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18 챕터

#71.(수정)[승리한 남자는 누구?-The Chariot]

테이블 위에는 기묘한 만담이 오가고 있었다.규련은 두 손을 모은 채 이 진귀한 광경에 초집중하며 상황을 감탄 섞인 눈으로 지켜봤고, 강무 역시 기가 찬 얼굴로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현신은 자신을 가운데 두고 이 엄청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가 찼다.이 와중에 효진은 벌떡 일어나 얼굴을 현신의 바로 앞까지 들이댔다.“마성의 알바생, 비법 좀 나중에 전수해 줘. 나도 신비주의 막 그런 거 하고 싶단 말이야.” “효진 님, 그런 비법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세요. 참, 그날 아리아 황홀할 정도로 좋았어요. 완전 브라바(Brava)였어요.”참 뇌가 해맑은 주효진이었다. 엘에프에게 푹 빠졌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전혀 질투 상대로 보지 않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진짜 마성의 알바생이야, 교양도 넘쳐 내 아리아가 그렇게 황홀했어?” “네, 최고였어요.”현신이 해맑게 웃으며 효진을 향해 두 번 손뼉을 치자,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 효진은 만개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 뒤로도 한참을 혼자 떠들어 댔다. 그제야 다들 효진에게서 관심을 끄고 메인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현신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음식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훌륭한 요리였으나 혀끝에는 모래알처럼 거칠게 느껴졌고, 나이프를 쥐는 것조차 고문이었다. 옆구리와 허리가 쑤셔와 도저히 시원스럽게 고기를 썰 기력이 없었다.“에스, 내가 잘라줄게.” “괜찮습니다.” “내가 원래 칼 쓰는 데는 능숙하잖아.”엘에프가 능숙하게 고기를 한입 크기로 잘라주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자, 현신의 온몸이 굳어지며 움찔거렸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잘 아는 현신은 몸서리를 치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엘에프는 색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긴장한 현신을 향해 한껏 웃어 보였다.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계영의 시선이 현신의 굳은 표정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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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The Star- 어둠 속에서도 그대만 보여]

일요일 오후의 영화 관람.현신은 가계영의 뜬금없는 제안에 1년 치 놀랄 일을 하루 만에 다 겪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남의 인기 영화에 6개나 되는 좌석이 남아 있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고, 어찌어찌 묘한 조합의 6명은 영화관으로 향하게 되었다.“자리 정해야지? 내가 가운데, 오른쪽에 계영 오빠, 왼쪽에 엘에프 당신이 앉아요. 알바생은 엘에프 옆에. 끝! 참, 오빠들은 윗줄로 가주세요.”효진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규련과 강무는 윗줄로 쫓겨났고, 아래 줄에는 네 사람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나야 에스만 옆에 있으면 상관없지.”엘에프의 나른한 목소리를 끝으로 극장의 불이 꺼지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현신은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면서 처음 영화관에 와본 자신은 이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구경부터 했다.‘계영 님의 선택이 나쁘지 않네.’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스크린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웅장한 음향 덕분인지 강무에게 얻어맞은 등이나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도 조금은 희미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하지만 그 평화로운 관찰을 방해하는 뜨거운 시선이 있었다. 가계영은 영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현신의 옆얼굴만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웃고 탄성을 질러도 영화의 화려한 볼거리 따위는 계영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현신은 부끄러움에 헛기침을 하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멋쩍은 기분에 계영을 의식하며 더욱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그때, 엘에프가 슬며시 허리를 세워 가계영의 시야를 차단하며 조용히 속삭였다.“에스, 오늘 어땠어?”현신은 불안했다. 엘에프가 오늘따라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막무가내 미치광이, 지독한 에고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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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아프게 빛나는 너-The Star]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던 김강무는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어떻게 그 무심하던 현신이 엘에프에게 저토록 지독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인지, 게다가 평소 냉정하던 가계영의 기류마저 심상찮았다. “강무야, 진짜 도대체 저 둘의 관계는 뭘까? 텐션이 너무 끈적해. 계영이도 그렇고.” “그러게.”반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한규련의 얼굴에는 완연한 흥미의 꽃이 피어 있었다.“우리 마성의 알바생, 보통이 아니네. 엘에프가 아주 푹 빠졌어. 저 애틋하게 상처만 들여다보는 눈빛 좀 봐.” “그래서 큰일이야.” “이러다 계영이한테 더 불붙는 거 아냐?”규련의 우려가 적중했다. 영화는 뒷전인 채 엘에프와 현신을 날카롭게 의식하는 계영을 보며 강무의 속은 타들어 갔다.“포기하게 만들어야지.” “강무 너, 그게 가능하다고 봐? 계영이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거 본 적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강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애썼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엘에프라는 인물은 워낙 독보적인 미친 존재감을 가진 데다, 독일에서 손꼽히는 젊은 재력가이자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 아닌가. 그가 끼어드는 바람에 오히려 계영의 승부욕과 호기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일이 아주 제대로 꼬이겠어.”하지만 강무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았다. 현신이 오늘 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며 필사적으로 굴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알바생이 제 발로 저쪽으로 가버리면, 게임 끝 아니겠어?”그 말에 규련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글쎄, 내가 보기엔 알바생이 엘에프를 좋아 죽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규련의 말이 맞았다. 일방적인 관계는 오래갈 수 없는 법. 강무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가 스크린 뒤편에서 각자의 수 싸움에 빠져 있었지만, 오직 상황 파악이 안 된 효진만이 팝콘을 입에 넣으며 영화 속 농담에 깔깔거리고 있었다. *** 영화가 끝나고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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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Justice-유리구두를 신은 언더커버]

