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Chapter 121 - Chapter 130

182 Chapters

#120. 휘몰아쳐 질주하는 마음, 혁명(革命)

엘에프의 짙어가는 속내도 모른 채, 현신은 눈앞의 케이크를 바라보며 그저 순수하게 행복해했다.그녀는 정성스레 케이크를 조각내어 엘에프에게 먼저 권하더니, 자신도 한 조각을 우아하게 포크로 떠서 입에 넣었다. “이 하찮은 것을 그토록 하고 싶었단 말이지?”“너무 행복하네요.”“에스, 태어나서 즐거워?”엘에프의 돌발적인 질문에 현신의 포크가 허공에 멈췄다.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요.”그 순간 엘에프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잠시 기묘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죽음은 어차피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가장 공평한 룰이지.”엘에프는 피식 웃으며 샴페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잔 너머로 현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엘에프와 이토록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게 되다니.오늘이 제 생일이라 그런 걸까.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다정한 그의 태도에 현신은 도리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에스, 날 따라온 걸 후회하진 않나? 억울하지 않아?”“후회 없어요.”엘에프가 느긋하게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아 앉으며 허리를 폈다. 자세를 바꾼 그가 현신을 빤히 응시했다.“그런 반짝이는 눈으로 온통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말해 봐야, 별로 감동 없는데. 에스.”과연 귀신 같은 남자였다. 제 속내를 다 꿰뚫어 보는 엘에프의 시선에 현신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풀리자 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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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사람 미치게 해 주는 일탈(逸脫)

어제 가계영과 엘에프라는,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두 남자에게 과분한 생일 선물을 받은 덕분일까. 운명은 기적처럼 현신에게 또 한 번 눈부신 하루를 허락해 버렸다.말도 안 되는 우연이 자꾸만 겹치고 있었다. 이토록 찰나의 순간마다 마법처럼 맞물리는 상황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지독한 필연일까. “하하, 그러네요. 아직 한국 안 가셨어요?”“그래. 아직 볼일이 덜 끝나서!”우연이든 필연이든 그저 먼 타국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 제 눈앞에 가계영이라는 온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신은 가슴이 벅차올랐다.현신의 손을 잡고 홍콩의 인파를 바람처럼 가르는 계영의 옷차림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묵직한 검은색 점퍼에 몸에 잘 맞는 청바지, 깊게 눌러쓴 캡모자와 검은 마스크까지. 마치 평범하고 활기찬 대학생 같은 실루엣이었다.‘오늘······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심장박동이 만들어낸 거친 메아리가 현신의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오늘 너무 좋군! 신! 좋아서 미칠 것 같다!”마스크 너머로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미소가 저절로 흘러넘치다 못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두 사람은 맞잡은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준 채 홍콩의 화려한 거리를 함께 달려나갔다.***준비된 자에게 행운이 따르는 법이라고 했던가.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생(生)이었다. 그러니 이 찰나의 조각만큼은 온전히 행복한 기억으로 박제해 두자고, 현신은 속으로 외치며 활짝 웃었다.‘계영 님, 전 이제 엘에프 선배의 뒤에서 빅토리아 기관과 전면전에 뛰어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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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도화선(導火線), 폭주하는 심장

