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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사람

71화.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사람“하늘 씨? 무슨 일 있습니까? 하늘 씨!”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동혁의 목소리가 단숨에 거칠어졌다.늘 얼음처럼 차분하던 남자의 음성이 이토록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하늘은 가로수 밑에 주저앉아 무릎에 머리를 박은 채, 대답 대신 꺼진 가스 밸브처럼 쇳소리 나는 울음만 뱉어냈다.목구멍이 꽉 막혀 아무런 단어도 만들어지지 않았다.“하늘아, 내 말 들려? 지금 어디야. 집 안이야?”다급함에 직함마저 잊은 동혁의 날 것 그대로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수화기 너머로 의자가 뒤로 밀리는 거친 소음과 가죽 재킷을 낚아채는 바스락거림, 그리고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티, 팀장님…….”하늘이 간신히 그의 직함을 불렀다.하지만 그다음 문장은 흐느낌에 막혀 비명처럼 부서졌다.“나…… 나 어떻게 해요? 나 어떡해…….”“아무 말 안 해도 됩니다. 울어도 되니까 내 목소리만 들어요. 지금 움직이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거 하나만 말해봐요. 응? 어디예요.”동혁의 목소리는 차분해지려 애쓰고 있었지만, 거칠게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거는 기계음이 그의 다급한 심계를 대변했다.하늘은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를 간신히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멀리 깜빡이는 노란색 보행자 신호등, 그리고 낯익은 빵집의 간판이 보였다.“우리 아파트…… 상가 앞이요. 큰 길가…….”“금방 갑니다. 딱 5분만 기다려요. 길가로 나오지 말고, 가로수 밑에 가만히 있어요. 알았죠?”전화는 끊기지 않았다.동혁은 스피커폰을 켠 채 거칠게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았다.밤바람을 가르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하늘의 귓가에 웅웅거렸다.하늘은 그 소리를 이정표 삼아, 당장이라도 자신을 삼킬 것처럼 일렁이는 밤의 어둠을 버텨냈다.멀리서 헤드라이트의 강한 불빛이 어둠을 찢으며 달려왔다.거칠게 타이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동혁의 차가 급정거했다.문이 열리자마자 셔츠 차림의 동혁이 미친 듯이 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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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든든한 내 편

72화. 든든한 내 편얼마 후, 차는 도심 외곽에 있는 단정한 오피스텔 주차장에 멈춰 섰다.동혁은 시동을 끄고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그리고 아까처럼 하늘을 품에 안아 들었다.품 안으로 가볍게 꺾여 들어오는 그녀의 몸이 너무나 가냘파서, 동혁은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엘리베이터가 슬라이딩 도어를 닫고 조용히 상승했다.거울에 비친 동혁의 셔츠는 하늘의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하늘의 찌푸려진 미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띡, 띡, 띡, 띠리릭.’현관문이 열리고 들어선 동혁의 집은 주인을 닮아 지나치게 단정하고 고요했다.거실에 짙은 회색 조의 가구들이 미니멀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옅은 커피 향과 세탁 세제 냄새가 섞여 감돌았다.동혁은 거실 소파에 하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그는 주방으로 가 따뜻한 물을 컵 가득 채워왔다.그리고 하늘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컵을 쥐여주었다.유리에 닿은 손가락이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동혁은 그 손을 감싸 쥐며 낮게 읊조렸다.“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오빠든, 부모님이든, 그날 밤의 일이든 전부 다요.”“팀장님…….”“지금 하늘 씨가 지켜야 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내일 아침을 맞이할 하늘 씨 자신입니다. 다른 건 내가 다 대신 생각하고 고민할 테니까, 여기선 그냥 숨만 편히 쉬세요.”동혁은 안방에서 가장 부드러운 새 침구와 헐렁한 티셔츠 한 장을 꺼내 와 소파 옆에 두었다.그는 하늘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거실 불을 은은한 간접 조명만 남긴 채 꺼주었다.어스름한 어둠이 내린 동혁의 거실에서, 하늘은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진정제의 기운과 오피스텔 특유의 묵직한 정적이 스며들자, 하늘의 거칠었던 호흡도 한결 고르게 가라앉았다.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컵의 온기는 기이할 정도로 정직해서, 억지로 소용돌이치던 감정의 날을 무디게 만들어주었다.하늘은 컵 표면에 맺힌 잔잔한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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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두려운 바다

