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21 Chapters

101화

“……아이린 드 페온.”카시안의 낮고 서늘한 부름에, 주최자인 아이린이 창백한 얼굴로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폐, 폐하…….”아이린은 가늘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내리깐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빠르게 요동쳤다.‘잠깐. 타티아나가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고작 그 천박한 계집 하나 없어졌다고 저렇게까지 이성을 잃는다고?’카시안이 뿜어내는 살기는 통제를 벗어난 장난감에 대한 가벼운 화풀이가 아니었다.블랑, 그 계집은 아이린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황제의 깊은 곳에 똬리를 튼 치명적인 약점이었다.“문을 지키는 새끼들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지옥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한 카시안의 명령에 아이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경비 대장을 호출했다.시종들이 황급히 달려가는 사이, 아이린은 속내를 감쪽같이 숨긴 채 남몰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오히려 좋아. 저게 맹목적인 사랑이든, 미친 소유욕이든 상관없어. 집착이 깊을수록 오늘 심어진 의심의 씨앗이 틔워낼 파국은 훨씬 더 처참할 테니까.’시작은 두 년이 대면도 하기 전에 벌어진 이 작은 소란일지 몰라도, 결국 이 균열이 그들을 완벽한 지옥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아이린은 엎드린 채 비릿한 미소를 삼켰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경비 대장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엎드렸다.“부, 부르셨습니까! 폐하!”카시안의 묵직한 군화 굽이 덜덜 떨리는 경비 대장의 손등 바로 앞을 짓밟듯 멈춰 섰다.“묻겠다.”“예, 예……!”“내가 테라스에 들어가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연회장을 빠져나간 자들이 있나.”황제의 살벌한 추궁에 경비 대장이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입을 열었다.“그, 그것이……! 현재까지 정문을 통해 나간 인원은 딱 두 명뿐이었습니다!”“누구냐. 당장 생김새를 불어.”“은색 가면을 쓴 남자와,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여자였습니다! 여자가 만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해 남자가 부축해서…… 컥!”퍽!카시안의 발이 자비 없이 경비 대장
Read more

102화

검붉은 드레스는 이미 빈민가의 전당포 창고에 헐값으로 처박힌 지 오래였다.수도의 가장 깊고 은밀한 뒷골목 야시장.레녹이 급조해 온 얇고 거친 리넨 원피스 하나만 걸친 블랑은, 낡은 숄을 뒤집어쓴 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아…….”블랑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싸구려 꼬치구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번들거리는 고기기름과 붉은 소스가 그녀의 입술에 끈적하게 묻어났다. 입가를 핥아 올리는 야릇한 혀놀림.세상의 가장 값비싸고 화려한 것들만 탐할 것 같던 여자가, 숯불 연기와 먼지가 섞인 뒷골목의 싸구려 음식을 이토록 달게 삼켜내다니.“그렇게… 맛있습니까?”평민 복장을 한 레녹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당장이라도 질색할 줄 알았던 그녀는, 마치 이런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는 듯 뺨을 붉히며 먹고 있었다.블랑은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활짝 웃었다. 계산된 교태가 아니었다. 가면도, 화장도 없는 민낯으로 웃는 그녀는 황궁의 요부 블랑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여인 로제로 돌아가 있었다.고개를 끄덕이던 그녀의 시선이 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머물렀다.부모의 손을 잡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블랑의 눈빛이 금세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나에게도… 저런 평범한 행복이 허락됐더라면.’그 얼굴을 멍하니 보던 레녹의 심장이 쿵, 하고 통제를 벗어나 무겁게 내려앉았다.단지 쓸만한 파트너인 줄 알았던 여자가, 기어이 제 숨통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황제의 손아귀에서 이 처연한 여자를 온전히 훔쳐 올 수만 있다면, 기꺼이 제 목을 걸어도 좋겠다는 서늘하고도 미친 충동이 일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레녹의 수하가 다급하게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레녹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짧은 꿈에서 깰 시간이군요, 부인.”레녹이 낮게 속삭였다.“폐하께서 수도 성문을 전면 봉쇄하고 이 잡듯이 뒤지고 계십니다. 검은 망토를 쓴 여자와 은색 가면의 남자를 찾으라고.”블랑의 손에서 꼬치구이가 툭 떨어졌다.아련하게 젖어있던 눈빛이 순식간에
Read more

