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자와 어쩌다 여름이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52 챕터

제21화: 시속 60km의 럭셔리 밴과 혜성 산부인과

"이태준 형! 지금 고속도로에서 시속 60km로 달리는 게 말이 돼?! 자전거가 우리보다 빠르겠다!"서울을 빠져나와 양양 고속도로에 진입한 지 한 시간째. 조수석에 앉은 이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쳤다."시끄러워. 뒷좌석에 7개월짜리 영유아가 탑승하고 있어. 급브레이크 한 번에 아이 목이 어떻게 꺾이는지 의학 논문으로 읊어줘?" 운전대를 잡은 태준은 앞만 뚫어지게 주시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유준이 새벽에 급하게 공수해 온 VVIP용 커스텀 대형 밴이었다. 내부는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뺨치는 리클라이너 시트와 최고급 방음재로 도배되어 있었지만, 태준에게는 그저 '움직이는 유리온실'일 뿐이었다."아무리 그래도 최저 속도는 맞춰야지! 뒤에서 트럭들이 쌍라이트 켜고 난리 났잖아!" "다들 조용히 해. 우리 여름이 깬다."뒷좌석 중앙에 설치된 최고급 회전형 카시트. 그 안에서 여름이가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양옆을 호위하듯 앉은 강태와 유준은 행여나 햇빛이 아이 얼굴에 비칠까 봐 번갈아 가며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형, 근데 이 차 승차감 진짜 끝내주지 않아요? 회장님들 타는 마이바흐 플랫폼 개조한 거라 방지턱 넘을 때 진동도 없어요." 유준이 자랑스레 속삭였다. "돈이 좋긴 좋다. 우리 체육관 낡은 스타렉스 탔으면 애 멀미해서 벌써 토했을 텐데."네 남자의 우당탕탕 로드 트립은 유준의 자본력과 태준의 극강의 안전 운전 덕분에 무사히 강원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오후 2시, 강원도 속초.바다 냄새가 훅 끼쳐오는 한적한 항구 근처의 구도심. 빛바랜 간판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낡은 3층짜리 상가 건물 앞에 럭셔리 밴이 멈춰 섰다.[혜성 산부인과 의원]"여기 맞아? VIP용 희귀 혈액이 수급됐던 병원이라길래 엄청 큰 종합병원일 줄 알았는데." 이수가 의아한 듯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이런 외진 곳이니까 대건 로펌의 추적을 피하기 쉬웠겠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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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낡은 보관함과 판도라의 상자

오후 3시 30분, 속초 시외버스터미널.바닷바람에 실려 온 짭조름한 냄새와 오래된 건물의 퀴퀴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평일 오후라 한산한 대합실 한구석, 녹이 슨 주황색 철제 코인 락커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곳에 네 남자가 섰다."040… 041… 여기다. 042번."태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빛바랜 042번 보관함 앞에 섰다. 강태와 유준이 혹시 모를 주변의 시선을 차단하듯 양옆에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고, 이수는 숨을 죽인 채 태준의 손끝만 응시했다.찰칵, 끼기기긱-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자물쇠가 뻑뻑한 마찰음을 내며 돌아갔다. 철문이 열리고, 캄캄한 보관함 안쪽에서 작은 종이 쇼핑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이거 하나뿐이야."태준이 조심스럽게 쇼핑백을 꺼냈다. 쇼핑백 안에는 손때 묻은 다이어리 한 권과, 뽁뽁이로 겹겹이 싸인 작은 직사각형의 물건, 그리고 반으로 접힌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편지의 겉면에는 꾹꾹 눌러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희동 14-2번지, 따뜻했던 분들께.]"…우리한테 쓴 편지야." 이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태준이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다. 다급하게 도망치며 썼는지 글씨는 여기저기 흔들리고 눈물 자국으로 번져 있었다. 네 남자는 대합실 구석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모여 앉아 그 편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갈 곳 없이 밤거리를 헤매던 제게 핫초코를 사주시고, 초상화를 그려주시고, 취객에게서 구해주시고, 따뜻한 코트를 덮어주셨던 분들. 그리고 차갑지만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주셨던 변호사님.염치없게도 그날의 온기를 잊지 못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제 아이를 여러분의 문 앞에 두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저는 아이를 버린 게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대건 로펌의 백도훈은 단순히 아이가 부끄러워서 저를 죽이려던 게 아닙니다. 제가 일하던 프라이빗 클럽에서 우연히 주운 그의 'USB' 때문이었습니다.그 안에는 대건 로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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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쉿, 우리 애기 낮잠 시간이야

