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141 - Chapter 150

179 Chapters

141화

끼이익—.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비원 병실의 문이 열렸다. 피비린내와 독한 약초 냄새가 찌들어 있던 공기 속으로, 이질적일 만큼 우아하고 짙은 홍차 향이 스며들었다.레녹은 우아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느릿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병상에 기대어 있는 사내를 관찰했다.'적도 성가시지만, 그녀의 곁을 맴돌 불쾌한 경쟁자라면 더더욱 살려둘 수 없지.'서린 레녹의 푸른 눈동자와, 사선을 넘나들던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체를 꼿꼿이 세운 카일의 핏발 선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혔다.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것은 곁에서 굳어 있던 에다였다.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굽혔다."레녹 후작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백작님의 은인께서 무사히 깨어나셨는지 확인차 들렀네."레녹이 무미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카일의 곁에서 잔뜩 긴장해 있는 에다를 향해 턱짓했다."에다. 이 자와 단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주겠나.""아, 네. 후작님……."에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던 찰나였다."멈춰."거칠고 묵직한 쇳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카일의 시퍼렇게 날 선 눈동자가 레녹을 향한 채, 입술만을 비틀어 에다에게 명했다."백작께서 계속 날 간호하라 명하셨을 텐데.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예……? 하지만, 후작님께서……."카일은 속으로 차갑게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주인을 지키려 눈을 치켜뜨던 에다는 이미 완벽하게 검증된 아군이었다.반면 눈앞의 사내는 달랐다. 귀족의 오만함을 두른 이 낯선 불청객이, 그저 정탐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살수들과 같은 편인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에다는 카일이 내세운 최소한의 방어선이자 목격자였다.그 기민하고도 날 선 경계심을, 레녹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호오.'레녹의 눈 깊은 곳에 짙은 흥미가 일었다.'단순한 미친개가 아니라, 의심할 줄 아는 영리한 사냥개로군. 마음에 들어. 합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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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무색하게, 블랑의 침소에 내려앉은 공기는 서릿발처럼 차갑고 무거웠다.방 안으로 들어선 카시안은 묵묵히 다가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부서질 듯 연약한 유리를 쥐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꼭 작별인사로 하는 사람 같네요.”블랑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느릿하게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살갗에 닿은 나직한 속삭임은, 그 다정한 품과는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서연합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아침 인사를 대신한, 건조하고도 잔혹한 출정 통보였다.“갑자기요?”블랑의 은회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너무 빨라. 이제 막 서연합의 심기를 건드려 불씨만 당겨놓았을 뿐인데, 이렇게 단숨에 전면전으로 판을 엎어버린다고?‘블랑은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지긋이 깨물었다.'불씨를 당기는 데만 집중하느라, 정작 내가 여제가 될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했어. 흩어진 아르센의 난민, 숨어있는 레지스탕스, 그들을 규합할 군자금과 무기… 아직 어느 것 하나 내 손에 온전히 들어온 게 없는데!'판이 너무 일찍 열렸다.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영원히 전리품으로 전락해 카시안이 주는 모이만 먹고 살아야 할 터였다.그녀는 이내 카시안의 제복 옷자락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당장 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직접 뛰어들어 기회를 탈취해야만 했다.“그럼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카시안이 제 품에 안긴 블랑의 어깨를 천천히 밀어냈다.“어딜 말이지.”“폐하가 계시는 곳 어디든요. 그곳이 전장이라 할지라도요.”그의 커다란 손이 블랑의 뺨을 다정하게, 그러나 결박하듯 감싸 쥐었다. 거리를 둔 채 옭아매는 시선이었다.“거긴 여인들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야. 게다가 널 내내 내 옆에 붙여 놓을 수도 없어.”하지만 블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제 뺨을 쥔 카시안의 커다란 손등 위로 두 손을 겹쳐 쥐며,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망울을 일렁였다.