103화

카시안의 기사단이 턱밑까지 추격해 오기 직전. 빗속을 뚫고 내달린 레녹의 마차는 서쪽 별궁의 으슥한 뒷문에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부축해 드립니까?”“아뇨. 혼자 갈 수 있어요. 빨리 가세요. 우리 싸움의 원인이 당신때문이었으니까.”“나요?”“제가 당신과 폐하를 비교했거든요. 지금 마주하면 그 목이 내일까지 안 붙어 있을거예요. 그러니까, 가세요.”마차에서 내린 블랑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빈속에 들이부은 싸구려 독주가 이성을 몽롱하게 마비시키며 온몸을 뜨겁게 집어삼키고 있었다.“부인!”어둠 속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에다가 사색이 되어 달려와 무너지는 그녀를 받아냈다.블랑은 간신히 몸을 가누면서도, 손톱이 옷감을 뚫고 살갗을 파고들 만큼 절박한 악력으로 에다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에다… 잘 들어.”“예, 예! 말씀하세요.”“폐하가… 폐하가 오시면…….”블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흐려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내가 들어온 지… 한 시간은 됐다고 해야 해. 알겠지? 꼭… 한 시간 전이야.”“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인.”간신히 당부를 마친 블랑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에다의 품에 무너져 내렸다. 사색이 된 에다는 완전히 의식을 놓고 축 늘어진 그녀를 반쯤 끌다시피 하며 다급히 침실로 향했다.숨 돌릴 틈도 없이 젖은 평민의 옷부터 벗겨 자신의 빨래통 깊숙이 처박고는, 블랑을 얇은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눕혔다.지독한 위스키 냄새가 훅 끼쳐왔지만, 물수건을 가져와 씻길 1초의 여유조차 없었다.그때였다.투두두두둑-!거센 빗소리를 뚫고, 별궁 앞마당의 진흙탕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수십 필의 말발굽 소리가 지진처럼 울려 퍼졌다.히이잉-!신경질적인 말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에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곧바로 별궁 복도의 대리석을 울리는 무겁고 폭력적인 군화 발소리가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쾅!“블랑!”카시안이 침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Read more

104화

“으음…….”블랑이 칭얼거렸지만 깨어나지는 않았다.카시안은 침대 위로 올라가, 무언가 확인하듯 블랑의 몸을 끌어안고 코를 파묻었다.킁.목덜미, 흐트러진 머리카락, 붉은 입술.그리고 다른 놈의 냄새. 그 은색 가면의 놈이 그녀의 몸에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집요하고 거칠게 살결을 탐했다.하지만 느껴지는 건 식도를 태울 듯 지독한 싸구려 위스키 냄새뿐이었다.머리가 아플 정도로 독한 알코올 향이 다른 모든 체취를 완벽하게 덮어버리고 있었다.‘……술 냄새뿐이군.’카시안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턱관절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거친 숨결에 뒤척이던 블랑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독한 술기운에 초점 없이 풀린 몽롱한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 제 위를 짓누르고 있는 카시안의 얼굴에 닿았다.“……어?”그녀는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에 들뜬 뺨을 기댄 채, 베시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카시안…….”평소처럼 가면을 쓴 목소리로 부르는 폐하가 아니었다.그녀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연인을 부르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블랑의 뜨거운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다 카시안의 뺨에 닿았다. 알코올로 인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이 현재인지 과거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만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있었다.“당신 눈…… 참 붉다. 태양 같아.”그녀의 손끝이 카시안의 눈가를 느릿하게 쓸었다.“그때도…… 이렇게 붉었는데.”뜬금없는 헛소리에 카시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웅얼거림에, 카시안의 심장이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섰다.“당신이 쥐여줬던…… 그 단검 말이야.”“……뭐?”“그거…… 꽤 쓸모 있게 썼어. 차갑고, 날카로워서…… 숨통을 끊어내기엔 아주, 제격이더라…….”카시안의 호흡이 멎었다.그것은 블랑이 알 수 없는 기억이었다. 카시안이 오직 로제에게만, 살아남으라며 제 손으로 직접 쥐여주었던 호신용 단검.블랑은 지금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 채 제 과거
Read more

