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멍든 꽃의 계절: Bab 31 - Bab 40

83 Bab

30화. 심리전

30화. 심리전“나, 병원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 내가 잊어버린 2년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거기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아.”확인해야 할 것.그 단어가 나오자, 재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잡힌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바다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감지한 듯 미간을 좁혔다.“……그래, 정 가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는데. 몸 안 좋으면 바로 관둬야 한다.”바다의 허락이 떨어지자, 재현의 주먹이 하얗게 불거졌다.그는 화를 억누르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샌드위치를 거칠게 찢었다.다정한 연인의 가면 너머로, 통제권을 잃기 시작한 포식자의 서늘한 광기가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하늘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재현의 완벽한 감옥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이었다.***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는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몸에 감겼다.기억은 백지상태였으나, 스테이션의 차트를 넘기거나 환자의 혈압을 재는 손끝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곁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시은 덕분에 하늘은 금세 제 자리를 찾아갔다.수간호사의 배려로 당분간은 오전 근무만 하기로 했지만,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병원의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그곳엔 어김없이 재현이 서 있었다.한낮의 쨍한 햇살을 받고 서 있는 그는 영락없이 헌신적인 연인의 모습이었다.하지만 하늘의 눈에는 그가 병원 입구를 정찰하는 감시자처럼 보였다.“재현아, 너 복학 시즌 아니야? 매일 이렇게 와도 돼? 학교는 어쩌고.”하늘이 가방끈을 고쳐 매며 묻자, 재현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가방을 뺏어 들었다.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손등을 스칠 때마다 하늘은 미세하게 어깨를 굳혔다.“누나, 지금 내 학교가 문제야? 누나 몸이 우선이지.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 아빠도 신신당부하셨어.”재현은 ‘아빠’라는 단어까지 끌어들이며 자신의 등장을 정당화했다.하지만 하늘은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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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연기자들

31화. 연기자들반면 하늘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에 시선을 둔 채, 유리에 비친 재현의 그림자를 관찰했다.동혁의 음성이 귓가에 이명처럼 남았다.'심증만 있을 뿐'이라던 그 말은 오히려 하늘에게 확신을 주었다.재현은 지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연애'라는 연극을 사랑하고 있었다.그 연극을 유지하기 위해 재현이 지불하고 있는 비용은 '거짓말'이었고, 그 거짓말의 무게가 핸들을 잡은 그의 손등 핏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하늘은 섣불리 그를 도발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당장 "당신이 나를 때렸느냐"고 묻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재현은 궁지에 몰리면 다정함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다시 그 '푸른 꽃'을 피워낼 인물이었다.하늘은 그가 안심하도록, 여전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연약한 기억상실증 환자임을 연기해야 했다.동시에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병원이라는 해방구에서 자신의 진짜 흔적을 찾아내야만 했다.“재현아, 우리 네가 말한 그 평범한 데이트 할까?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하늘이 먼저 침묵을 깨며 고개를 돌려 웃었다.재현은 그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잠시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응, 그러자. 누나가 좋아하는 곳으로 다 가자.”재현은 안도하며 가속 페달을 부드럽게 밟았다.차는 도심을 벗어나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재현은 주차를 마친 뒤에도 곧바로 내리지 않고, 운전석에 앉아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누나, 오늘 병원에서 별일 없었지?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여서.”그는 하늘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손가락 끝에 닿는 피부의 촉감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듯한 그 집요한 시선에 하늘은 숨이 막혔다.“응, 그냥 오랜만에 일하려니까 조금 피곤해서 그래. 카페 가서 시원한 거 마시면 괜찮아질 거야.”하늘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차 문을 열었다.재현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창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시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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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기억을 찾아서