“어차피 폐하가 없는 이 황궁은 제게 감옥이나 다름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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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뒤돌아선 카시안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블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하아.”긴장감이 풀어지는 것과 동시에 얼굴의 표정도 스르륵 풀렸다.‘전장에 따라가서 이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아파오는 머리에 미간을 찡그리는 찰나, 시선이 느껴졌다.‘참, 카일이 있었지.’블랑은 다시 표정을 다잡으며 짧게 명했다.“혼자 있고 싶으니 따라오지 말고 여기에 있으세요.”자리에서 일어난 블랑은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서재로 들어갔다.달칵. 문이 닫히자, 비로소 정적과 함께 완벽한 고립이 찾아왔다. 블랑은 그제야 길고 깊은 숨을 토해냈다.‘익숙해질 법도 한데, 연기하는 짓도 이제 점점 지쳐가.’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서재 구석의 책장으로 다가갔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 가장 두껍고 지루해 보이는 제국 법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책장을 넘기자 속을 정교하게 파내어 만든 좁은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에다를 시켜 남몰래 마련한 텅 비다시피 한 자금 장부와, 블랑이 기억을 더듬어 직접 그려 넣은 아르센의 조악한 지도가 전부였다.카시안의 시선이 닿는 이 별궁에서 그녀가 쥐고 있는 패는 이토록 초라했다. 블랑은 텅 빈 장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이대로 전장의 흐름에 무력하게 휩쓸려갈 수는 없어.'전쟁이 터지면 카시안의 시야는 온통 전선으로 쏠릴 것이다. 그 공백은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혼란을 틈타 뿔뿔이 흩어진 아르센의 난민들을 규합하고, 카시안의 눈을 피해 거대한 자금을 세탁해 세력을 불려야 한다.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완벽한 청사진을 그려두었어도, 텅 빈 두 손만으로는 결코 이 거대한 판을 굴릴 수 없었다.‘단순히 뒤에서 움직여 주는 게 아니라 옆에서 도울 수족이 필요해.’“지금 내게 에다 말고 누가 있을까.”낮게 읊조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던 블랑이 이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카일!’암살자들을 상대하던 카일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 짐작하는 것보다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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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달칵.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렸다. 짙은 상념을 끝낸 블랑이 거실로 걸어 나오자,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카일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따라와요. 당신이 제게 얼마나 유용한 호위인지, 오늘 밤 직접 확인해야겠으니.”블랑은 탁자 위에 놓인 짙은 색의 숄을 집어 들어 얼굴을 깊숙이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카일이 속삭이듯 물었다.“아무도 모르게 나가셔야 하는 겁니까.”“다 알아도 폐하는 몰라야겠지?”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일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목적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쥐새끼 한 마리 눈치채지 못하게 모시겠습니다.”어차피 마차를 부르거나 정문으로 걸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블랑은 카일의 능력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짧게 목적지를 내뱉었다.“레녹 후작의 저택.”그 이름이 떨어지는 순간, 카일의 가면 아래 감춰진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 재수 없는 여우 새끼.'야심한 시각에 그 자의 사저를 은밀히 찾는다는 것이 불쾌했지만, 카일은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읊조렸다.“실례하겠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일의 단단한 한 팔이 블랑의 얇은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앗….”짧은 신음이 새어 나올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열린 창밖의 짙은 어둠 속으로 쏘아지듯 허공을 갈랐다.경비병들이 교대하는 찰나의 사각지대. 카일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도약으로 성벽과 지붕을 밟으며 밤의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었다.블랑은 뺨을 날카롭게 스치는 밤바람 속에서 숨을 죽였다. 공중을 가르는 그의 움직임은 인간의 영역을 가볍게 벗어나 있었다.'마력을 쓰는 건가? 아니면 그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가?‘특유의 마나 파동이 뚜렷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무장한 경비병들의 시야를 완벽하게 기만하며 도약하는 이 기척 없는 은밀함은 평범한 용병이나 기사의 수준이 아니었다.