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1 - Chapter 10

45 Chapters

#1. 프롤로그

여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다. 현실에서도 라이신, 소설 속에서도 라이신.그토록 열광하던, 밤의 지배자이자 캔돔의 주인, 바아르 세라피르 대공 각하가 지금 라이신의 눈 앞에 나타났다.10년간 대공저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가, 하필 오늘 밤 새로 이사 온 이 비좁고 남루한 반지하 방에 짐승 같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이 밤을 나와 함께 보내자.”그는 고통에 짓이겨진 목소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0년 동안 숨죽여 살아온 일개 하인인 척 사내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제국의 정점에 선 남자가 들이닥치다니.밤을 보내자는 서슬 퍼런 선언이 내포한 야만적이고도 관능적인 의미를 깨닫는 순간, 라이신의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스쳤다.그는 자신의 성별과 존재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오직 본능만이 남은, 굶주린 짐승의 눈빛이었다.“각하, 대체 제가 뭘 했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자신은 그저 이 거대한 소설 속 세계에서 티끌 같은 엑스트라도 되지 못하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한 존재이건만.그의 갈증 어린 시선이 끈적하게 라이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시선에 닿는 살갗이 데일 듯 뜨거워졌다. 분명 대화는 나누고 있었지만, 그는 이성보다 고통과 욕망에 잠식되어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력이 몸속에서 폭주하는지, 그는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위험하고도 야릇한 기운을 뿜어냈다.바아르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라이신의 영혼까지 꿰뚫을 듯 강렬하게 박혔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끝이 옷깃을 스치듯,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맴돌았다. 낡은 하인복 옷자락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얇은 천을 지나 목덜미의 여린 살갗에 닿는 순간, 찌릿한 전류가 전신을 강타했다.“네가 날 유혹했잖아. 내가 참을 수 없도록. 이 지독한 향기로.”유혹? 누가? 자신이?지난 세월 별빛조차 허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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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짓말 같은 첫날 밤

레투니카 제국력 122년 4월 1일, 깊은 밤.우르르 쾅쾅!쩍! 쩍!하늘을 찢는 천둥소리와 함께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레투니카 제국의 캔돔 대공령, 그 험준한 파르교산의 정적을 깬 것은 자연의 노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 그리고 밤보다 짙은 흑발을 지닌 바아르 세라피르 폰 캔돔 대공이 발작 끝에 터뜨린 광폭한 오러의 잔해였다.“으윽! 헉, 헉!”발작이 시작되면 이성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굶주린 짐승의 본능이 차올랐다. 증상이 극에 달해 기억의 실타래가 끊기면 제 손으로 가신들을 도륙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서렸다. 그는 매번 스스로를 이 거친 산맥에 유폐한 채 홀로 광증의 파도를 견뎌내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통제를 잃고 날뛰며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검집에서 흘러나온 흙빛 오러가 서슬 퍼런 검날을 집어삼켰다. 번개 같은 섬광이 어둠을 가를 때마다, 수백 년을 버틴 올리타스 나무들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이미 쓰러진 거목이 수십 그루에 달했다. 파르교산이 아무리 마수가 출몰하는 험지라 한들, 지금 이 순간 가장 흉흉한 존재는 폭주하는 바아르 그 자신이었다. 그의 주위로 흙먼지와 나무 파편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바아르의 주변은 마치 거대한 지진이 휩쓸고 간 듯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검을 대지에 꽂은 그는, 파괴된 풍경을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이번만큼은 광증이 이성의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하지만 육체는 이미 한계였다.“으윽···, 돌아가야겠군.”그는 발작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흑전(黑傳)’을 대비해야 했다. 정신을 잃고 장소를 가리지 않은 채 깊은 수면에 빠져드는 그 무력한 순간이 바로 흑전이다. 만약 이곳에서 쓰러진다면, 마수의 밥이 되거나 얼어 죽을 것이 뻔했다. 말등에 겨우 몸을 기댄 채, 그는 타오르는 고통을 칼날처럼 삼켜냈다. 몸은 이미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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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하? 저를 어쩌시려고요?