105화

더는 기다릴 이유도, 지켜볼 이유도 없었다.카시안은 제 목을 감아오는 블랑의 가느다란 손목을 한 손으로 거칠게 낚아채 침대 헤드 위로 찍어 눌렀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에다가 입혀놓은 얇은 실크 슬립을 거칠게 쥐어뜯었다.찌익- 가차 없이 찢겨나간 백색 원단 사이로, 위스키의 열기에 절여져 붉게 물든 뽀얀 속살과, 한 손에 으스러지도록 쥘 수 있을 것 같은 유려한 허리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아…… 읏.”독한 술기운과 갑작스러운 한기에 블랑이 몸을 잘게 떨며 눈을 흐리게 떴다. 초점이 풀린 눈동자에 저를 집어삼킬 듯 포악한 독점욕을 번뜩이는 카시안의 얼굴이 들어왔다.지독한 취기에 이성이 통째로 녹아내린 그녀는 제 몸을 짓누르는 이 압도적인 무게감을 그저 서글픈 환각이라 확신했다.“꿈이구나…….”블랑의 입술 사이로 나른하고 실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눈가에 고여있던 투명한 눈물이 귀밑으로 툭 떨어졌다.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이 서늘한 환각을 안아버리겠다는 듯 힘 풀린 팔을 뻗어 카시안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가끔은…… 이런 꿈도 나쁘지 않지.”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그의 넓은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밀착되었다. 사방으로 끼치는 지독한 위스키 향 속에서, 블랑이 카시안의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으며 웅얼거리듯 속삭였다.“어차피 꿈이니까…… 마음대로 해, 카시안.”그 체념 섞인 허락이, 카시안을 억누르던 마지막 이성의 빗장을 산산조각 내버렸다.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자를 보며,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잔인한 가학증과 지독한 성욕이 왈칵 뒤엉켜 솟구쳤다.“네가 원한 거다, 로제.”카시안의 낮고 굵은 한숨이 블랑의 젖은 입술 위로 내리꽂혔다. 입술을 가르는 통증과 함께 지독한 위스키 향과 황제의 거친 타액이 끈적하게 섞여 들었다. 질척한 마찰음이 밀실 같은 침실 안에 외설적으로 울렸다.그의 입술은 이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가슴골 사이에 말라붙은 호박색 액체를 사납게 핥아 올렸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자극에 블랑이
Read more

106화

다음날 아침,지독한 숙취가 머리를 반으로 쪼개는 것 같았다.“으음…….”블랑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눈을 떴다. 익숙한 서쪽 별궁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 레녹의 마차를 타고 들키지 않은 채 침대까지는 무사히 돌아온 모양이었다.“부인……! 일어나셨어요?”침대 곁에서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던 에다가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들고 있는 트레이에는 해장용 꿀물이 놓여 있었지만, 에다의 안색은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에다…… 물 좀 줘. 목이 타네.”블랑은 상체를 일으키려 매트리스 짚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윽……!”허리와 골반을 끊어낼 듯한 뻐근한 과부하가 전신을 타고 강렬하게 들이쳤다. 술 기운으로 인한 두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언가에 가차 없이 짓눌리고 꺾인 듯한 노골적인 감각이었다.은밀한 곳은 열감으로 홧홧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젖은 허벅지 안쪽이 움직일 때마다 끈적하게 달라붙었다.‘이게 뭐지……?’황급히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제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손끝에 점액질처럼 묻어 나오는, 밤새 짓이겨진 농밀한 정사의 흔적. 뒤이어 코끝을 스치는 지독한 위스키 향과 낯익은 진한 체취를 확인한 순간, 블랑의 사고가 서서히 얼어붙었다.어젯밤의 기억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분명 독주에 취해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카시안이 제 옷을 찢고,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사납게 몰아쳤던 기억.‘꿈이니까…… 마음대로 해, 카시안.’제 입으로 그 서늘한 허락을 건넸던 기억이 벼락처럼 머릿속을 스쳤다.‘……그게 꿈이 아니었다고?’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로 뚝 떨어졌다. 술김에 미쳐서 카시안에게 몸을 내준 것도 모자라, 그 지독한 폭주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매달렸다니.블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다가 건넨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고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누르며 물었다.“에다. 어제…… 폐하가 오셔서 어떻게 됐지?”“…….”“말해. 내가 실수한 게 있어? 내 입으로 무슨 말이라도 뱉었느냐고
Read more