엘에프의 기묘한 행동은 이미 선을 넘었고, 현신은 이 기묘한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무에게 사실을 고할 필요를 느꼈다.“일단,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강무가 비릿하게 입매를 비틀며 콧방귀를 뀌었다. 낮게 깔린 조소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설마.” “···정말 사귀는 사이라면, 사람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혼자 버스 타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몸은 좀 어때?”강무가 건넸던 독한 진통제가 아니었으면, 현신은 오늘 허리조차 펴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약기운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온 듯, 그의 흰 이마 위로 식은땀이 계속 배어 나왔다. 상태가 좋을 리 없었지만, 구구절절 고통을 설명하기 싫었던 현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건조하게 답했다.“뭐, 좋을 리는 없죠.”현신이 조심스레 안전벨트를 매자, 강무는 가속 페달을 부드럽게 밟으며 은밀한 질문을 던졌다.“너, 마조히스트지?”차창에 비친 강무의 눈동자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렸다.“스스로 지옥에 발을 들이고는, 그 고통과 피해의식을 즐기는 부류같거든.”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강무의 시선에서 본 자신의 삶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신은 자조 섞인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이왕 제 삶이 이 모양인 거, 앞으로는 고통이라도 좀 즐겨봐야겠네요.”현신의 대답이 흥미로웠는지 강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 매력 있어. 알면 알수록 말이야.” “퍽이나··· 고맙네요.”자신을 향한 날 선 의심이 조금은 누그러진 걸까. 강무는 오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태도로 현신을 대했다. 현신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보았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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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The Hermit - 부서진 진심의 조각]

“······안 고쳐 주셔도 돼요. 저 그냥 갈게요.”현신은 바닥만 응시하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그 뒷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강무는 떠나려는 현신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규련이에게도 안 돼. 그 회사에서도 나와.” “네. 알고 있어요. 당연히 그곳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현신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연신 눈가를 훔쳐냈지만, 젖어가는 손등 위로 새로운 물방울이 계속해서 번졌다. 그 무구하고 처연한 항복을 보고 있자니, 강무는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악당이 되어 죄 없는 어린 짐승을 도살장으로 몰아넣는 기분이 들었다.가슴 한구석이 찝찝하게 저려왔다. 제 손아귀에서 떨고 있는 이 작은 존재를 지워내려는 자신의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인지, 강무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정의에 의구심이 일었다.“너, 지금 이 몸으로 어디 편하게 누울 곳이나 있어? 네 뒤에 붙은 미행이 얼마나 지독한 줄은 알고?” “···미행이요?”현신이 젖은 속눈썹을 떨며 눈을 크게 떴다.“너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눈들이 사방에 깔렸어. 당분간은 내가 지켜줄 테니 딴생각 마. 규련이 지키다 다친 거, 고맙게 생각하고 주는 보상이니까 치료나 제대로 받고 나가.”강무는 현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슬프고 애처로운 눈동자를 더 마주했다가는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일요일의 고요함이 내려앉은 병원이었지만, 내부에는 강무의 최측근 의료진들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무는 그녀를 은밀한 1인실로 데려갔다. 환자복을 건네주던 그의 시선이 그 위태로운 몸에 머물렀다.“몸 상태 좀 보자. 여기저기 타박상이 심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약만 처방해 주세요.” “나 의사야. 치료 안 받을 거야?”그녀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뒤돌아섰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고, 몸을 옥죄던 붕대를 천천히 풀어내었다. “부끄러운데······.”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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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만하고도 위험한 선언-The Lovers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강무는 겉으로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현신을 돌보는 일에 전담 간호사를 4명이나 배치할 만큼 지극정성을 쏟았다. 그녀가 성심성의껏 쉴 수 있도록, 그리고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결과였다.도대체 어떤 일상을 보내나 CCTV 화면을 통해 기민하게 관찰했더니, 녀석은 의아할 정도로 얌전했다. 종일 침대에 기대어 책만 보고 있는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특히 따로 누군가를 만나려 하거나, 병문안을 오게끔 연락을 취하는 이도 전혀 없었다. 이 역시 강무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대목이었다.‘사회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저리 친구도 없고 교류하는 지인도 없나.’병원 곳곳을 돌아다니지도 않고, 극도로 제한된 반경 안에서만 숨죽여 머무는 태도는 일반적이지 않아 보였다. 강무는 옥상 정원으로 현신을 따로 불러 이야기나 나눠볼까 싶어 잠시 시간을 마련했다.햇살 가득한 7월의 옥상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지만, 유리 벽으로 차단된 옥상 정원 카페는 쾌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간호사가 그녀를 데리고 정원에 올라온 순간, 투명한 햇살이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듯 쏟아졌고 찰랑이는 금발에서는 눈부신 빛이 일렁였다.“오랜만.” “아, 강무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규련 님 회사 정원하고 비슷하네요. 멋있어요.” “같은 인테리어 업체에 맡겼으니까.”혈색이 좋아져 뽀얗게 반질거리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강무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예뻐진 녀석의 모습에 놀라 숨이 절로 삼켜졌다.‘이러고 보니 천상 여자네. 휴, 이런…….’강무의 날 선 눈빛에 현신은 눈치를 살피며 애써 밝게 굴었다.“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저 정말 많이 나았어요. 당장 내보내 주세요.” “너 혹시 범죄자야? 어디 도망 다니는 중이라도 돼?” “아니요! 절대 그건 아니에요!” “사실 범죄자라도 상관없어. 조만간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준다면 말이지.” “당연하죠.”현신의 덤덤한 긍정에 강무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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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The Sun-폭풍보다 더 찬란하게 휘몰아치는]

