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11 - Chapter 20

46 Chapters

#11. 정적을 깨는 화려한 침입자

정적을 뚫고 날아든 서슬 퍼런 음성에 라이신은 흠칫 어깨를 떨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이 경고등을 켰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목소리를 향해 나직하게 응답했다.“대공가의 하인입니다.”연병장 한구석을 희미하게 밝히는 등불 아래로 라이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여럿 섞여 들며 정적을 소란스럽게 헤집었다. 라이신은 조아린 고개 아래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내놓을 변명을 머릿속으로 분주히 골라냈다.“하하! 그 소년이었구나? 이거 정말 반갑네!”예상치 못한 쾌활한 웃음소리에 라이신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바아르 대공이 발작하던 처참한 밤, 안면을 텄던 소년 기사가 서 있었다.“···아, 기사님?”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소년 기사가 성큼 라이신의 앞으로 다가왔고, 그 뒤를 이어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런데 그 무리의 중심에서 유독 이질적인 광채를 내뿜는 인물이 시야에 박혔다. 번듯한 귀족복 위에 짙은 초록색 망토를 두르고, 허리춤에는 보석이 박힌 화려한 검을 찬 남자. 큰 키와 우아한 골격을 지닌 그는 초록빛 머리카락을 밤바람에 흩날리며 라이신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초록색 망토? 윽! 대공 각하의 친구시잖아?’대공가의 문장과는 확연히 다른, 황금빛 태양이 수놓아진 문양. 그것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귀한 혈통을 의미했다. 소설을 당연히 꿰고 있는 라이신이었다. 바아르의 딱 하나뿐인 지기지우가 여기에 왜?라이신은 본능적으로 높은 분 앞이니 다시 고개를 깊게 숙이며 예를 갖췄다. 소년 기사는 그 귀족을 정중히 인도하며 라이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길 소르도 공작 각하. 제가 잘 아는 하인입니다.”“그래?”길 소르도라 불린 남자는 숨결이 닿을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순간, 기분 좋은 향기가 폭풍처럼 라이신의 감각을 휘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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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빛 속에서 얽힌 시선

라이신은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가는 형국을 살폈다.자신이 바아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제물처럼 투입되는, 그렇고 그런 의미의 ‘보물’이 된 건가 싶어 등등이 서늘해졌다. 마냥 기뻐하기엔 세이바로의 눈빛에 담긴 함의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라이신은 치솟았던 눈썹을 애써 내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풉, 하하! 이 꼬마, 반응하는 것 좀 봐. 정말 귀엽네! 무슨 맹랑한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지?”길 소르도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라이신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듯 가까이 들이밀었다. 코끝이 스칠 듯한 거리에서, 남자의 농밀한 체향이 라이신의 감각을 다시금 어지럽혔다.“너, 몇 살이야?”“확실치는 않으나··· 열일곱 정도 된 것 같습니다.”“열일곱이라기엔 너무 가냘픈데. 제 나이조차 모르는 걸 보니 부모가 없나 보구나? 그런데 말이야, 너 여기서 지금 무얼 하고 있었지?”순식간이었다. 길 소르도의 나긋하던 분위기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변한 것은. 다정함을 가장했던 말투에는 이제 상대를 꿰뚫어 보려는 날카로운 칼날이 실려 있었다.“기사도 아닌 하찮은 것이 이 늦은 밤, 연병장에서 무얼 꾸미고 있었느냐고 묻는 거다. 대답해.”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장난기를 지우고 포식자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길은 없었으나, 라이신은 죄지은 것이 없었기에 당당히 어깨를 펴고 입을 열었다.“공작 각하. 저는 단지··· 이곳에서 별을 보며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빵?”라이신은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뭉치를 조심스레 열어 보였다. 아직 온기가 남은 소박한 빵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따뜻한 빵이 생겨서··· 식기 전에 혼자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 길 소르도는 굳혔던 얼굴을 무너뜨리며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풉! 하하하! 혼자 먹으려고? 따뜻한 빵이 식을까 봐? 하하하!”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숨도 쉬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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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심장을 두드리는 존재

