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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남매의 시간

61화. 남매의 시간뜻밖의 휴가를 얻어냈지만, 식탁 위를 떠도는 공기는 어색한 정적에 잠겼다.바다는 젓가락 끝으로 빈 접시를 의미 없이 톡톡 건드렸다.그동안 그가 하늘과 공유한 것은 '일상'이 아니라 '생존'이었다.여동생이 발작하지 않도록 주변을 살피고, 남자의 접근을 차단하며, 악몽을 꾸지 않는지 밤새 귀를 기울이는 것.그것이 바다가 아는 남매의 시간 전부였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하늘은 더 이상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가 아니었다.뺨에 가시지 않은 온기를 머금은 채, 누군가의 배려에 마음을 흔들거리는 평범한 여자였다. 바다는 그 낯선 생동감 앞에서 길을 잃었다."하늘아, 우리 뭐 할까?"바다의 질문은 허공에서 힘없이 흩어졌다.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기엔 어두운 극장이 하늘에게 줄 압박감이 걱정됐고, 화창한 공원을 걷자니 낯선 남자들과 부딪힐까 봐 지레 겁이 났다.그동안 쌓아온 보호 본능이 즐거움이라는 감각을 압도하고 있었다."하고 싶은 거 있어? 오빠가 다 해줄게."말은 호기롭게 내뱉었지만, 바다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하늘은 잔을 든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동혁이 틔워준 '하루'라는 시간이 너무나 거대해서, 정작 그 안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오빠. 그냥, 우리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을까?"하늘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바다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가장 안전한 요새 안에서의 휴식. 그것이 하늘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자유라는 사실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그래. 오빠가 장 봐올게. 뭐 먹고 싶은데?""음. 우리 쿠키 구워볼까? 냉장고에 재료 좀 있을 거야."쿠키.바다는 생전 처음 듣는 조합에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바다는 서둘러 주방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거창한 외출도, 화려한 이벤트도 아니었지만, 두 남매는 처음으로 '생존'이 아닌 '취미'를 위해 마주 앉았다.식탁 위는 어느새 하얀 쌀가루가 눈처럼 내려앉아 엉망이 되었다.저울도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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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쿠키 같은 든든한 달콤함

62화. 쿠키 같은 든든한 달콤함폭풍 같던 하루가 지나간 밤, 집 안에는 낮에 구운 쿠키의 고소한 잔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하늘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 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만지작거렸다.자판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이 몇 번을 지웠다 쓰기를 반복한 끝에야 짧은 문장 하나를 완성했다.[팀장님 덕분에 오빠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치 제 마음의 일부분을 떼어 보낸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하늘은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누군가에게 일상을 공유하고 감사를 전하는 일이 이토록 가슴 벅찬 일이었는지, 그녀는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그때, 품 안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즐거웠다니 다행입니다. 하늘 씨가 웃는 날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액정 너머로 전해진 문장은 동혁의 평소 말투처럼 단정하고 간결했다.수식어 하나 없는 건조한 문체였지만, 하늘은 그 행간에 담긴 동혁의 진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라는 그 한 마디가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단단한 약속처럼 느껴졌다.무뚝뚝해 보일 수 있는 메시지였지만, 하늘의 심장은 통제 불능 상태로 뛰기 시작했다.이전의 떨림이 숨이 막히는 공포였다면, 지금 느끼는 이 진동은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는 듯한 생경한 설렘이었다.그녀는 동혁이 보낸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으로 덧그려 보았다.마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머무는 것만 같아, 하늘은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렸다.***현관문을 열고 나서려던 바다의 등 뒤로 다급한 부름이 꽂혔다.“오빠!”멈춰 선 바다가 몸을 돌리자, 하늘이 뒷짐을 진 채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건드리며 서 있었다.늘 창백하게 질려 있던 동생의 안색 위로, 오늘 아침에는 옅은 복숭앗빛 생기가 돌고 있었다.“할 말 있어?”바다의 물음에 하늘은 머뭇거리다가 등 뒤에 숨겼던 것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어제 그토록 정성스럽게 리본을 묶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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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저녁 준비

