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The Boss and His Sly Baby-Mama]: Chapter 31 - Chapter 40

47 Chapters

#31. [그 남자 앞에서는 Estúpido(바보)]

병원 응급실 복도의 디지털시계는 이미 토요일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손을 다친 경신은 세수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무력하게 의료진을 기다릴 뿐이었다.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선물은 시간이라지만, 경신에게 오늘의 시간은 유독 길고도 가혹했다. 차디찬 침상 위에서 깜빡깜빡 졸다 깨기를 반복하던 경신은 서서히 밀려오는 현실적인 통증에 몸을 떨었다.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타박상의 욱신거림과 화끈거리는 열감이 지독하게 파고들었다.“으윽···, 너무 아프네. 아이고, 힘들다···.”당장이라도 기숙사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대형 사고로 마비된 응급실에서 경신의 순례는 아직 멀어 보였다. 그때, 경신의 병상 근처 의자에 어린아이와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모자는 경신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몰골이 호환마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걸 잘 알기에, 경신은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엄마, 저 누나 무서워.”“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임산부지만 아직 스물한 살의 청춘이라 ‘누나’ 소리를 듣는 건 다행이었으나, 이어지는 대화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다.“화상을 입었나 봐. 온몸에 그을음 좀 봐라. 쯧쯧, 얼마나 아플까.”“그럼 죽어?”“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살아. 하지만 엄청 고생하겠네.”흉흉한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경신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고스란히 마음을 긁어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는데, 하마터면 삶의 궤적을 뒤트는 사건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폭풍 같은 사고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태하가 있었고,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엄마, 집에 가고 싶어. 병원 무서워.”“거봐, 너도 이제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 구슬 삼키면 큰일 난다고 엄마가 말했지?”아주머니는 가방에서 주스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스를 쭉쭉 빨아먹는 동안, 아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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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참지 않는 남자와 거래하는 밤 ]

응급실 복도, 세상 어디에도 없을 달콤한 기류를 뿜어내는 태하와 경신. 그들의 토크 타임에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사장님, 저거 봐요. 기적인가요?”“봉 실장, 이거 꿈 아니지?”태하가 사라져 한참을 헤매던 마호와 봉선규는, 뜻밖의 장소에서 경신과 ‘꽁냥’거리는 태하를 목격하고는 기염을 토했다. “둘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게 맞나 싶네요. 경신 양은 태하를 얼음처럼 대했었는데.”“말했잖아요, 사장님. 경신 양은 기억을 잃은 상태라고요.”마호는 경신이 머리를 다쳤을까 봐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그러고 보니 경신 양의 성격도 완전히 바뀌었더라고.”“어쨌든 저런 모습은 정말 놀랍네요.”과거의 태하는 무조건 일방통행으로 마음을 밀어붙였고, 경신은 그를 거부하며 멀어지려고만 했다. 마호가 보기에 둘은 늘 벼랑 끝에 선 아슬아슬한 연인 같았다. 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마주 앉아 있다니. 마호는 인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태하를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태하의 진심이 하늘에 닿았나 봐.”오직 한 여자에게만 꽂혀 있는 태하의 집요한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호는 그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랐다.기적 또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태하를 사지에서 살린 게 경신이듯, 그의 남은 인생을 구원하는 것도 결국 경신의 손에 달렸다고 마호는 확신했다.“···경신 양, 이제야 솔직해졌네.”그녀의 눈빛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태하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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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 남자가 좋아하는 치명적인 짓]

