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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을 거슬러의 모든 챕터: 챕터 691 - 챕터 700

764 챕터

제691화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던 의정전의 문이 열렸다.정군왕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매서운 찬 바람이 불어왔다. 서늘한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자, 정군왕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곁에 있던 상 내관이 허리를 굽혀 그를 배웅하며 호위들을 시켜 가마를 대령했다. 그렇게 정군왕은 저택으로 실려 갔다.그 시각, 화친 공주가 정군왕부에서 나온다는 소식은 일찌감치 정군왕부 안에도 전해져 있었다.정군왕비 역시 최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한참을 저울질한 끝에, 둘째 딸과 셋째 딸을 유력한 후보로 점찍고 두 사람을 안채로 불러들였다.두 딸은 안채 한가운데 서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폐하께서 너희 둘 중 하나를 화친 공주로 간택하셨다."정군왕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마침내 정군왕부에도 운이 트여, 칠흑 같은 암흑 속에 한 줄기 희망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었다.그녀는 두 서녀의 손을 잡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너희는 모두 내 딸이다. 누가 간택되든 이 어미가 아주 성대하게 시집을 보내주마. 훗날 정군왕부가 너희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것이다."화친이라는 말에 두 소녀는 기겁했다. 겁이 많은 둘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하지만 정군왕비가 싸늘한 눈길을 주자, 화들짝 놀라며 눈물을 삼켰다.평소 같았으면 당장 호통을 쳤겠지만, 화친이 코앞으로 다가온 마당에 굳이 서녀들과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여인이란 어차피 때가 되면 시집을 가야 하는 법이다. 헌데 이번엔 다르지 않느냐. 남이 태자에게 시집을 가면 태자비가 되는 것이야. 장차 운이 좋아 황손이라도 낳는다면, 그 아이 덕에 한 나라의 황후의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정군왕비는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옥팔찌를 빼어 둘째의 손목에 끼워주었다."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터이니,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둘째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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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준형이가 돌아오면 얘기하지."정군왕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그의 딱딱한 태도에 정군왕비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반 시진 후, 배준형이 급히 돌아왔다. 그는 정군왕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아버지, 지금 온 거리에 화친 공주가 우리 정군왕부에서 나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사실입니까?"정군왕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첫째는 다리가 불편하고 인물도 평범하여 남이 태자비가 될 재목이 아닙니다. 나이가 맞는 사람은 둘째와 셋째뿐인데, 조정에서 누구를 선택했습니까?"배준형은 의아했다. 두 누이동생은 성격이 판이하여, 누가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득실이 달랐다.무엇보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이전 삶에서는 화친을 간 사람이 정군왕부의 여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정군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배준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우리 정군왕부 사람이 맞다. 허나 둘째도 셋째도 아니다."배준형이 미처 되묻기도 전에, 정군왕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네 어미다!"벌떡!배준형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자신의 귀를 의심한 정군왕비는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입니까. 제가 어떻게 화친을 간단 말입니까?"하지만 정군왕의 얼굴은 한치 거짓도 없이 심각하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정군왕비는 점점 숨이 막히며 무너져내렸다."아,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아버지, 무슨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께서 어찌 화친을 가신단 말입니까?"배준형이 애써 이성을 찾으며 물었다.정군왕이 다시 한번 긴 한숨을 쉬었다."내가 의정전에서 폐하께 직접 들은 어명이다. 선왕조의 청귀비가 나라의 명운을 잇기 위해 희생했던 일을 예로 들며, 백성을 위해 네 어미를 보내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하셨다!"털썩!정군왕비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엎어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이건 노골적인 모욕입니다! 황족의 조강지처인 제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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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거리에는 화친 공주가 누구인지를 두고 소문이 파다했다.반면 현왕부는 몹시 평화로웠다."최씨 가문 쪽에서는 흠천감을 통해 진짜 화친 공주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아낸 모양입니다. 최 부인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반 시진 전에는 정군왕 세자가 입궁했습니다."운청은 바깥소식을 전하면서도 잊지 않고 자수 도안을 가져와 유지영 앞에 펼쳐 보였다.유지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아는 전생의 시어머니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성정에 죽어도 화친을 떠나지 않으려 발버둥 칠 것이다.일부러 판을 짠 보람이 있었다.사주가 맞고 안 맞고는 결국 윗선의 입맛에 달린 일이었다.날이 저물 무렵, 배준형이 두 시진이나 무릎을 꿇고도 서 태후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궁문이 닫히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그자가 찾아오거든 바로 내쫓으면 된다!"유지영은 배준형이 태후를 뵙지 못했으니 분명 현왕부로 달려와 분풀이나 하소연을 할 거라 짐작했다.그녀의 예상대로 배준형의 마차는 곧장 현왕부로 향했다.