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그 불쾌한 한기가 얼굴을 스치며 따갑게 느껴졌다.집에 도착한 허서령은 지문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갈아신은 뒤 문을 닫았다.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퇴근했어?”묵직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서령의 차갑게 식어 있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떨려왔다.그녀는 멈춰 선 채 고개를 들었다.지강산은 아침에 입었던 홈웨어 그대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차가운 흰 조명이 그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려, 더욱더 부드럽고 단정해 보였다.그 빛은 온기를 품고 있는 듯 집 안 가득한 싸늘함을 조용히 밀어내며 거실 전체를 따뜻하게 물들였다.축축하고 차가운 바깥 날씨와 달리, 이곳만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다.지강산을 보는 순간, 그녀 마음속 음울함이 조용히 사라졌다.그리고 갑자기 강렬한 충동이 밀려왔다.그녀는 너무나도 지강산 품에 안기고 싶었다.그를 꽉 끌어안고,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었다.하지만 지강산은 이제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다.지강산은 그녀가 아무 반응도 없자 휴대폰에서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눈이 마주친 순간, 허서령은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슬리퍼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녀가 거실을 지나갈 때 지강산이 조용히 물었다.“저녁 먹었어?”허서령은 걸음을 멈추고 또다시 멍해졌다.‘또 저녁을 안 먹었네...’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원망했다.‘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사는 걸까...’지강산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봤다.“안 먹었지?”“먹었어요.”허서령은 대충 둘러댔다.“무슨 일 있어?”“네?”허서령은 그를 돌아봤다.“제가 왜요?”지강산은 미간을 찌푸렸다.“너 엄청 안 좋아 보여.”허서령은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었다. 목소리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아니에요.”“아침에 면 끓여달라고 한 거 때문에 종일 화난 거야?”“아니요.”허서령은 문득 더 서글퍼졌다.오늘 하루 중 유일하게 충만하고 행복했던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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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드라이기 소리가 멈추더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허서령은 귀여운 흰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막 말린 길고 까만 머리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윤기 있게 찰랑거렸다. 샴푸 향도 은은하게 풍겼다.화장기 없는 얼굴은 맑고 깨끗해 꾸밈없는 청초함과 고요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세속에 물들지 않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연애하던 시에는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쁘고 또 같은 침대에 누워 있으니, 생리 기간만 아니면 단 한 번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참아낸 적이 없었다.그녀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만 맡아도 그는 이성을 잃곤 했다.지강산은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 허서령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샤워 후의 향긋한 냄새를 남기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답답하게 참고 있던 뜨거운 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따라갔다.허서령에게는 테이블과 소파 사이가 조금 멀었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바닥 카펫 위에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반면 지강산은 소파에 앉았다. 그는 팔다리가 길어서 소파와 테이블 사이 거리가 딱 알맞았다.허서령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포장 봉지는 어디 있어요?”지강산이 답했다.“버렸어. 포장 봉지는 왜?”“영수증 보려고요.”허서령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얼마 나왔어요? 반 낼게요.”지강산은 맥주 한 캔을 집어 티슈로 뚜껑을 닦고 가볍게 탁 따며 말했다.“내가 친구한테 술이랑 야식 사주는데 무슨 더치페이야.”그는 고개를 젖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마른 목을 축였다.“고마워요.”허서령도 사양하지 않고 맥주 한 캔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이것도 좀 따줘요.”“먼저 뭐 좀 먹고 속 채워.”지강산은 맥주를 받아 들었다가 바로 따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마치 그녀가 저녁을 안 먹은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유난히 고집스러웠다. 그는 고기 꼬치를 집어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그의 손바닥은 따뜻했다.허서령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손끝도 살짝 떨렸다. 그녀는 꼬치를 든 채 몇 초 멈춰 있다가 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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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서로의 시선이 오가는 사이,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두 사람 모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급히 시선을 피한 지강산은 맥주를 집어 들고 고개를 젖혀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섹시한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허서령은 마음이 어지러워 급히 일어나 잠옷 양쪽의 존재하지도 않는 주머니를 더듬으며 말했다.“저... 방에 가서 머리 좀 묶고 올게요.”그녀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머리끈을 찾아 머리를 뒤로 묶었다.다시 나왔을 때 지강산은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한쪽 팔은 등받이에 걸친 채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맥주 캔을 느긋하게 만지작거렸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허서령은 다시 카펫 위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꼬치를 먹었다.