바아르는 가슴 한구석에 얹힌 듯한 기분 나쁜 잔상을 떨쳐내지 못한 채, 결국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내일부터는 실종된 선대 대공, 카이우스 키요르 폰 캔돔을 추적하기 위한 기사단의 대규모 정찰이 시작된다. 군 수장으로서 기사단을 격려하고 전략을 점검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이었으나, 바아르는 마치 영혼의 한 조각을 어디론가 흘리고 온 듯한 기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시선은 저도 모르게 정원을 가로질러 하인 숙소로 향하는 라이신의 뒷모습에 박혔다. 보지 않으려 다짐할수록,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눈동자는 그 가냘픈 선을 집요하게 쫓았다.“바아르, 왜 그래? 넋이라도 나간 표정인데.”“아무것도 아니다.”“저 아이 보고 있었구나?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니까. 저 반듯하고 우아한 걸음걸이 좀 봐. 일개 하인치고는 지나치게 절도가 넘치지 않아?”길 소르도의 찬사에 바아르는 부정하지 못한 채 턱 끝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멀어져 가는 라이신의 움직임은 투박한 하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등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지면을 밟는 그 걸음은,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고결한 기사의 기개마저 느껴질 만큼 당당했다.여태껏 단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최근 '매 맞는 아이'로 제 앞에 불려 왔을 때부터, 그녀가 풍기는 기운은 낯설면서도 지독하게 익숙했다. 마치 잊고 있었던 본능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자극처럼.“거봐, 너도 눈길을 못 거두잖아. 저 하인, 정말 내 취향이야. 바아르, 나 주면 안 돼? 아니면 혹시··· 네가 이미 ‘다른 의미’로 점찍어둔 건가?”“길, 죽음의 신 하데스와 독대하고 싶은 모양이지? 농담이 지나치군.”“야! 너야말로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내가 없으면 네 발작은 누가 잠재우고, 하데스 문턱에서 누가 널 끌어오는데! 하인 하나 가지고 인색하게 굴기는···.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거 아냐.”바아르는 자신의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인지, 아니면 차갑게 긴장시키는 것인지 알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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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당신과 나 사이, 기묘한 경계선에서

라이신이 방문객의 정체에 대해 의아해하던 찰나,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라이신, 나 마리나다. 문 좀 열어라.]문을 열자 시녀장 마리나가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라이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채비를 서둘러야겠구나. 오늘 네가 미하엘 공녀님의 학습 도우미가 되어 주어야겠다.”“제가요? 갑자기요?”또다시 고통을 대신 짊어지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라이신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거절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이어지는 마리나의 말에 라이신은 숨을 멈췄다.“바아르 대공 각하께서 직접 너를 지목하여 데려오라 하셨다.”“······각하께서요?”라이신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엇을 잘못 들었나 싶어 갸우뚱거렸지만, 마리나는 확신에 찬 고갯짓과 함께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어서 가자. 각하를 기다리게 해서 좋을 것 없다.”'바아르'라는 이름이 나오자 라이신의 심장이 묘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는 그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왜 자신을 데리고 오라고 했는지. 라이신은 헛된 기대감을 쳐내기 위해 차갑게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기왕 매 맞는 김에 은화나 두둑이 벌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찰싹! 찰싹! 찰싹!서늘한 공기를 가르는 회초리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미하엘과 남작 부인 사이에 선 라이신의 엉덩이 위로 매질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보통의 '매 맞는 아이'들이라면 고통에 울부짖으며 실려 나갔을 강도가 아닐까.하지만 라이신은 단 한 번의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그 의연한 모습에 가장 당황한 것은 바아르였다. 그는 평소 앉던 창가 소파가 아닌, 미하엘과 같은 책상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펼쳐두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라이신의 가느다란 몸선에 고정되어 있었다.‘고통에 무감한 것인지. 인내심 하나는 기사 못지않군.’바아르는 길 소르도의 말이 옳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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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검은 날개 아래의 속삭임

