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대공의 집착을 받은 사연:The Tale of the Beastly Archduke’s Obsessio: Chapter 31 - Chapter 40

46 Chapters

#31.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다.

에스메 황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라이신이 이동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저 아이가······ 레인 경이 오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그거······ 대단한 거 맞죠?”레인은 말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무심한 듯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네? 은밀 마법으로 접근했는데 말입니까. 확실합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요. 대마법사라도 어지간해서는 기척을 읽기 힘들었을 텐데······.” “우연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뭔가 대단한 아이였어요.” “따라가서 죽일까요?”무심하게 뱉은 레인의 말에 에스메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싫어요! 내 친구예요!”레인은 당황한 듯 눈썹을 움츠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을 친근하게 대하거나 곁을 내준 적 없던 황녀였기에, '친구'라는 단어는 그에게 생경한 충격을 주었다.“······네, 알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곧 사람들이 전하를 찾을 시각입니다.” “그래요. 도서관으로 데려다주세요.” “알겠습니다.”레인은 황녀를 가볍게 들어 안아 올렸다. 단단한 팔 근육이 그녀의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기척을 지운 채, 대공저의 도서관을 향해 질풍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 한편, 바아르는 황태자를 맞이하려다 갑자기 터져 나온 발작에 급히 파르교산으로 몸을 피했다.“윽, 으아아악—!”짐승의 포효 같은 비명이 숲을 찢었다. 저 멀리서 호위 기사들과 길 소르도는 전전긍긍하며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인 바아르를 바라보았다. 바아르는 제어할 수 없는 파괴 충동에 고통스러워하며, 근처에 찢어 죽일 마수가 보이지 않자 눈앞의 올리타스 나무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 넘겼다.콰직, 콰앙—!한밤중에 나무가 쩍쩍 갈라지는 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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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달밤에 녹아든 불청객

레인은 표정 없이 에스메의 상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옷을 입은 그녀는 평소 음식을 잘 먹지 않아 그런지 앙상해 보였으나, 막상 겉옷을 벗겨내자 감춰져 있던 굴곡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볼록하게 도드라진 가슴과 쭉 뻗은 쇄골, 그리고 미끈하게 이어지는 목선은 어지간한 남성이라면 얼이 빠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성인 여성다운 성숙함을 머금은 에스메의 자태에 도서관의 공기가 순식간에 밀도를 높였다.레인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안아 올린 뒤, 치마 마저 벗겨내었다. 그 순간 훅 끼쳐오는 달콤한 살 내음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거세게 삼켰다. 에스메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처지라 코르셋이나 하체를 부풀리는 번거로운 속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기에, 옷을 갈아입히는 과정은 예상보다 수월했다.하지만 수월한 것과 별개로 감각은 예민해졌다. 레인이 새 드레스를 입혀 주기 위해 다시 에스메의 몸을 안아 올린 그때였다. 그녀의 가슴이 레인의 상체에 밀착되며 푹신한 감촉으로 그의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혹여 자신이 무거워 그가 힘겨울까 걱정된 에스메는 레인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섬세한 호흡을 내뱉었다.에스메는 부끄러운지 몸을 떨었고, 얇은 속옷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의 온기와 굴곡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둘 사이를 감도는 어색하고도 뜨거운 정적을 깨기 위해 에스메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저······ 레인 경, 아까 그 하인이 제게 빵을 주었어요. 친구가 구워주었다고 하더군요.”“대공가의 사람입니다.”“그래도, 친구로 삼고 싶을 만큼 다정한 사람이었어요.”“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레인은 드레스의 뒷부분을 여미며 조금 전 관찰했던 라이신을 떠올렸다. 걸음걸이도, 서 있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처럼 훈련받은 몸 상태였어..’레인 자신의 인기척을 단번에 눈치챈 것도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아이고, 제국의 작은 태양 아처린 제마 판 레투니카 황태자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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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폭풍의 중심, 너에게로