지강산은 계속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허서령이 뒤돌아보며 말했다.“강산 씨는 안 먹어요?”지강산이 고개를 들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소고기 꼬치 하나 줘.”허서령은 소고기 꼬치를 집어 건넸다.지강산은 받아 들고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천천히 먹었다.“회사 일 때문에 힘든 거야?”그가 갑자기 물었다.마음속 깊이 눌러두었던 답답함을 건드리자 허서령은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속에 담아두기만 하면 계속 곱씹게 되고 괴롭기만 할 테니 차라리 털어놓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네. 사건 하나 맡았는데 그 인간이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힘들고 억울한지 떠들더라고요. 회사에서 산업재해 보상도 못 받고 해고까지 당했다고요. 너무 안쓰러워서 제가 무료 법률 지원 신청까지 해줬어요.”“그런데 알고 보니까 완전 악질이었어요. 근무 시간에 성매매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인 거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서 해고당한 거였고요.”“그런 쓰레기가 회사에 보상받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아주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사실을 숨기고 저를 속여서 소송 도와달라고 해놓고는, 재판에서 지니까 제가 무능하다느니 머리만 길고 식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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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전 누나라는 이유만으로 어릴 때부터 뭐든 양보해야 했어요. 뭘 먹든, 뭘 하든 다 동생 우선이었고. 걔가 잘못해도 혼나는 건 늘 저였어요. 걔가 원하는 건 원래 제 것이어도 다 내줘야 했고요. 모든 게 다 동생 중심이었어요.”“엄마는 엄청 편애했어요. 어릴 때부터 커서 동생 도와줘야 한다는 말만 계속 주입했고요. 아빠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너무 착하고 소심해서 엄마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절 감싸주고 싶어도 늘 역부족이었죠.”“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무서웠어요. 어릴 땐 맞을까 봐 무서웠고, 지금은 맞는 건 안 무섭지만 제 앞에서 계속 떠들고 욕하고 닦달하고 협박하듯 말하는 게 너무 싫어요. 듣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아요.”“엄마는 맨날 입만 열면 ‘네 동생, 네 동생’... 모든 대화가 자기 아들 중심이에요. 똑같은 자식인데 왜 그렇게까지 차별하는 걸까요? 엄마는 절 전혀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허서령은 마음속 깊은 답답함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손에 든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텅 빈 캔을 흔들더니 화가 난 듯 바닥에 던져버리고 새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지강산은 그녀의 손에서 맥주를 빼앗듯 가져와 티슈로 캔 뚜껑을 닦고 따서 앞으로 내밀었다.“고마워요.”고개를 들고 웃고 있는 그녀의 맑은 큰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지강산은 오래도록 허서령의 붉게 젖은 눈가를 바라보았다.그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며 눈빛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안쓰러움이 스쳤다. 결국 모든 감정이 아주 희미한 한숨으로 바뀌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허서령의 어깨 위에 얹은 뒤 두어 번 가볍게 토닥였다.허서령은 그의 위로를 느끼며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전 괜찮아요. 지금은 절대 걔 버릇 안 받아줘요. 저한테 돈 달라고 하면, 저도 집 달라고 할 거예요. 집에 3층짜리 단독주택 있는데 왜 전부 동생한테만 주는데요? 전 방 하나도 없어요?”“우리 동생 다루는 건 쉬워요.”허서령은 술을 마시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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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허서령은 씩씩거리며 다 말해버린 뒤 손에 든 맥주를 또 다 마셨다. 그러고는 빈 캔을 흔들다가 볼을 부풀린 채 앞으로 던져버렸다.쨍그랑 소리와 함께 캔은 TV장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지강산은 그녀의 행동에 순간 놀랐다가 무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허서령은 테이블 위 빈 캔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한참 찾다가 이미 자기가 다 마셔버렸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트림을 한 번 하고는 지강산 쪽으로 몸을 돌려 양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포갰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엎드렸다.지강산의 몸이 순간 굳어지며 무릎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는 술에 취해 새빨개진 허서령의 얼굴을 내려다봤다.허서령은 아무 거리낌 없이 눈을 감은 채 그의 다리에 기대 잠들려 했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전 안 물러설 거예요... 절대... 안 물러나...”지강산은 소파에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서령의 붉고 고운 얼굴에 고정되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손에 든 술도 끝까지 마시지 못한 채 그대로 들고 있었다.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허서령의 숨결은 점점 고르고 잔잔하고 깊어졌다.그제야 지강산은 몸을 숙여 맥주 캔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허서령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함께 했던 4년 동안 그녀가 한 번도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이런 가정에서 자라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공평하게 대우받지도 못했으니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겼던 걸까?’하지만 그는 이제 그녀의 집안일에 끼어들 자격도, 명분도 없었다.지강산은 허서령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허서령, 일어나.”허서령은 아무 반응도 없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지강산은 그녀 양팔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부드럽고 가벼운 몸을 끌어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더니, 자세를 바꾼 뒤 그녀를 안아 들었다.그는 허서령을 안고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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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지강산은 순간 몸이 굳었다. 