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 Chapter 1 - Chapter 10

46 Chapters

#1. [(프롤로그) 폭풍우 치는 날에]

20XX년 1월 28일.겨울비가 창문을 부술 듯 거칠게 몰아치는 밤이었다. 한여름의 폭우보다 더 사나운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테헤란로의 마천루를 집어삼킬 듯 요란하게 창을 두드렸다.강남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0층 펜트하우스. 유리벽 너머의 도시는 혼돈 그 자체였으나, 두터운 방음벽이 가로막은 실내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공기 중에는 묵직한 침묵과 함께, 빗소리에 섞여 들어오는 낮은 신음과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아슬아슬한 파동을 만들고 있었다.은은한 무드등이 어둠의 경계를 허물자, 주인의 오만한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세련된 인테리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정점에는, 조각보다 더 비현실적인 실루엣의 남자, 태하가 있었다.그는 세상의 모든 빛을 제 눈동자에 가둔 채, 오로지 눈앞의 여자에게만 지독하리만치 깊은 시선을 고정했다.“신아.”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경신의 귓가를 간지럽히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잘 정돈된 근육으로 다듬어진 태하의 체격은 조명 아래서 매끄러운 광택을 내뿜었다.수려한 이목구비와 압도적인 피지컬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 무기는 오직 경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만 존재했다.“······태하 오빠. 하윽.”일주일 전만 해도 경신은 굳게 다짐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지독한 관계에 마침표를 찍겠노라고. 그를 멀리하고, 전화를 피하며 마음의 벽을 쌓았건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있었고, 취기 어린 그를 부축해 이 은밀한 침실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자신의 25번째 생일 선물로 '너'를 원한다는 그의 노골적인 요구에, 경신의 손에 들려 있던 초라한 넥타이핀 케이스는 바닥 어딘가로 굴러떨어진 지 오래였다.“윽······. 오빠, 아파.”“Va a ser duro porque es tu primera vez. (처음이라 힘들 거야.)”태하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부서뜨릴 듯 움켜쥐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본능을 억누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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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시 뜬 눈, 기적 혹은 재앙?]

병상 위, 이불이 산처럼 불룩 솟아오른 채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악, 깜짝이야! 오늘 일진 왜 이래?”단발머리에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쓴 여학생, 송화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통을 꽉 쥐었다. 꿈틀대던 이불 덩어리가 서서히 솟아오르더니 이내 이불자락이 옆으로 스르르 흘러내렸다.“······정신이 들어요?”“송화야, 나 아픈 거야?”“헉!”화야는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제 이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심지어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부르고 있었으니까.“저기요,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화야, 웬 존댓말? 너 경주 내려간 거 아니었어?”화야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고향 이름까지 나오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여자, 혹시 눈만 보면 꿰뚫어 본다는 신통한 무속인이라도 되는 걸까?“미치겠네! 저 오늘 그쪽 처음 봤거든요? 기숙사 짐 넣으러 갔다가 그쪽이 욕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거 보고 여기로 업고 왔다고요!”화야는 3년을 기다려 겨우 당첨된 S대 기숙사 룸메이트가 하필이면 '도사님' 스타일인 것에 절망했다.“그쪽 정체가 대체 뭐예요?”“성은 경, 이름은 신. 난 네 제일 친한 친구인데······.”“아이고, 경신 학생! 오늘 아침에 뭐 했는지 기억나요?”“······몰라.”“어제는?”“······그것도 모르겠어.”화야는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상실? 에이, 요즘 드라마도 그런 설정은 안 써요. 식상하게시리. 근데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안 거냐고요!”“나는 그냥 너를 알고 있어. 기억이 나······. 으윽!”갑자기 경신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들이 튀어 나왔다.“이건······ 단순히 어제오늘의 기억이 아니야. 묘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왜 그래요, 무섭게?”“태어나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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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생 다시 사는 건가?]