퍼억-!! 콰당탕!!속초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대리석 바닥 위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추수기의 볏짚처럼 픽픽 쓰러져 나갔다."크아악!" "이, 이 괴물 새끼…!"삼단봉을 휘두르며 덤벼들던 사내가 허공을 붕 날아 매표소 유리창 앞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최강태는 옷깃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놈들을 향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쓰읍. 조용히 하라니까. 우리 딸 낮잠 깨면 네들 진짜 뼈도 못 추려."전직 유도 국가대표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 은퇴 후에도 매일 덤벨과 바벨을 친구 삼아 근육을 단련해 온 강태에게, 뒷골목 흥신소 건달 십여 명은 아침 조깅 전 가벼운 스트레칭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이수 형! 유준아! 빨리 나가!"강태가 양손으로 두 명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바닥에 꽂아버리는 사이, 대합실 뒤쪽에서 유준과 이수, 그리고 태준이 쏜살같이 터미널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형, 차 키!" 태준이 유준에게서 스마트키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뛰어오른 유준은 제 몸집만 한 카시트 캡슐을 통째로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이수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글러브 박스를 열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경찰서 번호를 누르려 했다."경찰 부르지 마! 대건 로펌이랑 한통속인 놈들이 오면 USB 뺏겨!" 태준의 호통에 이수가 화들짝 놀라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그때였다. 강태를 피해 터미널 뒷문으로 쫓아 나온 깡패 셋이 밴을 향해 살벌하게 달려들었다."차 막아! 바퀴 터뜨려!!"한 놈이 삼단봉으로 밴의 뒷좌석 유리창을 향해 있는 힘껏 풀스윙을 날렸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를 안고 있는 유준과 눈이 마주친 찰나였다.깡-!!!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삼단봉이 제멋대로 휘어지며 튕겨 나갔다. 유리창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깡패의 손아귀가 찢어질 듯한 반동에 놈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푸하하! 병신들! 내 차가 일반 밴인 줄 아냐! 독일에서 특수 제작한 VVIP용 방탄유리다, 이 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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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폭풍전야의 첫걸음, 그리고 9시 뉴스

서울 강남구 청담동 펜트하우스. 거실 한가운데 깔린 알록달록한 뽀로로 매트 위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대건 로펌의 깡패들을 속초 터미널에서 따돌리고 무사히 서울로 귀환한 지 꼬박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다들 숨 참아. 지금 애 다리에 힘 들어갔다."이태준이 소파에 바짝 엎드린 채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시선 끝에는 최고급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물론 모서리마다 핫핑크색 스펀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를 두 손으로 야무지게 붙잡고 있는 8개월 차 여름이가 있었다.뒤집기, 배밀이, 네발기기를 빛의 속도로 마스터한 여름이는 며칠 전부터 가구에 매달려 일어서려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름이의 통통한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더니 마침내 소파에 기댄 채 완벽하게 수직으로 일어섰다."오오오…! 섰어, 섰다!" 이수가 입을 틀어막으며 환호성을 삼켰다."이수 형, 쉿! 애 집중력 깨져요!" 유준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켠 채 숨을 죽였다.여름이는 자신이 두 발로 섰다는 사실이 신기한지, 잇몸을 다 드러내며 꺄르륵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의 심장을 멎게 만드는 기적이 일어났다.여름이가 소파를 잡고 있던 두 손을 스르륵 놓은 것이다."헉!" 네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잡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의 두 발로 체중을 지탱한 여름이는, 눈앞에 엎드려 있는 태준을 향해 짧고 통통한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탁.작은 발바닥이 매트 위를 디뎠다. 뒤이어 왼쪽 다리가 비틀거리며 따라붙었다.탁. 한 걸음. 두 걸음. 중력을 거스르는, 위태롭지만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직립보행의 시작이었다."온다… 나한테 온다…!" 평소 바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독사 변호사 이태준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숨죽여 아이를 기다렸다.세 걸음째를 떼려던 여름이가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어어!"태준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 작은 몸집을 자신의 넓은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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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벼랑 끝의 악마,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