말을 주고받을수록 태하의 기묘한 페이스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기분이었다.“무, 무슨···. 그럼 당신이랑 과외든 뭐든 만날 때마다, 내가 궁금해하는 내 과거를 하나씩 알려주겠다는 거예요?”태하는 ‘빙고’라고 말하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움을 넘어 경신을 유혹하려는 듯,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형형하게 머물렀다. 이 남자는 지독하게 사악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21년의 세월을 복원해 줄 유일한 열쇠가 그뿐이라면, 경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알려줄게. 너에 대해 모든 것을, 난 알고 있으니까.”무슨 운명의 예언 같기도 한 그 말에 경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기꺼이 말려들게 될 것임을.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자신을 알아낼 기회이기는 한데.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경신의 달콤하고도 아찔한 고민이 응급실 복도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똑똑. 토요일 아침 7시의 정적을 깨고 간병인이 식사 소식을 전했다. 태하는 탁자 위를 정리하면서도 시선은 건너편 병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동그랗게 솟은 이불 뭉치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모습은 제법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간밤에 태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신이 누운 곳을 지독하게 바라보며, 머릿속을 헤집는 수만 가지 생각과 끓어오르는 갈증을 참아내느라. 숨이 막힐까 싶어 천천히 이불을 걷어내자, 신생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경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픈 꿈을 꾼다더니, 그녀의 미간에는 가느다란 주름이 잡혀 있었고 속눈썹 끝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태하는 홀린 듯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쓸어냈다. 손끝에 촉촉하고 따뜻한 수분이 닿았다. 그 손길에 반응하듯 경신이 몸을 더 웅크리며 드레싱 된 손으로 이불을 더듬었다. 안쓰러움에 이불을 다시 여며주려던 찰나,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배 위를 향했다. 그 순간, 경신의 얼굴에 맺혀 있던 어둠이 걷히며 입가에 고운 호선이 그려졌다. 지루할 틈이 없는 여자였다. 저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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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은밀한 덫에 걸린 것 같아]

JJ 엔터테인먼트.강남 한복판에 우뚝 솟은 이 유리 성(城)은 대한민국 연예계의 심장부와 같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 사장 서정우로부터의 호출은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봉선규는 사장실의 묵직한 문 앞에 서서 잠시 멈춰 섰다.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차갑게 얼어붙은 것 같아, 그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잡았다.아직 사장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서늘한 아우라에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관자놀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나와 안경테를 타고 미끄러졌다.글로벌 아이돌 그룹을 다수 보유하고, 내로라하는 톱배우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국내 굴지의 넘버원 엔터테인먼트. 이곳에 입사한 순간부터 봉선규는 업계 최고라는 자부심과 함께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왔다.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냉혹했다. 계약서에 적힌 숫자만큼, 아니 그 이상의 제 역할을 해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봉선규는 떨리는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이 문을 두드리기 전, 자신이 지난밤 내린 판단에 한 점의 오차라도 없었는지 필사적으로 되짚어 보았다.똑똑.“들어와.”결심을 마친 봉선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서정우의 낮고 매끄러운 미성(美聲)이 고요한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일찍 부르셔서 달려왔습니다.”“앉지, 봉 실장.”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하게 반듯한 이목구비에, 입가에는 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장 서정우는 오늘도 흠잡을 데 없는 차콜 그레이 슈트를 차려입고, 은은한 펄이 가미된 화이트 셔츠에 슈트와 톤을 맞춘 타이를 정교하게 매고 있었다.그는 본래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 내에서도 손가락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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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충돌, 집요함과 순수함 사이에서]

마호는 피부과 병동 환자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하와 경신을 먼발치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들고 있던 태하의 검사 결과지로 옮겨졌다.“태하 녀석, 천운이야 정말.”검사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화재 현장에서 유해가스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직후 경신이 발 빠르게 씌워준 KF94 마스크 덕분에 폐 손상이 거의 없었다. 골절이나 혈액 검사 수치도 정상을 기록했다. 경신의 기지와 헌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마호는 이 아찔한 사고가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절대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는 태하의 서슬 퍼런 엄명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눈치 레이다를 가동하던 그때,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어, 봉 실장?”-네, 사장님.“좀 쉬어. 어제 고생 많았는데 토요일까지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은 좀 릴랙스하라고.”-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게··· 사장님, 서정우 사장님이 좀 이상합니다.봉선규의 한마디에 마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정우. 이름만으로도 공기를 차갑게 얼리는 그 남자의 언급에 마호는 통화 중인 수화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왜? 무슨 일인데.”-어제 제 동선을 직접 물어보셨습니다.역시 촉이 무서운 남자였다. 아랫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거액의 연봉으로 사람의 영혼까지 묶어두는 서정우다운 행보였다.“그냥 MH에 왔었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말해도 될 것과 안 될 것을 구분했습니다. T.T.K. 사업 건은 함구하고, 듀엣곡 제안 때문에 갔다고 둘러댔습니다.“현명하네. 잘했어.”사실 태하의 배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 미국 유학 시절, 태하는 대가 없이 어려운 한국인 유학생들을 후원했다. 그 은혜를 입은 수재들은 졸업 후 자석에 이끌리듯 태하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스페인의 부모님을, 누군가는 홍콩의 형님을 보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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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아슬아슬 선을 넘기 일보직전]

