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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1화

허 귀비는 고개를 들어 건양제를 바라보았다. 계례를 치르던 날,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그는 여러 황자 중에서 특출난 편이 아니었으나, 허 귀비는 첫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오랜 세월이 흐르며 건양제는 한층 더 침착해졌고, 속내를 감출 줄 아는 지혜로운 군주로 변모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건양제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게다가 지난 몇 달간 이어진 냉랭함은 허 귀비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폐하, 신첩이 경솔한 말을 한 것은 사실이나, 신첩의 마음은 언제나 폐하를 향해 있습니다."허 귀비의 뺨을 타고 두 줄기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초한 눈망울이 애절하게 빛나며 가련함을 자아냈다.건양제가 허리를 굽히더니 손으로 허 귀비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허 귀비는 어쩔 수 없이 건양제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시선이 얽힌 순간, 건양제의 눈에 서린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귀비의 마음에 언제나 짐이 있다고? 헌데 어찌하여 사사로이 정군왕과 긴밀히 교류한 것이냐?"건양제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추궁했다.두려움에 떨던 허 귀비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허연."건양제의 손아귀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네가 정녕 바라는 것도 욕심도 없다면, 어찌 태후를 찾아가 황사를 달라고 청한 것이냐?""어제 짐은 이미 주의를 주었거늘, 어째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냐?"턱이 붉게 짓눌린 허 귀비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물을 글썽였다."폐하, 태후 마마께서는 후궁의 주인이시고 폐하께서도 늘 마마의 말씀을 따르시지 않습니까. 하여 신첩이 감히 태후 마마께 청을 올린 것입니다. 입궁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황사를 바라는 것이 어찌 잘못입니까?"허 귀비는 스스로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이토록 넓은 후궁에 황사가 단 한 명도 없는데, 뒤에 숨겨진 내막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건양제는 차갑게 코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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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2화

"짐에게는 혈연보다 강산이 더 중요합니다. 어마마마가 아니었더라도, 짐은 기꺼이 현준에게 짐의 강산을 물려주었을 것입니다."건양제는 서 태후 맞은편에 다가가서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떨 때 보면 짐이 현준보다 운이 좋았습니다. 곁에서 이끌어 주는 분이 계셨으니까요."건양제는 옛 추억이 떠오른 듯 주먹을 입가에 대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육씨 일가가 밖에서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서 태후가 긴 눈썹을 치켜올렸다."황상, 현왕비는 내 딸이 맞습니다."서 태후는 건양제가 당연히 분노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매우 차분했다. 의아해하는 서 태후에게 건양제가 말했다."짐은 현왕비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습니다. 유국공이 배준형을 친아들로 착각했을 때, 이미 이 일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서 태후는 건양제가 이토록 담담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유지영의 신분을 조사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건양제는 시선을 돌리더니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씨 일가를 경성으로 부르신 것이, 진정 육씨 노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입니까?""아닙니다."서 태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내가 육씨 노부인에게 약조한 바가 있어, 이번에 그 약조를 지키려는 것뿐입니다."대답하고 나서야 서 태후는 건양제의 진짜 의도가 따로 있음을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내 마음속에는 양나라 강산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꼬투리를 잡혀 추문을 남기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니, 황상께서는 안심하십시오."서 태후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고개를 숙인 건양제의 눈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그가 머쓱한 어투로 말했다."짐은 정무가 바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건양제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 태후는 소 상궁에게 명했다."육씨 노부인을 들라 하거라.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물리고."소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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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3화

서 태후는 육씨 노부인을 만나고 난 후 어쩐 일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소 상궁이 곁에서 위로를 건네고 나서야 표정이 조금 풀렸다.서 태후는 유지영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소 상궁에게 직접 현왕부로 다녀오라 명했다.해가 질 무렵 현왕부에 당도한 소 상궁은 유지영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태후 마마께서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들에 마음 쓰지 말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총명한 사람과의 대화는 굳이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유지영은 소 상궁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소 상궁을 배웅한 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불경을 필사하다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이어지는 며칠 동안 그녀는 왕부에 머물며 불경을 필사했고, 가끔 절에 들러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보름 뒤, 변방에서 최윤의 부고가 전해졌다. 운청은 유지영에게 보고했다."돌연 급병을 얻어 닷새 밤낮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행한 태의도 손쓸 방도가 없어 방치하다가, 마차가 양나라 국경을 넘어서자마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명문가의 여식을 골라 화친 공주로 책봉하여 변방으로 보내겠다고 하네요."최윤의 죽음은 유지영에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그녀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정군왕은 어찌 되었느냐?"운청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경성 곳곳에 최윤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소식을 접한 정군왕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합니다. 의원은 마음 속에 울화를 이기지 못해 심맥이 손상된 탓이라 진단했습니다. 정군왕의 현재 몸 상태로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최윤은 죽었고 배준형도 죽었다. 황궁의 숙태비 역시 매일 인삼탕으로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며 생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이제 남은 것은 정군왕뿐이었다.유지영은 굳이 그의 목숨을 취하지 않고 그가 온갖 수모를 견디며 살아가는 꼴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한 시대를 풍미했던 친왕이 오늘 이 지경으로 몰락한 것 또한 인과응보였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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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4화