"변호사 부르라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 내 아버지가 대건 로펌 대표 백명환이야!!"서울 중앙지검 특수부 취조실. 수갑이 채워진 채 의자에 결박된 백도훈이 짐승처럼 악을 썼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고급 맞춤 수트를 입고 재벌가와의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던 오만한 얼굴은 간데없고, 밤샘 조사에 시달려 눈에는 핏발이 가득했다.맞은편에 앉은 차 검사가 피식 웃으며 서류철로 책상을 탁 쳤다."백 상무. 아니, 이제 피의자 백도훈 씨. 당신 아버지는 지금 당신 변호할 정신이 없을 텐데? 방금 해성그룹에서 정식으로 파혼 통보했고, 대건 로펌 본사는 우리 애들이 탈탈 털어서 박스째 증거를 나르고 있거든.""이… 이태준 그 개새끼가…!!"백도훈이 이빨을 뿌득뿌득 갈았다. 장부의 존재를 알았을 때 윤의경을 죽여서라도 빼앗았어야 했다. 그 하찮은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완벽한 왕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같은 시각, 서초동 대건 로펌 본사 펜트하우스 집무실.창밖으로 비 내리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백도훈의 부친이자 대건 로펌의 수장, 백명환 대표였다. 집무실 안에는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 요원들이 떠난 뒤의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그의 앞에 대건의 전략기획팀장 김 전무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도훈이가 너무 서툴렀어. 흔적을 남기다니."백명환의 낮은 목소리가 집무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의 눈에는 아들을 향한 걱정 대신, 자신의 제국에 흠집을 낸 자에 대한 서늘한 분노만이 서려 있었다."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검찰의 기세가 너무 강합니다. 차 검사 뒤에 이태준 변호사가 버티고 있어서 장부의 진위 여부를 부인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백명환이 천천히 돌아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버려야 할 꼬리가 필요하겠지. 김 전무, 자네가 도훈이 대신 '장부의 실소유주'가 되어주게. 자네 가족들의 평생 안위와 해외 도피 자금은 내가 책임지마. 그리고 차 검사 윗선에 연락해. 도훈이는 '단순 명의 도용'으로 엮고,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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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빗속의 혈투, 그리고 다섯 번째 가족

추적추적 내리던 봄비가 어느새 거센 빗줄기로 변해 골목을 때리고 있었다. 윤의경의 품에 안긴 여름이의 온기에 네 남자가 취해있던 그 짧은 찰나. 이태준의 안경 너머로,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서늘한 금속광이 번뜩였다."위험해! 강태야!!"태준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 대여섯 명이 짐승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사시미칼이 의경과 여름이를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꺄아아악!" 의경이 본능적으로 여름이를 껴안고 바닥에 웅크렸다.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의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최강태였다. 강태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의경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자신의 두꺼운 팔뚝으로 쳐내며 놈의 손목을 우두둑 꺾어버렸다."크아아악!" "우리 딸이랑… 우리 애기 엄마한테 손대지 마, 이 쓰레기들아!!"강태의 포효가 빗소리를 뚫고 골목을 진동시켰다. 칼날에 스친 강태의 팔뚝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빗물과 섞였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괴물 같았다. 강태가 놈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꽂아버리는 사이, 뒤에서 다른 놈이 강태의 등 뒤를 노렸다.퍼억!"어딜 감히." 이태준이었다. 태준은 들고 있던 장우산을 거꾸로 쥐고, 우산의 묵직한 손잡이 부분으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가격했다. 법전만 파던 샌님인 줄 알았던 태준의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일격에 사내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이수야! 유준아! 당장 의경 씨 차 안으로 모셔!"태준의 지시에 이수가 재빨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의경과 여름이를 덮어씌우며 밴의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의경 씨, 괜찮아요? 고개 숙이고 절대로 나오지 마요!"유준은 밴의 슬라이딩 도어를 닫고 락을 건 뒤, 무전기에 대고 악을 썼다. "블랙!! 다 튀어나와! 쥐새끼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마!!"유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희동 요새를 호위하고 있던 해성그룹 특수 경호팀 '블랙' 요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훈련받은 최정예 요원들에게 뒷골목 흥신소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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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펜트하우스의 불청객, 그리고 VVIP 사모님의 기절

