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 Chapter 21 - Chapter 30

47 Chapters

#21. [중력에 이끌리듯 운명도...]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 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 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휴······ 화야.”“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를 뒤로하고 몸을 돌린 그 순간부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고, 그의 서늘한 시선이 머물던 그곳으로 회귀하고 싶은 충동. 기숙사로 돌아오던 내내 경신의 몸은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자꾸만 뒤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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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압도적인 그, 치명적인 그녀]

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 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규련 오빠가 태하 씨한테 연락했거든요. 두말 않고 달려와서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 나오는 순간이었다. 직접 안고 병원까지?경신은 당장이라도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 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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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갓물주와 밤에 피는 장미]

경신 자신이 그렇게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니.게다가 지제아는 더 대단한 말도 했다.“넌 그냥 기억이 안 돌아오는 게 본인한테나 남한테나 나을 것 같아.”어쩌면 이게 정답인 걸까.기억이 돌아온다면 아이들의 아빠에게 짐을 지울 수도 있고, 행복하지 않았기에 본능적으로 기억을 버린 것이라면 굳이 찾아서 괴로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막상 타인의 입을 통해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을 듣게 되니,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과거의 난 대체 어땠길래? 매일 밤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는, 밤에 피는 장미 같은 몸뚱어리였던 거야?”“뭐? 하하하! 네가 밤에 피는 장미라고?”지제아는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저렇게까지 박장대소할 일인가 싶어 경신은 미간을 찌푸렸다.“너, 너무 도도하고 얼음 같아서 밤에도 꽃을 막 피웠을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모르지.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까. 그나저나 너, 그 많던 명품 옷이랑 가방은 다 어디로 치웠어?”이제 놀라는 것도 지쳤다. 명품 옷이랑 가방이라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난 살던 곳이 재개발 구역이라 쫓겨난 가난뱅이 홈리스 신세야.”그러자 지제아는 경신의 어깨를 싱겁게 두드렸다.“너 재개발되면 한몫 제대로 잡는 거 아냐? 지금 자랑하는 거지?”“······자랑은 무슨.”얼버무리는 경신을 보며 제아는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꿔 꼬며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집 만큼은 절대 팔지 않겠노라 결심한 터였다. 과거의 자신은 아무 고민 없이 홀랑 처분했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아까운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제아야. 혹시 나 남자에 대해 아는 것 없어?”“말했잖아. 나를 포함해서 우리 과 애들 중 너랑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애가 거의 없었다니까? 축제도 안 즐기고 늘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만 하거나, 수업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졌거든.”경신의 대학 생활은 예상대로 과거와 별반 다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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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시, 그 남자의 영역으로]

화야와 학식을 먹자마자 버스에 오른 경신은 어느새 MH 엔터테인먼트 근처 정류장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무슨 낯짝으로 거길 다시 들어가나.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애초에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 경신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한 경우의 수로 가득 찼다. 규련에게 부탁해 한 다리 건너 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아가들아, 엄마가 온 게 정답 맞겠지? 이미 도착해 놓고 물어봐서 미안.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직접 만회해야 하니까.’경신은 잠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추위가 가신 3월의 봄 풍경을 무심하게 눈에 담았다. 과거의 자신이 수없이 겪어본 계절이었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가들과 함께 맞이하는 매 순간은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행복했다.‘과거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 행복을 키워낸 거야. 그리고 이제 난 혼자가 아니지.’경신은 소중하게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 아가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예전에는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걸하듯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조금 여유를 되찾은 경신은 상황별 행동 지침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묘했다.‘오늘,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태하가 그곳에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경신은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여학생들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한산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가 시야에 들어왔다.“아! 있다, 저 차!”경신이 퇴원할 때 태하에게서 빌려 왔던 바로 그 차였다. 차 주인이 건물 안에 있다는 확신이 들자, 경신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태하는 경신의 핸드폰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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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부서질 시간, 거꾸로 뒤집힌 세계]

경신이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생물학적인 위기 본능이 뇌하수체를 강타하는 기분이었다.어? 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휘청휘청, 버스 차체는 중심을 잃은 채 좌우로 요동쳤고 속도는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철갑 괴물로 변한 버스는 인도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해오고 있었다.“뭐야? 저 버스는······!”비현실적인 광경에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고 직전 왜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지 비웃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지금 경신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다리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무거웠고, 후들거리는 무릎은 당장이라도 꺾일 듯 비명 지르고 있었다.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 위험에 직접 노출된 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의 화살촉은 경신이 아닌 다른 곳을 정조준하고 있었다.“어! 어! 저기요!”바로 그때였다.무심코 시선을 돌린 골목길 입구에서, 경신이 잘 아는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한 대가 서서히 헤드를 내밀며 대로변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태하의 차였다.***경신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필 왜 지금 그가 나타난 걸까. 그가 직접 운전대를 잡은 것인지, 아니면 또 누군가에게 선의로 차를 빌려준 것인지 확인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버스와 골목을 빠져나오던 SUV가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 자명했다.“안 되는데! 오지 마세요!”경신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으로 버스 기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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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운명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다]

