인'으로서 보듬어 주었다. 계영이 자신을 이토록 지독하게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 살결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오직 자신만을 향해 거칠게 팽창하는 그의 압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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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빌런과도 지켜야 하는 것-약속(約束)

그날 밤 10시 30분.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E 호텔을 방문한 효진은, 로비 한 편에 자리한 은밀한 카페 창가에 엘에프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머, 당신, 변했나요?” “설마. 사람은 그리 쉽게 안 변해.”블랙 글렌 체크 겨울 슈트를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은 엘에프가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도 그는 지독하리만큼 매혹적이었고, 그래서 우아한 독약처럼 위험해 보였다.엘에프가 가볍게 손짓하자, 웨이터가 샴페인을 비롯한 고급 디저트를 일사불란하게 내왔다.“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 주다니. 당신, 여자 마음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아네요.” “다른 여자들에겐 관심 없어.”그가 잔인할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매만졌다. 효진 역시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그의 속내를 탐색하듯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뜻인가요?” “난 신사가 아니야, 미스 효진.” “세상에. 더는 묻지 않는 게 신상에 좋겠군요.”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다.하지만 딱 하나, 그 오만한 남자가 완벽히 감추지 못하는 기류가 있었다.“내가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당신, 혹시 그 알바생을 좋아하나요?” “글쎄.”과연 본인의 감정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걸까. 효진은 날카로운 직감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핵심을 찔렀다.“당신 그럼 대체 뭔데요?” “감정을 굳이 정립시킬 필요는 없지. 그대야말로 켄즈 대표와의 정략결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글쎄요.” “그 사내, 돈 버는 재주는 꽤 탁월해 보이던데.”거리를 두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간극을 제로로 만들어 코앞까지 침범해오는 이 사내는 너무도 위험해서, 정신없이 빠져들 것 같은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였다.“나도 돈은 많아요. 당신이야말로 결혼은 누구랑 할 건가요? 독일 여자? 이탈리아 여자?” “그대, 참 재미있는 여자야.” “말 돌리지 마요.”효진은 연신 재잘거리며 에그 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엘에프의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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