에밋은 지하에서 라이신을 불러내 대공저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달빛이 부서지는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부탁한다, 라이신! 제발, 제발 같이 가 다오!” “대체 무슨 일인지 말씀이라도 해주셔야죠!” “가 보면 알아!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단 말이다!”라이신은 숙소로 돌아가려던 길에 에밋에게 반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에밋은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캔돔 가문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절박한 눈빛에서 라이신은 이것이 단순한 소동이 아닌,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일임을 직감했다.에밋은 사력을 다해 달리다 문득 옆에서 가볍게 발을 맞추는 라이신을 보고 흠칫 놀랐다.“은근히······ 너, 정말 잘 달리는구나?” “체력은 국력이니까요. 저, 보기보다 튼튼해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어쨌든 잘 따라와 주니 다행이다!”에밋은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들 기세로 무거운 갑주를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쌀 반 가마니는 족히 넘을 철갑의 무게를 견디며 달리는 그와 달리, 가벼운 옷차림의 라이신은 할 로드의 빵집까지 쉬지 않고 왕복하던 실력을 발휘해 여유롭게 거리를 좁혔다.“다 왔다! 기사들이 기거하는 별채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이신은 난생처음 발을 들이는 기사 전용 별채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하인들의 숙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웅장하고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그곳은 평소 라이신이 품었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나도 장교 숙소 생활을 10년이나 했지만······ 이곳의 공기는 차원이 다르네.’별채에 들어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에밋을 발견하고 몰려들었다.“에밋 경이 오셨다!” “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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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늘하게 시작된 대공의 집착

캔돔 대공가의 기사들을 위한 의무실. 2층 높이의 석조 건물 내부에 마련된 이곳은 본래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이할 정도의 환희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오, 신이시여!”“서밋이 살아났다!”“이건 기적입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동료가 살아 돌아온 풍경에 기사들은 체면도 잊은 채 덩실덩실 춤을 추며 포효했다. 에밋은 방금 막 눈을 뜬 중급 기사 서밋을 바스러지도록 껴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쏟아냈다.“하하! 서밋, 이 자식아! 네놈 명줄이 길긴 긴 모양이구나!”서밋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창자가 쏟아질 듯 끔찍하게 찢겨 나갔던 자리는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고통의 끝에서 생명이 다시 맥동하는 감각이 비현실적이라, 그는 그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껌뻑였다.“고맙네, 에밋. 아, 아직도 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네 효심이 하늘에 닿은 게지! 영지에 계신 어머니께 효도할 기회를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서밋은 그제야 북받치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기사들이 그들 주변에서 손뼉을 치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이어가던 그때, 병실 입구에서 찬물을 끼얹은 듯 서늘한 외침이 들려왔다.“바아르 대공 각하께서 납시었다!”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대열을 정비했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2열 횡대가 만들어졌다. 그 정중앙을 가로지르며 등장한 남자의 존재감은 의무실 안의 산소를 단숨에 집어삼키는 듯했다.바아르 대공.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바닥에 고인 눅진한 혈흔과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으나, 그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남자의 서늘한 눈동자가 피칠갑이 된 병상에 앉아 있는 서밋에게 닿았다.“서밋 경, 몸은 어떤가.”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서밋은 황급히 병상에서 내려와 바아르 앞에 무릎을 굽혔다.“각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저를 치유해 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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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설마, 나의 것을 넘보려 하다니.

아처린은 바아르를 기다리다 못해 밀려오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는 미하엘의 안내를 받으며 대공저의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하기 시작했다.캔돔 대공가와 레투니카 황가의 관계는 비단 전대 대공비의 서거 이전에도 기름과 물처럼 결코 섞이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황제는 카이우스 대공만을 마지못해 접견할 뿐, 바아르와 미하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교류 거부 의사를 밝혀왔다. 미하엘 또한 부친이 실종된 이후로는 황궁 근처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아처린의 그 집요하고도 불쾌한 시선이 싫어 미하엘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곁을 지키는 길 소르도 공작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면, 아처린은 어린 시절부터 미하엘에게 품어온 일방적이고도 비틀린 연정을 숨기지 않은 채, 이 불편한 동행을 즐기고 있었다.황태자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미하엘이 구원을 요청하듯 길 소르도를 바라보자, 눈치 빠른 공작이 아처린에게 다가서며 미끄러지듯 말문을 열었다.“황태자 전하, 피곤하시진 않으십니까?”“길 소르도 공작, 눈이 이토록 즐거운데 피곤할 리가 있나.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군. 이 복도의 그림들은 언제 봐도 내 취향이야.”아처린은 벽면을 수놓은 대형 자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대공저에는 이름난 명화들이 즐비했으나, 그는 캔돔 영지의 풍경을 정교한 실로 엮어낸 이 기묘한 작품만을 탐욕스럽게 응시했다. 길 소르도는 미하엘의 수고를 덜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하하, 파르교산 너머 부르도산에는 뽕나무가 울창하여 견 생산이 독보적이라지요. 덕분에 이 영지의 자수 산업은 제국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에스메가 아끼는 비단 드레스들이 전부 캔돔 가문의 것이라더니, 가문의 경영 방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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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안식을 침범한 존재

