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21 - Chapter 30

268 Chapters

#21. 사람 돌게 하는, 그가 남긴 흔적

라이신은 바아르와 보낸 시간의 무게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폭풍 같은 정사가 휩쓸고 간 자리,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었다. 곁에 누운 바아르는 지옥 같던 발작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른 숨을 내뱉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으윽. 또 나를 이리도 꼭 끌어안고 주무시네.”그는 잠결에도 라이신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육중하고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커다란 손은 여전히 라이신의 가슴을 소유하듯 거머쥐고 있었고, 길고 탄탄한 다리는 그녀의 하체를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다.라이신은 허무하면서도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기에 젖어 붉게 타오르던 눈동자는 감겨 있었고, 성난 파도 같던 심장 소리는 이제 규칙적이고 평온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마치 아이처럼 순수해 보여 라이신은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감은 그 눈이 떠지면······ 다시 차가운 이성을 가진 원래의 각하로 돌아오시겠지.”라이신은 손을 올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한참을 그 평화로운 얼굴을 눈에 담던 그녀는 침실을 떠나기 위해 무거운 몸을 돌렸다. 허리는 끊어질 듯 뻐근했고, 허벅지 안쪽은 쓸리고 아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새삼 혀가 내둘러졌다.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붕대를 집어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가슴에 천천히 붕대를 감으며 라이신은 생각했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다정하려 애쓰긴 했지만, 바아르는 본질적으로 거친 포식자였다. 그 짐승 같은 욕망을 온몸으로 받아낸 라이신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붕대를 꼼꼼히 여미고 하인의 복색을 갖춰 입은 라이신은,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바아르를 돌아보았다. 그와 나누었던 뜨겁고도 절박했던 대화들이 귓가를 맴돌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언젠가 바아르가 또다시 발작하게 되면 그때는 이 밤을 기억할 것일 터.인생에 묘한 기대가 하나 생겨 라이신은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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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침실에 남겨진 달뜬 온기

“이곳은 대공가입니다. 저는 약속대로 감옥으로 가겠습니다.”라이신의 차분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상을 요구하거나 살려달라 애걸하지 않는 그녀의 초연한 태도에 가신들은 경악한 채 굳어버렸다. 어차피 바아르가 깨어나면 이 밤의 진실은 드러날 터였다. 구태여 입 아프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었다.라이신은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리더, 길 소르도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경계심과 안도감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생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의 자리까지 올랐던 라이신은 잘 알고 있었다. 리더의 망설임은 아랫사람들을 지치게 할 뿐이라는 것을.“일단, 모두 진정해. 사실만 놓고 보자면 이 아이가 바아르의 발작을 잠재운 건 확실해. 내 눈으로 보았고, 대공가의 가신들을 사지에서 구한 것도 맞다. 그건 인정해. 하지만······.”길 소르도는 한숨을 내쉬며 라이신을 집요하게 훑었다. 의심과 감탄이 뒤섞인 복잡한 눈초리였다. 라이신은 자신을 범죄자 취급했던 이들에게 서운함이 일었으나, 냉철함을 잃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대공 각하께서 일어나시면 그때 처분받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모두 가서 쉬어야 내일을 기약하지 않겠습니까?”야무지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발언에 길 소르도는 입을 떡 벌린 채 옆에 선 에밋을 보았다. 에밋 역시 그녀의 냉철한 판단력에 놀란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길 소르도는 모두의 충혈된 눈을 확인하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와, 우리 귀염이는 나중에 참모를 해도 되겠어. 그래, 일단 지하로 가자. 이곳의 법은 바아르니까, 처분도 그놈에게 맡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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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기억하지 못하는 육체의 갈증

