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71 - Chapter 80

100 Chapters

제71화

심인혜와 백시욱이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분위기가 싸해질 일이 없었다.백시욱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갔고, 심인혜도 그의 말을 절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허서령은 열흘 동안 답답하게 얹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끼며, 조용히 음식을 먹고 백시욱의 출장 이야기를 들었다.백시욱이 며칠째 밤샘으로 연속 야근을 해서 과로사 직전까지 갔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강산 씨도 저 사람처럼 밤새 긴급 업무를 처리하며 야근했던 걸까? 그때 분명 많이 힘들었겠지? 제대로 잠은 잤을까?’“강인시는 날씨가 엄청 춥더라고요.”백시욱이 감탄하며 말했다.“다행히 전 좋은 와이프 덕분에 두꺼운 옷을 잔뜩 챙겨 갔는데 강산이는 불쌍했어요. 공항 내리자마자 덜덜 떨더라니까요.”허서령은 반찬을 집던 손을 멈추고 긴장한 채 지강산을 올려다봤다.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고 있는 지강산은 표정이 태연하고 느긋했다.울심시의 12월은 그리 춥지 않았다. 두꺼운 내복 한두 벌에 두툼한 외투 하나면 겨울을 충분히 날 수 있었다.그는 지금 흰 니트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탓에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검은 코트는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그는 휴대폰 화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지강산과 눈이 마주친 순간, 허서령은 심장이 살짝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반찬을 집어 고개를 숙인 채 먹었다.심인혜가 웃으며 말했다.“역시 솔로는 다르네요. 옆에 챙겨주는 여자가 없으니까 날씨 예보도 안 보고, 두꺼운 옷도 제대로 안 챙기고.”지강산은 옅게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젓가락으로 생선을 집으며 담담하게 한마디 던졌다.“그러게요. 형수님이 한 명 소개해 주세요.”허서령은 먹고 있던 음식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아 힘겹게 삼켰다.심인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대단하신 지강산 씨인데, 제 소개가 필요해요?”지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필요해요.”“그럼 소유하는 여자친
Read more

제72화

윤성이 지강산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이렇게 급하게 여자친구 찾는 거면 제가 소개해 줄까요?”지강산은 윤성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다 좋아요. 마침 이틀 쉬니까 다들 약속 잡아줘요. 다 만나볼 테니까.”백시욱은 신나서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내며 물었다.“부모님이 결혼 압박이라도 하시는 거야? 갑자기 왜 이렇게 선보려고 해?”지강산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너랑 형수님이 너무 잘 사는 거 보니까 좀 부러워서 그래.”심인혜와 백시욱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허서령은 자신만 혼자 얼음창고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갑자기 식욕도 사라졌다.지강산이 그녀 앞에서 맞선 상대를 찾는 모습에 마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단지 지강산과 함께할 수 없을 뿐이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지강산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원래는 상관없는 일이었다.하지만 하필 그녀의 앞에서 이러고 있었다.‘하늘은 내가 아직 매우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벌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 지강산을 보내 나를 더 괴롭히는 건가...’“허서령.”갑자기 지강산이 그녀를 불렀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허서령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이유 모를 긴장과 불안이 밀려왔다.지강산은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태연하게 말했다.“혹시 주변에 솔로인 여자 동료 없어? 소개 좀 해줘.”결국 칼은 지강산의 손으로 직접 그녀의 심장에 꽂았다.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이 매우 어색했다. 심장이 계속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저었다.“없어요.”“아니, 있잖아.”심인혜가 끼어들었다.“너희 로펌에 엄청 예쁜 언니 한 명 있잖아. 그 사람 싱글 아니야?”허서령은 바지 위에 올린 두 손을 꽊 움켜쥐었다.“그분은 강산 씨보다 열 살 많아. 안 어울려.”지강산이 말을 받았다.“나이는 문제 아니야. 난 괜찮은데.”허서령은 씁쓸하게 입을 다물고 지강산을 바라
Read more