그러나 현왕부 대문 앞에는 수십 명의 호위들이 몽둥이를 쥔 채 험악한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광경에 배준형의 안색은 다시 어두워졌다."세, 세자. 현왕비 마마께서는 세자께서 오실 줄 미리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대놓고 안 만나주겠다는 뜻이 아닙니까."호위들의 위세에 기가 눌린 배준형의 심복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비쳤다.오늘 연달아 문전박대를 당한 배준형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어머니가 화친을 가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정군왕 세자. 마마께서는 세자를 뵙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고집을 부려 억지로 난입하려 하신다면, 저희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망신을 당하는 것은 세자가 되실 겁니다!"호위대장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경고했다."게다가 밤도 늦었는데, 외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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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부관은 배준형의 말이 진심이라 여겼는지, 한숨을 내쉬며 담씨 노부인이 머무는 장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나리께서는 문관의 몸으로 전장에 나가시고, 부인과 아가씨마저 참변을 당하셨지요. 노부인 혼자 장원에 외롭게 계시는 처지가 딱했는데, 세자께서 이리 챙겨주시니 다행입니다."부관의 말에 배준형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비웃음이 맴돌았다. 그는 노부인을 뵙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발길을 돌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준형은 부관이 일러준 장소에 도착했다.위치는 그리 외진 곳이 아니었으나, 대문에 현판도 없고 문을 지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복에게 눈짓했다."문을 두드려라."심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연달아 세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심복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다시 문을 쾅쾅 두드렸다.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문이 열렸다.하지만 밖으로 나온 것은 험악한 인상의 무장 호위 두 명이었다. 심복은 인사를 건네려던 것조차 잊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확인한 심복은 굳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마차 곁으로 도망쳐 온 그는 더듬거리며 보고했다."세, 세자. 마당 안에 무장 호위들이 깔려 있습니다."배준형은 마차의 휘장을 걷고 안쪽을 살폈다.과연 열 명이 넘는 무장 호위들이 대문 안쪽을 빈틈없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험악한 기세였다.배준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중 한 명의 허리춤에 매달린 요패를 확인했다. 유국공부의 요패였다.이들은 유국공부의 호위들이었다!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민하던 배준형은 결국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계단에 오르기가 무섭게 호위가 앞을 막아섰다."정군왕 세자는 돌아가시오. 담씨 노부인의 요양을 방해해서는 안 되오.""할머님을 뵙고자 온 것이오…….""세자, 굳이 입 아프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호위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대놓고 비꼬았다.연달아 문전박대를 당하자 배준형의 표정도 음침하게 바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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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유정남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배준형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눈앞의 이놈이 혼인을 무르고 다른 여인을 정실로 맞이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유지영은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좋다!"유정남은 단숨에 말에 올라타 고삐를 거머쥐었다. 그는 대문을 지키는 호위들을 향해 명했다."내 허락 없이 함부로 문을 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처결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말을 마친 그는 채찍을 휘두르며 자리를 떴다.배준형은 멀어지는 유정남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눈빛에 짧은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차에 오른 배준형도 장원을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반 시진 후, 경성 춘풍루의 한 별실.점소이가 상 가득 술과 안주를 차렸다. 상석에 앉은 유정남은 묵묵히 술을 따라 마셨다. 석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배준형이 안으로 들어왔다.방 안으로 들어선 배준형은 한풀 꺾인 태도로 유정남의 맞은편에 앉았다."국공 어른, 제가 장원으로 찾아가 할머님의 요양을 방해한 것은 경솔했습니다. 허나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유정남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참으로 당당한 태도로군."화친을 앞둔 이 시점에 배준형이 담씨 노부인을 찾아갔다는 것은, 노부인을 통해 정군왕비를 살려달라 매달리려는 속셈이었다. 담시령이 죽은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코빼기 한번 비치지 않더니, 아쉬울 때만 도움을 청하러 오는 꼴이 참으로 하찮았다."국공 어른, 백 번 천 번 제 잘못입니다. 애초에 제가 지영이를 져버렸으니, 오늘날 이런 처지가 된 것도 모두 자업자득입니다."배준형은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는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탁!유정남은 쥐고 있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다 지난 일을 굳이 다시 꺼내는 저의가 뭐지?"말을 마친 유정남의 입가에 희미하게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내고는 시선을 돌렸다."할 말이 있어 불렀을 터. 여기에는 다른 이가 없으니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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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유정남이 분노한 기세로 다시 달려들자, 배준형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국공 어른께서는 어찌 현실을 부정하려 하십니까? 