허서령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듣자 얼굴빛이 확 변하며 화가 난 듯 그녀가 감은 팔을 억지로 떼어냈다.그리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아 베개 양옆에 눌러둔 채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빛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허서령, 누가 널 떠났는데? 눈 제대로 뜨고 내가 누군지 봐. 내가 밤새 네 옆에서 술 마셔줬는데, 네 머릿속엔 윤성밖에 없어? 현실 좀 인정해. 걔는 이미 널 떠났어.”창밖 달빛은 술기운을 머금은 듯 흐릿했고, 베란다로 스며드는 찬바람마저 취한 듯 커튼을 흔들었다.허서령의 양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살며시 뜬 두 눈은 봄물에 잠긴 유리처럼 눈물이 어린 채 몽롱하게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분명히 봤다. 지강산이었다.‘그런데 왜 꿈속에서도 나를 혼내는 걸까?’자기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현실을 바꿀 힘도 없었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 작고, 무력하고, 연약했다.오직 꿈속에서만 그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화내지 말아요...”허서령은 울먹였다. 맑은 눈물이 눈에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술에 취한 채 버려진 새끼 고양이처럼 흐느끼며 중얼거렸다.“제가 잘못했어요... 떠나지 말아요...”지강산은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은 분노로 들끓었고, 눈가도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며 오래도록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지난 5년 동안 품어온 원망과 분노, 억눌림과 집착이 결국 억울함 가득한 한마디로 터져 나왔다.“허서령, 넌 정말 내가 잘해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그는 떨리는 쉰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짙은 원망을 내뱉었다.그 말은 지강산 자신도 무너뜨렸고, 술에 취한 허서령도 산산이 부숴버렸다.허서령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 베개를 적셨다.꿈속에서조차 그녀는 지강산을 잃어버렸다.지강산은 그녀의 손목을 놓고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앉았다.넓은 어깨는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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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휴대폰 알람 소리가 유난히 거슬리게 울렸다.허서령은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녀는 따뜻한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성가신 휴대폰을 더듬어 끈 뒤 화면을 밀었다.알람이 멈추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언제 닫혔는지 베란다 유리문과 커튼이 닫혀 있었고, 방 안은 따뜻하고 어스름한 기운으로 가득했다.그녀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몸을 지탱해 침대에 앉아 손가락으로 무거운 머리를 천천히 문지르며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어제의 기억이 조금씩 선명해졌다.하지만 기억나는 건 거실에서 술을 마시던 장면뿐, 마지막 기억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것쯤에서 끊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뜨고 이불을 들쳐 입고 있는 멀쩡한 잠옷을 확인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강산 씨가 방으로 데려다준 건가? 내가 술에 취한 뒤 강산 씨 앞에서 주사를 부린 건 아닐까...’허서령은 불안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30분 후, 그녀는 방에서 나왔다.시선은 자연스럽게 지강산에게 향했다.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검은색 위주의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차갑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좋은 아침이에요.”허서령은 거실을 지나 정수기 앞으로 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받았다.지강산은 아무 말 없이 눈꺼풀만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허서령은 몸을 돌려 물을 마시며 그를 마주 봤다.지강산은 검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의문을 담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허서령은 그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따뜻한 물을 크게 한 모금 삼킨 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감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지강산의 목소리는 유난히 담담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네가 아침 차려줬으니까 답례로 하나 만들었어. 주방에 있어.”“고마워요.”허서령은 작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몇 초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어젯밤 제가 취했을 때 강산 씨가 방으로 데려다준 거예요?”지강산은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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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한 순간 허서령은 발걸음을 멈췄다. 단지 밖에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순간 당황한 그녀는 급히 경비실 뒤로 몸을 숨겼다.어제는 남동생이 한아름을 데리고 찾아왔고, 오늘은 엄마였다.역시 쉽게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허서령은 잠시 망설이다 몸을 돌려 샛길로 향했다. 단지 뒤편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로펌에 도착한 뒤에도 그녀는 최대한 외근 업무만 골라 다녔다.이렇게라도 며칠 피하려는 생각이었다.윤성과 심인혜에게서 각각 메시지가 왔다. 내용은 거의 같았다.[네 엄마가 나한테 4천만 원 빌려달래. 설 지나면 네가 갚는다고 하던데?]기가 막힌 그녀는 한 마디만 답했다.[빌려주지 마.]윤성과 심인혜는 그녀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라 당연히 그녀 어머니의 성격도, 허서령의 태도도 잘 알고 있었다.이 돈을 빌려주면 친구 관계도 끝나고 돈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일주일 후의 저녁 무렵, 해 질 녘의 어스름이 내려앉았다.허서령은 여전히 단지 뒷문으로 귀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현관 앞에서 또다시 엄마 오정화를 마주쳤다.