11월 1일, 그 시각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 공공안녕정보국 내 특별전담 조직은 오늘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내년에 치러질 거대한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정부 여야 의원들의 날 선 고발장과 수사 의뢰가 빗발쳤고, 이에 따른 정보 수집을 명목으로 무휼과 여렌은 갑작스럽게 편성된 TF(Task Force)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두 사람은 모니터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가계영이 은밀히 맡긴 일들을 교묘하게 물타기하며 티 나지 않게 진행해 나갔다.“무휼아, 방어벽이 너무 빡빡하다.” “그러게요.”정보의 물길이 시원하게 터지지 못하고 끈질긴 장애물들이 계속해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방어벽을 뚫으면 이내 뒤엉킨 실타래처럼 더 엉켜버려 지독한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그래도 난 꼭 이번 미션을 성공하고 싶어. 계영 님은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야. 그분이 하려는 일이 정의거든.”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저도 좀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요.”무휼은 지난여름, 현신이 자취를 감춘 뒤로 제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오직 현신에게만 기대어 의존하고, 시온에게는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연명하는 삶은 고역에 불과했기에 그는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여렌 역시 계영이 지시한 정의 구현의 업무를 처리하던 중 무휼과 시선이 얽히자, 무거운 입술을 뗐다.“무휼아,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네 아내를 생각해서 위험할 때는 빠져.” “선배님도 마 검사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린 죽어도 같이 죽기로 진작에 이야기 끝냈어.” “······시온도 나중에는 이해해 줄 겁니다.”무휼이 그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코 충동적이거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현신아. 나 이제야 겨우 살아 숨 쉬고 있는 기분이 들어. 만약 우리가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회 없어.’무휼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고독한 의지를 삼키며, 다시금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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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심장을 집어삼킨 나의 우주(宇宙)

“오늘 돌아가지 마. 신, 나와 보내자.”순간, 현신의 커다란 눈망울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노골적인 제안에 완전히 얼어붙은 채, 그녀는 숨을 멈추고 가계영을 응시했다. 당황으로 하얗게 질려가는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아차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너무 조급했던 걸까.잠시 굳어 있던 현신이 간신히 제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곤란한 듯 입술을 열었다.“저······ 오늘 10시까지는 들어가야 해요. 약속은 지켜야 하거든요.”애써 거절의 이유를 대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10시. 엘에프가 그어놓은 잔인한 마지노선이 떠올라 속이 쓰려왔지만, 계영은 그녀에게 더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현신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포시 쓰다듬어 주었다. “어차피 지금 들어가도 씻고 잠만 잘 텐데, 그냥 내일 가.”마지막 회유에 현신은 입술을 작게 달싹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혹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 위태로운 눈빛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찌릿하게 저려왔다.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예전에 자신과 나누었던 가벼운 키스조차 처음이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현신이었다. 혹시 잠자리가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 걸까.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여자를 들끓는 소유욕 때문에 너무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건 아닌지 가슴이 무거워졌다.“······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다. 난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보내기 싫었어.”진심 어린 계영의 사과가 밤공기를 타고 전해진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현신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반짝이며 들어 올려졌다.“저도, 그래요! 저도 계영 님이 정말 좋아요!”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신의 모습이 계영은 눈물겹도록 사랑스러워 절로 숨이 멎어 버렸다.그는 차마 참지 못하고 팔을 뻗어 현신의 가냘픈 몸을 품 안 가득 꼭 끌어안았다. 단단히 맞물린 포옹 속에서,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현신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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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이성이 끊어져, 폭풍(暴風)