대공저 반지하, 나름 성실함을 인정받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숙소.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이불이 걷히고, 짧은 금발에 푸른 눈을 빛내는 라이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헐렁한 하인복 너머로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하음-.”라이신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내뱉었다. 이사 후유증으로 온몸이 뻐근했지만,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이전 방보다는 훨씬 넓고 깨끗했다. 책상 위 달력에 시선을 고정했다. 4월 1일. 만우절 같은 오늘, 그녀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별채 지하 4층, 습기 차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던 구석진 방에서 드디어 본관 반지하로 입성한 것이다.그녀는 스무 살 청춘이었으나, 대공가에서는 소년 하인으로 통했다. 캔돔가는 연고 없는 남자아이들만 거두어 일자리를 주었기에, 10년 전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라이신은 남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가슴을 동여매고 목소리를 낮추며 소년으로 살아온 10년. 체구가 작고 선이 고운 탓에 사람들은 그녀를 고작 열일곱 정도로 보았고, 성인 판정을 받기까지는 아직 1년이 더 필요했다.조금만 더 버텨서 돈을 모으고 신분을 얻어 자유민이 되는 것. 그것이 라이신의 유일한 꿈이자 버팀목이었다. 성실함을 무기로 드디어 얻어낸 이 방은 그녀에게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책상과 옷장, 그리고 개인 욕실까지. 무엇보다 창문 밖으로 밤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었다.“무려 하늘까지 볼 수 있지.”라이신은 의자를 창가로 옮겨 그 위로 올라섰다. 창을 열자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보석처럼 박힌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그런데 그 순간, 심장이 저릿할 정도의 기묘한 떨림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쿵, 쿵, 쿵!거친 발소리가 복도를 메우더니, 라이신의 방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누구세요?”이 시간에 찾아올 이가 없는데. 라이신은 당황하여 의자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문밖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사지가 굳어버렸다. 그것은 포식자의 기운이었다.대답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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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들의 뜨거운 밤이 열리고

라이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이성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굶주린 포식자가 먹잇감을 노리는, 원초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까 봐, 그리고 이 남자에게 짓밟힐까 봐 두려워 몸을 떨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뜨거운 체온과 매혹적인 향기가 그녀의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팽팽한 긴장감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의 침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어둠이 내려앉은 바아르의 침실은 고요했으나, 그 안을 채운 공기는 금방이라도 발화할 듯 뜨겁고 농밀했다.창밖 정원의 등불이 희미한 잔상을 드리울 뿐, 짙은 어둠은 두 사람의 숨결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대공의 침소는 라이신에게 구원의 장소인 동시에, 이성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함정과도 같았다.“으윽···, 넌 이 밤을 나와 보내줘야겠다. 이건 네 탓이다.”낮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갈증과 닮아 있었다. 이성이 휘발된 붉은 눈동자는 오직 눈앞의 먹잇감만을 응시했고, 그가 내뱉는 문장마다 서린 열기는 라이신의 뺨을 화끈거리게 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선언에 라이신은 헛웃음이 났다. “···각하, 제가 뭘 어쨌는데요?”라이신은 억울함에 항변했지만, 바아르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물처럼 어루만졌다. 마력이 폭주하는 고통 속에서도 손끝만큼은 애틋하고 섬세했다. 입으로는 날 선 명령을 내뱉으면서도 몸으로는 본능적인 갈구의 기운을 흘려내는 역설. 그 위태로운 균형은 라이신의 심장을 더욱 세차게 두드렸다.“네가 유혹했잖아. 내가 참을 수 없도록. 으윽···.”창가에서 별빛을 본 것이 죄라면 죄일까. 유혹은 오히려 제국의 주인공인 그가 하고 있었다. 황위 계승권 3위의 권위와 조각 같은 미모가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라이신에게 기대올 때, 그녀의 마음속 ‘개념’은 이미 욕망에 자리를 내어주기 일보 직전이었다. 모태솔로 탈출이라는 세속적인 욕망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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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밤을 보낸 남과 여