32화. 기억을 찾아서재현은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가느다란 미소 아래로는 검은 타르 같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기억을 잃은 하늘은 분명 다루기 쉬운 백지여야 했다.처음 기억 상실증 소식을 들었을 때 재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피비린내 나던 그날의 기억, 공포에 질려 바닥을 기던 그녀의 눈물, 그리고 자신의 손등에 남았던 그 생경한 타격감까지 모두 세탁할 절호의 기회였으니까.하지만 지금의 하늘은 예전과 달랐다.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작은 소리에도 어깨를 움츠리던 그 '순종적인 인형'이 아니었다.그녀는 주체적이었고, 때로는 서늘할 정도로 단호했다.자신의 제안에 토를 달고, 감시 섞인 배려를 '애 취급'이라 치부하며 밀어냈다.재현에게 그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공들여 쌓아온 제국에 금이 가는 소음이었다.'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순간순간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폭언을 집어삼키느라 재현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낚아채고 싶은 충동이 손끝까지 뻗쳤다.예전 같았으면 이미 거실 바닥에 그녀를 팽개치고 공포로 굴복시켰을 터였다.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었다.유리처럼 위태로운 '다정한 연인'의 연극을 완수해야만 했다.하늘은 재현과 대치할 때마다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본능적인 공포는 여전히 그녀의 세포 속에 박혀 있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떨림을 무시한 채 재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제 할 말을 다 했다.그 당당한 눈빛이 재현을 더욱 미치게 했다.'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결국 넌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야.'재현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자꾸만 자신을 거스르고 화나게 만든다면, 결국 2년 전 그 지옥 같던 방으로 그녀를 다시 몰아넣는 수밖에 없었다.사랑이라는 이름의 사슬을 더 굵게 만들고, 그녀의 발목을 더 짧게 묶어야 했다.좀 더 세밀하게, 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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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증거

33화. 증거재현이 벤치 등받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끼익, 하고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그는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처럼 하늘을 내려다보며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감히 나를 속여? 네가?”재현의 시선이 하늘을 지나 옆에 앉은 동혁에게 꽂혔다.동혁은 당황한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담담한 태도가 재현의 발작 버튼을 건드린 듯, 그의 목에 핏대가 굵게 솟아올랐다.재현은 하늘의 팔목을 낚아채듯 잡아 끌어올렸다.“일어나. 당장.”“아, 아파, 재현아……!”하늘이 고통에 신음하며 팔을 빼내려 했지만, 재현의 손아귀는 마치 강철 족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자신의 가슴팍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재현의 숨결에서 비릿한 광기가 느껴졌다.“아파? 네가 지금 아픈 게 문제야? 내가 너 맛있는 점심 먹이려고 일부러 포장까지 해서 왔는데, 넌 여기서 이딴 새끼랑 시시덕거리고 있어?”재현은 주변에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자신의 소유물을 되찾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일지도 몰랐다.동혁이 한 걸음 다가서며 재현의 손목을 잡았다.“그 손 놓으시죠. 지금 이거 엄연한 폭력입니다.”“네가 뭔데 참견이야, 이 새끼야!”재현이 동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찰나의 순간, 재현의 눈에는 이성을 잃은 짐승의 안광이 스쳤다.그는 하늘을 자신의 등 뒤로 거칠게 밀쳐내며 동혁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 기세였다.하늘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제 팔뚝을 감싸 쥐었다.재현이 움켜쥐었던 자리에는 벌써 검푸른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동혁은 재현의 멱살을 쥐어틀며 정면으로 맞섰다.그의 음성은 낮았지만, 정원의 소음을 짓누를 만큼 서늘한 무게감이 있었다.“하늘 씨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사랑한다면 그 몸에 이런 꽃을 피워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사랑이 아니라 비겁한 지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동혁의 일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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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세상 밖으로 나온 푸른 꽃

34화. 세상 밖으로 나온 푸른 꽃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소음이 증발했다.형사의 펜 끝이 멈췄고, 재현의 얼굴에선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동혁은 눈을 감으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형사는 곧바로 상황의 엄중함을 깨닫고 여순경을 호출했다.하늘은 여순경의 부축을 받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화장실 쪽으로 옮겼다.재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곁에 서 있던 다른 경찰관의 강한 제지에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닫힌 문 너머, 겹겹이 껴입었던 카디건과 셔츠가 하나둘 벗겨졌다.거울 속에는 재현이 '사랑'이라 명명하며 새겨 넣은 추악한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어깨부터 팔뚝,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검푸른 멍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의 층위를 그리며 피어 있었다.여순경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화장실의 공기는 서늘했지만, 하늘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비릿한 연고 냄새와 수치심은 공간을 눅눅하게 적셨다.여순경은 직업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찰칵, 찰칵.'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하늘의 창백한 살결 위에 새겨진 검푸른 얼룩들이 선명하게 기록되었다.어깨에 남은 손가락 모양의 압흔, 옆구리에 넓게 퍼진 황갈색의 잔흔들.그것은 재현이 다정하게 입혀주었던 실크 셔츠 아래에서 썩어가고 있던 진실이었다.여순경은 사진을 찍는 중간중간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해자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은 언제나 괴로운 법이지만, 이번 것은 유독 지독했다.잠시 후, 인화된 사진과 태블릿 화면을 넘겨받은 형사의 미간이 깊게 팼다.그는 눈앞의 재현과 화면 속의 처참한 상처들을 번갈아 보았다.“이걸 보고도 여자 친구가 바람이 나서 우발적으로 때린 거라고 주장할 겁니까?”형사의 낮은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사진 속 멍들은 색깔이 제각각이었다.방금 생긴 선명한 파란색부터, 이미 치유 단계에 접어든 노란빛까지.그것은 오늘 하루의 사고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상습적인 폭력의 지층이었다.재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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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증거 불충분