63화. 저녁 준비사무실로 돌아가는 복도, 바다의 발걸음은 아침보다 한결 더 가벼워져 있었다.반면 동혁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쿠키 상자를 보며 오늘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질 것임을 직감했다.숫자와 서류로 가득 찬 일터의 공기 속에, 자꾸만 달콤한 쌀가루 향기가 섞여 드는 기분이었다.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이 감돌았다.한 명은 지켜내야 할 가족의 집으로, 한 명은 그 집의 문턱을 조심스레 넘으려는 초대받은 이의 긴장감을 품은 채로.창밖으로 비치는 아침의 햇살은 두 남자의 등 뒤를 비추며, 오늘 저녁 그 작은 거실에서 피어날 새로운 이야기를 미리 축복하는 듯했다.바다는 휴대전화를 꺼내 하늘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팀장님 오신대. 준비해.’그 문장을 전송하는 바다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머물렀다.***바다의 확답이 담긴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하늘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껴안고 거실을 가볍게 두어 번 깡충거린 후에야, 하늘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시은에게 메시지를 적어 내렸다.[언니, 오늘 저녁 장 보러 같이 가주세요.]그 시각, 병원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확인하던 시은은 휴대전화 진동에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액정에 뜬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장 보러 같이 가자'는 그 평범한 한 마디가 시은에게는 기적의 선고처럼 들렸다.집 안으로 식재료를 배달시키거나 오빠인 바다가 사 오는 것에만 의존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대형 마트 근처는 얼씬도 못 하던 하늘이었다.그런 하늘이 먼저 외출을 제안했다.그것도 사람이 붐비는 마트로 가자는 소리에 시은은 가슴이 벅차올라 잠시 숨을 고르기까지 했다.[그래.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더 기대되는걸?]답장을 보내는 시은의 손가락 끝이 기분 좋게 떨렸다.단순히 저녁을 같이 먹는다는 즐거움을 넘어, 하늘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기로 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하늘은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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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대화

64화. 대화하늘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주방 창을 활짝 열었다.“언니, 일단 이것부터 꽂아둘게.”하늘은 장바구니에서 가장 먼저 프리지어를 꺼냈다.투명한 유리병에 물을 채우고 꽃을 꽂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식탁 정중앙, 동혁이 앉게 될 자리를 가늠하며 꽃병의 위치를 몇 번이나 고쳐 잡았다.노란 꽃잎이 식탁 위로 화사한 그림자를 드리웠다.시은은 팔을 걷어붙이며 식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유 셰프님,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언니는 채소 좀 다듬어 줘. 전골은 육수가 생명이니까 제가 국물부터 낼게.”하늘은 앞치마 끈을 단단히 묶었다.멸치와 다시마, 말린 표고버섯을 넣고 육수를 끓이는 동안 주방에는 이내 구수한 냄새가 차올랐다.칼도마를 두드리는 시은의 경쾌한 소리와 보글거리는 냄새가 어우러져, 늘 정적만 감돌던 집안에 비로소 사람 사는 활기가 돌았다.재료를 손질하던 하늘의 시선이 문득 싱크대 구석에 놓인 빈 찻잔에 머물렀다.동혁이 온기를 나누며 머물렀던 그 흔적.오늘 밤 그가 다시 이 자리에 앉게 된다는 사실이 실감 나자,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하늘아, 고기 밑간은 네가 할 거야?”시은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하늘이 서둘러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간장, 설탕, 다진 마늘을 적절히 배합하고 후추를 톡톡 털어 넣었다.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약속한 저녁 7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전골냄비 속에는 알록달록한 채소와 맛깔스러운 고기가 정갈하게 자리를 잡았고, 식탁 위에는 정갈한 밑반찬들이 정렬을 마쳤다.띵동.짧은 벨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깼다.하늘은 잡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으며 저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왔나 보다!”시은이 현관으로 마중을 나가는 사이, 하늘은 주방 조리대 뒤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현관문이 열리고, 낮게 깔린 바다의 목소리와 그 뒤를 잇는 묵직하고도 정중한 음성이 들려왔다.“실례하겠습니다.”그 목소리 하나에 하늘의 발끝이 간지러웠다.도어록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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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대화 2