시간이 제법 흘러,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가에 머물렀다. 라이신은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에 눈을 떴다. 알몸의 바아르가 그녀를 소중한 인형처럼 품에 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라이신은 약 10년 전, 이 소설 속 지하 창고에서 죽어가던 소녀의 몸에 빙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전생에 공군 여장교였던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설 『종말로 향해 가는 캔돔가의 대공 각하』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바아르의 비극적인 자살로 끝나는 원작을 알고 있기에, 지금 제 품에 안긴 이 남자의 평온한 얼굴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의 손은 여전히 라이신의 가슴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앞으로 이렇게 잠자리를 가지면, 발작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자살하는 결말은 바뀔 수도······.’인간을 초월한 그의 미모와 조금 전의 폭풍 같았던 정사를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잠자리가 이런 것이라면, 그동안 헛살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라이신은 으스러질 듯한 허리와 아랫도리의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 모았다. 이미 넝마가 된 셔츠를 대충 걸치고 잠든 바아르에게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각하, 나름··· 즐거웠어요. 잘 주무세요.’방을 나선 라이신을 맞이한 것은 복도를 지키던 소년 기사였다.“소년! 살아 있구나? 각하께서 저리 평온하게 주무시다니. 대단하구나!”뒤이어 집사장 할트바르트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재주가 좋구나. 진심으로 고맙다.”그들은 라이신이 여자인 줄도,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적적으로 발작을 재운 소년 하인’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명예가 지켜진 것에 안도하던 찰나, 할트바르트가 금화 한 개를 내밀었다.“자, 이거라도 받아라. 네가 고생해서 주는 거다.”그 순간, 라이신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자존심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돈이라니요!”이 돈을 받는 순간, 자신은 그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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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대가 좀 궁금한데

그로부터 며칠 뒤.라이신은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습관처럼 책상 의자를 창문 밑으로 끌어당겨 그 위로 올라섰다.좁은 창틀 너머로 비쳐드는 달빛을 보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나도 참 대단하네. 그 상황에서 잠이 오다니.”일할 때는 잡념을 털어내려 애썼지만, 홀로 숙소에 남으면 어김없이 바아르의 뜨거웠던 눈빛이 떠올랐다. 애정하던 소설 속 주인공과 꿈 같은 밤을 보냈음에도, 가슴 한구석은 시린 바람이 부는 듯 공허했다. 원작대로라면 발작 중의 일은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날 밤, 라이신의 몸을 탐하던 그의 손길은 거칠었으나 결코 무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그녀를 배려하려던 그 뜨거운 온기는 '좋았다'는 감각으로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 장면을 되새길 때마다 라이신의 뺨은 금세 화르르 타올랐다.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도, 미래를 약속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재앙 같은 발작 속에서 서로에게 불가항력으로 끌려 들어간 단발성 사고였을 뿐.“우린 그저··· 서로 그 밤을 즐긴 것뿐이야. 그래, 그거면 됐어.”하마터면 금화 1개, 전생의 가치로 따지면 무려 2천만 원에 달하는 돈으로 그 소중한 기억을 팔아치울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독립 자금이 절실한 처지였지만, 바아르와의 밤을 비천한 대가로 치환하고 싶지는 않았다.라이신이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던 그 순간, 거친 방문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의자에서 내려와 문을 열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하녀 마리가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마리? 어쩐 일이에요? 할 로드는 여기 없는데.”“응, 알아. 요즘 라이신이 몸살로 고생한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말이야.”마리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보자기에 싸인 그릇을 내밀었다. 라이신이 조심스레 보자기를 걷어내자, 훅 하고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고기 수프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와, 고기 수프잖아요! 이 귀한 걸··· 정말 고마워요, 마리.”“어서 먹고 기운 차려. 할 로드가 왔을 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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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를 잊은 당신에게