다음 날, 창가의 햇살이 자비 없이 쏟아져 길 소르도의 얼굴을 적셨다. 인상을 찌푸리며 비몽사몽 잠을 청하던 그를 깨운 건,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였다.“어머, 길 소르도 공작 각하. 설마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정말 무례하시군요.”길 소르도는 천천히 눈을 떠 제 앞에 선 금발의 숙녀를 바라보았다. “아······ 미하엘 공녀.”부드러운 햇살을 머금은 미하엘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으로 산란했고, 호수 같은 파란 눈동자는 화려한 드레스와 어우러져 눈이 시릴 만큼 반짝였다. 길 소르도는 찌근거리는 관자를 짚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는 이미 정돈되어 있었고, 그 주인이던 바아르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수십 개나 되는 귀빈실을 놔두고 왜 굳이 오라버니 방 소파에서 자고 계시는 거예요?”한심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미하엘을 향해, 길 소르도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아침부터 미모를 갱신한 나의 아리따운 레이디가 잠을 깨워주니, 이거 영광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됐어요, 말 돌리지 마세요. 제발 체통 좀 지켜주세요.”미하엘이 어제의 폭풍 같은 밤을 전혀 모르는 눈치이자, 길 소르도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캔돔 가문은 제국 황위 계승권을 갖고 있고 바아르의 서열도 무려 3위다. 대공의 약점이 밖으로 새 나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능청스럽게 말을 맞췄다.“내가 여기 딱 붙어 있어야 그대의 고집불통 오라버니를 악몽에서 건져 올릴 것 아닙니까? 나 아니면 누가 저 괴물을 감당하겠어요.”길 소르도의 달변에 미하엘은 금세 안쓰러운 눈으로 그가 누웠던 소파를 훑었다. 이불도 없이 망토 하나에 의지해 밤을 지샌 흔적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우리 오라버니가 뭐 몸이 안 좋으신 건 사실이라 챙겨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체 높으신 분이 이 꼴로 주무시다니, 아랫사람들 보기 민망하네요. 얼른 준비하고 응접실로 오세요. 생일 파티하셔야죠.”미하엘은 붉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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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본능이 마주한 숨결

바아르는 미간을 깊게 좁힌 채로 박차를 가해 거칠게 말을 몰았다. 길 소르도는 뒤처진 채 천천히 가라고 소리쳤지만, 바아르의 귀에는 그 어떤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요동치는 심장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왜 자꾸 녀석이 요즘 자꾸 거론되는 걸까.’몇 년 전, 레투니카 제국의 귀족들은 황가가 주시하는 캔돔 대공가의 비극을 보며 입을 모아 수군거렸었다. 바아르의 어머니가 도른에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아버지마저 실종된 사건.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추측하기로는 도르하르 출신의 흑마법사 첩자가 대공저에 침투했다는 것이 소문이었다.그동안 바아르는 대공가를 완벽하게 다스리며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오리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왔다. 그리고 마지막 마력의 흔적이 머물렀던 키요리타 산맥만 매년 수색한 그였다.그렇기에 라이신에게 티끌 같은 의심도 품고 싶지 않았던 그의 마음은 지독하게 조급했다. 지금까지 제 눈으로 직접 보아온 라이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의심과 연결되지 않아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어지럽혔다.바아르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달리며 뒤를 돌아 길 소르도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 소르도는 허겁지겁 그를 따라오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길, 서둘러.”길 소르도 역시 머릿속이 복잡한 듯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다 바아르와 눈이 마주치자 결심을 굳힌 듯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저기, 바아르. 이건 별개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발작 말이야.”그 말을 듣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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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오만한 대공의 폭발한 호기심

바아르는 먼저 방부터 천천히 둘러보았다. 덩치가 큰 자신과 길 소르도가 들어서자마자 공간은 이미 숨이 막힐 듯 좁게 느껴졌다. 작은 침대와 낡은 책상, 그리고 사람 하나가 겨우 몸을 들일 법한 욕실이 전부인 이 보잘것없는 공간은 살펴볼 것도 없이 초라했다. 그때, 길 소르도가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바아르를 향해 감탄을 뱉었다.“바아르, 여기만 되게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아? 지하 감옥이랑은 정말 천지 차이네?”길 소르도가 편하게 말을 붙여오자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라이신은 말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건넸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어요. 그래서 전 여기가 좋아요. 예전에는 창이 하나도 없어 너무 갑갑했거든요.”“그래? 별채 지하에서만 10년을 살았다고 했지? 정말 답답했겠네.”길 소르도는 라이신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는지 자리를 옮겨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라이신은 환하게 웃으며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침대와 책상 사이에 서서 말을 이었다. “귀한 분들이 계시기에는 너무 좁아 권할 자리가 없네요. 책상 의자 하나와 침대밖에 없어서······ 편한 곳에 앉으세요.”바아르는 라이신의 그 말에 우선 침대부터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기운이 풀풀 풍겨 나와, 그저 무방비하게 눕고 싶다는 발칙하고 위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책상으로 향했다. ‘몇 번을 만나는 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지? 분명 남다른 기운이라고는 느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바아르는 책상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으려다, 그 위에 펼쳐진 책 한 권에 시선이 꽂혔다. 그는 홀린 듯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책장에는 책이 두 권 더 꽂혀 있었다. 하인이 글을 읽는다는 것도 경악스러운데, 읽고 있는 책조차 모두 기사에 관한 것이라니. 어서 이 아이의 정체를 알아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어, 바아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제 맨손으로 메탈 크로우의 깃털을 모았다고?”“네.”길 소르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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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벗겨서 탐하고 싶게