아침 9시, 청담동 펜트하우스. 거실에는 따스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윤의경은 여전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의경 씨! 우리 여름이 오늘 아침 응가 색깔이 완벽한 황금색이야! 장 건강 상위 1%라고!" 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갈고 나온 강태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관장님, 목소리 낮춰. 애 놀라." 주방에서 완벽한 핏의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비장한 얼굴로 젖병을 열탕 소독하던 태준이 핀잔을 주었다.그 옆에서는 이수가 직접 깎아 만든 모빌을 천장에 매달고 있었고, 유준은 바닥에 기어 다니며 여름이의 인간 말(?)이 되어주고 있었다. 의경은 소파에 앉아 이 비현실적이고 왁자지껄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없던 8개월 동안… 이분들은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여름이를 사랑해 주셨구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며 다시금 콧잔등이 시큰해지려던 찰나였다.띠띠띠띠- 철컥.펜트하우스의 육중한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준이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경호팀장이면 초인종을 먼저 누를 텐데?"현관으로 시선이 쏠린 순간, 하이힐의 날카로운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천만 원짜리 명품으로 휘감은, 날카롭고 화려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 뒤로는 안절부절못하는 해성그룹 '블랙' 경호원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 들어왔다."도, 도련님! 죄송합니다! 사모님께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셔서…!"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유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큰, 큰어머니…!"큰어머니. 해성그룹 장남의 아내이자, 며칠 전 백도훈의 구속으로 결혼식이 산산조각 난 '나지연 상무'의 친엄마였다."나유준! 너 이 미친 놈의 새끼가 감히 내 딸 결혼식을 엎어?!"한 여사가 클러치 백을 소파에 집어 던지며 악을 썼다. "네가 며칠 전에 전화로 '충격적인 결혼 선물'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네가 검찰에 백도훈 장부 넘겼다며?! 네 할아버지가 지금 본가에서 뒷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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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성북동의 호랑이, 그리고 100억짜리 수표

서울 성북동. 높은 담장과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해성그룹 본가(本家)의 거대한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검은색 럭셔리 밴이 본가의 자갈밭을 밟으며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창밖으로 도열한 수십 명의 고용인들과 경호원들을 본 윤의경은 숨이 막히는 듯 두 손을 꽉 쥐었다. 강태가 조용히 의경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걱정 마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의경 씨는 여름이만 꼭 안고 있어요."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압도적인 규모의 샹들리에 아래 호랑이 가죽이 깔린 거대한 소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대한민국 재계의 거물, 해성그룹 나 회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들어와라." 나 회장의 묵직한 한마디에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유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앞장섰고, 그 뒤로 태준, 강태, 이수, 그리고 여름이를 안은 의경이 차례로 들어섰다. 나 회장의 시선은 곧바로 의경의 품에 안긴 작은 핏덩이에게 꽂혔다. 대건 로펌을 무너뜨리고, 해성그룹의 주가를 요동치게 만든 그 문제의 혼외자였다."네가 윤의경이냐." 나 회장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대건의 백도훈이 쓰레기인 건 진작 알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 유준이를 방패막이로 쓰다니. 담력이 큰 건지, 아님 멍청한 건지.""할아버지! 의경 씨는 절 방패막이로 쓴 게 아니라…!" 유준이 발끈하며 나서려 하자, 나 회장이 지팡이로 대리석 바닥을 쾅 내리쳤다."넌 입 다물어! 그룹 후계자라는 놈이 밖에서 이런 스캔들이나 달고 오고!"나 회장이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수표책에 거침없이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사각, 사각. 정적 속에 펜촉이 긁히는 소리만이 서늘하게 울렸다."100억이다." 나 회장이 수표를 테이블 앞으로 밀었다. 전형적이고도 폭력적인 재벌가의 방식이었다."이 돈 받고 오늘 밤 당장 한국을 떠나라. 미국이든 유럽이든, 평생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마. 대신, 이 아이와 너의 존재는 영원히 세상에서 지우는 거다. 대건 로펌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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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성북동 호랑이의 항복, 그리고 다섯 번째 아빠

