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Chapter 91 - Chapter 100

100 Chapters

제91화

달빛이 물처럼 부드럽게 베란다 위로 쏟아졌다.거실 안은 적막했다.허서령은 쿠션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겉보기엔 차분했지만 마음속은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지강산에게 향해 있었고, 초조하게 그의 귀가를 기다렸다.그녀와 어머니 사이의 오래된 막다른 갈등은 오직 돈으로만 잠잠해질 수 있었다.‘돈이 아니라면, 강산 씨는 대체 무엇으로 어머니를 설득할 생각인 걸까?’불안 속에서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허서령은 들고 있던 쿠션을 급히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지강산은 들어와 문을 닫고 현관장 앞에서 신발을 갈아신으며 곁눈질로 거실의 허서령을 본 뒤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쳤다.태연하고 담담한 남자의 눈빛과 걱정으로 가득한 그녀의 시선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지강산은 슬리퍼를 신고 작은 봉지 하나를 든 채 걸어왔다.“아직 안 자고 있었어?”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 숨소리가 조금 무거웠다.“기다렸어요.”지강산은 그녀의 앞에 서서 손에 든 작은 음식 봉투를 들어 보였다.“네 엄마가 사준 거야.”너무 황당한 말이라 허서령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봉투를 받아 안을 들여다봤다.단지 밖 카페에서 파는 디저트였다.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진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한테 돈 줬어요?”지강산은 느긋하게 외투를 벗어 소파 팔걸이에 던졌다.“진성호가 너한테 돈 주려는 건 널 결혼 상대로 보기 때문이야. 우린 그냥 평범한 친구고, 난 월세도 반반 받잖아. 밥 먹을 때도 더치페이고. 내가 네 엄마한테 4천만 원을 줄 만큼 멍청해 보여?”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내가 너무 앞서 생각한 걸까?’지강산은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며 그녀를 올려다봤다.“이제 네 엄마는 더는 너한테 돈 달라고 안 할 거야. 그러니 피하고 다닐 필요 없어.”“그럴 리 없어요.”허서령은 봉투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얼굴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동생 결혼 앞두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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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내 말은 전부 사실이야.”“강산 씨가 말한 그런 말들을 우리 엄마가 했을 리 없어요. 엄마는 일부러 저한테 디저트 사줄 사람도 아니고요.”“사람은 변하기도 해.”“그래도 강산 씨가 한 시간 얘기했다고 갑자기 저렇게 변할 순 없잖아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요?”지강산은 몸을 앞으로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얹었다. 깊고 날카로운 눈빛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다.“허서령, 넌 과정까지 알 필요 없어. 결과가 좋다는 것만 알면 돼.”“동생 예물비는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요?”허서령은 여전히 지강산이 돈 한 푼 안 쓰고 어머니를 설득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그건 네 동생 문제야. 알아서 해결하겠지.”허서령은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것도 엄마 뜻이라고요?”“그래. 이것도 네 엄마 뜻이야.”허서령은 소파에 기대며 다시 쿠션을 끌어안고 지강산을 깊게 바라봤다.그녀는 이 남자가 똑똑하고 재능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해결하지 못한 가족 문제를 강산 씨가 고작 한 시간 만에 해결했다고?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걸까?’문득 그의 말이 떠올랐다.“허서령, 넌 내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보여?”확실히 그는 그 정도 사람이 아니었다.예전에 그녀가 개에게 물린 사건 이후 도시 전체에 반려견 단속이 벌어졌다. 등록되지 않은 개와 유기견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내려졌고, 동물복지정책과의 여러 공무원이 조사받았다.아파트 단지는 순식간에 관리업체가 교체됐고, 불법을 눈감아주던 진성재마저 해임됐다.그는 확실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권력도 어머니 같은 막무가내 서민에겐 통하지 않을 거라 그녀는 생각했다.억지와 생떼에 자기만의 논리가 있는 어머니는 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런 사람을 강산 씨는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걸까?’그가 말하지 않을수록 그녀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지강산은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허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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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지강산은 차 키를 들고 거실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허서령을 바라봤다.“좋은 아침.”목소리는 낮고 맑았다.“면 끓였는데 같이 먹어요.”허서령은 자기도 모르게 회색 앞치마 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눈빛엔 안쓰러울 정도의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지강산은 몇 초 망설이다 식탁 쪽으로 걸어가 차 키를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허서령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다른 한 그릇을 들고나와 지강산에게 젓가락을 건넸다.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면을 내려다보았다.이번에는 분명 제대로 익었을 거로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지강산을 바라봤다.지강산은 젓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지난번 그녀가 아침을 해줬을 때처럼 부드러운 웃음은 없었다. 지금의 그는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허서령은 괜히 불안해져 조심스럽게 물었다.“먹기 싫어요?”“앞으로는 굳이 일찍 일어나서 내 아침 안 만들어줘도 돼.”지강산은 그렇게 말한 뒤 젓가락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면을 먹기 시작했다.허서령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마음 한편에 기대를 품고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묵묵히 면만 먹고 있었다.