오늘은 경신의 피부과 정밀 진료가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신의 미간은 좁아졌다.제 뒤를 그림자처럼 따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따라 들어오는 태하 때문이었다.“아니, 태하 씨. 처치실까지 뭐 하러 따라오는데요?” “보호자.”태하가 짧고 묵직하게 대꾸했다. ‘보호자’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듯,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경신을 응시했다. 그 단호함에 경신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어휴,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할 말이 없어진 경신은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인자한 인상에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동네 어디서나 볼 법한 할아버지 의사가 경신의 손바닥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떼어냈다.“학생, 이만하니 천만다행이야. 어때, 통증은 좀 가라앉았어?” “아, 네. 생각보다 괜찮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신경까지 다칠 뻔했어. 얼마나 뜨겁고 아팠겠어.” “사고 당시엔 놀라서 아픈 줄도 몰랐거든요.”경신은 그때를 떠올렸다. 오직 태하를 구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지배해 통각조차 마비되었던 그 순간,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불길이 치솟는 차 문을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모하고도 절박한 순간이었다.“왜 이리 무모해. 손 완전 못 쓸 뻔했잖아.” “연기 나는 차 안에 사람이 갇혀 있는데··· 죽게 놔둘 수가 없어서요.” “세상에 의인이네, 이건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해.”백발의 의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감탄했다. 경신은 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상은 무슨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런데 저 뒤에 있는 오빠는 뭐 했어? 어린 동생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갑작스러운 화살이 태하에게로 향했다. 의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하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경신이 당황하여 사고 당사자가 바로 저 사람이라고 설명하려던 찰나, 태하가 한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Ese soy yo de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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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내 인생에 이레귤러]

태하는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경신을 잠시 응시하더니, 말없이 정수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일회용 컵에 물을 담아 돌아오는 동안, 경신은 주변을 둘러보며 새삼 이곳의 풍경을 실감했다. 산부인과 대기실은 배가 부른 임산부들과 그녀들의 곁을 지키는 남편들로 가득했다.환자복 차림의 두 남녀가 등장한 순간부터 쏟아졌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태하의 압도적인 비주얼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내 경외에 가까운 집중으로 변했다.‘아이고, 아니에요. 정말 오해입니다. 이 남자는 저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고요!’경신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앞길 창창한 이 젊고 훌륭한 남자를 순식간에 유부남이자 예비 아빠로 만들어버린 상황이 미안해 고개를 푹 숙였다. 손끝이 움찔거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제 배를 살짝 문질렀다.‘아가들아, 미안해. 엄마가 죄지은 거 아니야. 너희를 책임감 있게 키우겠다고 결심했는데··· 상황이 참 이상하게 돌아가네.’일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기들을 생각해서라도 당당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태하는 그런 경신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의아한 듯 살피더니, 이내 무심하게 산부인과 내부를 훑었다.“무슨 진료지?”낮게 읊조리는 태하의 물음에 경신의 의기양양했던 기세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여성의 건강을··· 살피러 온 거예요.”태하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겠지만,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다만 경신은 이 순간, 그에게만큼은 이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진료실로 향했다.***경신의 주치의 한지원 박사는 지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배우같은 아름다운 외모에 정글의 최고 포식자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남자를 보며 숨을 집어 삼켰다.어떻게 이 어린 임산부에게 저리 대단한 남자가 따라 들어 온 것인지.그녀는 경신의 차트를 훑으며 다시 한번 다른 쪽으로 충격을 받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타인을 구하려 유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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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앙큼한 임산부의 호위 기사들]

경신은 병원이 환자의 개인정보를 이토록 철저히 지켜준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한시름 놓였다는 생각과 함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사고 당시의 복통이나 메스꺼움은 아니었지만, 극도의 긴장 상태를 견뎌온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아···.”“왜 그래?”“좀 어지러워서요.”“빈혈이라고 했지. 다른 곳은···.”태하는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은 표정이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고 경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사실 어제 이미 진료를 받았음에도 박사를 다시 만나라는 말에 혹시나 아기들에게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던 경신이었다. 하지만 한지원의 노련한 센스로 비밀은 지켜졌고, 태하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으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경신의 입가에 방실방실 미소가 번졌다.산부인과 병동에 가득한 임산부들과 남편들이 여전히 두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당당하게 복도를 걷던 경신은 문득 손목에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태하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의지가 되네.’그저 손목을 쥔 담백한 손길이었지만 그 어떤 접촉보다 든든했다. 경신은 태하의 손길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고, 태하 역시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을 벽 너머에서 뱀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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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찬란한 구속은 지금부터]