35화. 증거 불충분곤혹스러운 표정의 형사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변호사님 말씀대로, 과거의 상습 폭행 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아니, 무슨 법이 이래! 이 애 몸이 증거고, 살아있는 얘가 증인이잖아요!”시은이 참다못해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그러나 법의 논리는 차갑고 단호했다.하늘에게는 그 소리들이 자신을 가두던 재현의 새장 문이 다시 잠기는 소리처럼 들렸다.변호사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동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오늘 병원 정원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처벌을 피하기 어렵겠더군요. 목격자도 많고 녹취된 증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녹취 내용이 과거 2년 동안의 폭행을 증명해주지는 않습니다. 구동혁 씨, 오늘 폭행 건에 대해 합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절차대로 진행할까요?”동혁은 대답 대신 재현을 쳐다보았다.재현은 변호사의 등 뒤에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열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하늘의 눈물이 바다의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진실은 명백했지만, 그것을 세상의 언어로 증명해내는 길은 너무나도 멀고 험난했다.“합의 하지 않겠습니다.”동혁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변호사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아니, 구동혁 씨. 사회생활 해보셔서 알 텐데, 돈 몇 백이면 조용히 끝날 일을 굳이 이렇게 키우실 겁니까?”“키우는 게 아니라 바로잡는 겁니다.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저 하늘 씨와 대화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욕설과 폭행을 당했을 뿐입니다. 벌금은 피해자인 제가 아니라, 가해자인 이재현 씨가 내야겠지요.”동혁이 사실관계를 조목조목 짚어내자 변호사의 입이 다물어졌다.이미 동혁의 휴대전화에 녹취된 음성 파일은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었다.오늘 정원에서 발생한 사건만 떼어놓고 본다면 재현은 외통수에 몰린 형국이었다.“네가 하늘이랑 바람만 안 폈어도 내가 널 때릴 일은 없었어! 이 새끼야!”재현이 책상을 내리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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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절망

36화. 절망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주기적으로 차 안을 훑고 지나갔다.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그 빛줄기만이 차 안이 굴러가고 있음을 증명할 뿐, 내부는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했다.엔진의 낮은 진동음조차 누군가의 숨소리를 방해할까 조심스러운 밤이었다.조수석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하늘은 마치 텅 빈 인형 같았다.조금 전 경찰서 화장실에서 확인했던 자신의 몸, 그 흉측하게 피어있던 푸른 꽃들이 망막에 잔상으로 남아 떠나지 않았다.세상에 치부를 드러내듯 그 상처들을 사진으로 찍고 기록했지만, 정작 그 상처를 만든 주인은 비웃듯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증거 불충분'이라는 무미건조한 단어가 하늘의 심장을 차갑게 옥죄었다.감은 눈꺼풀 틈새로 눈물 한줄기가 소리 없이 배어 나왔다.그것은 통곡보다 더 깊은 절망의 찌꺼기였다.2년이라는 시간을 잊어버린 것도 모자라,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입증할 권리마저 박탈당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들었다.바다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하얗게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었다.룸미러로 힐끗 비치는 하늘의 마른 뺨이, 그 위로 흐르는 눈물 자국이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오빠가 미안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억지로 그것을 삼켰다.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값싼 사과나 감정의 배설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앞만 주시하는 바다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동생이 겪었을 그 끔찍한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잘 지내겠거니 방관했던 시간이 비수가 되어 돌아와 꽂혔다.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재만 남았지만, 바다는 이 깨질 듯 위태로운 정적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하늘이 기댈 마지막 기둥마저 사라질 것 같았기에.와이퍼가 마른 유리창 위를 한 번 쓸고 지나갔다.끼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정적을 찢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하늘은 여전히 감은 눈 뒤의 어둠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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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칩거