73화. 두려운 바다동혁은 주머니 속으로 휴대전화를 밀어 넣었지만, 액정의 잔상이 가신 어둠 속에서도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다.멀리 보이는 도심의 불빛들이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담겼다..유바다의 침묵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동생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아홉 살의 나이에 부모의 죽음을 방조하고, 그 비밀을 홀로 감당해 온 남자의 삶.그것은 칭송받을 영웅의 서사도, 그렇다고 온전히 비난받을 죄인의 굴레도 아니었다.단지 지독하게 비극적인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었다.하지만 동혁은 감상에 젖지 않기로 했다.유바다의 사정이 아무리 절절할지라도, 지금 제 안방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려 잠든 하늘의 현실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다.동혁은 베란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다시 거실로 걸어 나왔다.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카펫 위를 소리 없이 스쳤다.하늘에게 다가간 동혁은 가만히 허리를 숙였다.하늘은 부드러운 이불을 꼭 쥔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진정제 탓에 거친 호흡은 잦아들었지만, 속눈썹 끝에는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방울이 매달려 가로등 불빛에 잘게 빛났다.잠결에도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굳은 손가락 마디가 안쓰러워 보였다.동혁은 가만히 침대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리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하늘의 작은 손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손끝에 닿는 온기가 아까보다 조금은 더 따스해져 있었다.‘얼마나 더 깨어지셔야 합니까.’속으로 삼킨 질문은 무거웠다.3년 전의 사건으로 세상과 담을 쌓았던 여자가, 이제 막 제 손을 잡고 시장 바닥을 걸으며 세상 밖으로 한 뼘 발을 내디뎠던 날이었다.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그날 밤에, 인생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밑바닥 진실이 터져 나왔다.평범한 사람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의 연속이었다.그럼에도 동혁은 하늘이 완전히 부서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아까 차 안에서 제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며 진실을 뱉어내던 하늘의 눈빛은, 예전처럼 도망치려는 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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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바다의 짐

74화. 바다의 짐다음 날 아침, 사옥의 공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하고 무거웠다.유바다는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구동혁의 자리로 직행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그의 눈가에는 붉은 핏줄이 가득 서 있었고, 와이셔츠 깃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팀장님. 저랑 잠시 얘기 좀 하시죠.”바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묘한 절박함이 묻어났다.주변 팀원들의 시선이 은근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동혁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바다를 올려다보았다.그의 초토화된 얼굴을 묵묵히 응시하던 동혁은, 군더더기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이 향한 곳은 인적 없는 사옥 옥상이었다.5월의 이른 아침 바람이 옥상 철문을 열자마자 두 남자의 뺨을 차갑게 때렸다.바다는 난간을 붙잡은 채 한참 동안 먼 도심의 빌딩 숲을 바라보다가, 겨우 뒤를 돌아섰다.“하늘이는…… 괜찮습니까?”참아왔던 첫마디가 힘겹게 떨어졌다.“네. 잘 자고 있는 거 확인하고 출근했습니다.”동혁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그의 태도는 평소처럼 냉정하리만치 차분했다.“……감사합니다.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바다가 고개를 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동생을 다른 남자의 집에 밤새 맡겨두어야 했던 오빠의 자괴감과 그럼에도 무사히 돌봐주었다는 안도감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사였다.그러나 동혁은 그 고마움을 당연하게 수령하지 않았다.오히려 고개를 아주 살짝 꺾으며 바다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었다.“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머무르게 한 건 아닙니다. 하늘 씨는 바다 씨 동생이기도 하지만, 제 연인이기도 하니까요.”선포에 가까운 단호한 음성이었다.‘내 여자’라는 과한 소유욕 대신, 하늘의 삶에 자신 역시 지킬 권리가 있는 주체라는 명확한 선 긋기였다.바다는 그 묵직한 한 방에 뒤통수를 맞은 듯 입을 다물었다.동혁이 하늘을 향해 품고 있는 마음의 무게가 전혀 가볍지 않음을, 남자의 직감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옥상 한구석의 환풍기 돌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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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몸 따로 마음 따로