그가 숨기고 있는 진짜 힘의 근원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이 사내는 방금 전 서재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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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별안간 레녹의 짙은 눈썹이 비틀리며 조소가 터져 나왔다.“황후? 증명할 인장이나 옥새라도 품속에 숨겨왔습니까? 아니면 목숨이 아까워 지어낸 삼류 소설입니까.”“그깟 장신구는 훔치면 그만이죠. 당신처럼 철저한 사람에게 그런 조잡한 물건이 통할 리 없지 않습니까.”블랑은 거침없는 손길로 레녹의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를 끌어당겼다. 깃펜을 쥔 그녀의 손이 유려하고 화려한 필체로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아르센 황실 지하 금고의 마지막 봉인 암호, 그리고 서연합과 맺었던 방위 조약의 이면 계약서 내용입니다. 드라켄의 정보망을 총동원하고도 당신이 끝내 찾아내지 못했던 것들.”종이를 확인한 레녹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요동쳤다.“그리고 후작, 머리가 비상한 당신이라면 이미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을 텐데요. 당신이 아는 카시안은 정체도 모를 여자에게 한눈에 빠질 만한 사내이던가요?”블랑이 상체를 기울여 굳어버린 레녹과 시선을 마주했다.“처음부터 서연합의 손에서 날 구해낸 건 카시안이었어요. 내 정체를 알면서도 입을 닫고 있는 겁니다. 날 가지고 싶어서.”블랑의 입가에 짙고 오만한 미소가 번졌다.“그리고 나는, 내 나라를 무너뜨린 서연합을 치기 위해 카시안을 이용해 판을 짠 거고요.”“…….”호흡조차 잊은 듯 굳어있던 레녹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그러니까 지금 이 거대한 전면전을, 당신이 설계했다는 건가?”레녹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모든 계산과 의문이 산산조각 나고, 그 흩어진 파편들이 완벽한 하나의 그림으로 맞물려 들어갔다'아르센의 황후, 로제.'그 이름이 가진 가치를 짐작하자 레녹의 이성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이 여자의 판에 올라타 승리한다면, 백지상태의 새로운 제국에서 법과 의회를 제 입맛대로 주무르는 실세가 될 터였다.더 나아가, 저 여제의 옆자리. 국서(國壻)가 되어 제국의 반쪽을 합법적으로 집어삼키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만에 하나 싸움에서 밀린다 해도, 카시안이 그토록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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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드라켄 제국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의 함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황금빛 갈기의 군마의 옆에 선 카시안의 모습은 그 자체로 대륙의 질서를 쥐고 흔드는 철혈의 지배자이자 완벽한 제국의 군주였다.그의 출정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대륙의 저울을 제 발밑에 완벽하게 다시 맞추겠다는블랑은 황제의 곁에 마련된 마차에 올라타기 전, 제 귓가에 걸린 푸른빛의 귀걸이를 작게 매만졌다.‘제 모든 정보망과 자금줄을 바친 증표치고는 꽤나 앙증맞은 모양새지.’이제 이 작은 장신구 하나면 제국 전역에 깔린 레녹의 밀정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후방의 막대한 자금을 제 뜻대로 굴릴 수 있다.'카시안의 눈앞에서는 가장 가련한 척 안겨 있으면서, 그의 등 뒤로는 이 거대한 전쟁의 판도를 완벽하게 훔쳐내는 거야.'“바람이 차.”생각에 잠겨 있던 블랑의 어깨 위로 묵직한 망토가 덮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카시안이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옷매무새를 여며주고 있었다.“다시 말하지만, 막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내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네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다정함을 가장한 완벽한 통제. 블랑은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떨며 그의 큰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대었다.“당연하죠, 다만 폐하와 함께라면 괜찮은 거죠? 가끔 데리고 나가주세요.”만족스러운 듯 카시안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가 블랑을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한 뒤, 몸을 돌려 제 군마로 향했다.황금빛 갈기의 군마에 올라탄 카시안은 여유로운 시선으로 굳게 닫힌 마차의 창문을 응시했다.‘그저 발톱이나 숨긴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감히 내 등 뒤에서 아르센의 부활을 꿈꾸고 있을 줄이야.’그럼에도 기꺼이 모르는 척 이 위험한 동행을 허락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발버둥 쳐 보아라. 어차피 네가 되찾으려는 영토도, 네 숨결도 전부 내 것이 될 테니.’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녀의 정체를 밝히고, 드라켄의 정식 황후로 맞이할 생각이었다.한 번 망했던 나라의 과부 황후의 재혼?자신이 황제인 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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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드라켄 본진의 막사 안은 차가운 밤공기와 짙은 잉크 냄새만이 맴돌았다.