37화. 칩거정오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무겁게 집안을 울렸지만, 하늘의 방문은 요지부동이었다.바다는 문 앞에 서서 몇 번이고 들어 올렸던 손을 차마 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세웠다.문 너머의 적막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살결을 스치는 듯했다.한참을 망설이던 바다가 마침내 마른 손가락으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하늘아.”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기계적인 마찰음이었다.끼익—.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하늘의 상태는 처참했다.밤새 눈물로 지새웠을 것이 분명한 눈은 퉁퉁 부어올라 제대로 뜨기조차 힘겨워 보였고, 안색은 핏기를 잃어 창백했다.동생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 바다는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지만, 그는 억지로 그것을 삼켜냈다.“……할 얘기가 있어.”바다는 거실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무겁게 입을 뗐다.하늘은 힘없는 걸음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바다는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평소라면 거침없이 쏟아냈을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다.“괜찮아, 오빠. 말해.”오히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하늘이었다.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바다는 겨우 고개를 들어 하늘의 멍든 눈가를 피하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병원 말이야. 당분간 그만두는 건 어때?”하늘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자신이 사랑하던 일, 환자들을 돌보며 찾았던 보람이 재현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지는 순간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재현이 때문이지?”“응. 그놈이 네 직장까지 알고 있는 이상, 거긴 이제 사각지대나 다름없어. 오빠가 너 출퇴근할 때마다 같이 있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바다의 말에는 짙은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동생을 지키기 위해 동생의 일상을 포기시켜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바다는 저 자신이 이토록 작아 보일 수 없었다.“……알았어.”하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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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스토킹

38화. 스토킹재현은 통제권을 잃었을 때 느끼는 불쾌한 박동을 억누르려 애썼다.경찰서 문을 나설 때만 해도 조롱하듯 여유로웠던 미소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손안의 스마트폰은 벌써 수십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연결이 끊기거나,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기계적인 음성만이 공허하게 방안을 채웠다.차단.재현에게 이 단어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인 자신의 세계에 균열이 가는 소리였다.그는 거칠게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어두운 거실,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무의미한 불빛이 그의 일그러진 안면 근육을 기괴하게 비췄다.“유하늘. 지금 장난하는 거지?”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재현에게 하늘은 사랑의 대상이자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어야 할 소장품이었다.자신이 지운 기억의 빈자리를 오직 자신만이 채워야 했다.그런데 그 빈틈에 구동혁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었고, 이제는 유바다라는 장벽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재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병을 집어 들었다.잔도 없이 병째 들이켜자 타는 듯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알코올의 기운이 머리에 닿자, 불안은 곧 날카로운 분노로 치환되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하늘의 사진들 앞으로 다가갔다.“감히 네가 나를 거부해?”재현의 손이 사진 속 하늘의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연락이 닿지 않는 1분 1초가 그에게는 하늘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영영 빠져나가는 소리처럼 들렸다.그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어 새로운 번호로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손가락이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방안에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누나, 오빠랑 같이 있는 거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누나가 오해하는 거야. 제발 전화 좀 받아. 나 지금 너무 힘들어. 내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이야.]전송 버튼을 누른 재현은 광기 어린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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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침입

39화. 침입정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옥상은 지나치게 평온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바다는 난간에 위태롭게 기댄 채 타들어 가는 담배만 내려다보았다.연기를 깊게 들이마셔도 가슴 속의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머릿속은 온통 거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하늘의 잔상으로 가득했다.도어락을 누르던 재현의 손가락 소리, 문 너머로 들려오던 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담배가 짧아질 동안 한숨만 세 번이네요.”뒤에서 들려온 낮은 음성에 바다가 어깨를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동혁이었다.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팀장으로서의 의무감 그 이상의 염려가 담겨 있었다.“……아, 팀장님.”“무슨 일 있습니까? 안색이 더 안 좋습니다.”동혁은 바다의 곁으로 다가와 난간을 짚었다.바다는 머뭇거리다 결국 억눌러왔던 고통을 쏟아냈다.누구라도 붙잡고 이 막막함을 털어놓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그놈이……. 어젯밤에 집 문 앞까지 찾아왔습니다. 번호를 계속 바꿔가며 하늘에게 전화를 걸고, 문밖에서 다 들으라는 듯이 떠들다 갔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집에 혼자 있는 하늘이가 어떤 공포를 느끼고 있을지 생각하면…….”바다의 목소리가 끝에서 가늘게 떨렸다.담뱃재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스토킹입니까?”동혁의 질문은 날카롭고 직설적이었다.감정적인 공감보다 상황의 본질을 먼저 파악하려는 태도였다.“스토킹……. 신고가 가능할까요? 경찰서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저놈을 풀어줬는데, 겨우 전화하고 집 앞에 온 걸로 뭐가 바뀔지 모르겠습니다.”바다의 자조 섞인 물음에 동혁은 잠시 먼 하늘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현행법상 조금 애매하긴 합니다. 신체적 위해를 가하거나 지속적인 위협이 명확히 입증되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바다 씨, 법이 느리다고 해서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동혁이 고개를 돌려 바다와 눈을 맞췄다.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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