65화. 대화 2동혁의 커다란 손이 하늘의 손등을 덮었다.투박하지만 일정한 온기.그 온도는 하늘이 타인의 살결이 주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그것은 침범이 아니라 지탱이었다.“하늘 씨, 고개를 들어보세요.”동혁의 나직한 명령에 하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칠 생각도 못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동혁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하늘이 가진 결핍을 동정하는 눈빛이 아니라, 그 결핍을 딛고 서 있는 한 사람을 향한 경외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사회생활이요? 일상생활이요? 그런 건 배우면 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이 더운 날 직접 장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반죽을 치대고, 자신의 아픔보다 타인의 입맛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동혁의 엄지손가락이 하늘의 손목 부근을 부드럽게 쓸었다.“하늘 씨는 이미 제가 가지지 못한 게 커다란 걸 가졌어요. 그런데 제가 무엇을 부담스러워하고, 무엇을 후회한다는 겁니까.”“하지만 전…. 여전히 문밖이 무섭고, 가끔은 숨이 막혀요. 팀장님 같은 분 곁에 서기에 저는 너무….”“혼자 서라고 안 합니다. 제가 옆에 있을 거니까요.”동혁이 상체를 슬쩍 숙여 하늘과 눈높이를 맞췄다.식탁 위에 놓인 노란 프리지어 꽃잎이 두 사람 사이의 좁혀진 거리만큼 가늘게 떨렸다.“지치면 잠시 멈추세요. 뒤처지면 제가 걸음을 늦추면 됩니다. 하늘 씨가 견뎠듯, 저도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하늘은 멍하니 동혁의 눈동자를 응시했다.그 안에는 어떠한 거짓이나 과장도 없었다.그저 바다처럼 깊고 고요한 확신만이 일렁이고 있었다.왈칵,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슬퍼서가 아니라, 비로소 누군가에게 온전히 이해받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동혁은 손을 뻗어 하늘의 뺨에 흐른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손가락 끝에 닿은 피부의 촉감이 서늘했지만, 그 안에서 박동하는 생명력은 뜨거웠다.“울지 마세요. 오늘 전골, 정말 맛있었습니다. 제가 먹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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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맑은 하늘

66화. 맑은 하늘[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늘 씨에게도 즐거운 저녁이었길 바랍니다.]오늘 밤은 동혁이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여전히 젠틀한 내용이었지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는 건 하늘에 대한 조심성을 한 꺼풀 벗겨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하늘은 미소를 지으며 동혁의 메시지를 읽었다.침대 위에 엎드려 화면을 띄워놓은 채, 하늘은 한참 동안 깜빡이는 커서만 내려다보았다.방금 전송한 문장이 액정 위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저 오빠한테 말했어요. 팀장님 좋아한다고.]전송 버튼을 누를 때의 그 무모했던 용기는 어디로 갔는지, 손바닥에는 어느새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동혁은 늘 신중한 사람이었다.그런 그에게 이토록 직설적인 고백은 어쩌면 너무 무거운 숙제를 던진 건 아닐까.아니면, 오빠인 바다에게 허락을 구하는 식의 보고가 그를 당황하게 만든 건 아닐까.하늘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1분, 2분.평소라면 금방 도착했을 답장이 오지 않자, 시간은 기괴할 정도로 느리게 늘어졌다.침묵이 길어질수록 하늘의 머릿속은 불길한 상상들로 채워졌다.너무 앞서갔나 하는 자책이 심장을 조여올 때쯤, 손바닥 아래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화면에는 메시지 알림이 아닌, 동혁의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하늘은 들이마시던 숨을 멈췄다.텍스트가 아닌 목소리를 택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통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여보세요.”가까스로 내뱉은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수화기 너머로는 잠깐 동혁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그 짧은 정적이 폭풍 전야처럼 느껴져 하늘이 입술을 깨물던 찰나, 동혁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낮게 울렸다.“하늘 씨.”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고,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문자를 보고 바로 답장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글로 남기기엔 제 마음이 너무 벅차서요.”“아…….”“바다 씨에게 말했다는 건, 이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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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데이트