그 모습을 지켜본 경신은 자신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옆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이 상황을 지켜본 사람은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 화야를 향해 사과를 건넸다.“화야, 미안해.”경신은 젊고 어린 화야를 바라보며 세 번의 전생 내내 의지하고 위로받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내리는 빗줄기만큼이나 머릿속에 기억이 쏟아져 내리는 경신은 한결같이 제 편이었던 친구 화야가 감사하기만 했다.핸드폰 검색을 잠시 멈춘 화야는 뭔가 생각에 잠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건가요? 그분은 가셨나요?”두 눈을 껌뻑이며 화야는 그녀를 다시 기민하게 관찰했다. 경신은 눈앞에 이 친구가 새삼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싶어 가슴 한편이 저려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화야, 나 죽었을 때마다 너 되게 힘들었을 것 같아.”“······, 아직 제정신 아니구나.”“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어. 내 전생 되게 어둡고 힘들었더라.”“네?”“첫 번째는 36살에 죽었고, 두 번째는 31살에 죽었어. 그다음에는 26살에 죽어서 이번에는 설마 21살에 죽을 차례인가?”“헉!”“너랑 얼마 못 보겠다. 나 단명할 팔자거든.” “네?”화야의 눈빛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죄송해요. 더 듣기 힘드네요! 경신 양과 공존하기에는 제 심장이 너무 연약해서 죄송해요.”화야는 그동안 어렵게 자취하다 겨우 기숙사에 입성했기에 오전까지만 해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지만, 기쁨도 잠시뿐이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핸드폰을 챙겨 들고는 밖을 뛰쳐나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경신은 간호사들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검사를 받느라 지쳐 있었다. 소변 검사에 피검사까지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니, 화야는 간데없고 빈 병실만 그녀를 맞았다.화야가 나간 지 꽤 시간은 된 것 같았으나 아직 돌아오지는 않았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사람에게 주절주절 신상 정보를 읊어 댔으니 저렇게 사라진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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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가 임신했다고?]

헉-. 한규련의 탄식이 경신의 귀에도 닿았다. 화야는 규련의 팔을 톡톡 치면서 작게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오빠, 내 말 맞지?”“그래, 되게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불렀어.”병실로 들어와 정숙한 자세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화야는 비슷한 두려움을 품고 있는 규련의 팔짱을 꼭 낀 채 작게 중얼거렸다.“저기, 보살님. 저 기숙사 아니면 갈 곳 없어요. 룸메이트 교체는 안 된다네요.”그럼 그렇지. 화야는 다시 경신의 벗이 될 운명이었다. “보, 보살? 음흠, 화야, 나 21살이야. 너 재수해서 23살. 과거에 친구라 나 반말할게. 화야 너도 편하게 말해. 참, 내가 이번 주 로또 번호 알려줄게.”“······, 보살님, 로또? 휴······. 그래도 전 너무 두렵네요.”지금 돈이 문제냐 하는 화야의 눈빛은 경신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잠깐! 뭐? 로또 번호? 저기! 알려주시면······.”“규련 오빠 잠시 닥쳐줘. 그게 문제야?”물질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화야는 규련을 향해 눈을 흘겼다.“저기 학생. 정말 신기가 내린 사람 맞아? 정체가 뭐야?”규련의 질문에 경신은 그제야 그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가 시급하다 싶었다. 이게 순서였는데 그들과의 거리만큼 아직 마음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내가 이리 학습력이 없네요. 성은 청주 경(慶)씨에, 이름이 새롭다 신(新). 경신이에요. 제가 전생은 있는데 현생 기억은 없네요. 국어 교육과 4학년이래요. 만나서 반가워요.”“뭐 알고 있겠지만 난 수학 교육과 송화야.”“난 화야 남자친구 S대 의대 본과생 한규련이야.”둘은 쭈뼛거리며 경신에게 인사를 건넸고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곧 둘만의 대화를 속닥거리기 시작했다.“오빠, 전생 진짜 있는 거야? 의사잖아. 말해봐.”“아직 의대생이야. 게다가 그런 미스터리 한 분야는 논외야.”“오빠. 참, 아까 그 주님 있잖아. 건물주님은 가셨어?”“어, 주말까지 아예 이사할 때도 차 쓰라고 빌려주고 가셨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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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축복을 좀 받았어!]

