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캔돔 대공가의 가장 지위가 높은 대공과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아름다운 남장 하인과의 아슬아슬 유쾌한 사랑이야기 표지)신드롬(레이블-인첸티드)출판사 제공
Lihat lebih banyak여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다.
현실에서도 라이신, 소설 속에서도 라이신.
그토록 열광하던, 밤의 지배자이자 캔돔의 주인, 바아르 세라피르 대공 각하가 지금 라이신의 눈 앞에 나타났다.
10년간 대공저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가, 하필 오늘 밤 새로 이사 온 이 비좁고 남루한 반지하 방에 짐승 같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밤을 나와 함께 보내자.”
그는 고통에 짓이겨진 목소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0년 동안 숨죽여 살아온 일개 하인인 척 사내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제국의 정점에 선 남자가 들이닥치다니.
밤을 보내자는 서슬 퍼런 선언이 내포한 야만적이고도 관능적인 의미를 깨닫는 순간, 라이신의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스쳤다.
그는 자신의 성별과 존재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오직 본능만이 남은, 굶주린 짐승의 눈빛이었다.
“각하, 대체 제가 뭘 했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
자신은 그저 이 거대한 소설 속 세계에서 티끌 같은 엑스트라도 되지 못하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한 존재이건만.
그의 갈증 어린 시선이 끈적하게 라이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시선에 닿는 살갗이 데일 듯 뜨거워졌다. 분명 대화는 나누고 있었지만, 그는 이성보다 고통과 욕망에 잠식되어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력이 몸속에서 폭주하는지, 그는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위험하고도 야릇한 기운을 뿜어냈다.
바아르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라이신의 영혼까지 꿰뚫을 듯 강렬하게 박혔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끝이 옷깃을 스치듯,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맴돌았다. 낡은 하인복 옷자락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얇은 천을 지나 목덜미의 여린 살갗에 닿는 순간, 찌릿한 전류가 전신을 강타했다.
“네가 날 유혹했잖아. 내가 참을 수 없도록. 이 지독한 향기로.”
유혹? 누가? 자신이?
지난 세월 별빛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지하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오늘 겨우 이사 와서 반지하 창문으로 하늘 한 조각을 훔쳐봤을 뿐인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무슨 기적의 논리란 말인가.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유혹을 하고 있는 쪽은 명백히 바아르였다.
그는 지금 천상계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거친 짐승의 가죽을 씌운 듯, 신이 강림한 것처럼 완벽하고도 위험한 얼굴을 이리 들이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핏빛으로 물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지하 세계의 왕처럼 낮고 은밀한 동굴 보이스는 귓가를 간지럽히며 라이신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심장을 터질 듯 두근거리게 했다!
황위 계승 서열 3위, 넘치는 부와 권력, 그리고 제국 제일의 미모까지 갖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지금 미천한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며 매달리고 있는 이 기막힌 상황이라니.
라이신이야말로 머릿속이 혼탁해지며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보고 싶고 궁금했고, 언제 제대로 말 한번 붙여 볼 수 있으려나 막연히 기대하긴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기는 했지만, 일이 이렇게 기승전결도 없이 급발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이라도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남자의 옷을 거칠게 찢어발기고 모태솔로 탈출을 감행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라이신에게는 아직 '개념'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아르의 단단한 어깨를 덥석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10년 간 바아르 대공 각하를 뵙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요. 저기······ 저를 원하시는 것······ 맞긴 하죠? 정신이 나가셔서, 사람을 잘 못 찾아온 건······ 아니시죠?”
설명을 주절주절 뱉었건만.
“틀리지 않았어. 이 향기는 너뿐이니까. 널 원한다. 미치도록.”
답은 똑같았다.
바아르의 목소리에 실린 묵직한 고통과 갈망이 공기처럼 스며들어 라이신의 숨통을 막히게 하였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고통으로 뒤틀리며,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이 끊어져 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그 붉은 눈이 루비처럼 번뜩이며 서서히 초점을 맞추더니, 라이신을 정면으로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잠시 라이신은 넋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이 밤은,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뒤엉키며 금지된 영역으로 거침없이 발을 들이는, 되돌릴 수 없는 밤이 되겠지?