제73화

심인혜는 생생하게 친구 이야기를 하며 지강산에게 소개를 이어갔다.지강산의 시선은 허서령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그녀가 룸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도 서서히 굳어졌다. 그는 심인혜의 소개에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시골 식당 뒤뜰 바깥.허공에 초승달이 걸려 있고,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들판의 벌레 소리는 여름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몇 마리만이 느리고 잘게 울어댔다.허서령은 나무 난간에 기대 흐릿한 밤 풍경을 바라봤다.머리 위 따뜻한 조명이 가늘고 여린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의 주위에는 희미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마치 폭풍우 속을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몹시 지쳐 보였다.그녀는 엉망으로 무너져 있으면서도 끝까지 강한 척하며 밖에서 한참 동안 바람을 맞았다.심인혜가 찾으러 나와서야 그녀는 함께 룸으로 돌아갔다.자리에 앉자 백시욱이 농담하듯 말했다.“화장실에 빠진 줄 알았네요.”그녀는 옅게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뒤로도 그녀는 더는 먹지 못했고, 모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지강산은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직접 운전하기로 했다. 허서령은 그의 조수석에 올라탔다.은은한 향이 감도는 차 안은 조용하면서도 답답한 분위기가 이어졌다.지강산은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맨 뒤, 갑자기 무언가가 든 봉지를 그녀의 허벅지 위에 툭 올려놨다.허서령은 따뜻한 온기가 바지를 뚫고 허벅지 피부까지 스며드는 걸 느꼈다.그녀는 봉지를 들어 보며 물었다.“뭔데요?”지강산은 시동을 걸고 핸들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남은 해산물 맛 만두인데 버리기 아까워서 포장해 왔어.”식탁에는 애초에 해산물 맛 만두를 시키지도 않았었다.게다가 무슨 남은 만두가 이렇게 뜨겁단 말인가.허서령은 천천히 봉지를 열어봤다. 안에는 투명한 용기가 있었고, 그 안엔 하얗고 통통한 작은 만두 여섯 개가 담겨 있었다. 해물 향이 진하게 퍼졌다.“해산물은 밤새 두면 안 좋아져. 지금 먹어.”허서령은 아
Read more

제74화

“네.”이미 먹기 시작한 이상 멈출 이유도 없었다. 허서령은 조용히 대답하고 해산물 맛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차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도로 위를 달렸다.허서령이 만두를 다 먹고 포장 봉지를 정리하자, 지강산은 수납 칸에서 물티슈 한 팩을 꺼내 그녀의 옆에 놓았다.허서령은 잠시 멈칫하며 그를 바라봤다.‘이렇게 운전에 집중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내가 물티슈를 찾을 걸 아는 거지?’“고마워요.”허서령은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입을 닦고 손도 닦았다.“지난번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지강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허서령은 의아한 마음에 그의 잘생긴 옆모습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 위로 스쳐 지나가며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확신이 없어 물었다.“무슨 일 말인데요?”“난 소유하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그냥 아무 여자나 하나 데리고 내려가서 양가 생각을 끊어버릴 생각이었지. 그래서...”그는 몇 초 멈추더니 말을 흐렸다.허서령은 이해했다.“그래서 저한테 재결합 얘기하면서 도와달라고 했던 거예요?”“응. 그냥 툭 던져본 말이야. 그런데 이제 네 도움 필요 없어. 친구들이 소개팅 상대를 너무 많이 소개해줘서 고르기도 힘들 정도야.”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허서령은 안도의 숨도 살짝 내쉬었다.‘그런 거였구나...’그 때문에 그녀는 며칠 동안 너무 괴로웠다. 자신이 또다시 그에게 상처 준 줄 알았고, 그가 그렇게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예전에 지강산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으니 이제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미움뿐일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상처만 준 전 여자친구와 다시 시작하려 하겠는가.허서령은 자신에게 물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그냥 가족 속이려고 아무나 찾는 거예요? 아니면 진짜 결혼 생각하는 거예요?”지강산이 대답했다.“난 감정 가지고 장난치는 스타일 아니야. 잘 맞으면 당연히 결혼 생각하고 만나지.”허서령은 입술을
Read more