산부인과 진료 대기실에 이르자, 간호사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셋은 빈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이곳 풍경은 다른 병동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아픔이 아닌 희망을 진료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 그런지 경신은 이곳의 이질적인 느낌이 맘에 들었다. 화야와 규련은 산부인과 진료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신에게 작게 속닥거렸다.“오빠, 우리도 같이 들어가야 하나?”“그래야지.” 경신은 안 그래도 함께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먼저 운을 떼 주다니 이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감사해요. 그런데 규련 오빠네 고모 한지원 박사님한테 가는 거예요?”“어, 맞아요. 보, 보살님.”경신이 딱딱 맞추자, 한규련의 눈빛이 다시 숙연해졌고, 화야도 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경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제 머릿속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그분이라면 미국 유명한 의료 타운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은 해외 발령 나기 전인 듯싶었다.“와, 제가 운이 좋네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부인과 전문의 한지원 박사님께 진료받다니.”경신은 다시 손바닥으로 제 배를 쓰담쓰담 거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송화야는 손으로 제 입을 살짝 가리며 키득거렸다. “보살님은 다른 사람 운명은 잘 보면서 자신의 운명은 제대로 못 보시나 보네요.”“화야, 내가 오늘 이전에 21년 치 기억이 없어.”“일단 여기 병원이잖아요? 이따 정신과 쪽도 상담받아 보고 가세요.”전생에 관련하여 더는 말하기 귀찮아진 경신은 말문을 닫았다. 화야의 정신의학(psychiatry)에 대한 신뢰가 꽤 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신은 차례가 언제인가 싶어 궁금해하던 차에 진료실 입구 화면에 자신의 이름이 0순위로 뜨면서 간호사가 호명하자 바로 긴장이 되었다. “경신 님! 제 3 진료실로 들어가세요!”경신은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제 손을 배에 경건하게 갖다 대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하얗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인상적인 산부인과 진료실.꽤 고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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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기들의 슬기로운 자궁생활을 위하여]

경신은 아기 아빠에 관한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머릿속이 꽃밭이었다. “아기 아빠가······, 누군지 몰라서 저도 당황스럽네요.”그러나 경신의 말을 들은 화야와 규련의 얼굴이 굳어졌고, 한지원의 눈빛은 멍하니 흔들리며 초점을 잃어갔다.경신이 개인적으로 분석해 봤을 때 4회차 인생은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었다.하지만 인생이 그리 쉽게만 흘러갈 리가 없는 법. 속 알맹이는 수십 년을 살아냈지만, 이번 생에 아니, 전생을 통틀어 임신은 처음이라 그게 문제였다. 즉, 몇 회차나 쌓아온 경험도 전생의 기억도, 지금의 임신 앞에서는 무력했다.아기 아빠가 누구인지. 그는 아기를 원하는지. 핸드폰은 왜 해맑은지. 이제야 궁금해하다니, 이 머리로 대학은 다닐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어요.”경신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서렸다. 다시 엄청난 발언을 한 경신이었다. 요즘 비혼주의도 팽배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아이를 입양하는 시대이다. 미혼모도 종종 있고, 이혼하여 혼자 아기를 키우는 여성도 많지 않은가. 경신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빠가 누가 되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오래 살아야 하는 것이 일단 최우선 숙제이자 급선무였다.다들 왜 아무 말이 없나 싶어 경신이 그들을 바라보다 그제야 분위기 파악을 하고는 허겁지겁 말문을 열었다. “아! 저기, 오해하지 마세요. 저 문란하게 막 그렇게 산 사람은 아니에요. 제 상태를 보세요. 전 인생 통틀어서 모태솔로······, 이게 아니라. 남자들도 눈이 있지······, 이것도 아니고. 어쨌든 실은 제가 기억이 좀 없어요.”“잠깐! 잠깐! 네? 임산부님, 기억이라니 무슨 말이죠?”그제야 한지원도 흐리멍덩한 눈빛에서 다시 총명함을 되찾아 경신을 향해 기승전결을 물었다.“선생님, 제가 오늘 병원에서 눈을 떠보니 사실 여기 왜 내가 누워있나 할 정도로 살아온 삶에 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예요.”화야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경신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보살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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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 건물주님!]