잠깐은 피할 수는 있어도 평생 피해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오정화는 얼굴이 잔뜩 굳은 채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고, 옆에는 진성호까지 함께 있었다.일주일 동안 단지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자 같은 단지에 사는 진성호의 도움까지 받은 것이었다.‘아들 결혼 자금 마련을 위해 정말 필사적이네.’허서령은 지친 마음으로 걸어가 담담하게 인사했다.“엄마.”오정화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오만하고 냉담한 태도로 비꼬듯 말했다.“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네 엄마냐? 허서령, 20년 넘게 키웠으면 짐승이라도 자기 엄마한테 이렇게까지 하진 않겠다.”허서령은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왔다.엄마의 목소리는 유난히 날카롭고 귀를 찔렀다.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고, 여전히 괴로웠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오정화는 진성호의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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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허서령은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맞죠. 뭐.”“너...”오정화는 얼굴이 어두워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이마엔 핏대가 솟은 채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 했다.진성호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아주머니, 화내지 마세요. 예물 비용은 제가 낼게요. 어차피 설 지나면 우리도 한 가족이 될 텐데요.”오정화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진성호를 향해 부드러운 표정으로 감사에 찬미소를 지었다.“정말?”“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서령이한테 주는 결혼 예물 비용은 1.5억으로 한 푼도 줄이지 않을 거예요.”진성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직 저랑 서령이 결혼한 건 아니지만, 저는 아주머니도 믿고 서령이도 믿으니까 우선 4천만을 먼저 드릴게요. 나머지는 결혼식 당일에 드리죠.”오정화는 그의 손을 붙잡고 몹시 흥분했다.“고맙다. 성호야, 정말 정말 고마워.”허서령은 눈앞의 두 사람이 자작극을 벌이는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전 진성호와 결혼 안 해요. 두 사람 거래는 법적으로 아무 보호도 못 받아요. 결과는 알아서 감당해요.”말을 마친 허서령은 그들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분노에 휩싸인 오정화는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힘껏 밀치더니 뒤쪽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밖으로 내던졌다.허서령은 그 힘에 밀려 뒤로 휘청였다.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지려던 순간, 갑자기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힘 있는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줬다.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지강산의 어둡고 냉랭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순간 멍해진 허서령은 급히 그의 품에서 몸을 바로 세우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 품에서 벗어났다.“고마워요.”지강산이 낮게 물었다.“도와줄까?”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진성호는 지강산을 보자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그는 눈빛이 독기라도 어린 듯 날카롭게 변한 채 지강산을 사납게 노려봤다.오정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지강산을 위아래로 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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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다만 엄마가 막무가내였고 고루했으며, 마음속엔 오직 아들뿐이었다.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았다.이 지긋지긋한 문제는 돈 말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허서령은 생각했다.지강산은 그녀가 계속 침묵하자 얼굴을 굳힌 채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계속 엄마 피해 다니면서 시달리고 억지로 끌려다니고, 괴로우면 술 마시고 울다가 다음 날 일어나 또 똑같은 문제 마주할 거야?”허서령은 엄마와 진성호의 집착에는 담담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강산이 조금만 날카롭게 말해도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억울함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누구에게도 지금 자신의 무력함과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누구 앞에서든 강하고 냉정한 척할 수 있었다.하지만 유독 지강산 앞에서만은 가장 약한 모습이 쉽게 드러났다.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지만 지강산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추궁했다. 목소리가 차츰 거칠어지기까지 했다.“아니면 진짜 진성호랑 결혼해서 그놈 예물비로 네 동생 챙겨주고, 네 엄마 뜻까지 다 들어주려고 그래?”허서령은 마음이 시큰해지며 코끝까지 시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아주 깊게 숙인 채 답답한 숨을 가슴속에 눌러 담았다. 바짓가랑이를 움켜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허서령, 넌 왜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해? 주변 친구들한테도 폐 안 끼치려고 하고. 그게 용감한 거고 독립적인 거고 강한 거로 생각해?”지강산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엄한 말투 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답답함도 섞여 있었다.“아니야. 친구는 같이 놀고먹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야. 필요할 때 기대라고 있는 거야. 친구한테 조금 기대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인데?”허서령은 그의 말에 눌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어둑한 노을 아래 아무도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맑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누군가 거대한 손으로 심장을 움켜쥔 듯 저리고 답답해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지강산은 오정화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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