지금이라도 그를 밀치고 이 방을 박차고 나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라이신의 두 손은 이미 바아르의 넓은 어깨를 꼭 잡아 쥐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권력을 앞세워 자신을 취할 수도 있었고, 짐승 같은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바아르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라이신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라이신은 드디어 굳은 결심을 굳히고,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절 원하신다면 뭐······. 기꺼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리 될 수밖에.
“그러고 보니···, 너 여자구나?”
윽!
경악이 목구멍을 콱 막았지만, 진실은 이미 입가에 맴돌고 있었다.
하인복 너머로 느껴지는 가늘고 부드러운 선을 숨길 수가 없었나.
그리고 그의 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체구. 자세히 들여다 보고 만져보면 숨겨지지가 않겠지.
폭주하는 감각 속에서도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성별을 깨달은 것이다.
“비밀이에요. 여자 맞네요. 각하, 우리 둘······, 오늘 처음 만났지만, 어른이니······ 못 즐길 것도 없지요. 어차피 내일이 되면 기억 못 하실 테니······.”
라이신은 결심을 마치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유혹적으로 두서없이 말을 뱉어 보았다.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 순간, 그녀의 눈빛에도 은밀한 도발이 서렸다.
“내가 여인을 안는 건 처음이라···, 좀 거칠 수도 있어.”
저리 대단한 얼굴로, 저리 흉흉하고 노골적인 말을 어쩜 저토록 우아하고 치명적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바아르 대공조차 여인을 안는 게 처음이라니.
그렇다면 이것은 가문의 영광을 넘어, 일생일대의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처음을 내가 가져간다고?
“뭐, 음흠. 저도 처음이라··· 서툴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 잘 이끌어 주셔야 할 겁니다.”
라이신은 호기롭게, 이왕 이렇게 된 거 다가올 현실을 뜨겁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녀의 도발에 바아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짐승의 갈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럼···, 시작하자.”
그의 낮고 은밀한 명령이 반지하 방의 공기를 가르자, 시간은 멈추고 두 사람만을 위한 은밀하고도 야만적인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불과 1시간 전 만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건만.
죽을 때까지 이런 날은 올거라고 예상도 못했지만, 어쨌든 시작은 되고야 말았다.
그와 자신의 뜨거운 스토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굿노벨 독자님들.드디어!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이 완결되었습니다. 이 글이 지난 봄에 시작하여 여름을 지나 가을에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단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2편씩 선보인 유일한 글이라 그만큼 제가 애정을 갖고 집필하였습니다. 바로 외전에 글을 이어 쓸까 했지만, 마리와 황태자 이야기를 좀더 깊게 구성하고... 굿노벨 독자님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이어서 구성하고 싶어 완결 인사도 조금 늦었습니다. 시즌 2인 [짐승 황태자의 집착을 받은 사연] 외전이 계약이 이뤄지면 수요일부터 서비스가 될 것 같습니다. 혹시 계약이 늦어지게 되면 다시 공지 드릴게요. 이 소설은 제가 로판 장르를 처음 도전한 작품입니다. 로판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하고 용어 및 세계관 정리를 하느라 A4한글로 45매에 이르는 설정집을 따로 구성해 놓고 집필하였습니다. 즐겁게 저만 즐기기 아까워 세상에 공개하였고, 저랑 취향이 같은 분들이 많이 읽어주셔 감사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 굿노벨 한국어 플랫폼에서는 현대 로맨스가 주력 장르라 생소하시겠지만, 그래도 즐겨주셔 감사했습니다.'라이신'이라는 한 캐릭터가 밑바닥 지하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과정이 여러분들 보시기에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라이신'을 통해서 제가 대리만족을 많이 느꼈다고 할까요. 너무 신나게 폭풍으로 영감이 떠올라 집필했습니다.글을 즐기는 사람이자, 쓰는 것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저에게는 감사한 작품이랍니다. 그리고 다른 글도 사랑해주셔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드립니다. 굿노벨에 온지 몇달 안되지만, 다양한 제 안에 이야기를 앞으로도 이곳에 다 쏟아내고 싶네요. 조금씩 제가 성장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더 좋은 소설로 굿노벨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복받으시길요~ 왜? 제가 복을 빌어 드릴거니까요^^*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다른 굿노벨 작가님들 글도 많이 즐겨주시길요. 그동안 끝까지 함께해주셔 감