라이신은 바아르와 보낸 그날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핏빛처럼 짙은 붉은 카펫이 복도를 길게 수놓았고, 사람 키의 몇 배는 됨직한 높은 천장에는 정교한 프레스코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벽마다 걸린 거대한 초상화와 조각상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넘쳤다. 고풍스러운 장엄함이 라이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마치 소설 속 문장들이 살아서 춤을 추며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았다.상념의 늪에 빠져 있던 라이신은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시녀장 마리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기분 탓이라 치부하기엔 그녀의 시선이 지나치게 날이 서 있었다.“어째 비실비실한 것이··· 몇 분이나 버틸지 모르겠네. 쯧.”거칠게 내뱉는 그녀의 태도에 라이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매질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혹시 한스와 메리가 덩치 큰 마일을 보내지 않아 심기가 뒤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귀족 출신이 대다수인 시녀장들에게 하인의 불복종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라이신은 오늘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한스와 메리의 안위가 결정될 것임을 직감하며 어깨를 꼿꼿이 폈다.방 안의 소란스러운 대화가 잦아들자, 마리나는 지체 없이 문을 두드렸다.“대공 각하, 학습 도우미를 데려왔습니다.”잠시 후, 낮게 깔리는 근엄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라이신의 귓가에 닿았다.“들어와.”아, 이 목소리.뇌리에 깊게 박힌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라이신의 심장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문이 열리자마자 떨리는 시선으로 방 안을 살폈다. 한눈에 담기조차 벅찬 광활한 침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왼쪽에는 묵직한 오크통 색상의 테이블이, 정면에는 달빛이 쏟아질 듯한 테라스와 벨벳 소파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은밀한 드레스룸과 연결된 침실이 자리하고 있었다.‘각하와 첫날 밤을 보낸 곳이 이곳이구나.’기억 속의 공간은 어둠과 열기에 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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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심하고 야속한 대공 각하

파공성을 내지르며 채찍질보다 매서운 물푸레나무 회초리(Birch)가 라이신의 몸에 감겼다.찰싹.위잉, 찰싹.위이잉, 찰싹찰싹.살점이 터져 나가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정적을 깨부쉈지만, 라이신의 붉게 달아오른 입술 사이에서는 단 한마디의 신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매질을 휘두르는 스레기니 남작 부인과 그것을 지켜보는 미하엘 공녀가 움찔하며 그녀의 기묘한 인내심에 마른침을 삼켰다.그리고 바아르. 그는 다리를 꼰 채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고, 마치 흥미로운 실험체를 대하듯 라이신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자, 공녀님. 이제는 이 공식이 이해가 되시겠죠?”“아니, 전혀. 아까보다 더 모르겠어.”깊어지는 남작 부인의 한숨 소리만큼이나 미하엘 공녀의 해맑은 눈동자는 속절없이 반짝였다. 라이신은 고통의 감각보다 등 뒤를 집요하게 훑는 바아르의 시선이 더 소름 끼치게 부담스러웠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무심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지금 라이신이 고통을 집어삼키는 그 강인한 정신력에 노골적인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하지만 그뿐이었다. 거기엔 어떠한 연민도, 한 조각의 배려도 섞여 있지 않은 철저한 관조자의 눈빛이었다. 라이신은 대공을 다시 만난다는 희망 하나로 제 발로 이곳을 찾아온 자신을 자책했다. 바아르에게 그녀는 그저 매를 대신 맞아주는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성역의 지배자였고, 자신은 오늘 밤 엉덩이가 짓물러지도록 매를 맞아야 은화 몇 닢을 손에 쥐는 비천한 하인일 뿐이었다. 소문대로 미하엘의 학습 능력은 재앙에 가까웠고, 라이신의 이성은 진득한 욕지거리를 삼키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빌어먹을. 마일이 왔으면 벌써 거품 물고 쓰러졌겠군.’전생의 그녀는 공군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여군이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훈련과 가혹한 기합을 견뎌낸 군인 정신이 아니었다면, 벌써 이 저택 복도에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을 터였다. 공녀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가차 없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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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지.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이.라이신은 돈주머니를 오목한 구덩이에 밀어 넣고, 다시 흙을 덮고자 손끝에 미미한 힘을 실었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주변의 흙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구덩이 위로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평탄해진 바닥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 매끄러웠고, 소중한 전리품은 대지의 품속에 완벽히 감춰졌다.이곳은 터가 좋은 것일까, 아니면 이 땅 자체가 마력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라이신은 기분 좋은 전율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든 것이 숙소를 옮긴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사가 한층 더 만족스러워졌다.이전 공동 숙소에 머물 때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새벽이나 늦은 밤에 몰래 몸을 씻어야 했던 번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용 욕실이라는 호사를 누리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 이사 온 이튿날, 차가운 물에 진저리를 치다 장난 삼아 ‘물아, 따뜻해져라···.’ 하고 손을 뻗었더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지 않았던가.라이신은 오늘 새롭게 터득한 이 신비로운 권능을 즐겁게 만끽하며, 은화 한 개를 손에 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복도 통로를 수십 미터 질주하자 막다른 길이 나타났고, 그 왼쪽 모퉁이를 돌자 투박한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열 개 남짓을 밟고 올라가 작은 문을 밀어젖히자, 대공저의 광활한 정원이 마법처럼 펼쳐졌다. 달빛 아래 일렁이는 초록 잔디의 향연은 언제 보아도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장관이었다.라이신은 그림자가 짙게 깔린 담벼락을 따라 유령처럼 매끄럽게 달렸다. 담쟁이덩굴이 벽면을 집어삼킬 듯 무성하게 자라난 곳에서 발을 멈춘 그녀의 눈앞에 연병장이 나타났다. 기사들의 거친 숨결과 쇠 냄새가 배어 있는 그곳은 라이신이 이 대공저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장소이기도 했다.연병장을 가로질러 막다른 벽에 도달한 라이신은 익숙하게 담쟁이 숲 속에 숨겨진 개구멍을 찾아냈다. 몸을 낮춰 좁은 틈을 빠져나오자, 비로소 구속 없는 평평한 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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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밤의 장막이 거둬지는 순간