애초에 배현준이 지영이를 정실로 맞이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그놈은 마음에 품은 여인이 따로 있습니다!"두 사람이 서로 뒤엉켜 주먹질을 주고받는 통에 방 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국공! 배현준은 변방에서 이 장군의 부하들을 거두었습니다. 그놈이 마음에 둔 여자는 바로 이연령입니다. 태후 마마께서 이연령을 붙잡아 둔 것은 그 계집이 지영이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배현준을 압박하려는 속셈이지요. 오직 지영이 혼자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정남은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한쪽으로 쓰러졌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배준형은 우뚝 멈춰 섰다. 쓰러진 유정남을 내려다보던 그는 억눌러두었던 살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유정남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쾅!거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정세자? 구, 국공 어른?"소리를 듣고 달려온 춘풍루의 객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의 뒤로 수십 명의 호위가 따라 들어왔다. 배준형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리 중에는 경조판사도 있었다."국공 어른!"사람들을 밀치고 달려온 경조판사는 다급히 유정남을 부축했다. 유정남은 한 움큼 피를 토하고는 경조판사의 품에서 기절했다."국공 어른!"다급해진 경조판사가 연달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경조판사는 사람들을 시켜 유정남을 급히 국공부로 옮기게 하고, 태의를 부르기 위해 궁으로 사람을 보냈다.그는 방을 나서며 배준형의 곁을 지나치다가 싸늘한 질문을 던졌다."정세자, 오늘 본관이 우연히 지나치지 않았다면, 국공 어른을 때려죽일 작정이셨소?""대인, 오해가…….""오해?"경조판사가 언성을 높였다."예전 일로 정세자가 유국공께 앙심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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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유정남은 유지영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거칠게 요동치던 가슴이 서서히 평온해졌다.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은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의 커다란 손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찰나의 순간, 유지영은 유정남이 무언의 뜻을 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아버지, 아버지…… 조금만 버티십시오. 북명대사께서 곧 오실 겁니다."그녀는 유정남의 눈빛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을 보았다. 그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버지!"유정남은 곧바로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이날, 태의원의 모든 태의가 유국공부로 모여들었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방 안이 가득 찼다.얼마 후 북명대사가 안에서 나왔다. 회랑에 서 있는 유지영을 본 그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대사님, 아버지는 좀 어떠십니까?"한참 뒤에야 북명대사가 입을 열었다."국공 어른께서는... 고비를 넘기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털썩!그녀는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대사님, 제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현왕비."북명대사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목소리를 낮췄다."국공 어른께서는 이미 삶의 의지를 놓으셨습니다. 억지로 살려낼 방도가 없습니다."유지영은 찬물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이렇게 허무하게 아버지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위풍당당했던 유국공은 눈부신 전공을 세우고 문무를 겸비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북명대사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마마."운청이 휘청이는 유지영을 황급히 부축했다.이날따라 눈보라가 몹시 거셌다. 회랑에 서 있으니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지영은 숨조차 쉬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운청의 부축을 받으며 별채로 들어섰다.밤이 깊어갈 무렵, 불현듯 문밖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폐하를 뵙습니다."의자에 앉아 있던 유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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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그 순간 유지영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녀와 유관성이 나아갈 길을 닦아 놓으신 것이다.유관성은 북신에서 자란 특수한 신분 때문에 전장에 나설 자격이 없었다. 혹여 전쟁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북신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번 북신과의 전장에서 유정남 역시 의심을 피하고자 스스로 병권을 내려놓았다.아버지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을 보면, 북신과의 전쟁은 이미 양나라의 승리로 기울었고 이제 잔당을 소탕하는 일만 남았을 것이다.아버지는 유관성이 떳떳하게 전장에 나설 명분을 만들어주셨다.이후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 누구도 감히 유관성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또한, 아버지는 배준형의 손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가 지은 죄를 목숨으로 갚으라는 뜻을 남기고 가셨다."아버지!"유지영은 유정남의 식어가는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아버지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헌신뿐이었다.나라와 가문을 동시에 지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식들에게 훌륭하고 모자람 없는 아버지였다.과거 국공부 식구들이 그녀를 함정에 빠뜨린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아버지는 우매한 효심에 얽매여 그들의 만행을 덮어두는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변함없이 그녀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셨다.