원래 사고라는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준비해도 피할 수 없고 모든 경우의 수도 알아낼 수 없는 법이기에 인간사(人間事)는 모두 살아봐야 결과를 알게 된다. 경신은 전생을 통틀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이 참 재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 짝사랑했던 사람은 모두 일찍 유명을 달리하였고 본인 역시도 단명한 팔자다. 이번 생애도 경신은 그래서 남자를 멀리하려고 결심했지만, 이미 인연이 생겨 엮여가고 있는 태하라는 남자에게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다니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잇, 아니야! 그건 다 엄마 탓이 아니야! 이건 사고야! 엄마가 앙큼한 짓 좀 해야 할 것 같아!” 맘속에 품은 생각도 왠지 아가들은 다 알 것만 같았기에 경신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앙큼! 경신이 좋아하는 말이었다. 엉뚱한 욕심을 품고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만 보기와 다르게 실속이 있다는 의미를 지닌 그 단어를 사랑했다. “엄마는 재수 없지 않아! 너희를 품었어. 이것만 해도 운 좋은 것 아니겠어? 그리고 저 남자 내가 살릴 거야!” 이 검은 연기 속에서 보이는 것도 시원치 않지만 경신은 뭔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기로 결심을 굳혔다. 일단 가방 속을 뒤져 미세먼지 대비를 위한 마스크를 일단 썼다. 화야가 하도 임산부는 아프면 안 된다고 마스크 타령을 해서 여러 개 갖고 다닌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재수가 없긴 뭐가 없어. 아직 이번 생 다 산 것도 아닌데. 이봐 운 좋네! 가방 안에 살기 위해 이것저것 얼마나 많이 넣고 다녔는데! 아가들을 위해 그리고 눈앞에 이 태하라는 남자를 위해 경신은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한 법이고 인간은 약해도 인간의 마음은 강하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경신은 물론 알고 있었다. 자신도 전생에 교통사고로 죽어봐서 알고, 사고라는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듯 죽음이라는 것도 그렇게 황망하게 다가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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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타오르는 불꽃, 피어나는 희망]

털썩! 경신의 어깨 위로 묵직한 하중이 실렸다. 의식을 되찾은 태하가 그녀를 지지대 삼아 겨우 중심을 잡은 것이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태하가 이 와중에 손을 뻗어 반대편 조수석 쪽을 가리켰다.“가방······.”“태하 씨? 뭐라고요? 지금 이 판국에 가방이라뇨!”“······가방 가져가야 해.”경신은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차에 나뒹굴고 있는 남성용 백팩을 챙기라는 게 아닌가. “아이고! 오늘 큰 거 하나 배우네요. 이래야 부자가 되나 보죠? 이 와중에 철두철미하긴······. 걱정 마세요, 태하 씨 가방 내가 책임지고 챙길 테니까!”경신은 태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팩을 낚아채 제 가방 위에 겹쳐 멨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상당했지만, 경신의 부축을 받은 태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바닥을 짚으며 전복된 차 밖으로 몸을 뺐다.“자! 일단 여기서 피해요! 연기가 아까보다 훨씬 심해졌어요!”태하는 곁에서 저를 부축하는 경신을 바라보았다. 살을 에듯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가슴속이 일렁였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토록 무모하고 돌발적인 행동만 골라 하는 것일까.“위험한데···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몰라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자, 힘내세요! 우린 이제 살 수 있어요!”아직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태하가 조금이라도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면 그대로 뒤따라올 폭발에 휘말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경신은 한 걸음이라도 더 차량과 멀어지기 위해 그를 계속해서 다독였다.“잘하고 있어요! 어서요, 조금만 더!”매캐한 연기와 열기 속에서 경신은 자신의 가방에 태하의 백팩까지 짊어진 채, 자기 몸집의 두 배는 됨직한 남자를 부축해 나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온몸이 흥건히 젖어갔고 호흡은 가빠졌다.“윽···. 그래.”“힘내요! 조금이라도 걸어야 해요! 나 더는 몸에 힘 못 줘요!”경신은 당장이라도 배를 어루만지며 아가들의 안부를 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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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심장에 해로운 치명적인 남자]