창밖의 풍경이 일순간 기괴한 생동감으로 일렁였다. 수십 마리의 메탈 크로우가 검은 비구름처럼 정원 위를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그 불길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라이신의 눈동자가 찰나의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어차피 이 방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건 나니까. 창문 닫는 허드렛일 정도는 나서도 되겠지.’라이신은 성큼성큼 걸어가 열린 창틀을 잡았다. 저택을 포위하듯 맴도는 녀석들의 날갯짓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의 움직임이 화려해 나직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산에서 살아남는 법』에서 읽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포악하고 호전적이며, 철저한 위계질서를 가진 영악한 존재라고. 특히 마력이 없는 자가 접촉하면 그 기운에 몸을 상한다는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나는 비록 미약하지만 물과 흙을 다루는 마력이 있으니, 스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이신은 침착하게 유리문을 닫고는, 투명한 벽 너머로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메탈 크로우들을 눈에 담았다. 그때, 등 뒤에서 스레기니 남작 부인의 날카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대공 각하, 공녀님···. 저,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저 흉측한 짐승들이 너무도 두렵군요.”기품을 내던진 남작 부인의 겁에 질린 고백에 모두의 시선이 의아하게 쏠렸다. 그러나 공부라면 질색을 하던 미하엘에게는 그보다 더한 복음이 없었다. 공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희로 밝아졌다.“부인, 어서 가세요. 오라버니, 저도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요.”“알았다.”바아르가 묵직한 고갯짓으로 허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와, 메탈 크로우를 빤히 응시하던 라이신의 옆에 나란히 섰다.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바아르의 체향이 훅 끼쳐왔다. 라이신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감정을 거세한 듯한 바아르의 이성적인 옆얼굴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군주의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너는 저것들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네. 각하···. 네. 전 오히려 보기 좋은걸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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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금지된 전리품과 엇갈린 시선

라이신은 예전에 할 로드가 지나가는 말로 일러준 적이 있었기에 심란한 마음을 뒤로한 채 몸을 움직였다.메탈 크로우의 깃털을 시장에 내다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보를 상기하며 잔디 위에 떨어진 반짝임들을 마구 주워 담기 시작했다.자유롭게 하늘을 유영하며 거친 날갯짓을 퍼붓는 저 검은 존재들은, 그 위세만큼이나 많은 흔적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라이신은 정원 구석구석을 돌고, 저택의 은밀한 담벼락 안쪽까지 샅샅이 뒤지며 깃털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채웠다. 대공저를 한참 걷다 보니 어느덧 그녀가 즐겨 찾는 연병장 조회대가 보였다.여전히 메탈 크로우는 대공저의 하늘을 비린내 나는 검은빛으로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라이신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턱을 괴었다.“알고 보면 결국 까마귀일 뿐일 텐데.”하늘을 향해 내뱉은 혼잣말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전생의 기억 속 까마귀는 영리한 거리의 청소부이자 농작물의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였다. 똑똑해서 인간의 얼굴을 기억하고, 은혜나 원수를 잊지 않는다는 그 영특한 생물. 이 세계의 메탈 크로우 역시 그러할까 싶어 라이신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려 보았다.노동 뒤에 찾아오는 허기는 정직했다. 라이신은 조회대 밑 평평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갑게 보관해 둔 감자의 종이를 조심스레 벗겨냈다.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감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자, 환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짭조름한 베이컨을 곁들여 씹으며 시원한 얼음물을 들이켜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풍경도 좋고, 맛도 좋고.”평소라면 기사들의 거친 기합 소리로 가득했을 연병장은 원정 정찰 때문인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봄볕의 나른함 속에서 감자를 오물거리던 그때, 불현듯 짙은 인기척이 등 뒤를 엄습했다.이 대공저에서 자신보다 낮은 이는 없었기에, 라이신은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가오는 인물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목이 메어 쿨럭거리고 말았다.“윽! 저분은······ 길 소르도 공작 각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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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의 짐승이시여! 제발!

