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사극 로맨스 / 피안을 거슬러 / Chapter 671 -الفصل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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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1화

사혼을 철회한다는 태후의 명은 서씨 가문에도 당도했다. 소 상궁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명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가문이 몰락한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일전에는 끔찍히 싫었던 첩실 자리를 유일한 동아줄로 간주하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그 기대마저 사라진 것이다.크나큰 충격에 휩싸인 서명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 상궁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상궁님, 어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소 상궁은 서명주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아비가 죽고 장례도 번듯하게 치르지 못했거늘, 명색이 적녀인 너는 효상을 치르기는커녕 다른 집으로 시집갈 생각을 품었단 말이냐? 서씨 가문은 대역 죄인이나 태후 마마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목숨만 살려주신 것이다. 반면 최씨 가문은 공신 가문이거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집안 문턱을 넘는단 말이냐!"정곡을 찌르는 질책에 서명주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였다.곁에 있던 서 부인 진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태후의 속내를 깨달았다.서 태후는 일찌감치 서씨 가문의 말로를 전부 계획해 두었던 것이다.애초에 서명주를 최씨 가문의 첩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모든 것은 서씨 가문이 제 발로 무덤을 파도록 유도한 덫에 불과했다.소 상궁이 오늘 서씨 가문을 찾은 것은 태후의 명을 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경전 필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서소현, 진씨, 서씨 노부인, 서명주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얌전히 경전을 바쳤다.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반면 네 사람의 태도는 제각각 달랐다.그래도 다들 군말 없이 필사를 해놓긴 했다.소 상궁은 적당히 눈감아주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서씨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부들부들 떨며 다가와 소 상궁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상궁, 수고스럽겠지만 이 서신를 태후께 전해 주시게. 과거 내가 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 억울함과 수모를 겪게 한 것을 뼈에 사무치게 후회된다고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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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2화

그날 서 태후가 만약 기분이 안 좋았더라면, 서명주 역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소 상궁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제가 주제넘게 마마의 일에 참견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이 사람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내가 툭하면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마도 아니고."서 태후는 헛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 소 상궁을 일으켰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서 태후는 친정인 서씨 가문을 처결한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어느덧 일월 초가 되었다.천리마 한 필이 쏜살같이 경성 성문을 통과했다.말 위의 사내는 쉴 새 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단숨에 황궁 앞까지 내달렸다.때마침 궁문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휘장이 걷히고 정군왕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말 위에 올라탄 사내의 검게 그을리고 훌쩍 야윈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는 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준형아, 준형아!"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배준형은 어머니를 발견하고 급히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갔다."어머니."변방에서부터 밤낮없이 말을 몰아세운 덕에 스무 날이 넘게 걸릴 거리를 보름 만에 달려왔다.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질 듯 지쳐 있었지만, 다행히 어명에 명시된 기한 내에 당도할 수 있었다."이곳은 긴 이야기를 나눌 곳이 못 됩니다. 어머니께서는 먼저 돌아가 십시오. 저는 입궁을 해야 하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궁문에서 내관 한 명이 걸어 나와 배준형을 막아섰다."정군왕 세자, 폐하께서는 이미 세자께서 경성에 당도하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입궁하여 알현할 것 없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자숙하라 명하셨습니다."내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배준형은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안색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왔건만, 황제는 고작 내관 하나를 시켜 문전박대한 것이다.자존심 높은 배준형으로서는 뼈아픈 치욕이었다.하지만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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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3화

배준형은 정군왕비를 위로했다."가지 많은 나무가 거센 바람을 맞는 법입니다. 지금의 배현준은 과거의 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왕가에는 본디 정이 없으니, 언젠가 그놈 역시 내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는 유지영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유지영의 이름이 나오자 정군왕비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 계집은 갈수록 기고만장하더구나. 태후를 뒷배로 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한참을 험한 욕을 퍼붓던 정군왕비는 뜻밖의 소식을 하나 전했다. 유지영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배준형은 흠칫 놀랐다."지영이가 무사히 아들을 낳았단 말입니까?"다정한 호칭에 정군왕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준형아, 너 설마 아직도 그 계집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냐? 지금 그 계집은 우리 정군왕부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나를 협박하고 겁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정군왕비는 당장이라도 유지영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당치도 않습니다."배준형은 황급히 말을 바꾸며 정군왕비를 달랬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자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전생에서 유지영은 그와 혼인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아이를 가졌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배준형의 눈앞에서 핏물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유지영이 배현준의 아이를 낳았다니, 배준형은 속이 쓰렸다.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그녀는 지금쯤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매일 불당에 엎드려 불공을 드려야 했다.생각이 꼬리를 물자 배준형은 미간을 꾹 눌렀다. 속에서 묘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만약 이 년 전에 유지영이 자신 역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굳이 유선주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두 사람은 마땅히 부부의 연을 맺었어야 했다…….그때 정군왕비의 불평이 귓가를 때렸다."태후가 그 계집을 어찌나 끔찍이 아끼는지, 출산하기도 전에 사람을 보내 자녕궁으로 데려갔단다. 직접 곁에 두고 돌보더니 산후조리를 다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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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4화