이날, 유국공부에는 하얀 천이 내걸렸다.부고가 전해지자, 소복을 입은 서 태후가 국공부를 찾았다. 그녀는 눈가가 빨갛게 짓무르도록 울고 있는 유지영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지영아, 어제 국공이 사람을 시켜 내게 서신을 한 통 보냈더구나."그 말에 유지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앞서 간 네 어머니가 꿈에 나와 널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며 밤마다 꿈에 나타나 그를 원망을 했다더구나. 유씨 노부인이 급사한 후로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힘겹게 버텨왔는데, 이제 너와 유관성을 무사히 안착시켰으니 그제야 네 어머니를 볼 낯이 생겼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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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정군왕의 질책에 배준형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조차도 도무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유정남은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은 나이에 장군이자 국공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명성도 자자하여 딱히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고작 그 비밀 하나를 감추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단 말인가?씩씩거리며 다가온 정군왕은 배준형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한쪽 얼굴이 뻘겋게 부어올랐다."이 몹쓸 놈! 지난 이 년 동안 네가 우리 군왕부를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 아느냐? 네놈 탓에 난 어딜 가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단 말이다!"정군왕은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쏟아냈다."네놈은 콧대만 높고 잘난 맛에 취해 남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지 않았느냐!"정군왕의 말은 하나같이 배준형의 아픈 곳을 찔렀다.이번만큼은 정군왕비도 그를 감싸주지 않았다. 그녀는 문틀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더니 통곡했다."제가 화친을 가겠습니다. 폐하께 화친을 떠나는 저를 보아서라도 우리 준형이 목숨만은 살려달라 빌겠습니다."정군왕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배준형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어제 국공을 만나 유지영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보는 눈이 그렇게 많은데 제가 대놓고 사람을 때려죽였겠습니까? 공교롭게도 마침 근처에 경조판사가 있었다니요……. 아버지, 제가 아무리 미련해도 대놓고 공신을 죽일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배준형은 또박또박 억울함을 호소했다."게다가 저는 유국공과 철천지원수도 아닙니다."일 년 전, 신분을 오해받았던 일로 앙심을 품고 있기는 했으나, 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는 아니었다.하지만 그가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문무백관들은 네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폐하 역시 마찬가지다."정군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유국공이 죽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수하들이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어사들 역시 배준형은 물론 정군왕부 전체를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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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경조판사는 손을 저어 배준형을 끌고 가라 명했다. 그는 발길을 돌리기 전 정군왕을 향해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이 일을 캐고 들어가면, 단순히 세자 한 사람의 처벌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오."그 순간 정군왕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습이었으나, 정군왕은 지체 없이 그녀의 뺨을 쳐 입을 막았다. 그는 하인들을 시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질질 끌어내게 한 뒤, 경조판사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어미 된 자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으니, 대인께서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정군왕은 한껏 비굴한 태도로 비위를 맞췄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경조판사는 굳은 얼굴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정군왕은 정군왕비를 찾아갔다. 그의 두 눈에는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물증과 증인이 명백하거늘, 대체 여기서 뭘 더 어쩌겠다는 것이오?"정군왕비는 의자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준형이는 제가 배 아파 낳아 기른 자식입니다. 그 아이가 그토록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저지를 리 없습니다. 애초에 준형이의 계획에는 유국공을 만나는 일조차 없었습니다."형 집행까지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군왕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소?"하지만 이번만큼은 정군왕비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부군은 정녕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윗선에서는 이미 우리 정군왕부를 뿌리 뽑기로 작정한 겁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목숨입니다. 저는 이미 화친 공주로 낙점된 몸이니 폐하께서도 당장 저를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 군왕부를 위해 한 번 더 부딪혀 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정군왕비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모든 일은 저 혼자 벌인 짓이라고 하십시오. 부군은 내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면 그만입니다!"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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