라이신은 바아르와 이 좁은 방에 단둘이 남게 되자, 심장이 간질거리는 생경한 설렘에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지금은 차갑고 무심한 대공 각하일 뿐이야. 상식선에서 대답하자.’라이신이 애써 평정심을 찾으며 그를 응시하자, 바아르는 이제 방해꾼은 없으니 어서 입을 열어보라는 듯 고압적인 침묵으로 그녀를 압박했다.“말해.”“저, 사실······ 돈을 좀 숨겨두었거든요.”“돈?”바아르가 황당하다는 듯 한 걸음 다가오며 반문했다. 라이신은 정말 은밀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까치발을 들고 바아르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보여드리기 좀 곤란했어요.”바아르의 귓가에 라이신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순간, 귓바퀴를 타고 내려온 전율이 전신을 훑었고 솜털이 모조리 일어날 만큼 감각이 예리하게 곤두섰다. “계속 설명해 봐.”“전 바아르 대공 각하를 만난 덕분에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그전에는 이런 건 할 줄 몰랐거든요.”라이신은 돌연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침대 밑, 볼록하게 솟은 흙에 손을 얹자 마법처럼 흙더미가 옆으로 흩어지며 숨겨진 가죽 주머니가 정체를 드러냈다.“여기에 이렇게 은화를 숨겨 놓았어요.”“이게 비밀이라고?”“그전에는 손가락으로 흙을 파냈어야 했어요. 그런데 각하를 뵙고 난 뒤부터 이런 능력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죠.”바아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조그맣고 귀여운 흙더미가 라이신의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더 해봐.”라이신은 숙소 한가운데로 가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손 하나 대지 않고 바닥을 오목하게 파냈다가, 다시 흙을 돋우어 봉긋하게 올리는 기묘한 유희를 선보였다.“매를 맞고 받은 소중한 돈을 어디 숨길까 고민하다가 발견한 능력이에요.”천진난만한 라이신의 표정과 손길 하나에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흙을 지켜보던 바아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흙을 다루는 마나를 지니고 있군.”“마나가 뭔데요?”“마력의 근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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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나에게만 뜨겁게 다정한 대공 각하

바아르는 지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라이신의 순수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이건 경고였고, 명령이었다. “네? 각하, 전 뭘 조심해야 하나요.”라이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자, 바아르의 아랫배 근처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며 울렁거렸다.지금 이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존재가 바로 눈앞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벗겨서 탐하거나 트집을 잡아 거칠게 몰아붙여 침실로 끌고 갈 뻔한 흉흉한 욕망을 애써 눌렀다.바아르는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뜨거운 열기를 간신히 삼켜냈다.“나를 조심하라는 소리다.”예상치 못한 서늘하고도 묵직한 경고에 라이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문 채 바아르를 응시할 뿐이었다.사실 조금 전, 라이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머금었을 때 느껴진 그 보드라운 살결과 비릿한 피의 감촉은 바아르에게 지독한 자극이었다. 혀끝에 닿았던 감미로운 맛이 전신을 관통하자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반응하며 터질 듯 팽창했다. 머릿속을 하얗게 채우기 시작한 묘한 기운은 얼굴을 지나 온몸의 말초신경까지 짜릿하게 퍼져 나갔고, 바아르는 생전 처음 겪는 이 황홀한 통제 불능 상태에 황당해 미칠 지경이었다.[바아르! 바아르! 잠시 문 좀 열어 봐!]고요한 밀실의 텐션을 깨뜨리는 길 소르도의 외침이 들려왔다.“······대공 각하? 길 소르도 공작 각하께서······ 부르시네요.”“호들갑은.”바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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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달빛 아래 맺어진 비밀스러운 만남

