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1 - Chapitr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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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지강산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화이트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여전히 귀공자 같은 우아함을 풍기고 있었고 거기에 서늘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조각 같은 옆모습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지강산이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싱그러운 소년미를 풍기며 따스하고 햇살처럼 밝게 웃어주던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허서령을 품에 안고 어리광을 부리던 게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서령아, 뽀뽀해줘.”하지만 어제가 아니라 무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젠 전생의 일처럼 아득했다.허서령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릿한 통증이 번졌다. 어느새 눈시울도 붉어졌다. 도저히 지강산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냥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주춤거리던 허서령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룸을 나가려 했다.“서령 씨.”백시욱이 허서령을 불러 세웠다.“오자마자 왜 그냥 가요?”허서령이 멈칫하더니 문고리를 꽉 잡았다.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서령에게 쏠렸다. 오직 지강산만 예외였다. 휴대폰 화면을 넘기던 엄지손가락이 잠깐 멈칫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허서령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첫사랑과의 재회가 너무나 당혹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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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그럼 내가 물어볼게. 허서령, 5년 전 그 일 후회한 적 있어?”지강산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새로 채워진 독주를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사람들이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허서령을 쳐다봤다.그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후회 안 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허서령의 목소리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소유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했다.“자, 계속하자.”바로 그때 지강산이 갑자기 앞에 놓인 독주를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대체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벌주를 마신 걸까?“계속들 놀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지강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허서령이 멀어지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전의 지강산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고 술도 약했다.‘방금 그 독한 술을 두 잔이나 마셔서 속이 엄청 안 좋을 텐데. 내가 왜 저 사람 걱정을 해? 이젠 옆에 소유하가 있잖아. 걱정해도 소유하가 해야지.’허서령이 시선을 거두던 찰나 소유하의 날카롭고 분노 섞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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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윽.”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지강산이 허서령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짓눌렀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지강산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허서령의 가슴을 난도질했다.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알았어요.”허서령이 울컥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간결하게 답했다.오직 그녀만 알고 있었다. 지강산이 그녀의 세상에서 단 한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어린 시절 너무 눈부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남은 생이 외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문득 알 것만 같았다.지강산이 허서령을 놓아주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깨물린 입술을 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비상계단을 나갔다.허서령이 맥없이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고 입술 위에 지강산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심장이 부서져 내리는 고통에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비상계단에서 마음을 추스른 뒤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휴대폰을 꺼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미안한데 내 가방 좀 퀵으로 보내줘.]메시지를 보낸 후 벽을 짚고 일어나 고개를 들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더는 지강산과 마주치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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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병원 안.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미친놈.”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예물로 줄게. 우리 두 집안끼리 얽힌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걸로 다 끝내는 거야.”허서령은 진성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자 진성호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다시 허서령의 팔을 잡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네 엄마도 동의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콧대를 세울 거야?”허서령이 버럭 화를 냈다.“그럼 우리 엄마랑 결혼하든가.”화가 난 진성호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허서령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내가 널 눈여겨본 걸 너의 복인 줄 알아야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으니까 거절도 적당히 해. 그때 가서 감당 못 하겠다고 울지 말고.”더러운 손이 뒷머리에 닿은 순간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허서령이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지금은 법치 사회야.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수도 있어.”“흥. 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 마.”