75화. 몸 따로 마음 따로불을 끄고 정성스레 끓여진 죽을 그릇에 옮겨 담는 하늘의 손길은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죽을 한 입 입에 넣었다.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고소하고 슴슴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텅 비어 있던 속을 따뜻하게 채웠다.억지로 넘기는 불쾌한 식사가 아니었다.그것은 살기 위한, 그리고 마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발버둥이었다.‘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열세 살의 유바다가 감당해야 했을 부모의 무책임과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밤새 약병을 바꾸며 떨었을 그의 절박함.그리고 그 끔찍한 진실을 혼자 짊어진 채 매일 밤 악몽을 꾸었을 오빠의 나날들.그것은 분명 자신을 향한 지독한 사랑이자 헌신이었다.하지만 가슴은 그 숭고한 의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오빠를 만나면 고맙다고 울어야 할지, 왜 나를 속였느냐고 뺨이라도 때려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이 처참한 균열을 안은 채 앞으로 바다를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 할지, 그 앞에 서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하늘은 턱을 무릎 위에 얹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의 기만은 잔인했고, 오빠의 헌신은 눈물겨웠다.***‘띡, 띡, 띡, 띠리릭.’현관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제 무릎을 안 가슴팍으로 끌어당기고 있던 하늘의 귀가 쫑긋 들렸다.방 안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이내 안방 문틀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묵직한 발소리를 들었다.“하늘 씨.”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들어선 동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하루 종일 바깥의 건조한 대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온 남자의 어깨엔 얇은 피로가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방 안의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아, 팀장님. 오셨어요.”하늘은 웅크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목소리엔 아직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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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언제까지 팀장님입니까?

76화. 언제까지 팀장님입니까?하늘은 제 손가락 사이사이를 촘촘하게 파고든 동혁의 커다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가볍게 쥔 손이 아니었다.도망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마디마디마다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어지럽게 널뛰던 영화 속 배경음악이 아득한 귓전으로 밀려났다.지금, 이 거실에서 숨이 막힐 만큼 선명한 것은 오직 손끝을 타고 끊임없이 번져오는 남자의 강인한 체온뿐이었다.“……팀장님.”“영화에 집중 안 합니까.”동혁은 시선을 여전히 정면 화면에 고정한 채 나직하게 대꾸했다.겉으로는 평소처럼 무덤덤해 보였지만, 하늘의 손을 쥔 손등 위로 푸르게 돋아난 핏줄이 그의 속내 역시 아주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하늘은 힘을 주어 꼼지락거리던 발끝을 슬며시 내렸다.억지로 밀어내거나 뺄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오히려 그가 잡아 주는 완강한 압박감이, 맥없이 바닥으로 꺼지려던 하늘의 위태로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주는 닻처럼 느껴졌다.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하늘이,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제 손을 꽉 맞잡은 그의 체온이 여전히 단단한 구원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온전한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하늘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려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직하게 입을 뗐다.“죄송하지만…… 며칠만 더 신세 져도 될까요?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돼서요.”오빠의 집으로 돌아가 뒤엉킨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아주 조금 부족했다.동혁은 그런 하늘의 위태로운 망설임을 대번에 읽어내렸다.그는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오히려 당연한 명제를 증명하듯 무덤덤하면서도 깊은 음성으로 대답했다.“물론이죠. 하늘 씨가 있고 싶은 만큼 있으셔도 됩니다. 얼마든지.”“감사해요…….”“연인이 함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죠.”또다시 툭 던져지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하늘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간질였다.구동혁이라는 남자가 새로이 지어 올린 울타리는 이토록 가차 없고 따스했다.남자의 겉치레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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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호칭