전선의 최전방이었으나, 대군을 지휘하고 돌아온 카시안의 제복에는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았다.막사 중앙에 놓인 거대한 탁자 위로는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정밀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블랑은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쥐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갔다.“폐하, 밤공기가 찹니다.”카시안은 시선을 지도에 고정한 채, 한 팔을 뻗어 다가온 블랑의 허리를 감아안았다. 그의 단단한 품에 가련하게 기댄 블랑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카시안이 주시하고 있는 지도 위로 향했다.그의 손끝이 머물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르센이었다.“서연합이 겁도 없이 발톱을 드러내게 만든 건, 결국 이 아르센의 나약함 때문이었어.”카시안이 지도 위 아르센의 영토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조소가 섞인 음성이었다.“대륙의 질서는 각 제국이 제 몫의 힘을 쥐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성립되지. 하지만 아르센은 그 균형의 축을 담당할 힘조차 없는 무능한 나라였어. 저들이 제멋대로 오랜 균형을 무너뜨리고 이 따위 전면전을 끌어낼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아르센을 집어삼키는 편이 백배는 나은 결과였을 테지.”“……!”그 순간, 카시안의 품에 안겨 있던 블랑의 숨이 턱 막혔다.[내가 먼저 아르센을 집어삼키는 편이…….]그 무심한 한마디가 시퍼런 비수가 되어 꿰뚫고 들어왔다.까마득한 성벽 아래로 불어닥치던 맵찬 바람. 자신을 전리품 취급하던 전생의 카시안. 그리고 제 목숨을 부지하려 아내를 팔아넘기던 남편 레온의 비참한 얼굴까지.아르센의 태양이 붉게 부서져 내리던 그날의 감각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블랑의 가녀린 어깨가 속절없이 파르르 떨렸다. 카시안의 팔이 제 허리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끔찍한 구토감과 감정의 요동이 치밀어 올랐다.“블랑? 춥나.”품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카시안이 시선을 내렸다. 블랑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며 그의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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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달빛조차 숨죽인 막사 밖. 카시안이 작전 회의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블랑이 곁을 지키는 카일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카일. 폐하의 귀가 닿지 않는 곳에서 둘만 할 이야기가 있어요.”대놓고 주인을 배신하라고 요구하는, 위험하고 은밀한 시험이었다. 블랑은 달빛 아래 굳게 다물린 카일의 입술과 가면 너머로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살피며 팽팽하게 호흡을 조였다.'어떻게 나올까. 이 불경한 도발을 당장 네 주인에게 바칠까. 아니면…….'엄연히 카시안의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내다. 침묵하는 거구의 기사가 과연 제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아니면 기꺼이 제게 목줄을 쥐여줄지. 서늘한 긴장감이 블랑의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가면 너머로 블랑을 응시하던 카일의 안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둘만 할 이야기…….’은밀하게 닿아오는 그 나직한 목소리에 사내로서의 심장이 찰나, 속절없이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이성이 거친 박동을 짓눌렀다. 황제의 눈과 귀를 철저히 피해야만 하는 대화라니.‘혹시 그녀는 단순히 카시안의 곁에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무언가 거대한 다른 판을 꾸미고 있었던 건가?’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위험한 호랑이 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다. 그러나 카일의 턱선은 이내 단단하게 굳어졌다.‘이유가 무엇이든, 당신이 향하는 곳이 반역이든 파멸이든 상관없어. 나는 그저 당신의 뜻을 따를 뿐이다.’그녀가 원하는 틈이라면 기꺼이 만들어 주리라.“……잠시만 기다리십시오.”카일은 낮게 읊조린 뒤, 지체 없이 막사 뒤편의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녹여냈다.그리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콰아앙-!본진 후방의 군량고 쪽에서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길이 밤하늘로 치솟았다. 연이어 누군가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고, 병사들이 다급하게 무기를 뽑아 드는 소리가 진영 전체를 뒤흔들었다.“적습이다! 서연합의 첩자가 불을 질렀다!”진영 한복판에서 터진 대대적인 화재와 혼란에, 블랑 주변에 은신해 있던 황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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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시뻘건 화마가 휩쓸고 간 군량고의 잔해 앞. 