크게 놀란 배준형을 보며, 정군왕비는 내심 의아해했다. 그녀는 내친김에 태후가 처음에는 서명주와 최호에게 사혼을 내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임의설을 정실로 맞이하라는 사혼 교지를 내리고 현주 작위까지 내린 자초지종을 모조리 털어놓았다.배준형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전생에 임의설은 그의 숙비였다. 그의 슬하에 있던 이황자가 바로 임의설의 소생이었으며, 그 아이는 무척이나 총명하고 영특했다.게다가 임의설 본인도 사려 깊고 다정다감하여, 임국공부 전체가 그의 든든한 조력자였다."임씨 가문 장녀가 올해로 열여섯이다. 네가 조금만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쩌면……."정군왕비는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배준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생의 임의설은 삼 년 상을 치르느라 혼기를 놓치고 노처녀가 되었었다. 훗날 그가 황위에 올라 간택을 치를 때, 수녀 신분으로 입궁했던 것이다.시기를 따져보니 올해 연말에 임국공이 지병이 급발작하여 세상을 떠날 것이다.지금은 너무 많은 상황이 변했다. 더 이상 전생의 기억만으로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임국공의 목숨을 살린다면 반드시 임씨 가문을 온전히 그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배준형은 즉각 심복을 불러 임씨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명했다.곁에 있던 정군왕비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어머니,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정군왕부를 굳건히 세우고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배준형은 그동안 어머니가 겪었을 설러움이 가슴 아프다는 듯, 정군왕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짐했다.언젠가 다시 대권을 거머쥐는 날, 기필코 그들에게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정군왕비는 코를 훌쩍이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 그동안 정군왕부의 일로 피해를 입었으니, 외조모님과 외숙부님께서 저희에게 불만이 많으실 겁니다. 지금은 그분들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아니니 무슨 모진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당분간 최씨 가문은 절대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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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5화

배준형은 최씨 노부인의 당부를 가슴에 새겼다. 최 부인을 찾아가는 길에 최호를 마주쳤고, 두 사촌 형제는 깍듯하게 인사를 나누었다."준형 형님."최호가 먼저 입을 열고 인사를 건넸다.배준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우야, 오랜만에 보는데 갈수록 외삼촌의 모습을 닮아가는구나."최호 역시 빙그레 웃으며 몇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건넸다.일행이 최 부인의 처소에 당도했다. 아들이 함께 온 것을 본 최 부인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이내 환한 미소로 정군왕비 모자를 맞이했다.최 부인은 정군왕비가 최씨 가문에 재물을 요구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배준형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뜻밖에도 배준형이 품에서 손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곁에 있던 정군왕비는 그 종이를 확인하고 안색이 굳어졌다. 이백만 냥의 은자를 십 년 안에 갚겠다는 내용이 적힌 차용증이었다."주, 준형아."정군왕비는 평정을 잃었다. 그 많은 양의 은자를 정군왕부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최 부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준형을 바라보았다."빚을 졌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배준형은 차용증을 공손히 들어 올리며 최 부인에게 부디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몇 번의 실랑이 끝에 최 부인은 차용증을 받아 들었다."좋다. 이 차용증은 외숙모가 먼저 보관하마. 훗날의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최 부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 대인이 돌아왔다. 그는 배준형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를 따로 불러냈다.두 사람은 함께 서재로 향했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이미 점심을 마친 정군왕비는 아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배준형과 함께 최씨 저택을 나섰다.모자가 떠난 후, 최 부인은 최 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부군께서는 진정 배준형을 도우실 작정이십니까?"지금의 배준형은 아무런 권력도 세력도 없이 황제와 태후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그가 재기하려면, 막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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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6화