77화. 호칭“예?”“저는 회사에서 하늘 씨의 오빠인 유바다 씨의 팀장인 걸로 아는데. 여기선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동혁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짓궂게 속삭였다.갑작스러운 호칭 지적에 당황한 하늘은 자기도 모르게 동혁의 가슴팍에서 몸을 바짝 떼어냈다.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는 하늘의 뺨에는 채 마르지 않은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울다 지쳐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해 주려는 그의 속 깊은 배려라는 걸 알면서도, 막상 훅 치고 들어오는 연인으로서의 압박감에 가슴이 다시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동혁은 여전히 소파 뒤로 등을 기댄 채,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하늘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제 손가락 끝만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조금 전 “사랑해요”라고 먼저 고백할 때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팀장님’ 세 글자가 아닌 다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상상만으로도 목덜미가 화끈거렸다.“글쎄요. 연인 사이에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뭐가 있더라.”동혁이 턱을 괴며 짐짓 고민하는 척을 했다.스크린의 엷은 푸른 불빛이 그의 날렵한 턱선과 장난기가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비추었다.“오빠라고 부르기엔 바다 씨가 먼저 선점한 직함이라 하늘 씨가 헷갈릴 것 같고. 그렇다고 여기서까지 팀장님 소리를 듣자니 꼭 연장 근무를 하는 기분이라서 말이죠.”그의 능청스러운 투정에 하늘의 입가에서 기어이 자그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슬픔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여자를 이토록 순식간에 끌어올려 웃게 만드는 것은, 오직 구동혁이라는 남자만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었다.“가, 갑자기 이름 부르기엔 너무 어색해요.”하늘은 제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만 애꿎게 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구동혁이라는 남자가 가진 무게감과, 회사에서 항상 ‘팀장님’이라 부르며 굳어진 언어의 습관은 생각보다 단단했다.이제 와서 면전에 대고 “동혁 씨”라고 부르는 상상만 해도 온몸의 솜털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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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첫 입맞춤

78화. 첫 입맞춤동혁은 찌른 손가락이 무색할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뻔뻔하게 응수했다.그의 굵직한 음성에 묻어나는 웃음기가 하늘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게 쏟아졌다.하늘은 고개를 살짝 돌려 동혁의 단단한 턱끝을 올려다보았다.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푸른 불빛이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의 음영을 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장난을 걸고는 있지만, 자신을 품에 안은 그의 품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완강하고 아늑했다.그 완고한 온기가 하늘의 긴장감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켰다.온 세상이 나를 속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숨도 쉬지 못했던 몇 시간 전이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질 만큼, 이 사소하고 유치한 실랑이가 그녀를 단단하게 현실로 붙들어 매고 있었다.“치사한 팀장님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신사적으로 굴 생각도 있습니다만.”동혁이 하늘의 어깨를 제 품 쪽으로 조금 더 밀착시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얕은 숨결에 하늘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렸다.“……생각해 볼게요. 그러니까 당장 대답 안 하셔도 째려보지 마세요.”“째려본 적 없습니다. 기회를 주는 거지.”동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하늘은 기어이 참았던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렸다.지독한 슬픔의 밑바닥에서 자신을 건져 올려 마침내 소리 내어 웃게 만드는 남자.하늘은 동혁의 품에 등을 완전히 기대며, 그가 쥔 제 손가락 마디마디에 슬며시 힘을 주어 맞잡았다.호칭을 두고 투덜거리던 하늘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거실에는 다시금 영화의 잔잔한 배경음악만이 낮게 깔렸다.동혁의 품에 기대어 있던 하늘의 등 뒤로, 그의 심장 박동이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르고 묵직하게 울리는 것이 전해졌다.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감지한 하늘이 침을 삼키는 순간, 정수리 위로 동혁의 가라앉은 음성이 쏟아졌다.“……하늘 씨.”“네.”하늘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짐짓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동혁의 눈동자는 어느새 깊고 어두운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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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죄인의 무게