겨우 열여섯 살인 딸이 암자에 갇히게 생겼으니, 최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녀는 암자에서 최정안과 며칠을 함께 보내며 달래고 다그친 끝에야 간신히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유지영은 긴 눈썹을 치켜올리며 단박에 알아차렸다."허 귀비의 짓입니까?""그렇습니다!"최 부인은 허 귀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를 갈았다."허 귀비는 몇 번이나 정안이를 불러들였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폐하께서 자주 지나가시는 길목이었습니다!"허 귀비가 최씨 가문의 난처한 입지를 들먹이며 최정안을 꾀어내지 않았다면, 어린 최정안이 입궁할 마음을 품었을 리 없었다."제가 애지중지 키운 딸입니다. 심성 고운 그 아이가 어찌 수치심도 잊고 스스로 사내에게 몸을 바치려 들었겠습니까?"최 부인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일찍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딸의 경거망동을 눈감아준 탓에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최 부인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으나, 유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하소연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사건의 전후 사정을 정리했다."현왕비 마마, 경성 곳곳에 마마께서 태후 마마의 친딸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배후가 진정 궁금하지 않으십니까?"최 부인이 물었다.유지영은 대꾸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여유롭게 목을 축였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심한 태도였다.그 모습에 오히려 최 부인은 머쓱해져 말을 이었다."허씨 가문에 배준형이 정보를 흘렸습니다. 예전에 허지가 정군왕의 측비로 들어갈 뻔했던 사실을 허 귀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여기까지 듣자 유지영은 최 부인의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정군왕은 배이수의 혈통이 의심스럽다며 제 입으로 털어놓았습니다."최 부인은 내친김에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유지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요컨대, 정군왕 부자가 허씨 가문을 포섭하기 위해 배이수의 진짜 신분을 알렸고, 이해득실을 따진 허 귀비는 두 사람의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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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5화

유지영은 한참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운청이 다가와 시간이 늦었다며 재촉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육씨 가문의 노부인이 병석에 누웠다고 했지?"유지영이 짧게 물었다.운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십육 년 전 육씨 가문의 장남이 실종된 이후로 노부인은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합니다. 육씨 가문은 그동안 줄곧 조용히 자중하며 지냈고, 일족 중 누구 하나 경성에서 관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운청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듣자 하니, 과거 육씨 노부인께서 태후 마마를 각별히 아끼셨답니다. 태후 마마를 위해 친히 회북까지 내려가 서씨 노부인과 크게 다투셨고, 영씨 가문과도 의절하여 세간이 꽤나 떠들썩했다고 합니다."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 얽힌 사연은 유지영도 금시초문이었다.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유지영이 귀를 기울이자 운청은 계속해서 말했다."서소현이 보낸 태후 마마를 모함하는 서신 말입니다. 애초에 육씨 노부인의 손에 가장 먼저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육씨 가문 내에서는 태후 마마를 의심하며 파혼을 주장하는 이가 적지 않았는데, 육씨 노부인께서 홀로 앞장서서 일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혼사를 강행하셨답니다.""친정에 문안 오는 날에는 육씨 노부인께서 친히 태후 마마를 모시고 회북까지 가셨답니다. 서씨 가문을 찾아가 호통을 치며 해명을 요구하는 통에, 서씨 가문이 꽤나 곤욕을 치르며 사죄했다지요. 그 길로 육씨 노부인은 또 영씨 가문을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피우셨고, 결국 영씨 어르신이 직접 굽실거리며 사과한 뒤에야 발길을 돌리셨다고 합니다.""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유지영이 놀라 묻자 운청 역시 감탄 섞인 얼굴로 대답했다."젊은 시절 육씨 노부인께선 아주 괄괄한 성미셨답니다. 자기 사람을 끔찍이 챙기는 분이셨지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셨는데, 하나같이 인물이 훤칠하고 재주가 뛰어나다 들었습니다."선황이 서 태후에게 눈독만 들이지 않았어도 육씨 가문이 구설에 오르내리며 난처해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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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6화

