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118 챕터

#61. [The Hierophant- 울려버렸어]

긴 하루가 저물고, 선혈처럼 붉은 새벽이 새로운 하루를 밀어올리고 있었다.계영이 복잡한 사념을 삼키는 동안 차는 매끄럽게 미끄러져 켄즈 빌딩에 도착했다. 품 안의 녀석이 숨긴 사정이 무엇인지, 혹은 본래 그리 위태로운 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규련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남았을 녀석을 생각하면, 계영의 심장은 기이할 정도로 수런거렸다.‘만약 하남에서 마주쳤던 그 녀석이 정말 너라면······.’도망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았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자리를 피하지도 않은 채. 계영은 녀석의 풀어헤쳐진 단추를 하나하나 다시 채워주었다. 손끝에 닿는 칠흑 같은 압박 베스트의 감촉이 못내 차가웠다.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녀석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신. 일어나.”천천히 눈을 뜬 녀석은 잠결에 취해 현재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한참이나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영은 녀석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이끌었다.“천천히 내려. 우리 집에 갈 거다.”그제야 상황을 자각한 듯 녀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계영은 건물 곳곳에 고도로 훈련된 경호 인력을 배치하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녀석의 걸음걸이를 기민하게 살피니, 속도는 느려도 다행히 다리 쪽 골절은 없어 보였다.엘리베이터의 매끄러운 거울 속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란히 비쳤다. 먼지와 핏자국이 묻은 경호원 복장이었지만, 녀석의 예쁘장한 얼굴 탓인지 묘하게 퇴폐적인 매력을 풍기는 연예인처럼 말쑥해 보였다. 이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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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강제로 그 입을 막아-The Emperor]

어느새 방 안으로 발을 들인 김강무는 침대 위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규련에게 대강 이야기 들었어. 고맙다, 알바생. 규련이 녀석 지켜주느라······ 목숨까지 위태로웠다며.”훅 끼쳐오는 공기의 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계영의 얼굴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은 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극도의 흥분 때문인지 관자놀이에는 팽팽한 핏줄까지 돋아 있었다. “······전 괜찮아요.”그리고 그 아래, 가냘픈 몸을 떨며 울고 있는 애송이의 몰골이란.‘이거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데.’강무는 묘하게 뒤틀린 방 안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일부러 평소보다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하긴, 분위기가······ 계영아, 무슨 상황이야?”“······혼 좀 냈어.”계영이 억눌린 음성으로 짧게 대답했다. 강무는 픽, 소리 내어 웃으며 의료 가방을 내려놓았다.“야,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고 애를 이 지경까지 다그친 거야? 독하다, 가계영. 자, 어디 보자. 이리 와 봐.”“전··· 그냥 쉬면 돼요!”강무의 손길이 닿으려는 찰나, 녀석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 격한 반응에 강무의 입에서 헛된 탄식이 흘러나왔다.“야 인마, 괜찮기는. 나 의사야.”“그냥······ 연고랑 진통제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그 순간, 계영이 녀석의 거절에 화가 난 것인지 혹은 걱정이 앞선 것인지 녀석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리며 몸을 살폈다.“어디가 얼마나 아프길래 진통제 타령이야? 빨리 옷 벗어. 너, 몸 상태 엉망인 거 맞지?”계영의 서슬 퍼런 명령에 녀석은 공포에 질린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비밀이 파헤쳐질 것 같은 위기감에 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무가 계영의 팔을 잡아채며 제지했다.“계영아. 너 너무 배려가 없다.”“무슨 배려?”“이 녀석, 아직 미성년자야. 너 같으면 아무리 남자끼리라지만, 훌러덩 옷을 다 벗고 싶겠냐?”강무의 말에 계영은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뭐?”“친구야, 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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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죄악을 집어삼키며-The Devil]