제75화

구름타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1시였다.집 안으로 들어온 지강산은 차 키와 휴대폰을 내려놓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기댄 채 편안하고 거침없는 자세로 눈을 감았다.허서령은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갈아신은 뒤 들어왔다.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삼켰다.“일찍 쉬어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한 뒤 방으로 향했다.그때 지강산이 그녀를 불렀다.“허서령.”허서령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그는 여전히 늘어진 자세 그대로였다.“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 좀 해줘.”허서령은 어이없었다.그 말투는 부탁도 질문도 아닌, 그냥 당연하다는 듯 부리는 말투였다.화가 조금 머리끝으로 치솟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연애할 때도 이렇게 당당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저더러 강산 씨의 아침을 하라고요?”허서령은 사실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투와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친구 아침 좀 차려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지강산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허서령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친구? 자기가 멋대로 정한 관계를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는 거잖아.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자마자 이렇게 당당하다니.’허서령은 궁금했다.“강산 씨 원래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해요?”지강산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말했다.“난 누구한테나 잘해주는 사람 아니야. 친구는 쓸 수 있으면 쓰고, 부릴 수 있으면 부리는 거지.”“제가 안 해주면요? 절교할 거예요?”허서령은 담담하게 말하며 그가 어떻게 받아칠지 기대했다.지강산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투덜댔다.“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어. 오늘은 비행기도 오래 타서 너무 피곤해. 그래서 내일 아침은 못 하겠어.”이렇게 약한 척하자 허서령은 마음이 흔들렸다.“배달시켜 먹어요.”“배달음식 먹기 싫어.”“회사에서 숙식 제공
Read more

제76화

심인혜는 생각할수록 불안해졌다.“설마 분이 안 풀려서 너랑 같이 살다가 기회를 봐서 몰래 죽이려는 거 아니야?”“연쇄 살인 사건 관련 영상 좀 적당히 봐.”허서령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차라리 ‘재벌 남주의 사랑 이야기’ 같은 로맨스 숏폼 좀 봐. 정신 건강에 좋아.”심인혜는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감탄 섞인 한숨을 쉬었다.“서령아, 네 아버지 사건이 재심 되지 않는 이상 너랑 지강산은 절대 안 돼. 다시 빠져들지 마. 괜히 더 아파지니까. 알겠지?”“알아.”“아, 맞다. 네 엄마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너한테 전해달래. 네 남동생의 여자친구가 임신했대.”허서령은 휴대폰을 베개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겉보기엔 평온했지만 마음속은 이미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집안 이야기만 나오면 도무지 마음이 편해질 수 없었다.예전에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남동생의 여자친구까지 전부 차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몰랐다.심인혜가 말을 이었다.“네 엄마 말로는 시간 되면 한번 내려오래. 네 동생 결혼 얘기 상의해야 한다고. 한 해에 큰 경사가 두 번 있으면 안 된다면서, 네 동생은 설 전에 결혼시키고 네 결혼은 설 이후로 미루자고 하더라.”허서령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심인혜는 화면 속 그녀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고 말했다.“서령아, 자? 듣고는 있어?”허서령은 입술만 조금 움직였다.“듣고 있어.”“난 또 자는 줄 알았네.”허서령은 피식 웃었다.이런 얘기를 들으며 불면증 안 오는 것만으로 다행인데 어떻게 잠이 오겠는가.“네 동생 결혼은 어쩔 생각이야?”허서령은 담담하게 말했다.“뭘 어쩌겠어. 누나로서 결혼하면 내 형편 되는 선에서 체면치레할 축의금 정도는 줄 거야. 그 이상은 못 도와주고, 도와주고 싶지도 않아.”심인혜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역시 내가 알던 허서령이야. 인정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절대 많지는 않은 사람.’허서령은 동생 인생 대신 살아주는 누나
Read more