현신을 아쉽게 돌려보낸 가계영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현신이 쥐여주고 간 노란 손수건을 실없이 만지작거리며 깊은 여운에 잠겨 있었다.노란 손수건은 돌아온다는 약속이라고, 자신이 그의 등 뒤를 지키겠다고 녀석은 속삭였다.하지만 엘에프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수많은 세력을 제 발밑에 꿇리며, 피의 웅덩이를 정면으로 마주해 온 잔혹한 인간이었다. 그런 괴물의 감시 아래서 현신이 버텨내야 할 남은 9개월은, 생사조차 보장받지 못할 지옥과도 같을 터였다.그래도 계영은 현신을 믿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 역시 움직여야 했다. 녀석이 남은 9개월을 버텨내고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 자신을 지우지 않아도 되는 찬란한 세상을 빠르게 만들어놓아야만 했다.“마 실장, 회의 시작하지.”계영은 조용히 마음을 다잡으며 호텔 특별 회의실로 향했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 모두 준비했습니다.”가계영은 마 실장이 건네준 서류와 노트북 화면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내렸다. 강무가 보안망을 뚫고 보내온 증거들이 모니터 위로 기민하게 나열되었다.“지금 엘에프의 동선은?”“오늘 오전 회의가 끝난 직후, 개인 헬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인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현재는 다시 호텔로 복귀한 상태입니다.”“그래?”“호텔 로비까지 직접 나와 현신 양을 마중했습니다.”계영은 툭,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덮었다. 마냥 현신의 꽁무니만 쫓으며 로맨스나 즐길 수 없는 게 잔혹한 현실이었다. 자신이 흔들리면 현신을 지킬 힘도 사라진다. 그는 마 실장에게 가볍게 손짓했다.“좋아. 여렌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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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공조(共助): 아름다운 악마&정글의 포식자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어내며 계영이 벌떡 일어섰다.가슴 깊은 곳에서 통제할 수 없는 포악한 야성이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손바닥에 축축하게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위험에 노출되면 숨거나 요원을 그만두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인 세계였다. 그런데 한비단이 감히 내 여자를,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현신을 강제로 사냥하려 든다?모골이 송연해지며 대뇌 피질이 짜릿하게 타들어 갔다. 살의(殺意)가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아무쪼록, 지금 홍콩에 머물고 있는 제 친구를······ 가계영 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십시오. 그 말씀을 제 목숨을 걸고 직접 드리고 싶었습니다.“······그래. 정보를 알아내느라 수고했다.”이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겠는가. 현신을 중간에 엘에프로부터 데리고 온다고 해도, 당장 대한민국은 가지 못할뻔 한 것이다.사냥감이 되어 벼랑 끝에 선 현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계영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독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너도 몸 사려.”계영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제 다 같은 마음이었다. 썩어 버린 한비단도 쇄신하고, 현신도 지키고.서로의 뜨겁고 날 선 안광이 부딪치는 것을 끝으로 화상 통화가 툭 끊겼다. ***지금 현신은 계영과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와 엘에프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와인까지 걸치니 잠이 쏟아져 눈이 감겨갔다.긴장이 풀려서일까. 온몸이 나른해서일까.엘에프 옆으로 펼쳐진 홍콩의 침사추이 저편에 계영의 호텔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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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뺏고 싶고, 뺏기기 싫은 탐욕(貪欲)

11월 2일,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아침 7시.엘에프는 제 눈앞에 나타난 가계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도저히 멈추지 않는 흥미로운 미소였다.식사는커녕 겨우 해가 뜬 시각, 선약도 없이 이리 무례하기 짝이 없게 남의 성역에 발을 들이밀다니. ‘이 사내, 정말 지루할 틈을 안 주는군.’엘에프는 새삼 현신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다시금 절감했다. 이런 거물이 이성을 잃고 제 발로 오게 할 만큼 매혹적이라니. 그녀를 제 곁에 묶어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반면 엘에프의 곁을 지키던 헤르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가계영을 안내하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실크 나이트가운을 가볍게 걸친 나른한 차림으로, 엘에프는 거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는 우아한 손짓으로 대리석 테이블에 세팅된 차와 다과를 가계영에게 권했다.“켄즈 대표.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지만, 손님 접대는 해야겠지?”“우리가 서로 홍콩에서 대치한 지도 몇 달째 아닌가. 얼굴 맞댈 때도 된 듯싶어서.”계영은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완벽한 회색 가을 슈트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보면 아쉬워서 다급하게 찾아온 패배자가 아닌, 판을 지배하러 온 정복자의 여유가 그 표정에 만연했다.공기 중으로 팽팽한 살의와 긴장감이 진득하게 번져나갔다. 엘에프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계영의 오만한 태도에 오히려 짜릿한 호승심이 솟구쳤다. 쏟아지던 새벽의 피로가 단숨에 휘발되었다.“그쪽은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드는 재미있는 사람이군.”엘에프의 벼려진 비아냥에도 계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차향을 음미할 뿐이었다.서로 내용 없는 인사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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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기다리는 그 마음: 약속(約束)

