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의 모든 챕터: 챕터 81 - 챕터 90

118 챕터

#81. [Judgement - 그 악마의 정의]

현신은 떨리는 심박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헤르만의 등 뒤, 그 서늘한 그림자 너머를 살폈다. 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거대한 포식자 엘에프의 발톱이 이미 제 목덜미 근처까지 당도했다는 명백한 신호일 텐데.“엘에프는 없어. 데이트는 일요일이니까. 벌써부터 그를 찾는 건가?”헤르만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태연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들렸다.“······여긴 어떻게 오신 거죠? 병원 보안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요.” “지금 이 구역 CCTV는 먹통이니까.”엘에프의 오른팔이자 냉철한 전략가인 헤르만이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에 현신은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인다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멸시키거나, 소리 소문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소중한 얼굴들이 현신의 숨통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무슨 목적으로 오신 거죠?”현신이 잔뜩 날을 세워 묻자, 헤르만이 사신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바짝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옷깃에서 배어 나오는 차가운 향취가 현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헤르만은 커다란 손을 뻗어 현신의 턱 끝을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들어 올렸다.“경고하러 온 거야, 에스.”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현신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짓이겨진 입술, 그리고 가느다란 목선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그 시선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피부 위를 가볍게 스치는 것처럼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다음번에는 처참하게 제거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저 이제 도망 안 가요. 사실은 갈 곳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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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폭군이 폭주하면-The Emperor ]

엘에프의 시선은 현신이 소중하게 들고 있는 동그랗고 하얀 뻥튀기 주머니에 머물렀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 평화로운 공원 풍경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서민적인 간식이었다.“그게 뭐야?”“뻥튀기라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버려.”설명조차 끝내기 전, 엘에프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매끄러운 턱 끝은 이미 길가에 놓인 쓰레기통을 향해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맑아서 오히려 잔혹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이 오만한 남자에게, 현신의 손에 들린 간식 따위는 시야를 어지럽히는 불쾌한 쓰레기에 불과한 것 같았다.현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엘에프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현신을 베어 왔다.“방금 사서 아까운데요. 달콤하고 맛있거든요.”“에스, 내 인내심을 그런 하찮은 것으로 시험하지 마.”엘에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신이 좋아하는 것, 현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고작 간식일지라도 제 시야 밖으로 치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의 눈빛에서 읽히는 지독한 결벽과 통제욕에 현신은 결국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뻥튀기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착하네. 몸에 좋은 걸 먹어야지.”뻥튀기가 몸에 안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현신은 속으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 엘에프의 뒤를 따랐다. 그의 손등에 불거진 우아한 핏줄이 오늘따라 유난히 위협적으로 보였다.***같은 시각, 가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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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파멸로 이끄는 당신 -The Lovers]

현신은 가슴속 울분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들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되뇌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선배, 데이트 계속해요.”현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에도 담담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이 독배를 기꺼이 마시겠다는 결연함이었다.“역시. 오늘의 목적을 잊지 않았군.”엘에프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그 말 속에 숨은 의미를 단번에 짚어냈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지, 그는 잠시 웃음을 지우고 덤덤한 모습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아이처럼 가벼웠다. 현신의 손을 꼭 잡고 걷던 엘에프는 찬란하게 부서지는 물결에 비친 햇살을 감상하기도 하고, 그 위를 유유히 노니는 오리들에게까지 시선을 두었다. 그는 산책하는 내내 현신에게 그동안 무슨 미션을 했느냐고 물었고, 현신은 자신이 했던 일들에 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엘에프가 던지는 질문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현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한 치의 거짓도 섞지 않았다. 어차피 엉뚱하게 둘러댔다가는 그 순간 호숫가에 처박히고도 남을 수모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그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곤조곤 대답을 이어갔다.“지난 몇 주간은 미션은 안 했나 보군.” “그럴 몸이 아니었어요.” “얼굴은 보기 좋네. 혹시 나에게 할 말 없어?”엘에프의 물음에 현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젯밤 베개맡을 맴돌던 그의 고뇌 어린 숨소리, 그리고 지난 2년간 쌓인 침묵의 무게가 혀끝에서 맴돌았다. 엘에프는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현신은 숨김없이 전부 털어놓았다.“지난번에도 말씀드리고, 헤르만 선배께도 설명드렸지만······ 제게는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어요.” “음. 그래?” “제가 이탈리아에 남았다면 어땠을까요?”순간 엘에프의 눈동자 농도가 짙어졌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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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악마를 따를 용기-Judgement]