바아르는 언제나 그러했듯, 황가를 대할 때면 오만과 예우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는 캔돔의 주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녀인 에스메에게조차 귀족 남성들이 흔히 바치는 감언이설이나 손등 입맞춤 따위는 건네지 않았으나, 아처린을 대할 때의 서슬 퍼런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정중함이 그에게 머물렀다. 그때 아처린이 에스메에게 데면데면한 기색으로 천천히 다가섰다.“말도 없이 여기서 책을 보고 있었다니. 네 가신들이 고생이 많구나.”“아, 그냥. 책이 좋아서요.”에스메가 쭈뼛거리며 대답하자, 아처린의 시선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 시종 레인에게 닿았다. 레인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아처린을 마주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 정적을 깨고 도서관 안에서 또 한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가신 할트바르트였다.“다들 여기 계셨군요.”품에 고서를 안고 나오던 할트바르트가 복도를 가득 메운 인파에 흠칫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아처린은 에스메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를 내뱉었으나, 그 이면에는 서늘한 질책이 서려 있었다.“대공의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더니, 너도 참 예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황족의 얼굴에 먹칠이나 하고. 쯧.”주변 귀족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에스메에게 쏠리자 그녀의 하얀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전, 계단이 있는 곳은 불편해서요.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바아르는 그게 뭐 대수냐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예전에도 도서관 출입은 허락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아처린은 그제야 자신이 2층 미하엘의 응접실에서 있었다는 것을 무심하게 언급했다.“됐어 그럼. 난 에스메 너를 돌보는 것 보다 공녀와의 시간이 더 즐거우니까.”아처린은 휠체어를 잡은 레인을 한 번 훑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상황이 불편해진 에스메는 고개를 돌려 미하엘을 향해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서관을 2층에서 1층으로 미하엘 공녀님이 의견을 내주신 덕분으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려요.”갑작스러운 주목에 미하엘의 얼굴이 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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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감히,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다니

“거기 서! 어딜 도망가나!”바아르는 기민하게 반응하며 창가로 몸을 날렸다.“새도우!”그의 부름이 떨어지기 무섭게, 짙게 깔린 그림자 속에서 한 형체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바아르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던 기사는 망설임 없이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대공저의 화려한 정원등조차 닿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대기를 찢는 바람 소리만이 도망자의 자취를 쫓았다. 새도우는 허공을 향해 네 개의 표창을 날렸고, 그중 하나가 둔탁하게 박히는 파열음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깼다. 바아르는 그 짧은 소리만으로도 목표물이 명중했음을 확신했다.“각하, 한 발 적중했습니다.”검은 옷과 두건으로 전신을 감싸고, 오직 서늘한 눈매만을 드러낸 새도우가 어둠 속에 녹아든 채 답했다. 바아르는 정신없이 그 희박한 기척을 쫓았다. 어느 순간, 그들은 대공가 본관을 돌아 후미진 뒤편을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감히, 내 침실을 엿보려 하다니!’바아르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짓씹으며, 3층 객실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을 아처린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힐끔 던졌다. 서밋을 빈사 상태로 만든 아처린의 행태나, 예고 없이 찾아온 불쾌한 염탐자나 모두 그의 신경을 긁어놓기에 충분했다.어금니를 사늘하게 맞물린 바아르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라이신이 아니었다면 오늘 소중한 기사 하나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라이신이 잠꼬대를 내뱉던 그 찰나의 순간에 염탐자의 기척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생각이 깊어진 바아르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하자, 뒤를 따르던 새도우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속도를 늦췄다. 그때, 새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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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경계의 벽을 허무는 은밀한 친절