불평도 칭찬도 없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 침묵이 그녀를 초조하게 했다.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이 느낌은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도 지강산은 그녀에게 무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었다.분명 한동안 함께 지내며 관계도 부드러워졌고, 편하게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술에 취했던 그 날 이후, 두 사람 사이는 다시 차가워졌다.‘혹시 술김에 무슨 심한 말을 해서 화나게 한 걸까?’허서령은 울적한 마음에 입맛조차 사라졌다.지강산은 식사를 마친 뒤에도 자리에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허서령은 몇 입 먹다가 더는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 순간,지강산의 목소리가 들렸다.“다 먹어.”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줄지 않은 면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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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 허서령은 이미 지강산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었다.비록 연인으로 다시 함께할 수는 없어도, 매일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고, 그의 기척이 느껴지고, 그가 남긴 흔적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하고 안정됐다.그것만으로도 매우 좋았다.다시 연인이 되겠다는 욕심은 없었다.하지만 지금 같은 친구 관계만이라도 조금 더 편안하고 오래 지속하길 바랐다.지강산은 설거지를 마치고 간단히 주방을 정리한 뒤 소매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왔다.식탁 앞에서 차 키를 집어 든 그는 허서령을 바라보았다.허서령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온몸에서 쓸쓸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지강산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또 왜 그래?”‘내가 뭘 어쨌다고?’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허서령은 원래도 서럽고 속상했던 마음이 더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눈이 마주친 순간, 지강산은 미세하게 굳었다.허서령의 맑고 큰 눈에는 얇고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은근한 서러움이 배어 있는 눈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너...”지강산은 말을 멈췄다.지강산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손에 쥔 차 키를 꽉 움켜쥔 채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데려다줄게.”두 사람 회사는 방향도 달랐다.보통 이런 상황이면 허서령은 늘 거절했다.하나는 그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고, 또 하나는 지강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더 깊이 빠져들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언젠가 그가 떠날 때, 또다시 5년 전 같은 심장을 찢는 고통을 겪게 될까 봐 무서웠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이미 지강산의 이런 태도조차 견디기 힘들었다.앞으로 다가올 이별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미래 일은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자.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보내면 돼.’“그래요.”허서령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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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차에 올라탄 지강산은 봉투에서 생수를 꺼낸 뒤 남은 봉투를 허서령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물 사니까 같이 주더라.”허서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봤다.안에는 우유 한 병과 달걀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그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강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마워요.”허서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정이 가슴속을 어지럽게 휘젓는 걸 느꼈다.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지강산은 물병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출발했다.아침밥을 품에 꼭 안은 허서령의 마음속에 씁쓸한 감정이 천천히 번졌다.지강산은 원래부터 정말 좋은 남자였다.언젠가 그와 결혼하는 여자는 분명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로펌 앞에 도착하자 지강산은 차를 세우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가 일하는 곳이 조금 궁금한 듯했다.허서령은 아침거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차 앞을 돌아 로펌 입구에 선 그녀는 몸을 돌려 차 안의 지강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강산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순간 멈칫했다.“좋은 아침, 서령 씨.”그때 허서령의 뒤쪽에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돌아보니 현리아가 서류를 안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안에서 급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리아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허서령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현리아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차 안의 지강산을 보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남자친구 엄청 잘생겼네. 오늘 저녁 모임에 남친도 데려와.”“그 사람은...”허서령이 해명할 틈도 없이 현리아는 이미 옆에 대기 중이던 호출 차량에 타버렸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민망하게 지강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반면 지강산은 태연하기만 했다.허서령은 용기를 내어 차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두 사람... 