“자, 에스.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엘에프는 번지점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홀가분한 목소리로 현신을 이끌었다. 그가 데려간 곳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네, 선배.”현신은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엘에프는 능숙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음식을 주문했고, 현신은 그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식탁 위로 세상 겉도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한국의 유난히 지독한 더위, 공원의 풍경, 그리고 의미 없는 일상들. 어느 순간 화려한 코스 요리들이 하나둘씩 차려지자 엘에프는 그제야 식사에 집중하며 현신에게도 음식을 권했다.하지만 현신은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오늘 그가 또 어떤 곤란한 선택지를 내밀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울지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포크를 움직였다. 이 위태로운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현신은 식탁 너머 엘에프의 속 모를 눈치를 살피며 이 고요한 폭풍 전야의 끝을 가늠해 보았다. 가벼운 대화와 함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챙! 챙!엘에프가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포크로 와인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맑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레스토랑의 공기를 일순간 얼려버렸다. 주변의 소음이 소거된 듯 정적이 찾아왔다.“에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눈앞의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오늘은 제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하실 건지 궁금해서요.”우아하게 냅킨으로 입을 닦고 붉은 와인으로 목을 축인 엘에프가 현신을 향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에스. 자, 그럼 제안하지. 1번, 3주 뒤에 나랑 다시 데이트한다. 2번, 내일 당장 나와 함께 홍콩으로 떠난다.”현신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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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달빛 아래 젖어드는 안녕-The Moon ]

현신에게는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일요일 저녁의 강남은 평일 못지않게 도로 위가 차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현신은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익숙한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서일까.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가로등 불빛도,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고 특별하게 여겨졌다.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이곳에 돌아올 날이 언제쯤일까. 운이 좋아야 1년······ 아니면 영영 기약이 없을지도 모른다.개포동에서 압구정동으로 가던 중, 강무의 병원 근처에서 운 좋게 문을 연 와인 전문점을 발견했다. 현신은 급히 하차 벨을 누르고 정류장에 내렸다. 고심 끝에 나름 값비싼 와인 세 병을 골라 정성스럽게 포장을 부탁했다.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준 이들에게 건넬 마지막 성의였다. 간호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근처 베이커리에서 고급 케이크도 함께 구입했다. 묵직한 가방에 양손 가득 들린 선물들을 보며 현신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술과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남들에게도 이런 것만 선물하게 되는 것 같아 싱겁게 홀로 웃게 되었다.그저 받는 사람들이 기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병원에 들어섰지만, 아쉽게도 강무는 자리에 없었다.한규련과 함께 잠시 외출 중이라는 말을 들은 현신은 포장된 와인을 데스크에 맡겼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간호사들에게 남기고, 케이크를 전달한 뒤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현신은 택시를 타고 한규련의 빌딩으로 향했다. 지난봄부터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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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Three of Swords - 세 개의 칼, 심장을 뚫다]

가계영은 크게 소리치지도 않았고, 손가락질하며 삿대질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신은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계영이라는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도려내졌음을.“내 말이 안 들려? 돌아가라고. 어서, 내 눈앞에서 당장 사라져.”낮게 가라앉은 채 화를 꾹꾹 눌러 내뱉는 계영의 목소리는 서늘한 화살이 되어 현신의 심장에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현신은 온몸이 벌벌 떨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입술은 경련하듯 떨렸고,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마주한 그의 증오는 상상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밤새 공들여 준비했던 모든 말들이 물거품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입안은 바짝 타들어 가 텅 빈 공동(空洞)이 된 기분이었다.“저기······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가져가.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라고······!”기어이 계영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며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주차장의 공기가 그의 고함에 찢겨 나갔다.“네, 그럼······ 갈게요. 그동안 감사해서······이건 놓고······.”현신은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손등으로 닦고 또 닦고, 옷깃으로 훔쳐내며 막아보려 했지만&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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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남겨진 남자의 후회-The Hanged Man ]

“뭐? 뭐라고?”마동현 실장은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폭풍처럼 몰아닥칠 가계영의 분노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아 두려울 지경이었다. 계영 역시 멍한 눈을 껌뻑이다, 이내 대놓고 언성을 높이며 채근하기 시작했다.“마 실장, 할 말 더 남았어? 이 이상 충격적인 보고가 나올 리 없잖아. 계속해! 어서!”“······이 영상과 서류를 보십시오. 현신이라는 여자가 바로······.”마 실장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신 인천공항 CCTV 속에 담긴 모습을 계영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계영의 상태를 기민하게 살폈다.화면 안에는 엘에프와 함께 있는 현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잡혀 있었다. 이어 출입국 사무소의 출국 기록 서류를 훑어 내리던 계영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수십 초의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계영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엘에프 옆에 있는 이 여자가······ 현신이라고?”“네, 그렇습니다.”“그 녀석이 사실은 여자였고, 원래 정체가 현신······ 그 보육원 주인이라는 거지? 그런데 내게 그 금쪽같은 부지를 양도하겠다고?”“그렇습니다, 대표님.”거실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계영의 얼굴은 찰나의 순간 수만 가지 감정으로 일렁이더니, 이내 모든 표정을 지워낸 듯 차갑게 식어버렸다. 마 실장은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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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부완결)[도망간 운명의 여인-Wheel of Fortune]