정씨는 흠칫 놀랐다.육씨 노부인은 미안한 얼굴로 유지영에게 말했다."며느리가 성격이 워낙 활달하여 그런 것이니, 현왕비 마마께서는 부디 괘념치 마십시오."이때 불공을 드리러 오던 부인 몇몇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유지영 일행을 발견하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아까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현왕비 마마께서 참으로 육……."한 부인이 놀라워하며 입을 열었지만, 유지영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 하던 말을 꿀꺽 삼켰다.유지영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넓은 세상엔 기이한 일이 많고, 닮은 사람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함부로 남의 일을 의논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방금 입을 열었던 부인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고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육씨 노부인도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현왕비 마마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세상에 생김새가 닮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육씨 노부인은 돌연 가슴을 부여잡고 기침을 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정씨에게 말했다."오늘은 바람이 차니 이만 돌아가자꾸나."육씨 일가는 발길을 돌렸다.유지영은 등 뒤의 부인들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유지영은 산사에서 불공을 드린 뒤 서둘러 하산했다. 도중에 오라버니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국공부로 발길을 돌렸다. 뜻밖에도 그곳에는 방온도 함께 있었다.세 사람이 방 안에 모이자, 방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영의 호의를 저버리게 되어 미안하나, 나는 허씨 가문과 파혼할 생각이다."유지영은 깜짝 놀라 물었다."어째서입니까? 오라버니는 허 낭자를 마음에 품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허 낭자는 단정하고 사려 깊으며 다정한, 참으로 좋은 아가씨입니다."하지만 방온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말하자면 길어. 허씨 가문과은 언젠가는 유국공부를 적으로 돌릴 것이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모두 양부님이 이끌어 주신 덕분이지. 나는 국공부에 칼을 겨눌 수 없고, 허지 또한 가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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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7화

방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유지영은 다정한 연인이 억지로 갈라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유관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세 남매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방온은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무사의 부름을 받고 먼저 일어났다.방온이 떠나자 유지영은 눈시울을 붉혔다."오라버니, 방온 오라버니가 허 낭자를 얼마나 연모하는데, 저 때문에 피해를 본 것입니다…….""모든 일을 네 탓으로 돌리지 말거라."유관성은 고개를 저으며 다정하게 위로했다."두 사람 마음속에는 각자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젊은 날의 설렘은 아직 생사를 넘나드는 무게도, 가문을 짊어진 책임감도 넘어서지 못했다. 방온의 말대로 길이 다르니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유관성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방 백부님의 유언은 그가 문관이 되어 방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었다. 십수 년을 글공부에 매달려 장원급제했으니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다. 허나 허지를 선택한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테지. 허씨 가문을 돕지 않으면 부부 사이가 멀어질 것이고, 돕는다면 그의 벼슬길은 험난해지겠지."유관성이 굳이 방온을 말리지 않은 것은 이 모든 것을 짐작하고 이해득실을 따져보았기 때문이다.친부와 양부의 염원을 방온은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내가 알기로 허 부인은 허지에게 각별히 잘해 주었다. 허지에게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는 둘째 아우보다 무거울 것이다. 서로의 길을 가는 것이 두 사람에게 최선의 선택이다."유관성의 말에 유지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때 호위무사가 다급히 달려와 보고했다."둘째 공자께서 입궁하셨습니다!"유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운청을 불렀다."마차를 대령하거라…….""지영아."유관성은 다시 그녀를 가로막았다."방온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가 이 일을 잘 마무리할 것이라 믿거라."오후가 다 지나갈 무렵.방온은 자녕궁 문 밖에 두 시진이나 무릎을 꿇고 있다가 곤장을 수십 대나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서 건양제는 그의 관직을 세 품계나 강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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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8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 대인. 아직 고위 관원이 되기도 전에 황명을 이토록 가벼이 여기다니,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습니다!"십여 명의 대신이 앞다투어 방온을 물고 늘어졌다.곤장을 맞고 꼬박 하루를 꿇어앉아 있던 방온은 창백한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유관성이 먼저 나섰다."허 대인의 말씀에 본관은 동의할 수 없소."유관성은 단호하게 쏘아붙였다."내 아우가 파혼을 청하긴 하였으나, 허 소저를 깎아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소. 오히려 정이 깊고 의로워 소저의 앞날을 망치지 않으려 스스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오!"말을 마친 유관성은 매서운 눈빛으로 허 대인을 노려보았다."오히려 이성을 잃고 노발대발하는 허 대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남을 포용할 아량 따윈 전혀 없어 보이는군!"허 대인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유국공께서 방온을 편애하는 건 알겠으나, 옳고 그름을 혼란하시면 안 되지요. 이치대로 따져봅시다. 태후 마마께서 친히 내리신 혼사를 어찌 이리 손바닥 뒤집듯 무를 수 있단 말입니까!""하!"유관성은 참지 못하고 냉소를 터뜨렸다."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허씨 가문이 딸을 등 떠밀어 첩으로 보내려 했다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아는데! 이제 와서 무슨 부녀의 정이 깊은 척 위선을 떠시오?"가문의 치부가 드러나자 허 대인은 시퍼렇게 안색이 질린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 틈을 타, 유관성은 곧장 건양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폐하! 일전에 신에게 북신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어떤 상을 원하는지 물으셨지요. 신은 그 군공으로 아우의 항명과 파혼의 죄를 무마하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방온이 경악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국공!"다급해진 허 대인 역시 털썩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폐하! 일에는 응당 맺고 끊음이 있어야 합니다. 국공께선 어찌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하십니까!"유관성은 즉시 허 대인의 말에 반박했다."이는 폐하께서 내게 내린 포상이오! 군왕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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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9화