가계영은 짧게 심호흡을 하며 옥상 정원의 탁 트인 전경을 훑었다. 유리 벽 너머의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이곳의 공기는 김강무의 분노로 인해 날카롭게 베일 듯 서슬 퍼런 상태였다.예상대로 강무는 펄펄 뛰며 발끈했다. 항상 옆을 보지 말고, 밑바닥 인간에게 지나친 동정심을 갖지 말라며 냉정한 직언을 서슴지 않던 친구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계영은 미동도 없이 그 분노를 받아냈다.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녀석이라는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탓에, 그 어떤 충고도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을 끊어낼 수가 없어.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안 되겠다.” “가계영! 제발 정신 좀 차려!”그때 한규련이 중간에 나타나 강무를 필사적으로 말리며 중재하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잠깐만, 강무야 진정하자, 응? 그리고 계영이 너도 선 넘은 생각으로 가까이 두려는 거면 다시 잘 생각해!”규련이 계영의 진심을 파악하려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강무는 오히려 더 거친 언성을 높였다.“정신 차리라고! 가계영, 지금 네가 고작 이런 녀석한테 휘둘릴 때야? 너 그러다 뒤통수 제대로 맞을 수도 있어!”강무는 기어이 계영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 찰나, 계영의 팔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팍! 소리가 날 정도로 매몰차게 강무의 손을 쳐냈다.“강무, 선 넘지 마.”계영은 서늘하게, 오직 흉흉한 기운만을 담아 말을 내뱉었다. 그의 눈빛은 폭풍우에 요동치는 시커먼 바다처럼 매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친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이자, 제 손에 넣기로 결정한 먹잇감을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포식자의 노골적인 선언이었다.“나도 알아. 저 자식 삶이 엉망진창이고, 평범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 하지만···.”계영은 진득한 감정이 넘실대는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눈 안에는 연민과 갈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유욕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저 녀석이 엘에프한테 붙는 걸 그냥 놔둘 수는 없어. 그는 위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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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너라는 지옥을 탐닉한 대가-Death ]