“각하, 이곳은 여전히 참 아름답네요.”바아르의 따스한 손길이 닿는 순간 라이신의 전신에 아련한 전율이 흘렀다. “아니, 라이신. 당장 4월 1일에 열릴 우리 결혼식 말이야.”새로운 시작을 앞둔 라이신의 가슴은 뜨거운 설렘으로 타올랐다.그 순간 라이신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불과 며칠 전에 결혼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아득한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는데, 그날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당장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라이신이 발을 구르자 바아르는 뭘 걱정하냐는 듯 픽 웃더니, 크고 화려한 상자 하나를 마법으로 공중에 떠올렸다.“준비를 끝내놓고 키요리타로 떠나길 정말 잘했지. 자, 받거라, 라이신.” 라이신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의 드레스를 꺼내 들며 나직한 탄성을 내질렀다. 마정석 빛을 머금은 웨딩드레스는 은은하고 고귀하게 빛났고, 면사포 위의 티아라는 별빛을 흩뿌리듯 찬란하게 반짝였다.대신 드레스는 허리 부분 끈만 매지 않으면 임산부가 입어도 완벽한 형태였다.“당장 내일이라도 예식을 올릴 수 있겠지?”언제나 한발 앞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 두는 이 남자의 대단함에는 매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별채, 그리고······.”바아르가 끝도 없이 목록을 읊어대자 라이신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지만, 그저 사랑스러운 웃음만 터져 나왔다.“참으로 대단하시네요, 각하.” “매일같이 너를 이렇게 놀라게 해줄 테니까 앞으로 기대해도 좋다.”라이신은 혀를 내두르며 상자 속 물건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마정석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와 보석들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서로를 바라보며 달콤한 미소를 나누던 바로 그 순간. 전신을 관통하는 거대한 진동이 파르교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웅웅-! 웅웅-!바아르의 마도구 목걸이와 라이신의 반지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라이신의 머리 위로 고귀한 붉은 마법진이 피어올라 두 사람을 축복하듯 눈부신 마력을 일렁였다.“각하!”
“각하? 각······하?”그때 마도구 너머로 길 소르도, 레이나, 할 로드를 비롯해 라이신의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별장 거실에 생생하게 번져나갔다.[야! 지금 2월 하순이라고?][어머, 어머! 아까운 내 청춘!][잠깐만요. 그럼 그동안 캔돔가에 머물던 도르하르 제국민들은 어떻게 된 거지?][세상에나! 어쩐지 배가 좀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하고요.]시끌벅적하고 와글거리는 온기에 에스메는 환히 웃음을 터뜨렸고, 레인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섀도우와 눈빛을 나누었다.[분화구를 막고 봉인했을 뿐인데······. 아버지!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상황입니까?][실은······ 나도 눈을 떠보니 오늘이라.]에스메는 그들의 대화를 다 듣는 동안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웃음밖에 터져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섀도우가 들고 있는 마도구 앞으로 다가가 캔돔가의 선대 대공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카이우스 대공 각하. 저는 지금 죗값을 치르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는 에스메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이런, 고리타르 황제가 딸도 두었다니. 내가 기억을 잃은 탓에 황녀 전하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었소. 반갑군.]“제국은 현재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황위 계승 1순위이신 바아르 대공께서 그곳에 계셨던 탓에 황궁이 수개월째 비어 있었거든요. 하여, 카이우스 각하께 외람되나 청을 하나 올리고 싶습니다.”[······음, 청이라니.]에스메는 곁에 선 레인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생각을 가다듬은 뒤, 단단하고 단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레투니카 제국력 123년은 이제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그 파격적인 선언에 마도구 너머는 물론, 별장 안의 모두가 가만히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에스메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우스를 향해 소망을 담아 이어 나갔다.“‘캔돔 제국 1년’. 다가오는 새봄에 이 땅을 새롭게 출범시키는 것은 어떨까요?”[······캔돔 제국?]“부탁드립니다. 방황하는