에스메는 레인이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거슬리는 것인지 예민하게 구는 모습을 보며 가늘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정한 말 한마디를 기대했건만, 무슨 제안을 해도 돌아오는 건 서늘한 정색뿐이었다.“에스, 자꾸 그 하인을 언급할 거야?”레인이 귀찮음과 분노가 섞인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자, 에스메는 위축된 듯 어깨를 작게 웅크렸다.“···난 그 하인과 가까워지고··· 싶어.” “안 돼. 조심해야 해. 그리고 넌 설치고 다니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거, 잊었어?”레인의 잔인한 진실에 에스메의 표정이 더욱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아처린의 그림자에 가려져 숨죽여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그때, 에스메의 곁으로 불현듯 낯선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졌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기사인 레인조차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흠칫 놀라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에스 친구, 너무하네.”언제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건가.“······라이신?”어느새 나타난 라이신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맑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에스 친구분!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안 되죠.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배려해야 하는 법이에요.”그리고 망설임 없이 에스메에게로 성큼 다가왔다.“언제··· 온 거지? 인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레인은 얼마나 경악했는지 입술을 뻥긋거리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에스메 역시 어깨를 움찔거릴 만큼 라이신의 등장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때, 라이신이 코를 킁킁거리며 공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내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어? 에스 친구분, 혹시··· 다치셨나요? 어디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데요?”“피 냄새?”그 말에 놀란 레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라이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감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후각이 남다른 것인지. 레인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이었다.에스메는 놀라 몸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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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핏빛 향기에 휘둘려 버렸어.

늘 생일 무렵은 황가의 방문으로 어수선하기만 했다.다음날, 바아르는 아처린의 성화에 못 이겨 파르교산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산책을 빙자한 그 기묘한 여정 내내 그의 심경은 도무지 편치 않았다.아처린은 산의 지형을 꼼꼼히 살피고 채굴되는 광물의 종류까지 캐묻더니, 제 목적을 달성해서야 만족스러운 듯 기사단을 소집했다. 생일 축하는 명분일 뿐, 대공저를 염탐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바아르는 혀끝에 남은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황족들을 배웅했다.길 소르도까지 돌려보낸 뒤에야 대공저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문득문득 라이신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영주로서의 책무는 그의 감정을 사치로 몰아넣었다. 그 뒤로 며칠간 집무실에 틀어박힌 바아르는 주변 영지와의 교역품을 점검하며 업무에 매진했다.그 곁을 지키던 할트바르트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시중을 들었다.“바아르 각하, 옥체는 평안하십니까?”“멀쩡하다.”“요즘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지셔서 놀랐습니다. 내년이면 스물넷이 되실 텐데··· 조금만 더 버텨주시면 됩니다.”할트바르트가 서류를 받아 들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늘치 업무를 모두 끝낸 바아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를 응시했다.“자, 더 처리할 일거리는 없나?”“며칠간 워낙 초인적으로 일하셔서, 시급한 건 더 없습니다.”“안 시급한 거라도 가져와.”“예?”바아르가 자리에서 휙 일어나며 손을 저었다. 몸 안의 열기가 이래저래 어수선하게 들끓었다.“아니, 됐다. 책이나 좀 봐야겠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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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귓가를 파고든 음란한 속삭임

라이신은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기사단이 복귀할 때 보았던 풍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들어오던 정식 기사들 중 누구 하나 할 로드처럼 처참한 몰골인 자는 없었다.도대체 왜. 기사들의 수발을 드는 종자에 불과한 할 로드만 이 지경이 되어 돌아왔단 말인가. 할 로드가 남몰래 검술을 연마하고 오러를 발현한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 재능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하급 기사들이 제 몸을 사리느라 오러를 쓰는 할 로드를 사지로 내몰았을 상황을 상상하자 속상함에 미칠 것만 같았다.“너 정말 왜 그래? 이렇게 무모한 짓, 난 정말 질색이야!”라이신이 떨리는 손으로 피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침대에 널브러진 할 로드가 초점 없는 눈으로 라이신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미안···. 내가 좀, 흥분하면 앞뒤 안 가리고 날뛰잖아. 내 소드 브레이커가 톱날이라··· 마수 가죽도 잘 찢거든. 게다가 나, 힘도 세잖아.”선량하고 마음 여린 할 로드였다. 분명 기사들이 다칠까 봐, 혹은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혼자 앞장섰을 것이 뻔했다.“그래도 적당히 했어야지! 네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내가 되게 잘하는 줄 알고 그만··· 신이 나서 그랬나 봐.”아주 가지가지 재주까지 피워댔으니, 영악한 기사들이 할 로드를 방패 삼아 앞에 세운 것이 분명했다. 매일 밤 잠을 줄여가며 홀로 수련하던 할 로드의 성실함을 라이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정작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기사들은 할 로드만큼의 기량도 없단 말인가. 대공가의 군기가 얼마나 빠져 있는지, 라이신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너 당분간 내 눈앞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 얌전히 살아, 알았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라이신···. 네 옆에 붙어 있을게.”넝마가 된 할 로드의 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핏물을 닦아내고 상처를 봉합하면 될 것 같으면서도, 녀석의 숨이 이대로 끊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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