할 로드의 염려는 지극히 타당했고,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올곧은 진심이었다.사실 이 냉혹한 세계에서 라이신이 여자라는 비밀을 공유하는 이는 할 로드와 로드 부부뿐이었다.자신을 향한 투명한 걱정을 마주하자, 라이신은 묘한 죄책감에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스듬히 꺾었다.‘매 맞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가슴 아파하는데···. 만약 바아르 각하와 얼떨결에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비밀을 품은 자 특유의 민망함이 밀려와 라이신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할 로드, 이렇게 걱정해 주니 고맙다. 앞으론 조심할게.”여러 겹의 의미를 층층이 쌓아 올린 대답이었다. 라이신은 오직 할 로드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러나 할 로드는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는지, 날 선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어휴, 그러니까 내가 대공저를 나올 때 같이 나오자고 했잖아. 속상하게 정말··· 어떻게 매를 맞을 생각을 해?”할 로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며 말끝이 흐릿하게 젖어 들었다. 자식이 없던 로드와 앤트 부부는 4년 전 대공가에서 독립할 때, 할 로드를 양자로 삼아 함께 성문을 나섰다.라이신에게도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삶을 질색하며 단칼에 거절했었다.전생의 라이신 역시 부모 없이 자라며 친지들의 눈칫밥을 먹던 처지였다. 객식구가 늘어날 때마다 미묘하게 일그러지던 그들의 안색을 지겹도록 보아온 그녀였다.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어야 인연이 아름답게 유지되는 법. 그녀는 로드 부부와의 소중한 유대감을 결코 동정이나 부채감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할 로드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라이신의 엉덩이 쪽을 지그 바라보았다. 정신이 번쩍 든 라이신이 두 손으로 제 엉덩이를 급히 가렸다.“보지 마! 별로 안 맞았단 말이야!”“누가 뭐래? 그냥 걱정돼서 그렇지.”대답 대신 라이신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할 로드는 라이신을 제 친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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