밤은 깊었으나 대공저는 잠들지 않았다. 곳곳에 밝혀진 화려한 등불이 성벽을 타고 흘러내려, 평소보다 한층 고양된 축제 같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연병장에 들어선 라이신은 밤공기의 서늘함에 몸을 잘게 떨면서도, 한스가 일러준 배려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그녀는 탁 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신만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려한 정원으로 나갔더라면 낯선 손님들이나 예민한 기사들의 시선에 얽매여 불편했을 텐데, 이곳은 오로지 고요한 밤의 정취만이 가득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주머니에서 옥수수빵을 꺼내 정성스레 싸인 종이를 벗겨내자, 고소한 향기와 함께 이 빵을 구워준 친구 할 로드의 얼굴이 떠올라 라이신의 입가엔 절로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녀석은 별일 없겠지?”무심코 던진 안부와 함께 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찰나였다. 등 뒤에서 아주 미세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고요한 밤의 침묵을 깼다.수많은 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길 소르도 특유의 요란함도 아니었고,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바아르의 묵직한 기운도 아니었다. 라이신은 고개를 쭉 빼고 기척이 들려온 정원 쪽을 살피다 그만 숨을 들이켰다.어둠을 가르고 한 젊은 여성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캔돔 가문의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소박한 옷차림에 하녀인가 싶었으나,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기묘한 장치가 라이신의 시선을 붙들었다.“휠체어······? 아픈 사람인가?”나무 바퀴가 달린 투박한 의자를 홀로 밀며 나타난 그녀는 위태로우면서도 강인해 보였다. 이 세계에도 그런 보조장치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라이신은 힘겹게 바퀴를 굴리는 그녀의 가냘픈 팔동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다가갈까, 말까. 찰나의 고민이 스쳤으나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녀를 외면하기엔 라이신의 심성이 너무도 고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안녕하세요. 전 대공저에 사는 라이신이라고 해요.”가까이서 마주한 여성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앳되고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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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름다운 빌런 등장

라이신은 에스를 살피니, 부끄러운지 눈도 맞추지 못한 채 그녀 역시 빵을 아주 작게 뜯어 입에 넣고 있었다. 마치 상처 입은 작은 초식동물이 먹이를 먹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위태로운 몸짓이었다.에스의 겉모습은 열일곱, 혹은 열여덟 정도 되었을까. 몸이 불편해 움츠러들어 그런지 유독 가녀리게 보였다. 붉은 머리칼과 초록 눈동자라는 화려한 미모를 지녔음에도 성격은 한없이 의기소침하고 내성적인 그녀를 보며 라이신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친절하게 대하니 금방 마음을 여는 밝은 성격 같은데, 저 몸으로 하녀 생활을 해야 한다면 앞날이 얼마나 고단할까.라이신의 연민 어린 시선이 닿자, 에스는 다시금 억눌러왔던 속내를 조심스레 털어놓기 시작했다.“오빠가 한 명 있어요. 하지만 너무······ 무서운 사람이에요. 아버지도 괴팍하셔서 가끔 절 때리기도 하시고······ 하나 있는 친구도 쌀쌀맞아요. 전 살면서······ 다정한 남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만······.”쭈뼛거리면서도 라이신을 향해 필사적으로 자신의 진심을 쏟아내는 에스의 모습에 라이신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가정 학대의 그늘 아래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문득 등불 아래 드러난 에스의 가느다란 손목을 본 라이신은 경악했다. 누군가 강하게 쥐어짠 듯 선명한 피멍이 들어 있었고, 귓불 근처에도 날카로운 상처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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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 거슬리게 굴다니.

아처린은 먹잇감을 구석으로 모는 맹수처럼 느릿하고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미하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공기는 희박해졌고 목이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에 제대로 숨을 내뱉지 못했다.“다른 레이디들은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리도 초대장을 보내던데······.”돌연 아처린의 긴 팔이 미하엘의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어머!”비명은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짓눌려 부서졌다. 아처린은 풍만한 미하엘의 가슴이 제 제복에 짓이기듯 밀착되도록 강하게 끌어당겼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턱 끝을 느릿하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들어 올렸다. 강제로 시선을 맞춘 그의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일렁였다.“미하엘 공녀는 이리 정숙하게 구니, 오히려 뜨겁게 굴고 싶군.”아처린은 미하엘의 몸을 더욱 거세게 제 쪽으로 밀어붙였다.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남자의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근육의 감촉에 미하엘의 사고가 마비될 지경이었다.“······황태자 전하······, 전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몸입니다.”필사적인 항변이었으나, 아처린의 서늘한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허리를 감아쥔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골반을 제 쪽으로 바짝 붙이며 낮게 읊조릴 뿐이었다.“앙큼한 레이디군. 뭘 상상했나 보지?”아처린은 천사 같은 얼굴로 잔인하게 웃었다.“너무······ 제게······ 무례하게 굴지 말아 주세요.”미하엘의 떨리는 목소리에 아처린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눈동자에서 도톰한 입술을 지나, 하얗게 질린 목덜미에 머물렀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시선이었다.“무례한 건 시작도 안 했는데.”그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미하엘은 부끄러움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아처린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훑으며 목덜미를 감싸더니 환하게 미소까지 지었다.“나의 레이디를 지도한 가문을 멸해야겠군.” “네? 그 무슨······.” “감히 황족을 거부하려 하니 말이야. ”화가 날수록 입꼬리를 높여 눈부시게 웃는 버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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