"태후 마마의 입장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숙태비를 궁으로 불러들여 연금하셨지요. 만약 배준형이 보좌에 오르고 숙태비가 득세하게 된다면, 과연 태후 마마를 가만두겠습니까?"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최 부인은 결코 배준형을 선택할 수 없었다.최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문관이든 무관이든 배준형은 이미 모든 우위를 상실했다.최 부인은 최씨 가문이 배준형에게 얽매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그동안 우리 가문이 배준형을 뒷바라지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제 우리도 경성에 자리를 잡았고, 그 자는 제 앞가림조차 못 하는 처지 아닙니까. 차라리 다른 살길을 모색하는 편이 낫습니다."최 부인은 완강하게 부군을 설득했다.다행히 최 대인은 부인의 말을 귀담아듣는 성격이었다. 잠시 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아들 최호 역시 어머니의 뜻에 동의했다.최 대인이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사리 분별이 밝으신 분이니, 서씨 노부인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실 거요. 이따가 내가 직접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소."하지만 최호에게는 다른 걱정거리가 남아있었다."그럼 정안이의 화친 혼사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머니께서는 뾰족한 수가 있으십니까?"최정안이 화친 공주 후보에 오른 후, 최씨 가문은 온갖 수를 다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최 부인 역시 반쯤 체념하고 있었으나, 며칠 전 현왕비를 찾아간 이후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그녀는 조금 전 배준형이 써준 차용증을 매만지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정안의 일은 내게 다 생각이 있다."어찌 되었든 정군왕부에게 기대할 것은 없었다.세 식구는 의논을 마친 뒤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졌다.최 부인은 시녀를 시켜 비단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그 안에 차용증을 넣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뒤, 열쇠와 함께 심복 시녀에게 건넸다."현왕부로 가져가거라. 최씨 가문에서 올리는 작은 성의라고 전하고."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그 시각, 최 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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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7화

한 달째 폭설이 그치지 않았다.정군왕부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배준형이 경성에 돌아온 지 닷새나 지났건만, 건양제는 여전히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저택에 틀어박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경성에서는 이미 정군왕 세자가 폐하의 은총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어명으로 부장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전장에는 나간 적도 없고 초라하게 쫓겨 왔으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자신을 비웃는 소문이 귓가에 들어올 때마다 배준형의 안색은 음침하게 변했다.그는 행랑에 서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로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이 저 멀리 하늘 맞닿은 곳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그 풍경마저 그의 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최씨 가문 쪽에서는 연락이 없느냐?"그가 옆에 선 시종에게 물었다.외삼촌인 최 대인은 동료 관료들에게 좋게 말을 해주겠노라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이치대로라면 그가 돌아왔으니 조정에서 마땅히 관직을 하나 내어주어야지, 이렇게 방치하는 건 전례 없던 일이었다.전장에서 공을 세우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과실을 범한 적도 없거늘, 이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그의 질문에 시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배준형의 눈빛에 실망감이 스쳤다.그때, 문밖에서 망을 보던 한 시종이 황급히 달려왔다."세자, 현왕비가 오늘 점포들을 순시하러 나왔다 합니다. 지금 명루에 머물고 있습니다!"배준형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다급한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명루.유지영의 명의로 된 찻잎을 주품목으로 파는 점포였다. 장부를 훑어보니 잦은 폭설 탓에 두 달째 매상이 말이 아니었다.점주는 그녀의 곁에서 잔뜩 주눅 든 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날이 추우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당장 입에 풀칠할 식량과 땔감이 먼저 아니겠는가. 자네 탓이 아니니 마음 쓰지 말게."유지영은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다독였다.오늘 외출의 목적은 순시를 명목으로, 매상이 떨어져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점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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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8화