67화. 데이트동혁과의 시간은 느릿하면서도 견고하게 흘러갔다.평일 저녁, 해가 진 뒤의 도심은 여전히 하늘에게 서늘한 공포의 잔상을 남기곤 했다.퇴근길 인파의 어깨가 스칠 때마다 움츠러드는 하늘의 기색을 동혁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평일의 만남을 서두르는 대신, 밤마다 길게 이어지는 메시지와 통화로 그 빈자리를 다정하게 메웠다.“오늘은 날이 좀 덥죠? 내일은 아침 일찍 데리러 가겠습니다.”금요일 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동혁의 낮은 목소리는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완벽한 신호였다.토요일 아침, 하늘은 익숙했던 무채색의 옷 대신 연한 미색의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현관문을 열면 쏟아지는 눈 부신 햇살이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아파트 입구에 정차된 동혁의 차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미세한 설렘이 묻어났다.두 사람의 데이트는 주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공원이나, 창밖으로 산과 강이 흐르는 외곽 드라이브 코스였다.동혁은 사람이 붐비는 유명 맛집이나 화려한 쇼핑몰을 먼저 제안하는 법이 없었다.그는 하늘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안전한 거리’를 본능적으로 가늠했다.“저기 벤치에 좀 앉을까요? 바람이 좋네요.”동혁이 가리킨 곳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드리운 짙은 그늘 아래였다.하늘은 동혁의 곁에 앉아 눈을 감고 공기를 들이마셨다.왁자지껄한 소음 대신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와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팀장님, 저 오늘은 마트 말고 시장 구경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아주 잠깐이라도요.”하늘의 느닷없는 용기에 동혁이 고개를 돌렸다.그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하늘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조금씩 해보죠. 힘들면 바로 말해줘야 합니다. 바로 돌아갈 수 있게.”차창을 내리고 달리는 도로 위에서 하늘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바람을 만끽했다.동혁은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쪽 손으로 하늘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거창한 이벤트나 화려한 고백은 없었지만, 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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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영원한 비밀은 없다

68화. 영원한 비밀은 없다현관문을 열자마자 찌개 끓는 냄새와 함께 익숙한 옥타브의 웃음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동혁을 보내고 마음에 가득 차올랐던 옅은 아쉬움이 그 온기에 단숨에 흩어졌다.“하늘아, 왔어?”식탁 의자에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시은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홈웨어를 걸치고 주방을 서성이는 바다의 모습까지, 거실은 이미 주말 저녁 특유의 아늑함으로 채워져 있었다.“언니, 언제 왔어?”“퇴근 도장 찍자마자 빛의 속도로 날아왔지. 네 오빠 주말인데 혼자 심심해서 눈물 훔치고 있을까 봐 놀아주러 왔다, 왜.”시은이 턱끝으로 바다를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바다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냄비 뚜껑을 열어 간을 보았다.시은은 고개를 돌려 하늘의 뺨을 유심히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레 웃었다.“우리 하늘이, 오늘 데이트 아주 잘하고 왔나 보네? 얼굴에 아주 봄이 피었어.”“응…….”하늘은 부끄러운 듯 검은 봉지를 등 뒤로 쓱 감추며 목소리를 뭉뚱그렸다.“아이고, 부러워라. 세상 든든하고 다정한 남친도 두고, 유하늘 출세했네.”시은의 장난 섞인 부러움에 하늘은 배시시 웃다가, 문득 식탁 위에 놓인 시은의 차 키와 바다가 깎아놓은 과일 접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주말마다 제 집처럼 드나들며 오빠의 말벗이 되어주는 시은의 존재가 오늘따라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언니는 왜 우리 오빠랑 안 사귀어?”“뭐? 콜록!”물 조절을 하던 바다가 헛기침을 터뜨렸고, 시은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순간 정적이 감돈 거실에서 시은이 어이없다는 듯 기가 찬 웃음을 뱉었다.“야, 유하늘.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오빠랑 나랑은 전우애야, 전우애.”“하하, 뭐야 그게.”하늘은 그제야 긴장이 완전히 풀린 듯 소리 내어 웃었다.그리고 등 뒤에 숨겨두었던 검은 봉지를 식탁 위에 툭 내려놓았다.아직 식지 않은 묵직한 온기가 테이블 위로 퍼졌다.“아! 나 오늘 시장 구경하고 왔어. 사람 엄청 많은 재래시장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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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진실