107화

‘자, 어떻게 반응하실까.’거짓말이었다.간밤 폐하는 결코 밖에서 들릴 만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은 적이 없었다.앞치마를 쥔 에다의 손에 서늘한 땀이 배었다. 정말 기억을 잃은 가여운 정부라면,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안은 황제에게 투기와 비참함을 보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 껍데기 속에 웅크린 것이 다른 존재라면…….‘알아야겠어. 당신이 이름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블랑인지, 아니면 내가 영원히 충성해야 할 주인님인지.’‘로제를 불렀다고? 나를 안으면서?’블랑은 실소하며 제 옆자리를 쓸었다.짚어낸 시트는 온기라곤 먼지 한 톨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내가 로제라는 걸 모르는 거야. 알았다면 이렇게 갔을 리가 없어.’그럼 그에게 나는 뭐지?나는 그저 껍데기뿐인 대용품이자, 자위 기구에 불과한가?‘기억을 잃은 가련한 백치 정부 따위, 밤새 욕정이나 풀고 가 버려도 그만인 장난감이다 이거지.’“…….”수치심을 넘어선 맹렬한 모멸감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블랑이 덜덜 떨리는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 에다가 쐐기를 박듯 폭탄 같은 소문을 꺼내 놓았다.“그, 그리고 부인. 지금 황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젯밤 폐하께서…… 어떤 정체 모를 여인을 마차에 태워 데려오셨다고 합니다.”“뭐……?”“그 여인을 동쪽 별궁에 숨기셨대요.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하게 꽁꽁 싸매서, 폐하께서 손수 안아 들고 방 안까지 모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찻잔을 쥐고 있던 블랑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갔다.어젯밤. 제 안에 욕망을 쏟아내며 로제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 시간에. 카시안은 또 다른 여자를 황궁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하……, 하하하.”블랑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기가 막힌 실소가 터져 나왔다.밤새 저도 모르게 겪은 정사와, 대용품으로 전락한 끔찍한 진실, 그리고 동쪽 별궁의 여자. 모든 파편이 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정교하게 결합했다.‘역시 잔인하고 역겨운 인간. 로제
Read more

108화

해가 중천에 떠오른 나른한 오전 11시.동쪽 별궁, 백합관 앞. 그곳은 이름처럼 아름답고 화사해야 할 곳이었으나, 지금의 풍경은 묘하게 기괴했다.사랑받는 애첩을 위한 은밀한 온실이라기엔 공기가 너무도 삭막했다. 창문이란 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빈틈없이 봉쇄되었고, 별궁을 둘러싼 기사들은 의장대가 아니라 당장 마물과 실전을 치를 살수들처럼 중무장한 채 출입구를 겹겹이 틀어막고 있었다.웃고 떠드는 시녀들의 발길조차 철저히 끊긴 그곳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은신처라기보다 흉악범을 가둬둔 거대한 감옥 같았다.그 살벌하고 무거운 풍경 속에, 황궁의 공기를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블랑이었다.작정이라도 한 듯, 그녀의 옷차림은 누구나 한번 돌아볼 만큼 관능적이었다.살구빛 안감 위를 촘촘하게 뒤덮은 칠흑 같은 블랙 레이스 드레스.밝은 태양 빛 아래서 그 옷은 시각적인 폭력이 되었다.햇살이 비칠 때마다 안감의 색이 하얀 피부 톤과 뒤섞여, 마치 알몸 위에 아슬아슬한 검은 거미줄만 감아놓은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치켜올린 목에는 핏방울처럼 붉은 루비 초커 하나만이 위태롭게 달랑거렸다.그 모습은 질투에 눈먼 천박한 정부라기보다, 밤새 황제의 진액을 남김없이 빨아먹고 둥지에서 걸어 나온 독거미처럼 위험하고 고혹적이었다.“비키세요. 같이 폐하를 모시는 처지끼리, 면상이나 익혀두려 왔으니까.”블랑은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부채를 탁, 펼쳤다. 햇빛을 가리는 용도였지만,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에게는 숨통을 조이는 위협처럼 느껴졌다.“송, 송구합니다만 부인. 폐하의 엄명입니다. 그 누구도 들일 수 없습니다.”“누구도 못 들어간다? 그럼 나오라고 하세요. 내가 친히 발걸음을 했는데.”블랑은 접은 부채 끝으로 기사의 단단한 흉갑을 툭툭 치며 나른하게 속삭였다.기사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시선을 블랑의 목 아래로 내리지 못했다. 대낮의 적나라한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실루엣과, 가슴골 부근에 희미하게 남은 붉은 잇자국이 너무 자극적
Read more