“······흐흑.”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님방을 찾은 계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예상대로 녀석에게는 이미 힘겨운 사투가 시작되어 있었고, 그 처절한 신음 앞에서 계영은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한계야.”힘없이 중얼거리는 비명 섞인 잠꼬대가 계영의 귓가에 닿아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계영은 문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덤덤한 척 녀석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녀석의 흐느낌이 격해질수록 계영의 평정심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흐흑······ 흑. 아파. 누군가······ 죽는 건 싫어.”비틀거리는 몸짓에 벌어진 옷섶 사이로 칭칭 감긴 하얀 붕대가 얼핏 비쳤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녀석은 끝내 차마 듣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그냥······ 날 죽여줘. 고통 없이······ 끝내.”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은 생각에 계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침대 맡에 앉아 녀석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신, 정신 차려!”잠에서 깨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녀석을 보며 계영은 자조 섞인 질문을 던졌다.“너 대체 뭐야? 왜 하필 내 인생에 나타나서······!”칼로 자르듯 감정을 끊어내려 했다. 비정하게 내버려 두려 했다. 그런데도 결국 제 손으로 이 녀석을 다시 데려와 버렸다. 그때였다.“······흐흑······ 계영 님. 미안해요.”계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녀석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이름이 '가계영',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김강무는 한규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동안 머리가 지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운전기사는 비 오는 한여름이니 당연히 에어컨을 켰지만, 강무의 몸에는 소름이 돋아 히터가 필요했다.-녀석은 괜찮아? 응급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그냥 뭐 탈진해 보였어. 대신 좀 얻어맞긴 했더라.”지금 상태를 다 알려주면 규련은 죄책감에 힘들어 할 것 같아 에둘러 말을 돌린 강무였다.-지금 김 비서한테 보고 들으니 철문이 뜯겨 나갔었다며? 무서운 것들이 침입했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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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감정 낭비-Strength]

현신은 다시 꿈속으로 침잠했다.아니, 그것은 기억의 파편이었다. 지독하게도 이탈리아였다. 엘에프와 헤르만, 그리고 어린 시온과 무휼과 함께했던 낯선 타국 땅. 어떤 고통이 또다시 심장을 들쑤셔댈지 예감하기도 전에, 풍경은 가장 기억하기 싫은 그날의 폐허로 돌아가 있었다.로마의 버려진 건물 곳곳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실수로 뇌관이 잘못 건드려진 탓에 아군의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다급한 이탈리아어가 비명처럼 흩어졌다. 지뢰밭이나 다름없는 건물 내부에는 여전히 소형 폭탄들이 연쇄적으로 터지고 있었다.“당장 탈출해! 부상자만 챙긴다. 사망자는 버리고 간다!”현신과 공조하던 정부 기관 책임자의 냉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는 잔인한 선택의 순간. 그러나 현신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한 선택지를 고집했다.“수색을 허락해 주십시오!” “거긴 이미 생존자가 없어! 다 죽었을 거다!” “아닙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우노와 조직의 핵심 전력이 연락 두절입니다!”정부 측 책임자는 어린 나이에 핵심 증거를 확보한 현신이 못마땅한 듯했다.하지만 이번 임무를 성공 궤도에 올린 것은 현신의 활약이었기에, 기꺼이 제멋대로 굴었다.등에 맨 가방에 든 증거 없이는 이 임무 자체가 실패로 돌아갈 테니까. 책임자는 잡아먹을 듯 현신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알았다! 딱 10분 뒤 철수한다!”현신은 감사하다는 인사 뒤로 다시 생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펑, 펑! 날카로운 폭발음이 귓가를 때렸다. 로마를 침공한 테러범을 제압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노후한 건물의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했고, 대원들이 설치해 둔 폭탄들이 불길에 반응해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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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 - The Hermit]

가계영이 내뿜는 분위기는 한겨울 서리가 내려앉은 듯 서늘하기만 했다.“덕분에 잘 쉬었습니다.”현신은 그래도 신세를 진 입장으로 고개 숙여 인사부터 건넸다.“악몽을 꽤 심하게 꾸던데, 매일 그런가?”“또 제가······ 폐를 끼쳤나 보네요. 죄송합니다.”“너의 그 ‘죄송하다’는 말이, 이제는 그저 가벼운 일상의 인사치레처럼 들리는군.”현신은 계영의 서슬 퍼런 비아냥에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엘에프도, 계영도 늘 제게 화가 나 있었다.“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늘······ 사과할 일만 골라 하네요. 지금 몇 시죠?”“오후 2시.”“너무 늦게 일어났네요.”가계영은 그제야 물끄러미 현신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공기가 이토록 서먹해질 수 있을까.“밥 먹고 가.”계영의 표정은 텅 빈 것처럼 고요했다. 평소의 그와는 확연히 달랐다. 차라리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편이 나을 뻔했다. 현신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금 그냥 나갔다간 정말로 버려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밥만 먹고 얼른 갈게요.”사실 현신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움직일 때마다 몸 구석구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와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고통이었다. 어서 은행에 들러 환전을 한 뒤, 미행이 붙지 않는다면 무휼의 집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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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The Tower- 아프게 무너지는 신뢰 ]