제77화

지강산의 그릇에는 특별히 파까지 올렸다.고기와 달걀을 넣은 면 두 그릇을 완성하고 난 허서령은 지강산의 방 문을 두드렸다.곧 문이 열리고, 지강산이 연회색 홈웨어 차림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문에 기댄 채 막 일어난 사람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왜?”허서령은 의아했다.“어젯밤 강산 씨가 아침으로 면 끓여달라고 했잖아요.”지강산은 순간 졸음이 사라진 듯 눈빛이 밝아졌다.“허서령, 진짜 면 끓인 거야?”쉰 목소리엔 믿기 어렵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허서령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지강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소면이야? 라면이야?”‘누굴 무시하는 거야, 뭐야...’허서령은 이를 갈며 일부러 앞치마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고는 그를 노려봤다.지강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방에서 걸어 나왔다.허서령은 두 손으로 그의 배를 막으며 말했다.“양치량 세수부터 하고 나와서 먹어요.”“좀 있다가 할게. 면 불잖아. 먹고 씻을래.”“안 돼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지강산은 바로 돌아서 욕실로 들어갔다.허서령은 앞치마를 벗어 주방에 두고, 밀가루로 난장판이 된 주방을 둘러봤다. 사방이 전쟁터 같았다.정말 진이 빠졌다.‘배달이 얼마나 편한데. 치울 것도 없고.’더는 보기 싫어진 그녀는 앞치마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와 식탁 앞에 앉아 지강산을 기다렸다.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다행히 아침만 먹으면 출근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지강산은 생각보다 빨리 씻고 나왔다.그는 의자를 당겨 앉아 그릇 속 면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달걀은 지나치게 노릇하게 익었고, 고기 조각은 두툼했으며, 면발은 굵었다. 채소는 푹 익어 누렇게 죽어 있었고, 그릇에서 가장 예쁜 건 초록빛 파뿐이었다.비주얼은 평범했지만 요리 초보가 이 정도면 꽤 잘한 편이었다.허서령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계속 젓가락을 들지 않자 긴장한 채 물었다.“먹기 싫어요?”지강산은
Read more

제78화

지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공평해.”허서령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주방 안 치워도 된다. 다행이야.’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가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왔다.지강산은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다 놓고 나오다가, 허서령이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봤다.“데려다줄게. 주방은 다녀와서 치우면 되니까.”“괜찮아요.”허서령은 신발을 갈아신으며 그를 돌아봤다. 이유 모를 답답함이 몰려오며 목소리도 가라앉았다.“오늘 바쁘잖아요. 주방 치우고 나면 소개팅 상대들도 줄줄이 만나야 하고.”그 말에는 은근한 질투와 날 선 감정이 섞여 있었다.지강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확실히 바쁘긴 해. 그럼 안 데려다줄게.”허서령은 밖으로 나가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탁한 숨을 내쉬었다.‘4년이나 사귀었는데 왜 이제야 알았을까. 저 사람이 이렇게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걸.’밖은 아침의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 때문에 햇살조차 온기를 잃어버린 듯했다.공기엔 냉기가 서려 있었다.구름타워 입구를 막 나선 허서령은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그들도 그녀를 발견하고 웃는 얼굴로 빠르게 걸어왔다.허서령은 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음은 점점 더 답답해졌다.“누나, 좋은 아침!”두 사람은 동시에 웃으며 인사했다.그녀의 남동생 허태윤은 올해 스물넷으로, 전문계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집에서 게임만 하며 지냈다. 게임 대리 플레이나 방송으로 돈을 벌었고, 몸매 관리엔 관심도 없어서 어머니 손에 자란 살집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그리고 남동생의 여자친구 한아름은 스물두 살, 타지 출신에 머리는 알록달록하게 염색했고, 양아치 감성의 촌스러운 차림새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들어갔다가 게임을 좋아해 허태윤과 온라인에서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이후 둘은 종일 집에서 게임만 했고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닌 적이 없었다.하지만 어머니 눈엔 이 두 철부지가 세상 무엇보다 귀한 존재였다.허서령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좋은 아침.
Read more