순간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듯한 서늘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현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지하 공장의 가혹한 형광등 불빛 아래,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완벽한 수트 차림을 한 엘에프가 서 있었다. 이런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그가 한 걸음씩 현신을 향해 다가왔다.현신은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움켜쥐며 미간을 좁혔다. 대체 이 남자가 여기까지 왜 내려온 건지, 그리고 방금 제 선언을 어디서부터 들은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왜요?”현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엘에프는 현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상체를 슬며시 숙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소유욕으로 물들며 잔인하리만큼 다정하게 휘어졌다.“네가 너무 소중해서 말이지.”그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현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손길이었다.“나쁜 사냥개들이 널 찾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넌 안전만 누려.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엘에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잔혹한 말에 현신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시간 감각이 점차 흐려져 갔다.사방이 통제된 호텔이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서 날짜를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영을 만났던 그 꿈같은 새벽으로부터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 있었다.현신은 오늘 아침, 엘에프가 급한 정계 인사들과의 밀담을 위해 홍콩을 비우고 며칠간 출장을 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포식자의 감시망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진 틈을 타, 계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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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출정(出征), 날갯짓을 응원하며

벌써 홍콩에도 가을은 깊어져 어느덧 11월 말에 접어들고 있었다.오늘도 처절한 넘버 배틀을 끝내고 사각의 링을 내려온 현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손으로 휴대전화 속 달력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숫자가 바뀔 동안 그녀의 세계는 이 호텔 안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엘에프가 교묘하게 세워놓은 ‘절대 호텔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규칙은, 역설적이게도 현신에게 기괴할 만큼 무료하고 안전한 나날을 선물하고 있었다.바깥세상과 단절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지하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거나, 땀을 뿌리며 링 위에서 넘버 배틀을 치르는 것뿐이었다.현신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링 사이드로 걸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왕첸이 서둘러 다가와 깨끗한 수건과 시원한 물병을 건넸다.“와! 에스 님, 드디어 지상 넘버 30번 돌파예요! 진짜 축하드려요!”“······감사해요, 왕첸.”지상 서열 30위.그동안 차곡차곡 한 명씩 거물들을 꺾고 올라온 결과였다. 지상에서 자신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현신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링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넘버들의 눈빛이 경계에서 경외로 바뀌고, 저를 따르는 숨은 세력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더 빨리 치고 올라가야죠. 그래야······ 결국 그게 보스에게 힘이 될 테니까요.”현신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녀는 왕첸과 함께 링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방금 끝난 자신의 배틀을 구경하고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엘에프의 수하들을 눈으로 쫓았다.그런데 오늘 따라 사내들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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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새장을 벗어날 희망, 면죄부(免罪符)

이틀 뒤, 호텔 최상층. 현신은 엘에프가 점유하고 있는 펜트하우스 바로 옆 회의실에 소집되었다.사방이 방음벽으로 차단된 정적 속에서 상위 넘버 서른 명과 어제 늦은 밤 급하게 귀국한 엘에프, 그리고 헤르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회의석 말단에 앉은 현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운 좋게 마카오 상황을 정리하긴 했지만, 다쳐 나간 지하 넘버들을 목격한 잔상이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게다가 해외 일정을 마친 엘에프가 기어코 이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 자신을 동석시킨 탓에, 목덜미를 짓누르는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브리핑이 끝난 뒤, 엘에프는 상위 넘버들을 물리고 현신과 헤르만만 남겨둔 채 사적인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군.”“엘에프, 안색이 요즘 좋아 보여.”헤르만의 말대로 엘에프는 현신이 봐도 무언가 사는 재미를 찾은 사람처럼, 눈에 띄게 활력이 넘쳤다. “대신 나의 에스는 제대로 먹고는 다니는 건가? 그새 얼굴이 더 작아졌군.”현신은 말없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제 뺨을 만졌다. 요즘 입맛이 돌 리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흐르기를 바라며 매일 아침 휴대전화 속 달력의 날짜만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운동량이 부쩍 늘어서 그런지 도통 입맛이 없더라고요. 잘 챙겨 먹을게요.”현신이 적당히 둘러대자, 헤르만이 빔프로젝터 스크린에 아시아 지도를 띄우며 본격적인 비공식 브리핑을 시작했다.“엘에프, 에스 덕분에 지하 넘버들을 이끌고 마카오로 넘어가 소요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했어. 중국 본토 세력이 홍콩 쪽 국경을 침범하려던 움직임은 내가 차단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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