계영의 펜트하우스를 나선 현신의 등 뒤로 7월의 끈적한 습기가 달라붙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짐승의 안광일까. 사방에서 자신을 훑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추적이었다.현신은 발길을 돌려 강남 도서관으로 향했다. 고요한 서가 사이에서 무의미하게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죽였다. 해가 지고 나서야 한규련의 회사 근처에 닿았지만, 서울의 여름은 밤조차 자비가 없었다.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열기 속에서 현신은 밭은 숨을 내뱉었다.‘도대체 몇 팀이나 붙은 거지? 내가 아무리 둔해도 이 정도면 사방이 벽인데.’숙소로 돌아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진통제와 아이스크림, 빵과 생수를 샀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멜론 맛 아이스크림의 포장지를 벗겼다. 달콤하고 차가운 감각이 혀끝을 스쳤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뜨거운 공기에 아이스크림은 눈물처럼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현신은 그것을 서둘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좋은 것은 짧고, 고통은 유독 길었다.현신이 배운 인생의 법칙은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갈비뼈가 어긋난 듯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폐부를 찔렀다. 예전 임무에서 겪었던, 아주 익숙하고 지독한 감각이었다. 아마 한 달은 이 아픔을 동거인처럼 품고 살아야 할 터였다.현신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H 건설 본사 건물로 들어섰다. 웅장한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인공적인 냉기가 땀에 젖은 피부를 서늘하게 식혔다. 어제는 이곳이 생지옥의 발원지였건만, 오늘의 건물은 지독하리만큼 평온하고 우아했다.총무과에는 여전히 송화와 최 대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저기, 늦었습니다. 별일······ 없었죠?” “아무 일 없었는데? 넌 아직도 보디가드 코스프레 중이냐?”어제와 같은 옷차림의 현신을 보며 그들이 낄낄거렸다. 현신은 따라 웃으려 했으나, 뒤틀린 갈비뼈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저 흡- 하고 짧은 숨을 삼키며 통증을 억눌렀다. 단아한 투피스 차림의 송화가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알바생,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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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빌런과 함께하는 연인 놀이- The Devil]

김강무는 눈앞의 아르바이트생을 보며 기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신원 조회를 위해 ‘이신’이라는 이름을 시스템에 던져 넣을 때마다 데이터는 비명도 없이 막혔다. 아무런 기록도, 흔적도 남지 않는 무(無) 그 자체였다.그는 꼭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거나, 누군가 필사적으로 감추려 한 금기처럼 보였다.한규련을 지키겠다는 허무맹랑한 집념, 그리고 의식불명이 된 백 사장. 상황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만 갔다. 강무는 녀석의 눈을 가렸던 천을 난폭하게 풀어헤쳤다. 시야를 점령한 빛에 현신이 미간을 찌푸리자, 강무는 그를 강제로 앉히며 취조를 시작했다.“너, 백 사장이 심어둔 첩자지?”녀석이 가계영과 한규련에게 독이 될 존재라는 의심. 강무에게 이 묘한 녀석은 이제 아군이 아닌, 도려내야 할 종양처럼 보였다.“으윽······ 정말 창의적인 발상이네요. 강무 선생님. 백 사장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입니다.”전혀 기죽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황금빛 눈에 강무는 잠시 기가 눌려 버렸다.“그런데 왜 네가 있던 그 아수라장에서 놈들이 순순히 해산했지?” “제가 죽어라 막고 있던 덕분이죠. 사장님은 헬기로 탈출하셨고······ 제가 쓰러지기 직전에 계영 님이 오신 것, 선생님도 아시지 않습니까.”그의 눈은 맑았다. 탁한 지하실 공기 속에서도 눈동자만큼은 올곧게 빛나 강무를 당혹스럽게 했다.“규련이를 왜 지키려 했어?” “집도 주시고, 일거리도 주시고······ 제겐 은인입니다.” “단지 그 하찮은 이유 때문이라고?” “선생님이든, 계영 님이든······ 전 누구라도 지켰을 겁니다. 어차피 저보다 대단한 분들이 살아남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이로울 테니까요.”하긴 전혀 하찮지 않다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녀석은 밭은 숨을 내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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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수라의 만찬 - The Lovers]