기어이 자신은 또 얼마나 처절한 시간 속에 머물러야 했을까.울지 말라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던 계영의 고백에 현신의 온몸이 속절없이 떨려왔다. 그 떨림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영의 집요한 눈동자가 현신의 옆모습을 쫓았다. 녀석의 눈가에 스친 그렁한 빛을 확인한 계영의 눈동자는 이내 북극의 바다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네 악몽 속에 또 다른 남자가 등장했어. 누군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알겠지?” “······설마.”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영이 현신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힘에 현신은 소파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고, 계영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가슴 위로 자신의 몸을 실어 압박했다.“너!” “으윽···.”아직 다 붙지 않은 갈비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육체적인 고통이 밀려왔지만,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계영의 슬픈 표정을 마주하자 심장이 더 아릿하게 저려왔다.“엘에프, 그딴 놈 때문에 내 제안을 거절한 거야?” 현신의 목젖이 파르르 떨렸다. 계영은 테이블 모서리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자인 걸 알면서도, 왜 마음이 이끌려? 돈 때문이야?”현신은 입술을 짓씹었다. 계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이 설수록 현신의 심장은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엘에프에게 마음을 줄 리도, 돈 때문에 다가선 것도 아니었지만 진실을 뱉어낼 수 없는 현실이 목을 조여왔다.‘말해야 해. 하지만···.’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계영이 오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알기에 더 괴로웠다. 현신은 눈을 감았다. 감긴 시야 너머로 계영의 눈동자에 비친 제 조각난 모습이 흩어지는 환영이 보였다.오해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멀어져야만 했다. 현신은 눈동자에 독기를 품고 비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이제야 아셨습니까? 전 딱 그 정도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 좀 버려 주십시오. 가던 길 가시라고요!”단호하게 내뱉었지만, 끝음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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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짐승처럼 저돌적으로-The Chariot ]

7월의 마지막 자락, 목요일의 태양은 대지를 태워버릴 듯 작열하고 있었다.프랑크푸르트발 홍콩행 비행기, 정적만이 감도는 퍼스트 클래스 기내에는 오직 두 남자만이 존재했다. 한 명은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 냉기를 묵묵히 견뎌내며 위스키 잔을 흔들고 있었다.“엘에프. 술 좀 그만 마시고 그냥 눈 좀 붙여.”헤르만은 방금 전까지 유럽 전역의 비즈니스 판도를 피로 물들이고도, 마치 가벼운 산책이라도 다녀온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에프를 보며 나직하게 충고했다.“막상 금방 끝내버리니 조금 허무하군.”엘에프는 헤르만의 말을 가볍게 흘려보내며 비행기 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을 응시했다. 유럽 사업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이룬 그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기묘한 희색이 감돌았다. 그것은 성취감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사냥감을 마주하기 전 포식자가 느끼는 서늘한 흥분에 가까웠다.“엘에프, 네 악명이 대단하긴 하더라. 프랑스 쪽 거물들까지 순식간에 흡수하다니. 과정은 거칠었어도 결과는 완벽했어.” “홍콩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작해야지. 판은 이미 짜뒀어.”이제 엘에프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헤르만은 그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상, 오직 앞만 바라보기로 했다. 그것이 이 괴물 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엘에프, 홍콩보다는 상하이가 관리하기에 더 수월하지 않겠어? 그쪽 인프라가 더 탄탄해.” “일단 홍콩 먼저.” “시간이 촉박한데···.”단호한 엘에프의 어조에 헤르만은 입을 다물었다. 엘에프의 시선은 이미 지도 위의 점이 아닌, 특정한 '누군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헤르만, 에스는?” “병원에 입원 중이야. 상태는 안정적이라더군.” “지루해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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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사신(死神)처럼 서늘하게-Death]

계영과 강무가 숨 가쁘게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자, 평화로운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여름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계영의 차가운 눈빛과 강무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정원의 나른한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성형 수술 후 얼굴에 붕대를 감은 여인들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머, 강 원장님이시네. 그런데 그 옆에 저 훤칠한 분은 누구일까?” “배우 아냐? 아니면 모델? 분위기가 장난이 아닌데.” “아니야, 저분 유명한 경제계 거물이잖아. 투자의 귀재라는 켄즈의 가계영 대표! 원장님이랑 절친이라더니 정말이었네. 실물이 훨씬 대단하다.”쏟아지는 시선과 낯간지러운 찬사들이 귀를 어지럽혔지만, 계영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그의 신경은 오직 단 한 곳, 나무 그늘 아래에서 꽃 핀 듯 웃고 있는 '그 녀석'에게 고정되어 있었다.현신은 나무 그늘 아래 소파에 앉아 환자들과 무언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계영과 강무의 서슬 퍼런 기운을 감지한 듯, 녀석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아···. 안녕하세요. 강무 선생님, 그리고··· 계영 님.”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녀석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계영은 그런 녀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며칠 새 녀석의 얼굴은 병실 안에서 보호받은 덕분인지 더욱 말갛고 고와져 있었다. 그 무해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계영의 심장은 분노와 애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망으로 날뛰었다.‘그럼 그렇지. 요원 활동을 해왔으니 거짓말엔 능했을 테고, 타인의 시선을 속이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웠겠지.’인생을 다 산 듯 텅 비어있던 그 눈동자,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롭던 그 분위기.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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