진성호가 콧방귀를 뀌며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너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진 빚을 딸인 네가 몸으로 갚는 게 뭐가 어때서? 지극히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허서령이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아빠는 무죄야.”반드시 재심을 청구하여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배상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고 이미 지불한 병원비도 전부 돌려받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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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다.그러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린 그때 허서령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안 가?”허서령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다가갔다.‘다시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날 기다렸던 거야?’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강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지강산의 키가 훤칠했고 짧게 자른 머리가 아주 깔끔했으며 뒤통수마저 참 예뻤다. 그리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은 데다가 몸매까지 다부져서 옷을 입으면 날씬하고 맵시가 있어 보였다.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었다.예전의 허서령은 지강산이 요리를 할 때마다 몰래 백허그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 편안하고 마음이 놓였다.그럴 때면 지강산이 웃으며 묻곤 했다.“이렇게 매달려 있으면 요리를 어떻게 해?”허서령이 애교를 부렸다.“손은 안 잡았잖아요. 강산 씨는 요리해요. 난 이렇게 안고 있을 테니까.”“네 몸이 얼마나 말랑거리는지 잊었어? 자꾸 이러면 나 속이 근질거려서 밥이 아니라 널 먹고 싶어져.”“요리나 해요.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지강산이 농담으로 끝내는 법이 없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허서령을 번쩍 들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힌 다음 ‘처벌’을 내리곤 했다. 만족할 만큼 그녀를 탐한 뒤에야 기진맥진한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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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음 날.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인혜야, 깼어?][어, 깼어.][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그게 무슨 소리야?][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허서령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울심시가 넓고 사람도 많았다. 마음먹고 피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허서령도 바빴고 지강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는 실제로도 일부러 그를 피했다.심인혜와 백시욱이 주선한 자리는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친구들이 부를 때마다 누가 오는지 낱낱이 확인하며 지강산과 마주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그렇게 보름 뒤.변호사 나정민이 서류 한 뭉치를 들고 허서령의 사무실로 들어왔다.“허변, 이 사건 의뢰인이 꼭 허변한테 사건을 맡기고 싶다네요.”허서령이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상표권 침해 소송요? 나변,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요? 전 공익 쪽을 위주로 맡고 있고 이런 상업 소송은 나변 담당이잖아요.”“그쪽에서 꼭 허변한테 맡기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나정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면서 감탄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수임료를 무려 30%나 더 주겠다는데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그건...”“허변 능력을 믿어요.”“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의뢰인 집 주소니까 바로 가보세요.”“집으로요?”“네, 집으로.”...에버그린 힐.울심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주택이자 고소득 전문직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보안이 매우 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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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오빠, 신발 갈아 신어.”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허서령만 빤히 쳐다봤다. 소유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상표권 침해 사건 때문에 친구한테 법률 사무소를 소개받았는데 거기서 얘를 보낼 줄은 몰랐어.”허서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 섞인 눈빛으로 소유하를 째려봤다.‘내가 올 줄 몰랐긴 개뿔.’지강산이 소유하를 돌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상표권을 따질 회사가 어디 있어?”당황한 소유하가 멋쩍게 웃었다.“어... 그게...”“그럼 이만 가볼게.”허서령은 가슴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단 1초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강산이 신발장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바람에 신발을 갈아 신을 수가 없었다.“그래. 가봐.”소유하가 다시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렸다.“업무 능력도 별로인 것 같고 전문성도 떨어져서 이런 사건을 너한테 맡기기엔 좀 불안해.”‘웃겨서 원. 회사도 없으면서 상표권은 무슨.’당하고만 있을 허서령이 아니었다.“내 전문성은 법과 사실을 존중하는 데서 나와. 회사도 없는 ‘고객’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모욕을 견뎌주는 건 내 업무가 아니야. 오늘 수임료는 초 단위로 계산해서 청구할 거야. 이따가 청구서 보낼 테니까 확인하는 대로 입금해.”그러고는 지강산과 소유하 사이를 거칠게 비집고 들어가 팔꿈치로 지강산의 가슴팍을 힘껏 밀쳐냈다.“좀 비켜주시죠.”허서령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지강산이 뒤로 한 걸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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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 앞에 도착한 허서령이 멍하니 굳어버렸다.지강산이 소유하의 집 바로 맞은편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아, 동거하는 게 아니었구나.’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자마자 소유하가 집에서 급히 달려 나와 문을 활짝 열었다.“오빠...”신나게 달려오던 소유하가 허서령을 보더니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두 사람이 흠뻑 젖어 있는 걸 보고서야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는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허서령, 아직 안 갔어?”