79화. 죄인의 무게“글쎄요. 기회를 잡는 거라고 해두죠, 팀장님.”하늘이 일부러 마지막 단어에 힘을 주며 생긋 웃었다.그 미소가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동혁은 하늘의 가느다란 허리를 힘껏 감싸안아 제 무릎 위로 완전히 당겨 앉혔다.단숨에 시야가 뒤바뀌며 동혁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자 하늘의 입술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동혁은 단 한 순간의 틈도 주지 않고 하늘의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조금 전의 서툰 입맞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맹렬한 돌진이었다.하늘의 얄미운 도발을 벌하기라도 하듯, 동혁은 거칠고 밀도 높게 그녀의 입술을 헤집었다.숨이 가빠진 하늘이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손을 올렸지만, 동혁은 도망칠 길을 전면 차단한 채 그녀의 작은 몸을 제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구속했다.거실을 채우던 잔잔한 TV 소리는 이미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조명 아래, 서로의 타는 듯한 숨결을 거칠게 나누는 두 사람의 실루엣만이 정적 속에서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포장마차의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투명한 소주가 가득 채워졌다.허름한 형광등 불빛이 잔술의 표면에 부딪혀 잘게 부서졌다.바다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그 작은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안주 하나 집어 들지 않은 손가락 마디가 허옇게 질려 있었다.툭, 잔 위로 무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며 잔잔하던 술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다.“나는…… 부모를 죽인 살인자야.”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소음 가득한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은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야! 유바다!”시은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탁,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잠시 쏠렸지만, 바다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 눈물이 섞인 투명한 술잔에 고정되어 있었다.“사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도 무서웠어. 그래서 하늘이를 살린 것에 대한 책임감에 더 미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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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80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시은은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진 바다의 어깨를 가까스로 짊어졌다.포장마차를 나와 택시를 잡고, 그의 방 침대에 눕히기까지 몇 번이나 중심이 흔들렸는지 모른다.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이불도 덮지 못한 채 얕은 숨을 몰아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은은 이마에 맺힌 땀을 거칠게 훔쳐냈다.방 안에는 거칠게 널뛰던 남자의 죄책감이 잔흔처럼 흩어져 있었다.술 냄새와 함께 가라앉은 정적을 응시하던 시은은 바지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화면의 푸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굳은 얼굴을 비추었다.연락처 목록을 거슬러 올라가 ‘유하늘’ 세 글자를 찾아 누르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 시각, 동혁의 집 침대에 누워 있던 하늘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 거실 소파에서 나누었던 뜨거웠던 숨결과, 동혁이 남긴 호칭 숙제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던 참이었다.‘동혁 씨…….’입안으로 조용히 굴려본 이름이 낯간지러워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는데, 베개 옆에 두었던 휴대전화가 짧고 강한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시은이었다.오빠의 곁에서 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온 언니.하늘은 가슴팍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통화 버튼을 밀었다.“여보세요.”최대한 덤덤하게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미세한 물기가 섞여 나왔다.수화기 너머로 잠시 거친 숨을 고르는 시은의 음성이 들려왔다.“어, 하늘아. 자고 있었어?”“아니. 무슨 일 있어?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하늘이 침대 위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시은이 제 오빠인 바다와 함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시은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해 봤어.”“…….”“괜찮니?”단순한 안부치고는 지나치게 묵직한 질문이었다.그 짧은 음절 안에 부모의 죽음과 오빠의 기만을 다 알아버린 하늘을 향한 염려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하늘은 이불자락을 쥔 손가락에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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