경신은 행복을 안고 본격적으로 이번 생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경신 님, 지금 기억이 없어 불안하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원인이 된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요.” “기억 없는 것도 걱정이지만 다가올 운명도 험난할 텐데. 저, 잘 이겨낼 수 있겠죠? 선생님?”“운명도 사람이 개척하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바라요.”경신은 배를 문지르며 어떻게 제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신기하기만 했다. “이건 기적인데······. 제가 이 기적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기적도 기대하고 준비된 사람에게 내려주는 거예요. 분명 잘 지켜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한지원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말을 해주는 것인지.경신은 의사가 자신에 대해 뭘 알고 하는 말 같이 들렸기에 다시 울컥해서 조금 전에 받았던 새 티슈로 다시 눈을 찍으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한지원 선생님. 역시 미국에서도 그리 유명하셨다는데 대단하세요.”“······미국?”“아 맞다. 아직은 아니구나. 선생님 곧 미국 San Antonio-Northwest S-Medical Center로 발령 나실 거예요. 국위 선양해 주세요.”한지원이 놀라움에 입을 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한규련과 화야에게 머물렀다.“어머, 그곳은 최근에 파견 근무를 신청해 놓은 병원인데······.”거보라는 듯 한규련은 제 고모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신기함과 두려움을 품은 그들은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경신의 손이 배 위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 오르리라는 기대감에 젖어, 그녀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 생애는 이 아기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살아남아야지.’경신의 결심이 단단해졌다. 희망의 싹을 틔우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한지원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져갔다.그녀를 본 한지원은 흐뭇하게 웃으며 앞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을 늘어놓았다. 경신은 그 내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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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드디어 병원밖으로]

일요일 오전 경신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납하러 갔더니 이미 정산이 끝나 있다고 해서 놀라기까지 했다. 한규련이 이렇게 매너가 좋은가. 게다가 너무 맛있는 것도 많이 갖다 준 바람에 짐도 늘어 있었다.“화야, 올때는 빈손이었는데, 갈 때는 왜 이렇게 되었지?”“사람은 숨만 쉬어도 필요한 게 생기잖아요. 어머, 이 냉장고 속 과일들도 챙겨가야겠다.”화야는 냉장고 속 음식들을 보며 알뜰살뜰 꼼꼼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과일, 샐러드, 초밥, 샌드위치, 캘리포니아 롤 등 다음 날까지 따로 사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꽤 많은 음식이 이 병실로 공수되었다. “산해진미를 규련 오빠 덕분에 다 먹었네. 이 은혜 내가 살면서 갚을게.”“그러게요. 저도 오빠를 다시 봤어요. 보살님은 꽤 은혜를 상당히 입은 것으로 추정되니 다 갚으려면 오래오래 사셔야겠네요.”전생에 경신이 지켜봤을 때 화야와 규련은 경상도 출신이라 무뚝뚝하기가 말도 못 했다. 그냥 멀리서 보면 꼭 싸우는 것 같아서 저러다 헤어지는 것 아닌가 한 적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세상 다정한 커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화야와 규련에게 신세를 많이 진 경신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이래서 사람에게는 좋은 친구가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그래, 벽에 똥칠할 때까지 꼭 이번 생애는 오래오래 살면서 잊지 않고 보답할 거야.”“보살님, 국어 교육과라 그런가 표현이 참 찰지네요.”“너도 전생에 국어 교육과라서 그런지 언어 사용이 매우 아방가르드해.” “그 입은 요단강 먼저 보내버리고 싶네요.”화야의 눈에서는 선득한 레이저가 쏟아져 나왔고 경신은 마주쳐도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며 짐 정리를 마쳤다. 구박도 4회차 인생 내내 듣다 보니 경신은 그냥 화야의 살벌함은 공기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까지 뵙고 퇴원 처리를 마친 경신과 화야는 두 손 가득 짐을 들고서 병원 로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택시를 타겠냐고 호화롭게 택시 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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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 남자가 움직이다.]