이때 들고 있던 바구니가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포슬포슬했던 감자와 베이컨, 시원한 기운을 머금었던 가죽 물주머니, 그리고 문제의 메탈 크로우 깃털들이 먼지 섞인 흙바닥 위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다.“제게 왜 이러십니까!”라이신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건장한 기사들에게 붙들린 가느다란 팔이 으스러질 듯 비틀렸다. 그러나 길 소르도는 대답 대신, 바닥에 흩어진 깃털들을 넋이 나간 눈으로 응시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침묵하는 공작을 대신해 명령을 내린 것은 그의 보좌관, 에밋이었다.“자! 당장 이 녀석을 대공 저택 지하 5층 감옥으로 처넣어라!”“······ 네? 감옥이라고요?”황당함을 넘어선 공포가 밀려왔다. 라이신은 오늘부로 자신의 운수가 완전히 바닥났음을 직감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까악! 까악!을씨년스러운 메탈 크로우의 울음소리가 대공저의 하늘을 비린내 나게 뒤덮었다. 에밋의 서슬 퍼런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라이신을 압박했다.“당장 포박해! 한 치의 틈도 주지 말고 끌어내라!”“말씀 좀 해보십시오!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라이신은 굴욕적으로 꺾인 팔의 통증을 견디며 소리쳤다. 하지만 길 소르도의 얼굴에서는 늘 보던 그 능글맞은 여유가 증발해 있었다. 그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을 마주한 듯 멍한 표정으로 읊조렸다.“귀염아, 세상에 이럴 수가······. 대체 네 정체가 뭐야?”“······전 그저 각하의 저택 지하실에 사는 하인, 라이신일 뿐입니다.”정체가 뭐냐니. 여자인 것을 들킨 걸까, 아니면 이 깃털을 주운 게 대공의 소유물을 훔친 절도죄라도 되는 걸까. 바아르가 곧 법인 이 대공저에서 자신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라이신을 절망케 했다. 에밋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기사들을 독려했다.“일단 지하 깊숙이 처넣어! 이 해괴한 사실을 바아르 대공 각하께도 당장 보고드려야겠다!”평소라면 에밋을 제지했을 길 소르도마저 입을 다물고 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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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몸을 바쳐서라도, 그대에게

웅크리고 있던 라이신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바아르 대공의 발작. 그것은 곧 제어할 수 없는 마력이 육신을 갉아먹는 처참한 고통의 시작을 의미했다. 누군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그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채 굶주린 맹수처럼 날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지하 감옥의 서늘한 복도 끝에서 집사 할트바르트와 소년 기사 세이바로, 그리고 낯선 기사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포션을 주입했는데도 진정이 안 된다는 건가? 어이, 세이바로 경! 바아르의 상태가 정녕 그 정도로 심각한가?”길 소르도가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네! 이미 고농축 포션을 두 병이나 비우셨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 아이가 왜 여기 갇혀 있는 겁니까?”“세상에······ 도대체 어디 있나 했더니, 녀석이 왜 이런 곳에!”세이바로와 할트바르트가 라이신을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라이신은 차가운 쇠창살을 움켜쥐며 그들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세이바로 님! 할트바르트 님! 제발 저를 바아르 각하께 보내 주세요!”라이신의 돌발적인 외침에 길 소르도와 에밋을 비롯한 기사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너? 네가 가서 무엇을 하겠다고······.”“귀염아, 지금의 바아르는 제정신이 아니야. 널 지켜줄 여력 따위는 없단 말이다.”길 소르도의 만류에도 라이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할트바르트와 세이바로는 길 소르도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라이신이 타 가문인 캔돔가의 공작에 의해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이 역력했다.“이 하인이 어째서 이곳에 갇혀 있는 것입니까? 여긴 대공저입니다! 공작 각하께서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하셔도 저희 가문의 하인을 함부로 대하시는 건 도를 넘은 처사 아닙니까?”할트바르트의 서슬 퍼런 항의에 길 소르도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이 녀석이 맨손으로 메탈 크로우의 깃털을 줍고 있더군. 상처 하나 없이 말이야.”“설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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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짐승의 숨결을 느끼며