섀도우는 그동안 제국의 상황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에스메에게 여러 장의 제국 소식지를 들고 찾아왔다.제국의 상황이 어수선해 섀도우의 표정은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소식지들은 하나같이 일제히 혼란에 빠진 레투니카의 엄청난 기사들을 격앙된 어조로 전하고 있었다.[키요리타 산맥, 화산 폭발의 임박 위기 극복! 마침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산맥 일대를 강타하던 연이은 대지진 정지. 캔돔가 영지에는 갑작스럽게 출현한 수천 명의 군사와 도르하르 백성들로 대혼란.][레투니카 하늘을 장엄하게 물들인 무지갯빛 오로라와 검붉은 마력 폭풍. 원인은 불명, 제국 마법학회에서 정밀 조사 착수.][레투니카 황궁은 비어 있으나 정무 대신들의 비상 체제로 국정 안정화 주력. 서열 1위 바아르 각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에스메는 만삭에 가까워져 불룩해진 배를 두 손으로 보듬으며 레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어째서 바아르 각하와 라이신 대공비는 아직까지 캔돔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 걸까요?”섀도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멀리 보이는 레투니카 상공에는 오늘도 찬란한 무지갯빛과 검붉은 마력의 잔향이 불꽃처럼 아지랑이치고 있었다.“어찌하여 이토록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신 건지······.”겨울이 깊어가도록 라이신과 바아르를 비롯해 함께 떠난 길 소르도, 레이나, 할 로드까지 단 한 명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자, 별장에 머무는 이들은 날마다 근심 속에 소식지만 뒤적이고 있었다.***다시 며칠이 흘렀다.샤를 후작가가 은밀히 관리하는 깊은 산속의 전망 좋은 별장.에스메는 레인과 함께
라이신이 방문객의 정체에 대해 의아해하던 찰나,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라이신, 나 마리나다. 문 좀 열어라.]문을 열자 시녀장 마리나가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라이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채비를 서둘러야겠구나. 오늘 네가 미하엘 공녀님의 학습 도우미가 되어 주어야겠다.”“제가요? 갑자기요?”또다시 고통을 대신 짊어지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라이신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거절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이어지는 마리나
바아르는 가슴 한구석에 얹힌 듯한 기분 나쁜 잔상을 떨쳐내지 못한 채, 결국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내일부터는 실종된 선대 대공, 카이우스 키요르 폰 캔돔을 추적하기 위한 기사단의 대규모 정찰이 시작된다. 군 수장으로서 기사단을 격려하고 전략을 점검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이었으나, 바아르는 마치 영혼의 한 조각을 어디론가 흘리고 온 듯한 기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시선은 저도 모르게 정원을 가로질러 하인 숙소로 향하는 라이신의 뒷모습에 박혔다. 보지 않으려 다짐할수록,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눈동자는 그 가냘
라이신은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가는 형국을 살폈다.자신이 바아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제물처럼 투입되는, 그렇고 그런 의미의 ‘보물’이 된 건가 싶어 등등이 서늘해졌다. 마냥 기뻐하기엔 세이바로의 눈빛에 담긴 함의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라이신은 치솟았던 눈썹을 애써 내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풉, 하하! 이 꼬마, 반응하는 것 좀 봐. 정말 귀엽네! 무슨 맹랑한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지?”길 소르도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라이신에게 다가왔다. 이윽
정적을 뚫고 날아든 서슬 퍼런 음성에 라이신은 흠칫 어깨를 떨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이 경고등을 켰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목소리를 향해 나직하게 응답했다.“대공가의 하인입니다.”연병장 한구석을 희미하게 밝히는 등불 아래로 라이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여럿 섞여 들며 정적을 소란스럽게 헤집었다. 라이신은 조아린 고개 아래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내놓을 변명을
Ulasan-ula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