제79화

“빌려줘? 너무한 거 아냐? 진짜 내 친누나 맞아?”허태윤은 얼굴을 굳히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턱을 치켜든 채 심기를 건드렸으니 알아서 풀어주라는 듯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철부지인 그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어릴 적엔 어머니의 편애와 압박 때문에 허서령이 늘 양보하고 맞춰줘야 했다.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된 날부터는 더는 누구 눈치도 보지 않았다.친엄마조차 신경 쓰지 않는데 남동생이 뭐라고.“내가 뭐가 너무해?”허태윤은 당당했다.“누나는 내 친누나잖아. 지금 나 결혼한다고. 이건 내 인생에서 엄청 중요한 일이야. 돈이 필요한데 누나는 마침 돈이 있잖아. 그럼 당연히 나한테 줘야지. 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린 가족이니 서로 도와야 하고, 서로 책임져야 하잖아.”허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가족끼리는 서로 도와야지. 네 결혼 예단비는 내가 낼게. 부족하면 친구들한테라도 더 빌려볼 테니까.”허태윤은 흥분했다.“진짜?”한아름도 얼굴이 활짝 폈다.미래 시어머니한테 듣기로는 허태윤의 누나는 겉보기엔 여리여리해도 성격이 차갑고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했다.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말이 잘 통했고, 이렇게 통 크게 나올 줄은 몰랐다.하지만 기쁨은 3초도 가지 못했다.허서령이 이어 말했다.“아, 맞다. 집 3층짜리 단독주택 있잖아. 엄마가 1층 쓰고, 너희 부부가 한층 쓰고, 남은 한 층은 나 줘.”허태윤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누나, 농담이지? 그 집은 원래 부모님이 나 주려고 지은 거야. 누나는 어차피 시집갈 사람이고, 시집간 딸은 남이라고 하잖아. 무슨 딸이 집에 와서 남동생 집을 뺏어?”‘헐. 필요할 땐 친누나, 이익 나눌 차례가 되면 남이라는 거야?’가족이라는 건 정말 사람을 가장 깊게 찌르는 양날의 검이었다.허서령의 목소리는 더없이 잔잔했다.“내가 나중에 결혼하
Read more

제80화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가슴 한가운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틀어막고 있는 듯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눈가도 이유 없이 뜨거워졌다.하지만 그 감정은 한순간뿐, 그녀는 곧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자신이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 가족에게 끝도 없이 빚진 사람이 된 건지.감정의 빚, 돈의 빚, 책임의 빚, 길러준 은혜의 빚.심지어 누나라는 이유만으로도 남동생에게 평생 빚진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었다.하늘 전체가 먹구름에 뒤덮인 듯했다. 햇빛은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고,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뼛속까지 시렸다.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녀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 유리 벽 하나가 놓인 기분이었다.유리 안쪽엔 오직 그녀 혼자만 있고, 유리 바깥세상은 시끄럽고 활기찼다.바쁜 업무조차 그녀의 마음속 답답함을 떨쳐내 주지 못했다.언제부터였을까, 허서령은 엄마와 남동생을 만나는 게 너무 두려워졌다.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치밀고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그들을 한 번 만나고 나면 종일, 심할 땐 며칠씩 우울하고 답답했다.점심 재판에서 그녀는 패소했다.“승소 가능성 크다며? 생긴 건 멀쩡하게 배운 사람 같은데 일 처리하는 건 돼지보다 못하네. 여자들은 머리만 길었지 제대로 일을 못 한다더니 딱 너 같은 인간 말하는 거야. 소송 하나 못 이기면서 무슨 변호사야? 그냥 빨리 남자한테 시집이나 가. 여기서 쪽팔리게 굴지 말고.”원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은 그 독설을 듣는 순간 완전히 무너지며 화가 치밀어 가슴까지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전문성과 평판이 걸려 있어, 저런 무식한 인간처럼 막말로 맞받아칠 수 없었다.허서령은 차가운 얼굴로 분노를 억누른 채 날카롭게 말했다.법원 문을 막 나서자 의뢰인이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전 공익 변호사예요. 의뢰인한테 수임료도 받지 않았고, 이런 사건 수백 건 넘게 맡아 대부분 승소했어요. 하지만 의뢰인처럼 자기 변호사한테 진실을 숨긴 건 처음이에요. 의뢰인은 배송 중 다친 게 아니라,
Read more
PREV
1
...
56789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