일요일 정오 MH 엔터테인먼트.낙성대에서 사당 사이에 있는 구도심 허름한 골목길에, 어느 5층짜리 낡은 건물에서는 오늘도 희미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골목 건물 주변으로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어린 여학생들이 더 많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응원 도구와 손수 만든 플래카드 상태로 봐서 이곳에는 핫한 연예인이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골목길은 마치 벚꽃이 만개한 것처럼, 그녀들의 함성으로 거리를 물들였다.입구의 현판은 주변 분위기나 건물하고는 동떨어진 매우 세련된 금속으로 MH 엔터테인먼트라고 그럴듯하게 걸려 있었고, 스타크래프트 벤(S사 익스프레스 튜닝벤) 두 대가 건물에 바짝 붙어 주차되어 있었다. 5층에는 건물 겉모습과 일치할 정도로 허름한 사장실이 있는데 유일하게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그림 같은 사내가 사장실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마호 자신보다 한참 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장만으로도 그는 긴장한 탓인지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고 위압감에 짓눌렸다. 태하의 존재감은 겨울 서리처럼 날카로웠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특별한 행동이 없어도 자체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자. 그가 바로 이 회사의 대표 태하였다. 물론 조금만 수가 틀리면 이 건물과 회사는 그에 의해 공중분해 될 수도 있기에 마호 입장에서 태하가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태하의 인성이 워낙 훌륭해 그럴 리는 없지만, 어쨌든 백억 단위의 돈도 가볍게 여기는 그였다. 반대로 그의 흥미 본위로 이 건물과 회사, 100억 원가량의 투자금도 취미 생활에 쓰는 푼돈처럼 뿌려준 덕분에 이곳 식구들은 길거리에 나앉지 않게 되었다. 태하가 소파에 앉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호는 태하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눈치를 보았다.“태하야, 요즘 자주 오네.”“볼일 보러.”이 회사 사장 마호는 냉장고에서 평소 그가 자주 마시는 병에 든 커피를 꺼내 앞에 놓아주면서 뭔가 불안한지 눈치를 살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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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리셋된 인생에 기적이 찾아왔다]

행복함을 배 속 가득 품고 있어서일까. 경신은 굳이 먹지 않아도 더할 나위 없이 배가 부른 듯 기분까지 몽글몽글해졌다.게다가 자신의 기구한 인생에서 과거에도 현재도 유일하게 소중한 사람들, 화야와 규련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일요일 오후의 강남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고깃집 입구마다 늘어선 줄이 상당해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셋은 운 좋게 창가 구석 명당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일단 삼겹살 3인분! 오늘은 제가 쏠게요.”“화야, 아니야. 이럴 때는 나이가 많은 내가 내는 거지.”“모두 저 불편하게 하실 건가요? 저 스트레스받으면 아가들한테 안 좋은 거 아시죠? 일단 5인분 갑니다. 돈은 제가 내요.”셋은 기분 좋은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 ‘임산부 벼슬’을 야무지게 남용한 경신의 승리로 끝났다. 오늘 지갑은 4회차 인생의 주인공인 그녀가 열기로 결정되었다.지글지글불판 위에서 선홍빛 삼겹살이 육즙을 가두며 야무지게 익어갔다. 특히 고기 뒤집기의 골든타임을 감각적으로 캐치하는 한규련이 ‘집게의 신’으로 등극하면서, 셋은 그야말로 예술적인 굽기의 고기를 즐길 수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12가지 반찬이 촘촘하게 깔렸고, 구수한 된장찌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공깃밥까지 등장하니 그야말로 완벽한 만찬이었다.“어머, 저 이제 알겠어요. 보살님.”“뭘?”“보살님 의외로 해물파였군요? 젓가락이 아까부터 굴부침, 꼬막무침, 생선조림 쪽으로만 유독 바쁘게 움직이네요?”경신은 젓가락질을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자신이 해물을 좋아했던가? 스스로 자문해 보았으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올시다’였다.하지만 매서운 화야의 눈썰미를 무시할 순 없었다. 곰곰이 살펴보니 어느새 그녀의 앞접시에는 꼬막 껍데기와 가시 발라낸 생선 살, 그리고 코앞까지 당겨 놓은 굴부침 접시가 증거처럼 놓여 있었다.경신은 즉각 상황을 분석했다.전생의 그녀는 비릿한 해산물을 즐기지 않았고, 워낙 입이 짧아 같은 음식을 반복해서 먹는 법도 없었다.화야 말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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