“밖에 태풍도 불고 비도 세게 와서 못 갔어.”허서령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조금 전 소유하의 집에 있을 때 창문은 물론 커튼까지 닫혀 있어서 바깥 날씨를 전혀 몰랐다.지강산이 소유하를 무시하고 문을 열자 다급해진 소유하가 이렇게 말했다.“오빠, 허서령을 우리 집에 머물게 해. 같은 여자라 허서령한테 맞는 옷도 있어서 우리 집이 더 편할 거야.”허서령도 소유하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신세 좀 질게.”허서령이 예의상 한마디를 던지고 소유하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지강산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됐어.”지강산이 덤덤하게 거절하더니 허서령을 자기 집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닫았다.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허서령이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동시에 뒤에서 소유하가 화를 내며 문을 두드렸다.“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쟤 허서령이야. 예전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었어? 그런 여자를 집에 들여보내면 어떡해? 다시는 바보같이 굴지 않겠다고 했잖아. 허서령을 우리 집으로 보내. 문 열어...”소유하의 말이 날카로운 칼처럼 허서령의 심장을 난도질하여 통증이 밀려왔다.허서령이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거실로 걸어 들어가는 지강산을 쳐다봤다.‘저런 말을 들으면 나도 이렇게 아픈데 강산 씨는 괜찮은 거야? 침착한 걸 보니 아프지 않은 모양이네. 하긴. 날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을 테니까 당연히 괜찮겠지.’뒤에 있는 허서령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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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밖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허서령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닫은 뒤 옷장을 열어봤다.옷장 안에 옷이 있긴 했지만 아주 적었다. 비싼 드레스 두 벌과 아이보리 슬립 잠옷 한 벌 말고는 다른 옷이 없었다. 갈아입을 속옷도 마땅치 않았다.허서령은 하는 수 없이 슬립을 꺼내 들고 욕실로 향했다.다행히 욕실 수납장에 일회용 칫솔 세트와 일회용 샤워 타월이 구비되어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뒤 방을 나서니 벌써 밤 8시 반이었다.평소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위염을 달고 살았던 탓에 배고픔이 도를 넘어서면 위가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오늘 역시 저녁을 먹지 못한 상태라 위산이 위점막을 자극하여 알싸한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그때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순간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속옷을 입지 않고 얇고 섹시한 슬립 한 장만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이에요?”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문 뒤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저녁을 넉넉히 했더니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좀 먹을래?”지강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한 줌의 온기도 섞여 있지 않은 서늘한 말투였다.허서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유하의 집에 있을 때 이미 저녁을 먹었다며 영양탕까지 거절했던 그였다.그렇다면 소유하를 거절하기 위해 핑계를 댄 것일까?“저기 겉에 걸칠 만한 외투나 셔츠 하나만 빌려줄 수 있을까요?”잠깐 침묵이 흘렀다가 이내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알았어.”잠시 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허서령이 문을 아주 살짝 열였다. 문틈 사이로 지강산이 손을 쑥 내밀고 흰색 셔츠 한 벌을 건넸다.“고마워요.”허서령이 옷을 받아 들고 문을 닫았다.지강산의 옷을 쥐자마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러다가 뭔가에 홀린 듯 고개를 숙여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지강산 특유의 냄새와 포근한 세제 향이 섞여 있었다. 문득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음 깊숙한 곳이 아릿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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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허서령은 식사를 마친 뒤 식탁을 정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 놓았다.주방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지강산에게 향했다.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는데 여전히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허서령은 대체 무엇을 저토록 집중해서 보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다. 그녀가 소파 앞을 지나갈 때도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사실 지강산의 성품이 이만하면 충분히 훌륭했다. 태풍이 부는 날 전 여자친구를 재워주는 것도 모자라 저녁까지 차려줬다.남들 같았으면 그녀 같은 전 여자친구가 우물에 빠져도 구해주기는커녕 더 빨리 가라앉으라고 커다란 돌덩이라도 던졌을 텐데 말이다.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허서령은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문득 밤중에 목이 마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소유하 앞에서 물을 챙겨왔다고 한 건 그저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었다.허서령이 잠시 망설이다 지강산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선 바람에 지강산의 뜨거운 눈빛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지강산이 즉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당황한 기색이 금세 사라졌다.허서령은 순간 멍해졌으나 잘못 본 것이라 여기며 정중하게 물었다.“혹시 집에 생수 있어요?”“응.”지강산이 고개를 들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냉장고에 있어.”그녀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또다시 지강산의 앞을 지나가던 그때 지강산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어떤 여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섹시한지 정말 몰랐다. 특히 허서령이 그러했다.이목구비가 청순했고 검고 부드러운 긴 생머리가 아무렇게나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다. 짧은 실크 슬립 위에 지강산의 널찍한 흰 셔츠만 입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길고 곧게 뻗은 하얀 다리로 지강산의 앞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허서령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남자가 섹시하고 매혹적이라고 느끼는 포인트가 결코 노골적인 노출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순수함과 관능미가 공존하면서도 본인은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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