69화. 진실“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거실을 채우던 고요가 일순간에 찢겨 나갔다.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뒤틀리듯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억누르려 할수록 호흡은 가빠졌고, 눈앞의 바다와 시은의 형체가 흐릿하게 번져갔다.눈물방울이 턱끝을 타고 바닥 위로 툭툭 떨어졌다.“엄마, 아빠가 왜? 어떻게 죽었길래 나한텐 비밀이야? 왜 나만 몰라야 하는데?”“하늘아, 그게 그러니까…….”바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하늘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엉거주춤 멈춰 섰다.그의 얼굴은 마치 죄수처럼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하늘은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악을 쓰듯 말을 내뱉었다.“우리만 두고 자살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그런 거지? 우리가 짐스러워서, 내가 미워서 버린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잖아!”“아, 아니야! 하늘아, 그런 거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바다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하지만 그 격렬한 반응이 오히려 하늘에게는 확신이 섰다.“그러면 뭔데! 뭔데 지금까지 나한테 숨겨? 시은 언니도 아는걸, 친딸인 나는 왜 몰라야 하냐고! 이게 말이 돼?”“하늘아…….”바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비통함으로 일그러진 그의 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동생의 상처를 헤집지 않으려 평생을 짊어져 온 비밀이, 최악의 타이밍에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동생의 가슴에 박히고 있었다.그 무력감에 바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시은이 서둘러 식탁을 돌아서 하늘에게 달려들었다.그녀는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하늘의 가느다란 어깨를 꽉 감싸안았다.“하늘아, 일단 언니 봐. 언니 눈 봐. 우선 진정해야 해. 너 지금 숨 너무 가빠. 이러다 또 발작 올라와. 어? 약, 약 어딨어? 일단 약부터 먹고 이야기하자. 응?”간호사로서의 본능과 언니로서의 공포가 시은의 목소리를 다급하게 만들었다.시은은 하늘을 반강제로 이끌어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그리고 서랍장을 거칠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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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균열

70화. 균열“내 행복을 핑계로 오빠의 죄책감을 타협하며 살아온 거야.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면서도, 결국 진실을 마주하기 무서워서 도망치며 치사하게 버텨온 거라고! 유하늘의 행복이라는 완벽한 빌미를 방패 삼아서!”“하늘아…….”바다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나직하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늘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악에 받친 소리를 쏟아냈다.손끝이 바다의 가슴을 향해 못 박히듯 흔들렸다.그것은 단순히 바다를 향한 원망이 아니었다.자신을 살리기 위해 열세 살의 소년이 감당해야 했던 참혹한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자신을 평생 죄인으로 가둬둔 오빠에 대한 뼈아픈 연민이자 배신감이었다.오빠가 무너져 내리는 줄도 모르고 제 상처만 아프다며 방 안에 숨어 지냈던 지난 세월이 통째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시은은 차마 두 남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한 채, 소파 한구석에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물을 훔쳤다.바다는 하늘의 악에 받친 비난을 단 한 마디도 부정하지 않고, 온몸으로 그 독설을 받아내며 묵묵히 들이마셨다.동생이 던진 ‘비겁하고 치사하다’라는 말이, 도리어 지난 몇 년간 그가 스스로에게 내렸던 형벌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기에.“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늘은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바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실 테이블이 마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절벽처럼 느껴졌다.“어릴 때야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랬다고 치더라도,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얼마든지 얘기해 줄 수 있었잖아. 우리가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던 그 수많은 날 동안, 하루하루가 기회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끝까지 나를 속여!”악에 받친 외침 끝에 호흡이 가늘게 부르르 떨렸다.“내가 재현이한테 매여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낼 때도, 그 일 때문에 이 방안에 나를 가두고 바보처럼 울고만 있을 때도…… 오빠는 내 뒤에서 그 끔찍한 비밀을 굴리며 무슨 생각했어? 내가 불쌍했어? 아니면 진실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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