마차가 궁문 앞에 멈춰 섰다. 유지영은 몸에 두른 망토를 여미고, 우산을 쓴 채 한 걸음씩 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새하얀 눈이 겹겹이 덮인 길고 긴 회랑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다행히 궁인들이 부지런히 눈을 쓸어둔 덕에 신발과 버선이 젖지는 않았다.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자 유지영은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왕비 마마, 뒤에 최 부인이 오고 계십니다."운청이 조심스레 귀띔했다.유지영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걷자, 최 부인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서 인사를 건넸다."멀리서 뵈었을 때는 긴가민가 했는데, 정말 마마가 맞으셨군요."무릎을 굽혀 예를 갖춘 최 부인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마마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물론입니다."유지영과 최 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자녕궁을 향해 걸었다.가는 길에 최 부인이 넌지시 변방의 소식을 꺼냈다."듣자 하니 연달아 승전고를 울려 북신에서 이미 화친의 뜻을 내비쳤다 하더군요. 왕비 마마께서도 일찌감치 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유지영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자녕궁.두 사람을 본 궁인들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고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소 상궁이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마침 잘 오셨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마침 화친을 떠날 세 아가씨의 예절 교육을 살피고 계십니다. 해가 바뀌면 곧바로 길을 떠나야 하니까요."그 말을 들은 최 부인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두 분, 이쪽으로 드시지요."소 상궁이 허리를 굽히며 앞장섰다.휘장을 걷어 올리고 넓고 환한 내전으로 들어서자마자 훈훈한 열기가 확 밀려오며 얼었던 얼굴을 녹여주었다.내전에는 과연 세 명의 아가씨가 서 있었다.그중에는 허지도 있었다.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허지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온몸에서 단아한 기품이 흐르고, 행동거지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허씨 가문에 있을 때의 그 주눅 들고 나약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허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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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9화

서 태후는 허 귀비를 굳이 붙잡지 않고 사람을 시켜 가마를 타고 편히 돌아가게 해주었다."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허 귀비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허 귀비가 물러가자 최 부인은 내심 속이 타들어 갔다.화친 후보는 총 세 명뿐인데, 그중 한 명이 바로 허 귀비의 조카인 허지였다.듣자 하니 허 귀비는 황제를 찾아가 허지의 심약한 성정으로는 화친이라는 중대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하소연했다고 한다.황제는 당시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고 했다.당장 다음 달이면 화친 행렬이 출발해야 하니 최 부인으로서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낯선 타국으로 화친을 떠나게 되면 평생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생각만 해도 가슴에서 피눈물이 흘렀다.그 후로도 한참 동안 담소가 이어졌지만, 정작 화친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초조해진 최 부인이 막 입을 떼려던 찰나, 소 상궁이 다가와 서 태후의 귓가에 무언가를 은밀히 속삭였다.서 태후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번졌다."회랑에 세워두고 정신 좀 차리게 하거라!"소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유지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시더니, 갑자기 누구에게 저리 노하신 걸까?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서 태후는 두 사람을 내전에 남겨 함께 식사를 했다.식사 도중 서 태후는 수저를 내려놓고 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유지영과 최 부인도 황급히 수저를 내려놓았다."무슨 근심이라도 있느냐? 고민이 많은 것 같구나."태후가 유지영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유지영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마마, 며칠 전 책을 읽다가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마침 남이 사람이 쓴 책이었는데, 남이는 점복을 무척 중시하여 명문가의 혼사에는 특히 더 신중을 기한다고 하더군요.""지금의 남이 황후 역시 본래 일개 후궁이었습니다. 허나 사주가 남이 황제와 찰떡궁합이라는 이유로 파격적으로 황후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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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0화

정군왕비는 자녕궁 정전 문밖에서 꼬박 두 시진을 서 있었다. 안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찬 바람을 맞다 보니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게다가 조금 전 코앞에서 최 부인에게 무시까지 당했으니 속에서는 천불이 끓어올랐다.무엇보다 그녀는 오늘 최정안의 화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입궁한 참이었다!"태후 마마께서는 피곤하시어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 하십니다. 정군왕비, 이만 돌아가시지요."밖으로 나온 소 상궁이 건조하게 말했다.정군왕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소 상궁. 나는 괜찮네. 마마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뵈어도 무방하니."소 상궁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다시 상황을 아뢰었다.얼마 후, 밖으로 나온 소 상궁이 문을 가리켰다."정군왕비, 태후 마마께서 드시라 하십니다.""고, 고맙소."정군왕비는 추위에 잔뜩 얼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뻣뻣한 다리를 이끌고 내전으로 들어선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 있는 서 태후를 보자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그녀는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태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서 태후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정군왕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까닭도 없이 어쩐 일로 문안을 다 왔느냐?""태, 태후 마마."정군왕비는 한참 동안 몸을 녹이고서야 겨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마마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간청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준형이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제가 그 아이의 혼처를 찾아주고자 합니다."그 말을 들은 서 태후는 마치 실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코웃음을 쳤다. 정군왕비는 억지로 표정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준형이는 현왕과 동갑인데, 현왕은 벌써 품에 자식까지 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준형이는 여태껏 홀로 외로이……."서 태후는 정군왕비의 뻔한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보고는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모두 황상의 핏줄인데, 내 어찌 차별을 두어 준형이를 홀대하겠느냐."서 태후가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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