허지는 점점 멀어지는 방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제가 복이 없는 것입니다."등 뒤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온 허씨 노부인은 허지를 의미심장하게 흘겨보고는 허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하루빨리 허지의 새 혼처를 찾아주어라. 사람은 네가 직접 고르고."허 부인은 당황하여 되물었다."어찌 이리 서두르십니까?""파혼을 두 번이나 당했는데 이대로 둘 셈이냐? 경성에 이 아이를 받아줄 곳도 마땅찮거니와 수많은 눈이 주시하고 있다."허씨 노부인은 방온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 허지를 탓하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며느리인 허 부인을 노려보았다."네 친정에 허지와 나이가 엇비슷한 조카가 하나 있지 않더냐."허 부인은 흠칫 놀라며 머뭇거리는 눈빛으로 딸을 쳐다보았다.허지는 먼 곳을 응시하다가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체념한 얼굴이었다."제가 곧 친정에 다녀오겠습니다."딸의 반응에 허 부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지금의 허지는 군주의 신분인 데다 혼수도 넉넉하여, 친정에서도 감히 무시하지는 못할 터였다.허씨 가문은 일사천리로 혼사를 확정 지었고, 석 달 뒤 허지는 조용히 혼례를 올렸다.방온은 국공부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했다. 유관성이 찾아와 아우의 상태를 살폈다."곤장을 마흔 대나 맞았다더니, 겉보기엔 끔찍해도 급소는 다 피했더구나. 태후 마마께서도 자비를 베푸신 게지."유관성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방온 역시 잘 알고 있었다.태후가 친히 내린 혼사였다. 파혼을 그리 쉽게 허락했다면 훗날 황실의 위엄을 어찌 세우겠는가. 문무백관과 백성들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니 방온은 서 태후를 원망하지 않았다.황실의 체면도 세우고 뭇사람의 입방아도 잠재울 명분이 섰으니 자연스레 파혼을 윤허하신 것이다."허지가 혼처를 정했다더구나."유관성이 넌지시 말했다.방온은 멈칫하더니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저는 품계가 세 계단이나 강등되었으니 훗날 더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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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0화

아이를 잃었다니…….유지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다가갔다.시녀의 귀띔을 받고서 유지영을 발견한 기씨 큰부인이 황급히 일어났다."경, 현왕비 마마께서 오셨군요."큰부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분노와 애통함이 교차했다.유지영은 조용히 다가가 침상 곁에 앉았다. 유영 군주가 별안간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그 여자의 품에 내 아버지의 옥패가 걸려 있었습니다. 현왕비 마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마마뿐입니다. 우리 어머니께 꼭 이 사실을 전해 주십시오."유영 군주의 손에는 아직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몸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맹렬한 분노와 살기가 번득였다. 유지영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일단 푹 쉬세요.""마마...."유영 군주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유지영이 맞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주자 유영 군주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기절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씨 가문의 가마가 도착했다. 태의가 침을 놓아 유영의 심맥을 보호한 뒤,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가마에 뉘었다."현왕비 마마."기씨 큰부인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제가 유영이를 데리고 나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였다면 이런 끔찍한 변고는 없었을 것을."죄책감 가득한 말에 유지영은 단호하게 말했다."유영 군주는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분이니 큰부인께서 너무 자책하실 일은 아닙니다. 당장 급한 것은 배후를 찾아내어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기씨 큰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심복들에게 유영 군주를 호송하라 지시하는 동안, 유지영은 운청을 불러 은밀히 무언가를 지시했다. 운청은 조용히 물러났다.기씨 큰부인은 그 모습을 보았으나 못 본 척 넘겼다.잠시 후, 사건의 경위를 파악한 유지영과 기씨 큰부인은 본격적인 추국에 나섰다. 악행을 저지른 범인이 끌려왔다.열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거지꼴을 한 채 해진 옷을 걸쳤지만, 눈빛만큼은 매섭고 날카로워 기씨 큰부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기씨 큰부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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