매캐한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잿더미 위로 카시안의 군화가 무겁게 내려앉았다.“폐하, 서연합의 척후조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외곽 경계병 두 명이 목이 그인 채 발견되었고, 그 직후 이곳에 불길이 솟았습니다.”얼굴이 검게 그을린 기사단장이 다급하게 보고를 올렸다.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 위로 잔불을 끄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고함과 쇳소리가 어지럽게 얽혔다.그러나 횃불의 일렁이는 빛 아래, 카시안의 표정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서연합의 척후라.”그는 나직하게 읊조리며 바닥에 눕혀진 경계병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시신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단 한 번의 검격이다.’뼈를 건드리지 않고 정확히 기도와 혈관만 끊어내, 비명조차 지를 틈을 주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깔끔한 상흔이었다.기분 나쁜 위화감이 아래에서부터 스르륵 척추를 타고 올랐다.‘적의 척후조가 이토록 완벽하게 외곽을 뚫어냈다면, 고작 변두리 군량고에 불이나 지르고 도망칠 이유가 없다.’목표는 지휘관인 자신의 목이거나 무기고여야 마땅했다. 게다가 발화점을 훑던 카시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외부에서 던져 넣은 불화살의 흔적이 아니었다. 군량고 내부에 비치된 등유통을 안에서 걷어차 엎은 뒤 불을 붙인, 철저히 내부에서 시작된 작위적인 화재였다.‘이것은 습격을 위장한 소란이다.’누군가 의도적으로 진영 전체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몰아넣기 위해 던진 미끼에 가깝다는 확신이 들었다.카시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사단장을 향해 조용히 음성을 흘렸다.“방금 전 화재가 터졌을 때, 블랑의 막사 주변에 은신해 두었던 내 그림자들은 어디 있었지?”“예? 아, 그게…… 불길이 거세게 번지는 바람에 폐하의 막사 쪽으로 옮겨붙을 것을 우려하여, 사태 수습을 위해 일제히 이쪽으로 투입되었습니다!”그 순간, 카시안의 이성에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진영 전체의 눈과 귀가 군량고로 쏠리고, 제 그림자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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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그러나 카일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묵직한 음성을 내뱉었다.“어둠 속의 혼란은 암살자가 가장 선호하는 사냥터입니다, 폐하.”카시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카일은 고개를 숙인 채 완벽한 기사의 논리로 대답을 이어나갔다.“적의 규모도, 목적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오히려 적이 파놓은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과녁이 되는 꼴이라 판단했습니다. 불길이 막사로 옮겨붙지 않은 이상, 입구만 틀어막고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전술적 판단이었다. 카시안의 날카롭던 기세가 일순 멈칫하자, 침상에서 얇은 숄을 두른 채 웅크려 있던 블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카일의 말도 맞지만, 제가 이곳에 있자고 했어요.”떨림이 배어 있으나 기묘할 정도로 맹목적인 목소리. 블랑이 맨발로 다가와 카시안의 가슴에 조심스레 손을 얹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막사를 버리고 피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폐하께서 반드시 절 구하러 오실 거라 확신했으니까요.”그 달콤한 한마디는 카시안을 틀어쥐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내가 직접 내 여자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제 여자의 붉은 입술로 확인받는 순간, 카시안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불쾌한 의심은 남김없이 증발하고 그 자리에 짙고 폭력적인 소유욕이 번져 들었다.“……하.”카시안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 살기로 번뜩이던 표정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다정하게 허물어졌다.그는 제 품으로 파고든 블랑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커다란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이내 거친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그녀의 가녀린 뺨과 턱선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일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지극히 애틋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블랑의 붉은 입술을 다정하게 머금었다. 짙은 맹신에 화답하는 깊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블랑을 감싸 안은 그의 너른 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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