109화

달그락.마차 문이 닫히자 좁고 어두운 마차 안으로 햇빛에 달궈진 블랑의 몸에서 밤새 짓이겨진 비릿한 체취가 확 끼쳐왔다. 레녹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차갑게 억누르며 정곡을 찔렀다.“어제 저잣거리에서 알리바이를 만들라고 건넨 위스키를 겁도 없이 병째로 들이부으시더니. 결국 폐하께 온몸을 내어주셨습니까.”블랑은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자조적으로 대꾸했다.“네. 덕분에 필름이 완전히 끊겼죠. 눈을 떠보니 남은 건 끔찍한 통증과 흔적뿐이고요. 그런데 황제란 작자의 취향을 모르겠네요. 밤새 날 그렇게 안았으면서, 동쪽 별궁에 다른 여자를 숨겨뒀다니.”“숨겨둔 게 아니라, 가둬둔 거겠죠.”레녹이 차갑게 블랑의 말을 정정했다.“동쪽 별궁의 경비 태세는 보셨을 테죠. 부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품에 안고 밤을 새웠을 텐데, 황제는 그녀를 감옥처럼 가둬놓고 부인에게 와서 미친 듯이 욕정을 풀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별궁의 여자는 애첩이 아니라 정치적 인질이거나, 부인의 목을 조르기 위한 덫일 확률이 높습니다.”블랑의 눈이 커졌다. 레녹의 날카로운 분석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갔다.“하지만 지금 그 별궁의 정체보다 더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부인.”레녹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깔려 있었다. 그의 짙은 시선이 블랑의 목덜미를 지나, 드레스 안쪽으로 가려진 그녀의 아랫배를 향해 꽂혔다.“기억도 없이 폐하의 욕정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면…… 사후 피임은, 하셨습니까?”순간, 마차 안의 공기가 뚝 멈췄다.블랑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황제의 품에서 눈을 뜬 직후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가 제 안에 남겼을지도 모를 치명적인 씨앗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지금 아이를 갖는 건, 우리가 쥘 수 있는 최악의 팹니다.”레녹이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상체를 숙여 블랑의 코앞까지 다가왔다.“임신 초기가 되면 당장 폐하의 밤부터 온전히 감당할 수 없겠
Read more

110화

동쪽 별궁, 백합관의 2층 테라스.타티아나는 커다란 창문의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낸 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창문 틈 사이로 조금 전의 소란이 고스란히 보였다. 검은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황궁의 안주인 행세를 하던 그 은빛 머리카락의 정부.‘블랑이라고 했지.’기사들에게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타티아나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풋.”입가를 가리고 흘러나온 비웃음엔 노골적인 우월감이 묻어 있었다.‘어설픈 짝퉁 주제에.’자신이 떠나간 자리에 채워진 가여운 대용품.‘카시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이니까. 이해해야지.’어쨌든 결국 이 백합관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누군가는 황제가 내린 엄명을 두고 타티아나를 감금한 것이라 수군거렸지만, 타티아나의 해석은 전혀 달랐다.‘이건 감금이 아니야. 나를 지키기 위한 성역(聖域)이지.’그녀는 창틀을 어루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엘런의 폭력과 시골 영지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서 벗어나, 저 천박한 것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얀(카시안)이 나를 철저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유리관 속에 애지중지 모셔둔 최고급 보석처럼.“시녀장.”그녀의 부름에, 방구석에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예, 부인. 부르셨습니까.”“은밀히 전할 서신이 있어. 하나는 아이린 영애에게, 또 하나는 내 본가인 백작저로 보내.”타티아나의 눈동자가 영악하게 빛났다. 어젯밤 연회장에서 아이린의 도움으로 카시안의 눈에 띄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까지고 그녀의 선의에 기댈 순 없었다.‘아이린은 황후 자리를 노리고 나를 방패막이로 썼겠지. 하지만 이 황궁 사교계에 내 자리를 굳히려면 그 여자의 인맥이 필요해. 본가의 아버지는 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걸 알면 당장 내게 유용한 정보통들을 붙여줄 테고.’타티아나는 치밀하게 계산했다.자신은 가련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영지 부인으로 남아야 했다. 뒤에서 아이린과 가문을 조종해 사교계의 여론
Read more
PREV
1
...
891011121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