각종 사이렌이라는 사이렌은 전부 다 합창하듯 한꺼번에 울려대는 지금, 이건 대체 상황일까.그야말로 무간지옥이 따로 없었다. 경신은 귀가 먹먹해 비현실적인 고요 속에 갇힌 기분이었고, 시야조차 확보되지 않아 현실인지 악몽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지만.일단 저승길을 건너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태니까 말이다.20여 미터 떨어진 곳, 태하의 차는 이미 검은 불기둥에 휩싸여 화마에 처참히 삼켜져 있었다.고개를 돌려 반대쪽 사고 현장을 보니, 수많은 구조 인력이 투입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대한민국의 위기대응 능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그 짧은 찰나에 경찰차와 구급차, 소방차들이 섬광을 내뿜으며 집결해 있었다.저 멀리 수십 미터 밖으로는 구경꾼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핸드폰을 앞세워 이 비극을 찍어대고 있었다.아까는 그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세상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지만, 이 아비규환 속에서 셔터나 눌러대는 모습에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비릿한 탄내와 함께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다른 이를 탓하는 이런 불경한 감정조차 태교에 해가 될까 싶어, 집 나간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았다.“참! 태하 씨!”경신은 미처 몰랐는데, 그는 자신 옆에 그림자처럼 딱 붙어 있었고 심지어 손까지 부서질 듯 꽉 맞잡고 있었다.손을 빼야 하나 고민할 찰나, 옆으로 누워 거칠게 가슴을 들썩이는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조차 지독하게 비현실적이고 근사했다.“다행이네요, 태하 씨. 정말 애썼어요.”경신이 떨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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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독하게 달콤한 명령]

아비규환의 무간지옥, 그야말로 ‘Hell in hell’이었다.전쟁터를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풍경이 아닐까.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평범했을 일상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그런데 그 참혹한 배경 속에서, 인간미 없이 완벽하기만 하던 태하가 옅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네왔다. 만나서 반갑다니. 이 아수라장에서 임산부에게 그런 말간 미소를 짓는 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죄가 있다면 이런 순간에도 사람을 홀리는 그 잘난 얼굴이 죄였다.이번 생엔 어떤 남자와도 엮이지 않겠다고, 돈이 궁한 꿀알바조차 걷어차려 결심했건만. 이 불쑥 치고 들어오는 반칙 같은 설렘은 경신의 심장에 무자비한 압박을 가했다.경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올려 태하의 눈을 가렸다. 그 깊고 짙은 눈동자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당황으로 일렁이는 제 눈빛을 이 오만한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오기이기도 했다.태하의 크고 단단한 손이 경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제 시야를 가린 그녀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었다.“왜?” “……부끄러워서 그래요. 보지 마세요.”사고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진실이 날아와 박히자, 경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약 그를 구하지 못해 그가 잘못되었다면, 아마 남은 평생을 죄책감이라는 가시권 속에서 헤맸을 것이다.다시 내려다본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이마 옆으로 흐르는 붉은 피조차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치명적으로 어울려서, 경신은 윽, 소리를 삼키며 다시 그의 눈을 가려버렸다.“왜.”태하가 다시 손목을 밀어내며 왼쪽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렸다. 다 알면서 묻는 저 여유가 더 분했다.“……그냥, 내 표정 들키기 싫어서요.” “솔직하네.”달달하면서도 서늘한 그의 미소에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다. ‘아가들아, 엄마 심장이 제정신이 아니라 놀랐지? 걱정 마. 절대 이 남자한테 안 홀릴 거니까.’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 경신의 호기심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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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치명적인 오해]

태하의 단호한 명령에 구조대원 여럿이 경신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경신의 외상과 골절을 살피느라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저 차 상태 좀 봐!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용하네.”“저 불덩이에서 탈출했다고? 천운이군, 천운이야!”“저기 실려 가는 여자가 그 탈출한 주인공인가 봐요!”주변의 웅성거림에 경신은 아찔해졌다. 그녀는 다급히 태하를 가리키며 외쳤다.“전 정말 괜찮아요! 이 남자부터 응급실로 데려가 주세요!”“나보다 이 여학생부터 부탁합니다!”하지만 태하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경신의 외침을 집어삼켰다. 그를 보던 대원들이 경신을 확인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어수선하게 움직였다.“여자 환자분, 진짜 심각하네요!”“학생! 정신 차려요! 어떻게 이 상태로 버틴 거야!”“세상에! 미안합니다, 학생! 우리가 늦어서 이렇게 방치되다니!”착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경신은 민망함에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저기요, 저 폭발한 차에 타고 있던 분은 이 남자고요, 전 그냥 옆을 지나다가…….”참다못한 경신이 팩트를 날리자, 그제야 대원들의 시선이 태하에게 닿았다.“아! 맙소사! 늦어서 죄송합니다! 1차 충돌 차주 분이십니까?”“네. 하지만 절 사지에서 끌어낸 건 이 여학생입니다.”태하의 뻔뻔하리만치 차분한 증언에 경신은 기가 찼다. 사고 당사자가 저렇게 어필을 해대니, 졸지에 자신은 목숨 걸고 화마에 뛰어든 세기의 의인이 되어버렸다.“충격이 상당했을 텐데 남자분도 응급실로 모시겠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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