며칠 뒤 강남 개포동.시온은 무휼과 사랑을 나누고 있어도 불길한 예감 탓인지 즐겁지가 않았다.무휼 역시 H건설 보안실 근무마저 단칼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무휼아······ 혹시, 현신이한테 연락이 왔어?”“아니. 녀석은 휴대폰도 없어.”괜히 현신에 대해 언급했을까. 무휼은 일절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도, 그는 시온에게 별다른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컴퓨터 앞으로만 향했다.“아직도······ 엘에프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지?”“그렇겠지.”“어떻게 H건설에 투자까지 하고 그곳에 직접 나타나다니. 세상에 그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을까?”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법이 없었는데. 시온은 무휼에게 다가가 그의 단단한 등을 뒤에서 안으며 조심스레 엘에프에 관해 언급했다. “엘에프는 원래 현신에게 지독할 정도로 집착했으니까. 우연을 가장해 녀석을 추적해온 것일지도 몰라.”“현신이 협박을 받은 거 아니야?”“그럴지도.”엘에프에게 끌려갔다면 현신을 추적해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시온은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불안이 들끓기 시작했다.“무휼아, 우리가 현신이 너무 구박한 거 아니야?”“어디서든 잘 있어야 할 텐데···&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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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3부)一日三秋(일일삼추)-하루가 3년 같아

9월 초, 벌써 홍콩에 가을이 시작되었다. 침사추이의 심장부에 위치한 E호텔 지하. 화려한 지상의 야경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의 공기는 광적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중앙에 설치된 사각형 링 주변으로는 수백 명의 관중이 빽빽하게 모여들어 격투기를 관람 중이었다.VIP석에는 오직 엘에프와 헤르만, 단둘만이 앉아 있었다. 이 거대한 지하 왕국의 군주인 엘에프는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만큼은 사각 경기장 위를 유영하듯 즐겁게 훑고 있었다.홍콩을 긴급히 출국했다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직행한 엘에프는 라이트 브라운 슈트에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 정갈한 차림새는 흡사 깊어가는 가을의 우아함을 연상시켰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가을 서리보다 차가웠다. “에스의 본명이 현신이라던데. 실력은 여전하네.”옆자리의 헤르만 역시 세련된 글렌 체크 그레이 정장을 차려입은 채, 링 위에서 유려하면서 우아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현신을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엘에프는 근래 들어 드물게 숙면을 취했고, 술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삶의 유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 견고한 새장 안에 드디어 곁에 두고 싶었던 존재를 가둬 놓았다는 안도감이 꽤 괜찮은 전리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수백 대의 CCTV를 돌릴 때마다 화면 어딘가에 현신이 실존한다는 사실이 그를 평온하게 만들었다.“그동안 계속 ‘이신’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할 땐 정보가 교묘하게 막혀 있었는데.”“과거가 뭐 그리 중요한가. 현재만 보면 그만이지.”현재 링 위에서는 금발로 짧게 자른 머리, 중성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실루엣을 가진 현신이 자신보다 배는 더 큰 거구를 처참하게 유린하고 있었다.&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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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빨리 그대에게 가고 싶어서,一日三秋(일일삼추)

 현신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엘에프는 눈앞에서 어느 정도 보이지 않게 되자 자신도 몸을 돌렸다.  “곧 에스가 지상 넘버로 올라올 것 같아. 엘에프.” 헤르만의 말을 들으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녀석은 제대로 아랫것들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오겠지.” 앞으로 또 얼마나 현신이 즐거움을 안겨줄까 생각하던 그때. 헤르만의 숨소리가 일순 거칠어졌다. “한국에서 온 그 사내는 호텔에 계속 머무르고 있더군.” 그게 뭐라고. 그 말에 엘에프는 승리자 같은 표정을 지으며 지상을 바라보듯 시선을 체육관 천장으로 향했다. “한국 사람들 재미있어.” 소중한 이들의 안위를 인질로 잡힌 현신이, 제 손아귀를 벗어나 감히 배신을 꿈꾸지 못하리라는 것을 엘에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이 즐거울 것 같은 엘에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 “마 실장!” “넵.” “분명히 지난주 엘에프 조직원이 원래 중국 본토 세력하고 센트럴 부근에서 트러블이 있었을 때 현신은 없었어?” 가계영은 몇 주 전 기어이 엘에프가 소유한 E 호텔 건너편에 호텔 하나를 사들여 K 호텔이라고 명칭도 바꾸고 리모델링도 겨우 마친 상황이다.  그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E호텔 내부로 밀어 넣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옥죄는 침묵뿐이었다. 단 한 조각의 흔적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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