강남역 6번 출구. 쏟아지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현신의 몸은 얼어붙어만 갔다.“에스. 1시 정각이야.”“겨우 시간에··· 도착했네요.”현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체력 탓에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화사하게 웃으며 독보적인 미모를 뽐내는 엘에프는 강남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마치 홀로 조명을 받는 듯 찬란하게 빛이 났다.“우리 꼭 커플 같은데?”하필이면 강무가 준비해 준 옷이 문제였다. 깨끗한 화이트 긴 소매 셔츠에 여름 하늘을 닮은 데님 팬츠라니. 공교롭게도 엘에프의 착장과 맞춘 듯 어우러져, 누가 보아도 다정한 연인 같은 실루엣을 연출하고 있었다.“힘들어 보여 손잡아 줄게.”“네· 배도··· 고프네요.”현신은 결국 그에게 손목을 내어주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 채, 강무가 억지로 먹인 진통제의 약효가 어서 퍼지길 빌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 네가 나오다니 놀라워.”“약속은 당연히 지켜야죠.”엘에프는 걸음을 멈칫하더니 현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음· 너는 항상 그 입이 문제야.”“뭐··· 가요?”“한규련 죽이지 말라는 경고 같잖아?”역시, 엘에프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재미없을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군다면, 언젠가 이 지독한 관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볼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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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나쁜 남자VS나쁜 남자-The Devil]

‘정말 환장하겠네.’현신은 이 상황을 설계한 김강무를 당장이라도 멱살이라도 쥐고 싶었다. 그가 이 레스토랑을 예약해 주며 데이트 잘하라는 제안을 던졌을 때, 이런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제 손으로 가계영에게 현신의 데이트 상대를 확인시켜 주려 하다니.취미가 고약하다 못해 악취가 나는 강무를 향해 현신은 차가운 눈길을 보냈지만, 정작 오늘 제일 경악한 사람은 강무 본인인 듯했다. “진짜 데이트하는 것도 모자라··· 상대가 저런 거물이라니··· 알바생, 너 진짜 정체가 뭐야?”강무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물어왔지만, 현신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지운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후-, 전 보시는 바와 같이 그냥 알바생이에요.”그 순간, 현신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계영과 엘에프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불꽃이 튀듯 흉흉한 기운이 오갔다. 엘에프는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현신의 창백한 얼굴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에스, 저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너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우연인가?”엘에프는 오늘의 판도를 자신이 장악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계영을 향해 보란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뭐 중요한가요? 전··· 배가 고플 뿐이에요.”엘에프는 흥미롭다는 듯 입술 끝을 말아 올렸지만, 현신은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한규련이 끼어들었다.“한국어를 언제 이리도 능숙하게 하다니, 능력이 많군요, 엘에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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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악마의 고백 - Wheel of Fortune]

도대체 엘에프가 왜 이러는 걸까. 화가 난 건가? 아니면 자신을 도발했다고 생각해서 판을 깨려는 걸까.현신은 너무 놀라 엘에프를 빤히 바라보았다.“아··· 엘에프 선배. 왜요?”엘에프는 순간 몸을 숙였다. 현신의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닿을 정도로 밀착한 그가 이번에는 이탈리아어로 낮게 속삭였다. “음······ per te, sarò in grado di fare qualsiasi cosa.(널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어.)”“Non c'è bisogno di farlo per me.(절 위해서 그럴 필요 없습니다.)”“Shh, bada a come parli.(쉿,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등골을 타고 짜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현신은 더는 대화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거슬리는 말을 잘못 뱉었다간, 저 변덕스러운 악마의 화살이 가계영을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효진이 세상 신기하다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어머 어머, 둘이서만 속닥속닥 이탈리아어로 말하다니···. 난 어지러워서 식사나 해야겠네요.”그때 한규련이 얼굴을 활짝 펴며 거들었고, 강무 역시 기가 빨린 듯한 눈으로 웨이터를 불렀다.“효진아, 25년 만에 옳은 말 했다. 일단 밥이나 먹자.”“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놀랍다 놀라워.”다들 제정신인가? 엘에프가 이 식탁을 장악하고 휘젓고 있는데, 어쩜 저리 태연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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