서로 몰라요?”지강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가 알아야 해?”‘아니라고?’전에 분명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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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새벽 무렵, 회사 단체 버스가 구름타워 밖에 멈춰 섰다.허서령은 마지막 두 동료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이번 워크숍은 울심시 근교 민박으로 떠나 자연을 즐기고 현지 음식을 맛보는 일정이었다.집 앞에 도착한 허서령은 지문으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었다.거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조금 놀랐다.‘이 시간이라면 강산 씨는 벌써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예상대로 지강산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그는 편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이 시간까지 농구 경기를 본다고?허서령은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들어가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허서령은 화면 오른쪽 위의 선명한 세 글자를 발견했다.[재방송.]“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농구 보고 있었어요?”허서령은 가방을 소파 위에 올리고 간식 봉투를 테이블에 둔 뒤 그의 옆에 앉았다.지강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대신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예상치 못한 접근에 허서령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는 두 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졌다.쿵, 쿵쿵, 쿵쿵쿵...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라 그녀는 지강산의 짧은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고, 뜨거운 숨결까지 느껴졌다.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이 긴장된 그녀는 침을 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예요?”그녀는 지강산이 키스하려는 줄 알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지강산은 입 맞추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멈춘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냄새를 맡더니 다시 몸을 세워 앉았다.“좋아. 술 냄새 안 나.”지강산은 담담하게 한마디 던지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허서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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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허서령은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는 간식 세 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가리켰다.“쌀과자, 깨강정, 전남친 토스트.”지강산의 코가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는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으며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들었어.”“우리 지역 특산물인데 혹시 안 먹어봤을까 봐 가져온 거예요.”“토스트를 많이 먹어봤어도 전남친 토스트는 처음이네. 무슨 맛이야?”“고소하고 부드러워요. 강산 씨 너무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단 과자는 안 가져왔어요.”지강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문 채 손에 든 과자를 몇 번이나 다시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일부러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허서령은 순간 마음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급히 해명하듯 말했다.“제가 큰 상품 못 뽑아서 회사에서 위로차 선물 준 건데, 대부분 엄청나게 달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이 세 개만 골랐어요. 깨강정이 조금 달긴 한데 나머진 괜찮아요. 강산 씨 입맛에 맞을 것 같아요.”“내가 너무 단 거 안 좋아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네?”지강산은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허서령은 그 시선에 가슴 깊은 곳이 살짝 떨렸다.두 사람 사이로 묘한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며 눈빛이 오가고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결국 지강산이 먼저 침묵을 깼다.“고마워.”그는 간식 세 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씻고 자.”허서령은 TV를 가리켰다.“농구 아직 안 끝났잖아요.”그제야 지강산은 TV를 아직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끄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목소리도 따라서 부드러워졌다.“내일 아침 뭐 먹고 싶어?”“네?”허서령은 멍해졌다.“죽? 아니면 국수?”지강산은 면 요리를 좋아했지만 허서령은 밥 종류를 더 좋아했다.허서령은 가방을 들고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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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지강산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손엔 간식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허서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방문을 두 손으로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저 혼자 지하철 타고 출근할 거예요. 안 데려다줘도 돼요. 알겠어요?”지강산은 태연하게 웃었다.“친구끼리 왜 그래?. 부담 갖지 마. 차비 안 받을게.”“차비 문제가 아니에요.”허서령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시간이랑 체력 문제라고요.”“난 시간도 체력도 남아돌아.”“강산 씨...”지강산은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문 안 놓으면 오늘 밤 나랑 자고 싶은 거로 알 거야.”갑자기 날아든 노골적인 농담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손을 뗐다. 얼굴은 또다시 새빨개졌다.“잘 자.”