"회, 회장님! 바지에 침이…!"비서실장이 사색이 되어 최고급 실크 손수건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 회장은 말없이 손을 들어 비서실장을 제지했다.거대한 응접실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대한민국 재계를 호령하는 호랑이의 바짓가단에 감히 침을 묻히고 지팡이를 빼앗으려 드는 생명체라니."꺄아! 맘마!"여름이가 나 회장의 호두나무 지팡이를 잡고 흔들며 까르륵 웃었다. 나 회장의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아주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얼음처럼 차갑게 살아온 노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통제할 수 없는 '무장 해제'의 신호였다."…허, 참. 겁도 없는 녀석이군."나 회장이 천천히 커다란 손을 뻗어 여름이의 통통한 뺨을 살짝 건드렸다. 여름이는 낯선 노인의 거친 손길에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뺨을 부비며 나 회장의 굵은 손가락을 작은 두 손으로 꼭 쥐었다.그 순간, 나 회장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100억짜리 수표를 집어 들었다. 윤의경이 숨을 헉 들이켰고, 네 남자는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찌익- 찌지직.나 회장은 망설임 없이 100억짜리 수표를 반으로, 다시 네 조각으로 찢어 허공에 던져버렸다."할아버지…?" 유준이 멍하니 불렀다."100억으로는 턱도 없겠어." 나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엄격한 표정을 꾸며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여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이태준 변호사라고 했나. 네놈이 아까 '네 명'이서 완벽한 성벽을 치겠다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틀렸다. 오늘부터 이 녀석의 아빠는 다섯이다. 증조할아버지뻘인 내가 특별히 다섯 번째 보호자 자리를 맡아주지.""예엣?!"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심지어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태준조차 안경이 흘러내릴 정도로 놀란 표정이었다.나 회장이 비서실장을 향해 턱짓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받아 적어라! 해성그룹 차원에서 우리 '막내 증손녀'에게 지원할 항목들이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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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연희동 셰어하우스의 아침, 그리고 문센 대첩

"헉, 늦었다!"아침 7시 30분. 윤의경이 안방 텐트에서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푹신한 이불과 완벽한 방음, 그리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여름이 맘마 먹일 시간 지났는데! 기저귀도 갈아야 하고!'의경이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거실 한가운데에 선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연희동 14-2번지 셰어하우스의 아침은, 마치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 같았다."1번 라인, 젖병 열탕 소독 완료! 건조기 들어갑니다!" "2번 라인, 유기농 소고기 브로콜리 미음 40도로 데웠어! 온도 완벽해!" "3번 라인, 여름이 모닝 응가 처리 및 엉덩이 뽀송뽀송하게 말리기 완료!"주방에서는 쓰리피스 수트 바지에 앞치마를 두른 이태준과 이탈리아제 실크 파자마를 입은 나유준이 분유와 이유식을 세팅하고 있었고, 화장실 앞에서는 최강태가 한 손으로 여름이를 안은 채 능숙하게 가제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었다."저, 저기… 제가 할게요!" 의경이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며 다가가려 하자, 구석에서 여름이의 낮잠 이불에 햇살을 쬐어주던 서이수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막아섰다."어허, 의경 씨. 스톱. 의경 씨는 오늘부터 이 셰어하우스의 VVIP 입주민입니다. 육아는 우리 '지옥에서 온 네 아빠'들이 전담할 테니, 의경 씨는 푹 쉬면서 체력만 보충하시죠.""그래도 명색이 엄마인데 제가 늦잠을 자서…."태준이 온도계로 이유식 온도를 재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지난 8개월 동안 도망 다니느라 편히 잔 적 하루도 없었을 텐데, 이제라도 늦잠 좀 자둬요. 그리고 오늘 일정 빡빡합니다. 오전 11시에 여름이 생애 첫 '문센(문화센터)' 가는 날이니까.""네? 문화센터요?""어제 해성 백화점 VVIP 전용 문화센터 '오감 발달 촉감 놀이' 클래스에 등록해 뒀습니다. 우리 여름이가 이제 두 발로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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