산부인과 병동을 나온 경신은 얼떨결에 태하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진료 일정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이마의 상처를 소독하는 처치실에 따라가 그가 통증을 견디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내과 검사를 받을 때는 대기석에 앉아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경신은 두 손을 배 위에 겸허히 모았다. 손바닥엔 두툼한 드레싱이 감겨 있었지만, 손가락은 멀쩡했기에 조심스레 배를 문지르며 생각을 정리했다.‘아가들아. 오늘도 한고비 넘겼다.’태하에게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다짐할수록 운명은 자꾸만 그와 그녀를 촘촘하게 엮어놓았다. 회귀한 첫날부터 그랬다. 쓰러진 그녀를 구해주고, 병원비를 내주고, 차량을 제공하고, 심지어 기억에도 없는 과외 선생 노릇까지.‘안경이랑 핸드폰을 전해주러 오다가 사고가 나서 이렇게 되어버렸네.’결국, 지금도 같은 입원실을 쓰게 되었다. 한 공간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공유하며 잠이 든다니.‘엄마의 인생은 잔혹 동화가 아닐 수 없는데 말이야.’경신이 짝사랑했던 왕자님들은 마치 저주라도 걸린 듯, 그녀보다 1년 앞서 유명을 달리했다. 자신 역시 그 저주를 풀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1년을 버티다 죽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하고 잔혹한 방법으로.복잡한 상념을 깨운 건 단정한 노크 소리였다.똑똑—.“식사 시간입니다.”태하는 간병인에게 식판만 두고 나가라 지시하더니, 어느새 경신의 침상 위 테이블을 펼쳤다. 벌써 ‘식사 놀이’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경신의 손등을 정성스레 닦아준 뒤 식판 두 개를 나란히 올렸다. 물을 떠놓고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경신과 눈을 맞췄다.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남자의 표정이 경신 앞에서만 시시각각 새롭게 갱신되고 있었다.“저기, 저 당근 싫어해요. 감자채만 주세요.” “그냥 먹어.” “백김치는 진짜 질색인데.” “입 벌려.” “국은 원래 안 먹거든요?” “아—.”이 와중에 편식을 일삼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태하의 단호한 손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건 자신인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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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은밀하게 펼쳐진 미친 전주곡]

일요일 아침.“밥.”누워 있는 경신에게 오늘도 태하는 지독하리만큼 효율적인 언어생활을 실천했다. 포근한 이불을 뺏긴 경신은 몸을 감싸던 온기가 사라지자 더는 모르는 척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의 상처도 꽤 아물었는데, 이 으리으리한 병실에 감금되어 강제로 ‘소꿉놀이’에 참여해야 한다니.‘퇴원- 퇴원-.’ 경신이 노래를 불러도 돌아오는 건 ‘안 돼- 안 돼-.’라는 태하의 단호한 거절뿐이었다.태하는 간병인에게 식사만 두고 나가라 지시하더니,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경신의 병상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가 다가오는 거리가 어제보다 한 뼘 더 가까워진 건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이 남자는 잠도 안 자는 걸까? 언제 씻었는지 그에게선 늘 싱그러운 비누 향이 풍겼다. 죄 많은 남자. 이런 친절을 함부로 베풀다간 주변 여자들 여럿 울렸을 게 분명했다.“입맛이 좀···.”“밥.”“알았어요, 태하 씨. 먹을게요. 그나저나 나 얼굴은 좀 괜찮지 않아요?”“안 괜찮아. 세수.”씨알도 안 먹혔다. ‘세수 놀이’는 더 무서운데. 어젯밤 태하는 경신의 머리까지 직접 감겨주었다. 어찌나 야무진 손길로 두피를 자극하며 드라이까지 해주던지, 경신은 그 노곤함에 취해 속수무책으로 잠에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음악 방송이라도 보려던 야심 찬 계획은 꿈나라로 직행하며 무산되었다.그래도 아름다운 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법. 안 먹어도 배부른 태하의 보배로운 얼굴을 감상하며 경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 남자는 원래 이렇게 잘 웃었나? 아니, 이건 미소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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