지강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허서령은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머릿속엔 방금 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친구끼리잖아.”‘세상 어느 평범한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아침 차려주고, 출근도 데려다주고.’성인이면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감정이 있었다.허서령의 입가엔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그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행운이었다.이제 더는 괜한 감정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평범한 관계라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몰랐다.‘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다음 날, 허서령은 평소보다 30분 더 자고 일어나, 바라던 대로 지강산이 만들어준 달걀 요리와 야채죽을 먹었다.더는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끼어 있을 필요도 없었고, 서서 갈 필요도, 급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그저 지강산의 따뜻하고 편안한 차 안에 앉아 그가 준비해준 작은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회사에 도착하면 됐다.그녀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지강산은 그녀를 데리러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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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직접 만드는 거예요?”“그건 진짜 무리야. 포장된 거 사와야 해.”허서령은 걸어가며 음성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지강산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음성 메시지로 들어도, 직접 들어도 여전히 좋았다.그녀는 일부러 서운한 척 늘어진 말투로 답했다.“아쉽네요...”그러자 지강산이 바로 물었다.“삐졌어?”허서령은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괜히 자기 한마디에 또 레시피를 찾아보며 복잡한 팥죽을 만들려고 애쓸까 봐 서둘러 말했다.“안 삐졌어요. 기대 중이에요. 내일 동지라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랑 드론쇼 한다더라고요.”“같이 보러 갈까?”“내일 봐서요. 야근할지도 모르잖아요.”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가서 이야기하길 기다릴 수조차 없는 것처럼 지강산과의 음성 메시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밤안개가 내려앉은 단지 산책로에는 사람 그림자도 드물었고 가로등 불빛도 희미했다.“허서령!”갑자기 남자의 익숙하면서도 분노에 찬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허서령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움켜쥔 채 뒤를 돌아봤다.진성호였다.그는 얼굴이 잔뜩 굳은 채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분노에 휩싸인 모습이었다.허서령은 즉시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전기충격기를 움켜쥐었다.“무슨 일이야?”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네 엄마 대체 왜 그러는데?”진성호는 폭발하듯 소리쳤다.“네 동생 결혼식이 다음 달 1일, 새해 첫날이잖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내 돈 필요 없다 그러고, 네가 나랑 결혼하기 싫어하면 강요 안 하겠다고 하고, 나더러 너 괴롭히지 말라더라.”허서령 역시 궁금했다.지강산이 도대체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한 건지.하지만 그 뒤로 어머니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오랜만에 평온하고 편안해졌다.“법적으로 성인은 결혼의 자유가 있어.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 못 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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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허서령은 순간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골목길은 텅 빈 채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순간 차오르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손목을 비틀더니 전기충격기를 빼앗아 덤불 속으로 던져버렸다.허서령은 겁에 질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살려주세요!”진성호가 빠르게 따라붙더니 그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두피가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더는 앞으로 달릴 수 없었다.진성호는 덩치가 크진 않았지만 남녀 간 힘 차이는 명확했다.그의 앞에서 허서령은 여전히 약자였다.진성호는 한 손으로 그녀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덤불 사이 좁은 길로 끌고 갔다.그의 집 방향이었다.“읍읍...”허서령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두피가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았고, 공포는 수많은 독화살처럼 그녀 심장을 찔러댔다.몸부림치는 사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휴대폰이 아직 외투 주머니 안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휴대폰을 꺼내 뒤로 숨긴 뒤 익숙한 동작으로 지문 잠금을 해제했다.아마 채팅 화면이 그대로 떠 있을 터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 아래 ‘말하기’ 버튼을 길게 눌렀다.그리고 있는 힘껏 진성호의 손을 물어버렸다.“젠장!”고통을 느낀 진성호는 그녀의 입을 놓았다.그 틈을 타 허서령은 소리 높이 외쳤다.“진성호! 왜 날 네 집으로 끌고 가는 건데! 살려줘...”진성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허서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뺨은 화끈거렸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으며 휴대폰도 멀리 튕겨 나갔다.진성호는 즉시 그녀 휴대폰을 주워 확인했다.잠금 화면 상태인 걸 보고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허서령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힘이 너무 세서 턱과 볼이 부서질 듯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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