문 앞은 이미 낭자한 혈흔으로 젖어 있었고, 코끝을 찌르는 비린내가 진동했다. 바아르는 라이신과 시선을 마주한 채,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힘에 잠식당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으윽! 악! 으으윽!”쿵, 쿵. 바닥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비명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 길 소르도가 뒤늦게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왜 갑자기······ 아, 아니다! 내일이 바아르의 생일이라 더 심각한 거였어! 어쩌지? 작년 생일에는 정말 상태가 심각했단 말이야.”길 소르도의 낮은 중얼거림이 라이신의 귓가에 차갑게 박혔다. 복도에 모인 이들은 저주받은 괴물의 소굴처럼 변해버린 침실을 힐끔거리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아, 각하. 저러다 고통에 몸이 먼저 부서지시면 안 되는데······. 라이신, 어떻게 좀 부탁한다. 제발, 지난번처럼 우리 각하를 잠재워다오. 우리 대공가를 위해서 말이다.”안절부절못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할트바르트의 간청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라이신에게 쏠렸다. 라이신은 지난 번에 마주했던 바아르를 떠올렸다. 그때는 대화라도 통했고 손길에 일말의 다정함이라도 서려 있었지만, 지금 저 문 너머의 광기가 자신을 어떻게 짓이길지는 알 수 없었다.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킨 라이신이 모두를 향해 결연한 목소리를 건넸다.“······ 다녀올게요. 그러니 다들 최대한 멀리 떨어져 계셔 주세요. 저, 문 닫을 거예요.”짐승처럼 울부짖는 바아르와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라이신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잘 부탁한다, 라이신.”“너도, 대공 각하도 무사하길 간절히 빌어 줄게.”할트바르트와 세이바로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두드리며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길 소르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움켜쥐었다.“예쁜아, 미안하고 고맙다. 다들 물러나자. 더 큰 피해는 막아야지.”그의 명령에 기사들과 하인들이 복도 저 멀리로 몸을 숨겼다. 폭풍의 중심부 앞에 라이신 홀로 남겨진 순간.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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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지워지지 않을 탐닉의 밤

라이신은 제 몸을 빈틈없이 짓누르며 고통에 일그러진 바아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차가운 듯 뜨거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지자,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불길 같은 열기가 지각을 마비시킬 듯 강렬하게 흘러들어왔다.바아르는 짐승 같은 거친 손길로 제 몸을 옭아매고 있던 제복과 셔츠를 찢어발기듯 벗어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육중한 제복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 방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고였다.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마주하게 된 바아르와 라이신. 이제는 오직 본능만이 지배하는, 짐승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지난번보다 훨씬 위태롭고 파괴적인 상태였다. 이성을 잃고 누군가를 해칠 만큼 폭주하던 남자가, 제 품 안에서만큼은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붙잡으려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지독한 절제와 배려가 느껴져 라이신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잦아들었다. 광기에 휩싸인 짐승의 모습일 때조차,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이 밤이 지나 새벽이 오면 그는 또다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을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통받는 그의 영혼에 온전한 구원이 되어주고 싶었다.바아르는 마치 가장 아끼는 연인을 대하듯 라이신의 이마와 뺨, 콧등에 잘게 입을 맞추었다. 후끈한 입김이 여린 살결을 간질였고, 메마른 입술이 스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번개처럼 흘렀다. 어느새 등 뒤로 파고든 그의 단단한 팔이 라이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제 가슴팍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짓눌린 가슴 사이로 서로의 심장 박동이 경계 없이 뒤섞이며 격렬하게 공명했다.라이신은 말갛게 웃으며 바아르의 굵고 뜨거운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에게 낮게 속삭였다.“바아르 님, 많이 힘드세요?”“······ 어.”무심한 듯 내뱉은 대답이었지만, 그 음성은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심장이······ 산 채로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야. 그런데 네가 있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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